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개세영웅(蓋世英雄)
쏴아아아아.
숲을 빽빽하게 채운 나뭇가지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물에 젖은 길은 자칫 방심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발끝으로 신경을 집중한 박진봉은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들짐승처럼 번뜩이는 눈동자가 어둠과 빗물에 잠긴 숲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어디쯤 사냥꾼들이 임시거처로 쓰는 움막이 있었다.
종일 십학사에서 보낸 자객들에게 쫓겼던 터라.
잠시만이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쉬고 싶었다.
“지독한 놈들.”
뒤를 돌아보며 박진봉은 이를 으득 갈았다.
십학사에서 보낸 자객들은 ‘포기’라는 말을 모르는 듯했다.
죽이고 또 죽였건만.
자객의 칼날은 끊임없이 그를 쫓아왔다.
그렇지만 지독하기로 치자면 박진봉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나가 딴 넘을 죽일 순 있어도, 넘의 손에 죽을 사람이 아녀.”
얼굴에 묻은 핏물을 빗방울로 씻으며 박진봉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낫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낫 끝에 남아 있던 피가 빗물에 씻겨나가며 진득한 혈향을 풍겼다.
비릿한 향기가 폐부를 관통하자, 살육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박진봉은 먹잇감을 앞에 둔 사냥개처럼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짜릿한 감각.
살인의 충동은 어느덧 지독한 중독으로 변했다.
한번 맛 들인 즐거움은 좀처럼 잊기 어려웠다.
이 재미난 놀이를 오래 즐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단양으로 가자.
그가 나고 자란 곳.
대대로 오랜 세월 터를 잡고 살아온 그 땅엔 그간 십학사의 재력을 이용하여 박진봉이 은밀하게 키운 수하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단양에만 가면 십학사가 아니라 백학사가 쫓아온다 하여도 끄떡없으리라.
오늘 밤만…… 이 밤만 버터 내면 된다.
날이 밝는 대로 산을 내려가 단양으로 가는 배만 타다면…… 그 이후엔 만사형통이었다.
때마침 어둠 저편에 흐릿한 형체가 들어왔다.
박진봉이 애타게 찾던 움막이었다.
그는 재게 발을 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를 아프게 후려치는 빗방울을 피해 움막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까닥했으면 똥개 마냥 밤새 오돌오돌 떨 뻔했네.”
그는 빗물에 젖은 옷자락을 쥐어짰다.
바닥으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툭툭, 머리에 묻은 물기마저 털어내며 움막 안쪽으로 두어 발짝 더 몸을 옮겼다.
“것 보게.”
낯선 음성이 움막의 그늘진 곳에서 들려왔다.
“……?”
비 내리는 밤이라.
짐승을 쫓던 사냥꾼인가?
궁금한 박진봉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들어왔다.
탁탁.
부싯돌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움막 안쪽에 있던 등잔에 불꽃이 붙었다.
이윽고…….
노란 등잔 불빛 아래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상흔을 지닌 사내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로 올 거라 하였잖은가. 내가 이겼으니 한 냥 주게.”
허공으로 손을 내미는 기대의 곁으로 얼음으로 만든 듯 차가운 표정의 사내가 다가왔다.
사헌부 집의, 장무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군.”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으나, 장무열은 소맷자락에서 엽전을 꺼내 기대에게 건넸다.
“뭐여?”
반갑지 않은 두 선객(先客)을 향해 박진봉이 으르릉거렸다.
장무열이 건넨 엽전을 품속에 갈무리한 기대가 박진봉의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벌써 우릴 잊었는가?”
기대는 싱긋,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개세……영웅(蓋世英雄).”
“뭐?”
“개세영웅. 새로운 세상을 여는 영웅이라고나 할까.”
일순, 박진봉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
저 나약한 사내의 얼굴 위로 지옥 염라왕의 모습이 겹쳐 보인 건 종일 자객에게 쫓긴 탓이리라.
애써 불길한 생각을 털어내며 박진봉은 입술 끝을 끌어당겼다.
히죽대는 웃음을 지어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이 굳어져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
“이런, 얼굴에 흉이 생겨서 어쩌나.”
기대는 석상처럼 서 있는 박진봉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 생긴 것과 같은 자리에 난 상처였다.
“상흔보다 더한 것들로 가득한 얼굴인지라. 별로 흠도 안 되는군.”
장무열이 기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것들이……!”
뒤늦게 자신을 감상하는 두 사내를 향해 박진봉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런, 심사 상할 줄 알았으이.”
박진봉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기대가 위로했다.
그는 장무열을 돌아보며 지청구를 던졌다.
“자네, 맞는 말이라 해도 그리 면전(面前)에서 말하면 어찌하는가. 아무리 악당이라 해도 상처받는단 말일세.”
“악당이 상처는 얼어죽을…….”
“허허, 거참. 말본새하고는.”
기대는 장무열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다 이내 박진봉에게 시선을 맞추며 사냥하게 속삭였다.
