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조선의 비밀 책사(策士)
대궐에 어제와 다른 바람이 불었다.
선왕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어느덧 달포가 지났다.
쌍클하여 뺨을 아프게 때리던 차가운 공기에 온기가 깃들었다.
가지마다 빼곡하게 꽃을 틔웠던 앵두나무가 붉은 노을 속으로 하얀 꽃잎을 떨어트렸다.
이제 곧 열매가 맺히리라.
전각 담벼락에 쌓인 꽃잎과 함께 붉은 과즙이 꽉 찬 통통한 과실이 떠올랐다.
존현각을 지키던 문군사는 저도 모르게 입안에 맴도는 단침을 꼴깍 삼켰다.
찰나.
“주상 전하, 납시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군사의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석강 시간이 가까워졌다.
문군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고 어깨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이윽고 몰려드는 발소리와 함께 존귀한 분의 모습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감히 용안을 마주하는 불경한 죄를 지을세라, 문군사는 황급히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제 발끝에 시선을 집중하는 문군사의 곁으로 많은 인기척이 지나갔다.
종종걸음으로 긴 행렬을 뒤따르는 어린 항아의 발소리를 마지막으로 존현각의 문이 닫혔다.
그제야 허리를 쭈욱 편 문군사는 힐끗, 존현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고요했던 존현각이 한바탕 시끄러워질 게 뻔했다.
이 밤엔 또 무슨 일로 목소리를 드높이려나?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이니, 제 알 바 아니었다.
양반이니 상것이니,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서인이니, 벽파이니 시파이니…….
부르는 명칭과 각자의 명분만 다를 뿐.
알고 보면 저마다 제 셈속에 맞춰 이익을 챙기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야 거기서 거기라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터라.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하나, 저 하많은 속셈들을 어르고 달래고 때론 냉혹하리만큼 단호히 죄를 벌하는 새로운 임금님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보위에 오르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건만, 닳고 노련한 정치가들을 상대로 탕탕평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원하는 바를 취하시니.
번번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존현각을 나가는 늙은 대신들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후련해지곤 하였다.
이쯤 하여 큰 소리가 나야 하는데…….
문군사는 연신 존현각 안을 힐끔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
“전하, 통촉하여 주옵소서.”
노론의 젊은 수장, 심환지의 들끓는 목소리가 형운의 귓전을 아프게 찔러왔다.
“본디 사내와 여인을 가르고, 양반과 상것을 구분 짓는 건 제각기 할 수 있는 일과 책임질 범위가 다름이 엄연하기 때문이옵니다. 책임과 의무가 다르니 얻고 누리는 것 또한 다른 것이 마땅하옵니다.”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소. 계속해 보라.”
“전하, 무릇 수신제가(修身齊家)해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 수 있사옵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각각의 집안에 적자와 서자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 짓는 건 제가(齊家)의 기본이기 때문이옵니다. 이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부터 집안의 중심이 되는 장자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고, 이는 곧 나아가 나라의 중심마저도 흔들릴 수 있사옵니다.”
“…….”
“서얼을 관직에 등용하여 나랏일을 맡기는 건 여인에게 판서의 자리를 허락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짐승 잡는 백정의 칼과 나라를 지키는 장수의 칼이 같다 말씀하시는 것이옵니다. 하오니, 전하,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서자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그 말씀, 거둬주옵소서.”
심환지는 목덜미로 푸른 혈관이 불룩 튀어 오르도록 목청을 높였다.
뒤질세라,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조판서, 채제공 아뢰옵니다.”
남인을 대표하는 채제공이 입을 열자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형운 역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말해 보시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고, 짐승이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은 인륜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륜이옵니다. 이는 양반과 상것, 적자와 서자로 태어나는 것 역시 인륜이 아닌 천륜이 구분 짓는 것이거늘. 이제 와 사람의 힘으로 하늘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사옵니다. 감히 아뢰옵나니, 통촉하여 주옵소서.”
소론에 몸을 담고 있는 서명선이 빠지지 않았다.
“신 서명선, 목숨을 걸고 아뢰나이다.”
채제공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서명선에게로 옮겨졌다.
모두의 눈길을 받으며 서명선이 목청을 돋웠다.
“양반도 전하의 백성이고, 상것도 전하의 백성인 것을. 누구에게 좋은 것을 주고 누구에겐 허락하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처사라 생각하옵나이다.”
