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11화 (211/215)

#211. 봄날의 민들레 (中)

“안 돼! 오지 마!”

날카로운 고함이 방 안에서 들려왔다.

“헉!”

사헌부 집의처 방문 앞.

결재받을 문서를 들고 집의처를 찾았던 허상익은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황급히 뗐다.

그는 집의 직무실 안에서 새어나오는 흐릿한 불빛과 제 등 뒤에 서 있는 권문을 번갈아 응시했다.

‘어찌합니까?’

눈썹을 까닥거리며 허상익이 권문에게 물었다.

‘다시 여쭤보게.’

권문 역시 눈썹을 까닥하며 대답했다.

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허상익은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흠흠…….”

낮은 헛기침과 함께 ‘소인, 허상익옵니다.’ 하고 고하려는 찰나.

“안 돼!”

단호한 고함이 다시 들려왔다.

짧은 순간.

허상익의 뇌리로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새벽 이른 시간.

사헌부 집의처에서 간절함이 담긴 고함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는 건 지금 저 안에서 보아서는 안 될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뭐 하고 있는가?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문서가…….”

권문이 허상익을 재촉했다.

허상익은 황급히 눈치 없는 상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버둥거리는 권문을 끌고 서둘러 집의처 마당으로 내려섰다.

“읍! 왜 이러……는가?”

“결재는 소인이 나중에 받겠습니다.”

허상익은 집의처 중문 밖으로 권문의 등을 떠밀었다.

“이봐, 당장 이 문 열게!”

중문 밖에서 권문의 단호한 호령이 들려왔다.

그러나 허상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이 중문 앞을 가로막았다.

사헌부 집의의 은밀한 비밀을 지키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담긴 등이었다.

***

“안 된다! 절대 안 돼!”

귓가에 화살처럼 꽂히는 소리에 장무열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잠꼬대를 이리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냐?”

집무실을 제집인 듯 드나드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자리를 깔고 단잠을 자던 김기대가 연신 고함을 질러댔다.

보다 못한 장무열은 살피던 서류를 내려놓고 김기대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껏 일그러진 기대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나운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기대는 허공을 향해 연신 팔을 휘두르며 잠꼬대를 뱉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장무열은 발끝으로 기대의 발치를 툭툭, 걷어찼다.

그 서슬에 기대가 번쩍 눈을 떴다.

“……헉!”

기대는 비명과 함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마른 세수를 하던 그가 장무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 물 좀 주게.”

“그런 건 네놈 집에 가서 찾아라.”

“컥컥.”

험한 잠꼬대에 입안에 말랐는지, 기대는 잔기침을 내뱉었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못마땅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장무열은 기대에게 자리끼를 건넸다.

“휴우,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자네 덕분에 살았네.”

황급히 찬물을 마시며 기대는 악몽의 여운을 털어냈다.

“언제까지 여길 드나들 테냐?”

“내,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오늘 단단히 깨달았다네.”

“더불어 살던, 함께 살던, 그건 네놈이 알아서 하고…….”

“혼자 잤으면 내내 악몽을 꾸었을 터…….”

“네놈의 꿈이 악몽이든 길몽이든 나완 상관없다. 그러니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장무열의 입에서 차가운 지청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대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있어 참으로 다행일세.”

해사한 웃음과 함께 건넨 진심.

“…….”

장무열은 굳어버렸다.

멍한 표정이 된 장무열의 시야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기대의 해맑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 천진한 얼굴을 보며 더는 지청구를 던질 수 없었다.

주춤해진 장무열에게 기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렇게 보는 겐가?”

태연한 물음.

기어이 장무열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

“응?”

“이런 놈을 붙잡고 내가 뭐하는 짓인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장무열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왜?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시끄럽다.”

“말 들어달라고 하지 않았나.”

“되었다.”

“말해 보게. 내 들어줌세.”

“제발 여기서 꺼지라 하였다.”

“어허, 사람 마음 섭섭하게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네놈은 섭섭하냐? 나는 네놈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요즘은 소화도 안 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단 말이다.”

“밥을 못 먹는단 말인가? 그런 것이라면 진즉 말하지 그랬는가.”

기대는 순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 위인이 어쩐 일일까?

궁금한 찰나.