“저 사람, 말은 저렇게 차갑게 해도 마냥 매정한 사람은 아니니…….”
“……?”
“고통스럽지 않게, 한 번에 죽여줄 것이야.”
말과 함께 기대는 박진봉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럴 마음 없다.”
본래 기대가 서 있던 자리로 장무열의 검이 치고 들어왔다.
박진봉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예상한 듯 허공을 박차고 오른 장무열이 박진봉의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가 맞은편에 착지했다.
“헛!”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장무열의 검이 박진봉의 늑골을 꿰뚫었다.
뜨거운 감각이 검붉은 핏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울컥 올라왔다.
“네, 네놈이…….”
박진봉은 장무열의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검날을 쥐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었건만.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듯 장무열은 검날을 한옆으로 돌렸다.
가볍게 박진봉의 몸을 빠져나온 그의 검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커억…….”
박진봉의 등줄기로 불덩이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비틀거리는 그의 귓가로 장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어디냐?”
물음은 눈앞에 있는 박진봉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박진봉의 어깨너머.
좀처럼 볼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의 기대를 향해 장무열이 물었다.
“가슴.”
기대의 대답에 따라 장무열의 검이 움직였다.
박진봉의 가슴에 사선의 상흔이 남았다.
“그다음은 아랫배였지. 아마도 이쯤이었을걸.”
마치 형에게 이르는 어린 아우처럼…….
기대는 단양에서 박진봉에게 당했던 날을 떠올리며 제 몸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눈앞에 번쩍거리는 검날을 향해 박진봉이 낫을 들었다.
휘휘.
허공을 베어내던 낫 끝에 장무열의 소맷자락이 잘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린 소맷자락의 몇 배나 더 큰 상처가 박진봉의 몸에 새겨졌다.
“커어억…….”
박진봉은 입안 가득 머금고 있던 핏물을 토해냈다.
눈앞이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휘청거리던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연신 피를 토하는 박진봉에게 기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결국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지, 이렇게…….”
기대는 오른발을 뻗었다.
박진봉의 몸이 맥없이 옆으로 넘어갔다.
끔뻑거리는 그의 눈동자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겨우 입을 벌린 박진봉이 말했다.
“살려……줘유.”
“뭐라?”
어이없는 애원에 장무열은 제 귀를 의심하였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나는……죄 없어유. 하라는……대로 한 죄밖에……없구먼유. 나가……뭔 죄를 지었다고…… 이런데유?”
“…….”
“죽이래서…… 죽였슈. 죽일 만……혀서…… 죽인 거 뿐여유.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 죽이는…… 그런 세상 아녀유? 그런데 왜…… 나한테만 이런대유? 나가…… 뭔 큰 죄를 졌다고…….”
원망 가득 담긴 시선이 장무열과 김기대를 번갈아 응시했다.
쌔액, 쌔액, 밭은 숨을 몰아쉬며 박진봉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자신이 들었던 말.
하지만 단 한 번도 들어 준 적 없었던 간절한 애원.
점점 얕아지는 목숨줄을 놓지 않으려 박진봉은 발버둥 쳤다.
흐릿해지는 그의 눈동자에 움막을 떠나는 두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쏴아아악.
움막의 지붕을 사납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살거여, 나가…… 살고 말겨.”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 인생이었다.
이리 죽어선 분하고 억울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살아야지.
어떻게든 살아야지.
악을 쓰며 몸을 틀었지만, 작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나는 죄 없다.
나보다 더 큰 죄 지은 놈들일랑 하고 많은데…….
그놈들 다 놔두고 어째서 나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나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종말을 맞이해야 한단 말인가.
왜……!
요동치던 박진봉의 어깨가 우뚝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일평생 맺혀있던 붉디붉은 살의가 조금씩, 천천히 사라졌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외다!”
고요하던 객청에 홍인한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새로운 왕의 전교에 정전에 모였던 신료들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고, 그다음엔 하나같이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져 누구 하나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버려두고 형운은 정전을 나가버렸다.
뒤늦게야 하나둘 정전을 빠져나온 신료들은 그대로 객청에 모여 앉았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함이었건만, 지금 일어난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황금빛 비단에 깨끗한 햇솜을 채워넣은 보료 위에 앉았다고 생각했건만, 칼날이 가득한 방석을 깔고 앉은 걸 뒤늦게 깨달은 신료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누군가 절망 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홍인한이 단호히 소리쳤다.
“어허, 어찌하긴 무얼 어찌하오. 선왕께서 남긴 유음이 아직 귓가에 생생하외다. 임오년에 일어난 불행에 대해선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말라는 선왕의 뜻을 따라야지요.”
“옳소이다. 아무리 전하시라 해도 ‘사도’라는 두 글자를 입에 올릴 순 없소. 돌아가신 선왕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건 그야말로 불효 중 불효이외다.”
우의정이 맞장구쳤다.
“맞소이다.”
“그 일로 조정을 흔들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신 전하가 아니오.”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내 풀이 죽어 있던 대신들이 목청을 돋웠다.