일순, 형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일찍이 재주 비상하나, 서자라는 이유로 가진 재능을 숨기는 자들을 많이 보았나니. 이는 진실로 나라에 큰 손해가 아니겠소.”
서명선이 형운의 주장에 동참했다.
“맞사옵니다. 세종대왕 시절, 대호군에 위에 올랐던 아산 장씨(장영실)의 기록만 보더라도 그렇사옵니다. 비록 관노로 태어났으나, 그의 재주 비상하여 나라에 큰 공헌을 하였나이다.”
“어허!”
채제공이 탁한 눈동자로 서명선을 매섭게 응시했다.
“그대는 아산 장씨의 마지막을 알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그는 다시 형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전하! 아산 장씨의 실수로 귀하신 옥체에 큰 변고가 일어날 뻔했음을 전하께서 잘 알고 계시질 않사옵니까.”
세종대왕 시절, 대호군(大護軍) 장영실은 임금의 행차에 쓰일 수레를 만들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수레의 바퀴가 빠져 임금께서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상처는 경미 하였으나, 옥체에 생채기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사건이었다.
채제공을 그 일을 형운에게 상기시켰다.
“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 하였소.”
“옥체를 모시는 자는 절대 해선 안 될 실수였사옵니다.”
“그 죗값은 단단히 치른 걸로 알고 있소.”
“죗값을 치렀다고 해서 지은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옵니다.”
“지은 죄보다 그가 치른 값이 큰 것도 사실이오.”
왕의 수레가 망가졌다는 이유로 장영실은 그대로 궐에서 쫓겨났다.
누군가는 그를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렸다.
그동안 장영실이 밤잠을 아끼며 나라를 위해 이룩한 수많은 업적과 공적은 그 한 번의 실수로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
듣고 보면 맞는 말인지라.
채제공은 마른 입맛을 다셨다.
보다 못해 심환지가 끼어들었다.
“송구하오나, 지금은 그 일을 논하는 자리가 아닌 줄 아뢰옵니다.”
정신 차리세요.
그러다 또 전하께 말려들고 말 겁니다.
심환지가 채제공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
아차!
날 선 설전(舌戰)에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것도 잊고 말았다.
채제공은 눈을 부라렸다.
심환지가 옳았다.
과거의 일을 지금에 와서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서얼이 과거시험을 치를 수 없게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도면밀한 왕께서 그 일을 모를 리 없을 테고.
이 역시, 다 계획된 일이리라.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맙소.”
채제공은 심환지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였다.
평소에는 얼굴도 마주하지 않을 만큼 앙숙이었던 노론과 남인.
그들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힘을 한데로 뭉치는 순간이었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옵소서.”
채제공의 애절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심환지를 비롯한 나머지 대신들이 읍소하였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무심히 그들을 지켜보는 형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지긋하게 보료에 등을 기대었다.
서얼허통(庶孽許通).
당장 그 일을 이 자리에서 처리하겠다는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사실 이 자리는 서로에게 도끼눈을 뜨고 있던 노론과 남인이 상대방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조금이라도 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형운은 은근슬쩍 심환지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엎드려 ‘통촉’을 부르짖던 심환지 역시 힐끔 고개를 들어 주상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잠깐.
두 사내의 시선이 허공 중에 맞닿았다.
형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시 고개를 바닥에 묻으며 심환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무서우신 분.
그는 간밤에 왕과 주고받았던 서찰을 떠올렸다.
작금의 상황을 예측한 듯 왕은 심환지에게 시기적절하게 채제공과 연합하는 모습을 보이라 명을 내렸다.
그렇게 하나둘 왕의 분부에 따르다 보니, 어느 사이 조정을 차지하고 있던 노론의 수가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서인이 한데 어울린 조정의 모습은 선왕께서 그리 원하던 탕탕평평, 어느 한 당파에 치우침 없이 공평한 조정의 모습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그 일을 해낸 왕이 새삼 대단하고도 무섭게 느껴졌다.
심환지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운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형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엔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제 의지를 꺾은 군주의 표정을 역력했다.
“그대들이 그리도 반대하니, 내 어쩔 도리가 없군. 이 문제는 차후 다시 이야기합시다.”