“가세, 그렇지 않아도 출출했는데. 어디 가서 국밥이나 한 그릇씩 하세.”

그럼 그렇지.

푹, 한숨을 쉬며 장무열은 들고 있던 문서에 머리를 쿡 박았다.

“나는 되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일어서게.”

기대가 살가운 손짓으로 장무열의 어깨를 잡았다.

힐끗, 제 어깨에 닿은 기대의 손을 보며 장무열이 중얼거렸다.

“그 손, 잘리고 싶지 않으면 치워라.”

장무열은 지척에 있는 검집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사람 같으니.”

서둘러 손을 거둬들이며 기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힐끗, 곁눈질로 기대를 응시하던 장무열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툭.

무심한 한 마디를 던졌다.

“지은 죄가 많은 모양이더군.”

“죄가 많다니? 법 없이도 살 사람한테 그 무슨 말인가.”

“법 없이는 살아도 매 없이는 살지 못할 사람이지.”

“어허, 사람을 어찌 보고?”

“시끄럽다. 밤새 네놈의 심한 잠꼬대를 듣느라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다.”

“아, 내가 그랬는가.”

기대는 입가에 겸연쩍은 미소를 떠올렸다.

생소한 광경인지라.

장무열의 눈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그 찰나의 눈빛을 놓치지 않은 기대가 장무열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궁금한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묻는 그에게 장무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솔직히 아주 잠시,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의 저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는 순간, 찰나의 호기심을 후회했다.

아니나다를까.

“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특별히 자네에게 말해주지.”

“듣고 싶지 않다.”

단호히 말했으나, 무소용이었다.

어느 사이 아련한 표정이 된 기대는 기억의 한순간을 떠올렸다.

“몇 해 전이었지, 아마.”

“시끄럽다.”

“바람이 오늘처럼 살랑살랑 불던 봄날이었다네.”

“꺼져.”

“그런데 말일세…… 밥은 안 먹을 텐가?”

“…….”

“국밥이 싫으면, 요리집은 어떤가? 얼마 전에 새로 생긴 맛집이 있다네. 여기서 만든 곡주가 별미 중 별미인지라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더군.”

“…….”

“어디 가는가? 사람이 말을 하는데. 같이 가세. 그 봄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

“궁금합니다.”

한서로의 목소리가 중궁전 침소에 동그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분,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을까요?”

“왜 내 오라버니를 만나려는 겐가?”

“지금, 오라버니라고 하셨사옵니까?”

놀란 한서로는 무릎걸음으로 이레에게 바싹 다가갔다.

“정녕, 그분이 중전마마의 오라버니란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중전의 위(位)에 오른 이후.

한서로는 이레에게 더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무리 격과 식을 갖추지 않아도 좋은 관계라 하여도, 그럴 수 없노라 강경하게 저항했다.

결국, 이레는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격식을 차린다고 하여 가까운 마음(親心)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예법을 존중하되,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러기에 한서로는 이른 새벽, 허물없이 중궁전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밤, 십학사의 은밀한 모임에서 만났던 거북 학사를 만나기 위해.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만사여의, 한서로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사내가 중전마마의 오라버니였다니.

놀라 휘둥그레진 두 눈이 좀처럼 작아지지 않았다.

“이제 말해 주겠는가? 그대가 내 오라버니를 찾는 연유.”

“이리 말씀 올리면 어찌 들으실지…….”

“말해 보게.”

이레는 주춤하는 한서로를 재촉했다.

“그분은…….”

한서로의 말끝이 길어졌다.

“그래, 내 오라버니는…….”

이레는 귀를 기울이며 꼴깍 침을 삼켰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중전마마의 오라버니는…….”

붉은 봉선화 꽃물을 들인 이레의 손톱에 한서로의 시선이 멈췄다.

통통통.

한껏 부풀어 오른 봉선화 열매가 터지듯, 한서로의 뇌리 깊숙한 곳에 눌러두었던 기억들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

17년 전, 늦은 밤.

통통통.

송도 최고의 명문가문, 한윤 대감의 고택 뒷문으로 몸피 가느다란 여인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대던 여인은 조심스럽게 나무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 협문이 열렸다.

“어서 오게.”

송도의 세습무(世襲巫) 월채는 청지기의 안내를 받아 곧장 고택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후.

월채가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고택의 안채였다.

해산한 지 열흘도 되지 않은 터라.

부숭하게 부푼 안방마님, 정 씨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월채의 손을 잡았다.

“내 여식을 좀 살려주게.”

귀한 분의 난데없는 행동에 월채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마님, 왜…… 왜 그러십니까요?”

“내 아이, 이 아이의 고열이 좀처럼 내리질 않네.”

그제야 정 씨의 품에 안겨 연신 싸악, 싸악, 밭은 숨을 몰아쉬는 어린 목숨이 무녀의 눈에 들어왔다.

월채를 향한 정 씨의 눈동자.

검고 습한 어미의 눈빛에 서린 간절함과 두려움이 월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이 아이만은 잃을 수 없으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놓칠 순 없네.”

“쇤네가 애기씨를 살펴도 되겠습니까요?”

월채가 정 씨에게 물었다.

말해 무얼 할까.

기다렸다는 듯 정 씨는 아기를 건넸다.

입술을 동그랗게 만 월채는 품에 안은 아기의 귓가에 쉬잇쉬잇, 휘파람 소리를 닮은 독경을 속삭였다.

“어떤가?”

맞은편에 앉아 연신 마른 입술을 적시며 정 씨가 물었다.

월채의 품에 안겨 있는 저 아이를 낳기 전.

정 씨는 무려 네 명의 아이를 잃었다.

셋은 배 속에서 잃어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였다.

일 년 전에 태어난 사내아이는 백일 남짓 젖을 물렸었다.

하나, 방심한 탓일까.

가벼운 고뿔에 걸린 줄 아이는 하룻밤 사이 영영 어미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렇게 네 명의 자식을 맥없이 보낸 정 씨에겐 이제 못할 짓이 없었다.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열흘.

고열로 인하여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애타는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아이가 고열이 나는 원인을 알아내는 의원은 없었다.

기세등등하게 한 대감의 고택을 찾았던 의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라졌다.

명의라 불리던 최 의원마저 포기를 선언했을 때, 정 씨는 낙담하고 말았다.

이렇게 또 아이를 잃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정 씨는 마지막 수단을 강구 했다.

바로 용한 무녀를 불러 아이의 용태를 살피게 한 것이다.

초조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녀의 잇새로 새어 나오던 독경 소리가 마침내 그쳤다.

월채는 정 씨에게 아기를 되돌려주었다.

“내 새끼, 왜 이러는지 자네는 알겠는가?”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며 정 씨가 물었다.

“우선 감축드립니다요, 마님.”

“감축?”

핏덩이가 사지를 헤매는데 감축이라니?

월채의 돌연한 축하인사에 정 씨는 어리둥절하였다.

“재신(財神)이 우리 애기씨의 모습으로 환생하셨으니. 저 조그마한 양손에 온갖 재물 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요. 우리 애기씨 앉는 곳이 곳간 자리요, 우리 애기씨 발길 디디는 곳마다 황금 덩이가 떨어져 있을 겁니다요. 자자손손 이 댁에 큰 재운이 깃들 것이니. 참으로 큰 경사가 아니겠습니까요.”

“아이의 모습이 이 모양인데, 그깟 재물복이 무에 기쁠까.”

“그러기에 애통합니다요.”

“애통?”

“삼신할매가 노망이 났나. 이 어인 실수를 하였단 말입니까요. 사내로 태어날 애기씨를 여아로 점지하였으니. 타고난 길성(吉星)을 누리기도 전에, 명부에 이름부터 올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애통하고 또 애통한 일입니까요.”

“지, 지금 뭐라 했는가?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

“송구하오나, 마님. 우리 애기씨 발치에 명부의 사자가 와 있습니다요.”

월채는 옷고름을 들어 눈가를 찍어냈다.

“이 무슨 헛소리더냐?”

제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무녀를 향해 정 씨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찾아달라는 병마의 원인은 아니 찾고, 명부의 사나를 언급하는 월채를 향해 정 씨는 눈을 부라렸다.

“마님, 고정하시어요.”

곁에 있던 유모 할멈이 바르르 경기하는 정 씨를 붙잡았다.

“유모도 듣질 않았는가, 저 무녀가 내 아이를 두고 하는 헛소리를.”