형운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모습으로 존현각을 나섰다.
“허허허, 다행입니다. 전하께서 이번엔 쉽게 뜻을 꺾어주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형운의 뒷모습을 보며 심환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나 말이오. 전하께서 또 고집을 부리시면 어찌하나, 이 늙은이 걱정이 컸소이다.”
채제공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
그런데…….
분명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처리되었건만.
어찌하여 마음이 이럴까?
뭔가 또 말린 듯한 기분에 채제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때마침, 그의 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듯 형운이 걸음을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늙은 신하와 시선이 마주친 젊은 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당했다.
이번에도 왕께 당하고 말았다.
푹, 고개를 숙이는 채제공의 정수리로 형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좋구나. 밤 산책하기 적당한 날이다.”
풀기 없이 존현각을 나서던 모습과는 달리 왕의 음성은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
형운의 말처럼 밤 산책하지 좋은 날이었다.
또한, 은밀한 회합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이기도 하였다.
동대문 밖.
아름드리 전나무가 빽빽한 숲 속으로 낯선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각기 나타난 방향은 달랐으나 목적지는 한 곳이었다.
바로 전나무 숲 한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고택.
십학사의 비밀 회합이 열리는 안가였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고택에 초대된 손님들을 확인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일 먼저 고택에 발을 들인 이는 십학사의 학, 장무열이었다.
“무기는 안으로 들고 가실 수 없습니다. 회합이 끝날 때까지 면사를 벗으시면 안 되십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장무열은 흑의인이 손짓한 긴 회랑을 따라 걸었다.
서른 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반월 문이 나타났다.
그의 그림자가 문풍지로 어리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이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직사각형의 긴 공간이 보였다.
방의 가장 깊은 아랫목엔 여덟 폭 십장생 병풍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으로 둥근 탁자와 열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해를 중심으로 학과 물, 사슴과 소나무, 그리고 대나무와 바위, 거북과 불로초의 자리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구름을 상징하는 의자는 해와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했다.
궁궐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듯, 십학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는 학사의 자리를 지켰고, 또 누군가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장무열은 전자에 속했다.
새로이 조직된 십학사의 학.
학은 자신을 지칭하는 문양이 조각된 의자에 앉았다.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 것인가.
명확한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생사(生死)를 결정짓는 일 따윈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다짐을 새기듯 장무열은 검지 끝으로 탁자를 더듬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상념에 빠진 그의 곁으로 향긋한 내음이 다가왔다.
“감회가 새로우신가 봅니다.”
검은 너울을 바닥까지 내리뜨린 여인.
장무열의 눈동자에 찰나, 불씨가 일었다.
그러나 이내 그 불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언가요? 실망하는 눈빛이군요.”
여인은 짧은 순간의 동요를 잘도 집어냈다.
“그럴 리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장무열이 대답했다.
“감정도 못 숨기시고, 거짓말엔 더더욱 재능이 없으시군요.”
“험……”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장무열은 고개를 돌렸다.
짓궂은 장난기로 똘똘 뭉친 여인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 이내 제 자리를 찾았다.
파도치는 물의 문양이 세공된 의자.
본디 이레의 자리였던 그곳을 자연스레 차지한 여인은 다름 아닌 한서로였다.
본디 재물을 상징하는 물의 자리는 가짜 만사여의 대신 진짜 만사여의의 것이 되었다.
한서로는 팔을 탁자에 올려 턱을 괴었다.
“오늘 새로운 거북 학사가 온다고 하던데. 알고 계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장무열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모호 한 그의 반응에 한서로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무에 알고 계십니까?”
“…….”
“모르는 겁니까?”
“…….”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닙니까?”
장무열의 묵묵부답에도 한서로는 질문을 이어갔다.
“모를 겁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파가 들어섰다.
노파는 나비를 쫓는 사슴의 문양이 수자 놓인 면사를 쓰고 있었다.
“사슴 학사.”
한서로가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파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눈웃음이 맺혔다.
“잘 지냈습니까?”
살가운 물 학사의 물음에 사슴 면사를 쓴 노파, 하월네가 대답했다.
“무탈하지요.”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로, 맑고 청아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두 분의 사이, 참으로 다정하니. 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단정한 옷차림의 어린 선비가 불로초가 수 놓인 면사를 쓰고 있었다.