헛소리라 하면서도 정 씨는 품에 안은 아기를 한껏 힘주어 안았다.

행여 명부의 사자에게 빼앗길세라.

파랗게 날을 세운 눈으로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안 뺏겨.

못 뺏겨.

애끓는 어미는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웠다.

그 가엾은 모습을 다독이며 월채가 속삭였다.

“애기씨를 살릴 방도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요, 마님.”

“방도가 있단 말인가?”

“사자의 눈을 속일 방도가 있습니다요.”

“사자의 눈을 속여?”

“애기씨의 삼칠일이 되기 전에 사내아이를 찾으십시오.”

“사내아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월채가 정 씨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이내 무녀의 낮은 속삭임이 정 씨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애기씨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를 찾으셔요. 그 아이가 입었던 옷을 애기씨에게 입혀 몸속의 음기를 덮으면, 명부의 사자들도 깜빡 속아 넘어갈 겁니다요.”

***

무녀, 월채의 처방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 정 씨만이 믿을 뿐이었다.

아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믿는 것이리라.

아이를 살릴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정 씨는 사람을 풀어 여식과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를 찾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삼칠일을 넘기기 하루 전.

여식과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입던 배냇저고리를 사들인 정 씨는 여식에게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여식을 괴롭히던 고열이 뚝 하고 떨어졌다.

좀 전까지 가쁘게 숨을 내쉬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표정이 되어 어미의 젖을 빨았다.

정 씨가 영험한 무녀를 다시 부른 건 당연했다.

“이보게.”

무녀, 월채가 두 번째로 고택을 찾아갔을 때.

월채를 맞이하는 정 씨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실낱같았던 여식의 생명줄을 이어준 은인.

“이제 무얼 어찌해야 하는가? 내, 자네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따를 것이네.”

정 씨는 월채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차후의 방비를 묻는 정 씨에게 월채가 말했다.

“정말입니까요? 정말 뭐든 하실 겁니까요?”

“할 것이네. 뭐든 할 것이야.”

“애기씨를 사내로 기르셔라 해도 따르실 수 있습니까?”

“그게……무슨 말인가? 어찌 반가의 여식을 사내로 키우란 게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명부의 사자를 속이기 위한 방도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도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요.”

여아로 태어난 아이를 사내로 키우란 말만으로 하늘이 무너지거늘.

그것마저도 임시방편이라니.

“그게 또 무슨 말인가?”

“사내의 옷으로 사자(使者)의 눈을 속이는 건 애기씨께서 꽃물을 보기 전까지입니다. 우리 애기씨의 몸에서 꽃물이 활짝 봉오리를 피우는 그 순간부터는 쇤네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지요.”

“그 말은…….”

정 씨의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한고비 넘겼는가 했더니, 더 큰 태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한부(時限附).

여식의 생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 어린 것에게 어찌 이리 각박하십니까.

이 가엾은 것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원망하고 한탄했지만, 무력한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서글픈 눈물만 흘릴 순 없었다.

어미가 아니던가.

여식이 생을 살아가는 동안만이라도 길성이 이끄는 대로 풍요롭고 복록 가득하게 살아가도록 바람막이 노릇을 하리라.

정 씨는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어미의 비호 아래, 한서로는 열일곱 해 동안 잔병치레 한 번 없이 무탈하게 자랄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반가의 사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보고 싶은 풍광은 장소를 불문하고 즐길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요리 또한 한껏 음미할 수 있었다.

물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했다.

그러는 동안, 무녀 월채의 예언이 얼마나 영험한가를 다시금 실감하는 일도 생겼다.

한서로가 태어난 이후, 한 대감의 재물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나라에 흉년이 들어도 한 대감 소유의 논밭에선 곡식이 야무지게 여물었다.

하나를 베풀면 열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 수다했다.

그렇게 17년의 세월이 흐르고, ‘송도 최고의 명문가’라는 한 대감의 수식어 뒤에는 ‘송도 최고의 재력가’이라는 호칭이 덧붙었다.

그리 엄청난 집안의 금지옥엽인지라.

비록 거짓 사내 행세를 하며 살았어도 한서로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나날이 행복에 겨웠다.

시시각각, 다른 즐거움이 그녀와 함께했다.

하지만 석 달 전.