얼마 전 십학사에 합류한 학사였다.
“불로초가 아니십니까.”
“학사께서 기꺼이 동참하신다면, 이 늙은이에겐 더없는 광영이 아니겠습니까.”
한서로와 하월네가 어린 선비를 반기며 말했다.
열예닐곱 살의 어린 학사에게선 특유의 청수한 기운이 가득했다.
가깝게 다가갈 순 있어도 어리다고 함부로 쉬이 대할 수 없는 정갈한 기운인지라.
십학사 안에서도 섣불리 그를 대하는 이가 없었다.
“우리끼리 있을 땐 삼미라 불러 주십시오.”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있어 자신을 ‘삼미(三尾)’라고 불러 달라는 어린 선비의 출연으로 방 안의 공기가 밝아졌다.
“아직은 모두 모이지 않았으니, 우리끼리겠지요?”
한서로의 말에 하월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안 그렇습니까, 삼미 선비님.”
“옳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다정한 목소리 사이로 ‘흠흠’ 고저 없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고개가 장무열에게로 향했다.
“이런, 학 학사께서 계셨군요.”
뒤늦게 장무열을 발견한 삼미가 인사를 건넸다.
장무열이 가벼운 고갯짓으로 답례하려는 찰나.
“답례가 없다 하여 상처받지 마세요, 삼미.”
한서로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삼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힐끔, 장무열의 모습을 살피던 한서로가 삼미를 방 한쪽으로 데려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삼미를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학 학사는 원래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답니다.”
“맞아요. 이 늙은이도 지금까지 학 학사께서 누군가의 인사에 답하는 걸 보지 못했지요.”
하월네가 한서로의 의견을 뒷받침해 주었다.
세 사람은 나름, 장무열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닥거렸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무사의 교육을 탓에 일반 사람들보다 시각, 청각, 후각 등등…… 모든 감각이 발달한 장무열에게 세 사람의 목소리는 너무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런 게 아니다.
이제라도 해명해야 하나.
잠시 갈등하던 장무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함이었건만.
“무슨 이야길 그리도 재미있게 하시는가.”
장무열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십학사의 다른 학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하나둘, 학사들이 모여 마침내 거북과 해를 제외한 의자에 주인이 자리했다.
“그보다, 새로이 거북의 자리에 앉을 학사는 어떤 사람이오?”
구름 자리에 앉은 심환지가 물었다.
제각각 담소를 나누던 학사들이 구름 학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답하는 학사는 없었다.
심환지가 질문을 바꿨다.
“그럼 누가 거북 학사를 추천하였소?”
이번에도 학사들은 대답하지 했다.
서로 면사 쓴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할 때였다.
“제가 했습니다.”
문이 열리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촘촘한 검은 너울 뒤로 단아하게 쪽진 여인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자리에 앉았던 학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예를 취하며 자리로 향하는 여인의 너울엔 해의 문양이 수자 놓여 있었다.
마침내 여덟 폭, 십장생 병풍 앞에 놓인 의자에 여인이 앉았다.
그제야 다른 학사들 역시 저마다의 자리에 몸을 기댔다.
번잡했던 공기가 가라앉자 구름이 다시 물었다.
“거북 학사를 해 학사께서 추천하였단 말입니까?”
“네, 제가 했습니다.”
십학사의 새로운 해(日).
과거 만사여의의 모습으로 물의 자리에 있던 이레가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떤 사람입니까?”
구름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문이 열렸다.
“접니다.”
얼굴에 거북 문양의 면사를 쓴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밝고 경쾌한 몸짓과 어울리는 음성.
유난히 싱그러운 눈웃음.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연분홍빛 상흔.
“너는…….”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장무열이었다.
언제나 무감하던 그의 얼굴에 동요가 떠올랐다.
그러나 놀란 사람은 장무열,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저 사내…….”
해인 이레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한서로가 탄성 섞인 비명을 낮게 질렀다.
“아는 사람이오?”
이레의 물음에 한서로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 사내인 듯합니다.”
“그 사내……?”
“저를 한양으로 부른 사내가……분명합니다.”
한서로의 음성에 희열이 잔물결 쳤다.
이레는 거북의 면사를 쓴 김기대와 한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이 운명이 되었음을…….
또 하나의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임을…….
그저 조선의 비밀 책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음에 안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