한서로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첫 꽃물이 활짝 피어난 것이다.

그날 이후.

한서로는 수시로 심한 고열에 시달렸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내의 옷도 이번엔 소용없었다.

영험한 무녀, 월채가 세 번째로 고택을 찾았다.

“우리 애기씨, 더는 사내 노릇 아니 하셔도 되겠습니다요.”

발치에서 일어난 열기가 곧장 등줄기를 훑고 정수리까지 치솟아 올랐다.

한서로는 전신을 뒤덮는 고열을 견디지 못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무녀의 목소리가 먼 데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러나 한서로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월채는 한서로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대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애기씨, 여기서 지시면 아니 됩니다요. 곧 액운을 막아 줄 벽사의 귀인을 만나실 겁니다. 아니, 어떻게든 꼭 만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월채는 잠시 숨을 멈추고 말을 골랐다.

어찌 말을 해야 애기씨께서 큰 충격을 받지 않으시려나.

고심하는 그녀의 손을 한서로가 힘껏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찌 되는가?”

병세 위중한 와중에도 한서로의 눈빛은 형형하였다.

감히 시선 마주하기 어려워 무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애기씨께선 북망객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요.”

“……!”

어머니에게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듣긴 하였으나, 막상 눈앞에서 죽음을 단언하는 무녀를 보니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한없이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지요. 하나, 맥없이 꺾어지는 것 또한 사람 목숨입니다요. 그러니 애기씨…….”

“어림없는 소리.”

한서로는 무녀의 예언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깟 허황한 이야기에 휘둘릴까.

그러나 증명이라도 하듯 꽃물을 피운 처음 한 달 동안엔 닷새를 고열에 시달렸다.

그다음 한 달은 열흘이었다.

그리고 석 달째에 접어들어 무려 보름이나 사지를 헤매야 했다.

비릿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한서로를 위협해 들어왔다.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면 명부의 사자가 발치에 서서 그녀에게 손짓하곤 하였다.

어서 오라고…….

이번 생엔 더는 미련 두지 말라 하였다.

죽음에 순응하라 하였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기엔 열일곱의 나이는 너무도 찬란하였다.

“어림없어.”

살 거야.

어떻게든 살고야 말 거야.

마지막 열병을 떨치고 일어난 한서로는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날 이후.

한 대감댁 애기씨의 벽사화(闢邪畵) 찾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출발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

“여인?”

사헌부를 나온 장무열은 소광통교에 있는 국밥집을 찾았다.

평상에 엉덩이를 걸치는 그의 맞은편에 김기대가 자리 잡았다.

“그래, 여인.”

기대가 시작한 봄날의 이야기는 길고 긴 서두를 막 지나는 참이었다.

제 이야기에 도취된 기대는 두 눈을 반짝거렸다.

그 눈을 마주 보며 장무열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몇 해 전 봄에 우연히 길에서 여인을 주웠다?”

“그렇지.”

장무열의 눈매가 한순간 가늘어졌다.

“주운 게 아니라 납치한 거겠지.”

의심 어린 한마디에 기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납치라니! 이 얼굴로 누굴 납치한단 말인가!”

“그럼 납치범들과 한패였더냐?”

“어허, 애먼 사람 잡는군. 내가 왜 그런 짓을 벌이겠는가?”

“예를 들면 명예 때문은…… 아닐 테고.”

“이 사람이!”

“여인의 미모 때문……은 더욱 아닐 테고.”

“당연하지!”

“역시 그것 때문인가?”

“그거?”

“돈 때문이겠군!”

확신하는 장무열을 향해 김기대는 포효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큰북을 귓가에 바투 치는 듯한 외침에 장무열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면 말고.”

장무열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그 사이, 국밥집 주인이 작은 소반 위에 국밥 두 그릇을 내려놓았다.

수저를 들며 장무열은 기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느냐?”

“그다음……?”

“아까 길에서 여인을 주웠다……까지 했다.”

“아, 그렇지.”

기대는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

그의 입가에 팽그르르르 팽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 봄날, 길에서 여인을 하나 주웠다네.”

기대의 얼굴 위로 초록빛 햇살이 내려앉았다.

담벼락 아래에 피어 있는 흰노랑민들레가 바람에 꽃잎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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