불효(不孝).
공맹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다름 아닌 효(孝)이거늘.
본을 보여야 할 군왕이 나서서 불효를 저지르게 할 수 없노라며 저마다 신념에 차 소리쳤다.
그때였다.
“전하께선 불효하지 않으시었습니다.”
홍문관 교리 심환지가 활기를 되찾은 신료들을 향해 찬물을 끼얹었다.
홍인한의 눈초리가 길어졌다.
“그 무슨 말이오? 그대도 분명 듣지 않았소?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 천명하는 그 목소리.”
“들었습니다.”
심환지는 맑은 눈빛으로 홍인한을 응시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에 하신 말씀도 분명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전하께서 말씀하시었지요. 선왕께서 정통을 위해 전하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이셨으니. 유음을 따라 임오년의 일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는 일을 방해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임오년, 사도세자에게 일어난 불행을 문제 삼지 않겠다.
다만, 왕께서 보위에 오르는 일을 방해한 자들만 벌하겠다.
새로운 왕께선 정확히 선을 그었다.
“허허, 그 말이 그 말이지 않소.”
홍인한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분명 다른 문제였으나, 홍인한을 비롯하여 사도 세자의 죽음에 연관된 자들에겐 같은 문제였다.
그 갑갑한 속내를 알 리 없다는 듯 심환지가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길게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잠시 뜸을 들여 이목을 집중시킨 심환지가 말을 이었다.
“명부록이란 것이 존재한다 합니다.”
“명부록?”
홍인한의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엇이오?”
고개를 돌려 문밖의 사정을 살피던 심환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죄지은 자의 명단이 적힌 서책이라 합니다.”
“……!”
일순, 객청에 소리 없는 술렁임이 일었다.
누군가의 얼굴엔 혈색이 돌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전보다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윽고 홍인한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그런 걸 만들었단 말이오?”
***
-그놈 있잖으냐.
상의 활기찬 글씨가 서탁 위로 떠올랐다.
-그놈이라시면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상의 대답이 냉큼 돌아왔다.
-불손, 그 녀석 혈육입네 하고 이것도 알지 마라, 저것도 알지 마라…… 그 뭐라더라……?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는 상을 대신하여 예가 대답했다.
-삼불필지(三不必知)라 했소.
-그래, 그거! 감히 망언했던 그놈!
말에 이레가 단정한 필체로 대답했다.
-그분의 존함일랑 일찌감치 올려놨습니다.
-그 고모는?
이번엔 화가 물었다.
-그분도 서책의 맨 앞장에 있습니다.
악의 악필이 또 사람을 거론했다.
-고모가 데려다 키운 그 어린놈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 그 할아버지 옆에서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던 늙은 놈도 있잖으냐. 그놈도 잊지 말고…… 또 누가 있지?
고민하는 상을 향해 악이 한마디 했다.
-뭐 좋은 일이라고 그리 신이 났느냐?
-신 나긴 누가 신이 나?
-좋아서 입 찢어진 게 보일 지경이다.
-어허, 사람을 어떻게 보고?
-제대로 봤으니 하는 말이지.
두 할아버지의 말싸움으로 서탁이 가득 찼다.
이레는 서탁 위의 종이를 슬그머니 내리고 새로운 종이를 깔았다.
-그놈도 잊지 마라.
화 할아버지의 조언이 이어졌다.
이레는 서탁에 떠오른 이름과 손에 들고 있는 서책을 대조했다.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서책.
그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실뜨기 놀이의 그림책처럼 보이는 서책이 사실은 명부록에 오를 이름과 그들이 행한 행실임을 아는 이는 없었다.
오직 이레와 형운만이 아는 암어로 엮은 비밀 서책.
그 서책에 그린 그림들이 반듯한 글씨가 되어 명부록을 채웠다.
-아, 맞다! 그놈도 있구나, 그놈……!
상 할아버지의 글씨가 새로운 종이에 떠올랐다.
밤이 깊도록 할아버지들과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분을 잊고 있었군요.
이레가 상이 이른 이름을 적었다.
“그 사람도 있소.”
“누구 말입니까?”
“사가로 나가 살 때 문앞을 지키던 문지기.”
“아차!”
“그런데 그자의 이름은 알고 있소?”
“그렇군요. 그자의…….”
말을 하던 이레는 불현듯 드는 기시감에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자신을 향한 새카만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들어왔다.
그리고 맑고 시원한 향내.
낯설지 않은 숨결이 그녀의 귓불을 간질였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형운의 붉은 입술이 이레의 여린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
문풍지 위로 두 개의 고귀한 그림자가 어리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무열은 머리를 숙였다.
“신(臣) 장무열, 명을 마치고 돌아왔나이다.”
듣는 이 없었으나, 고하는 그의 모습은 격식에서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진실한 예를 끝낸 장무열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되었다.
은자원의 은랑.
고귀한 한 여인과 이별할 시간…….
내 언저리를 맴돌던 노랑나비 한 마리.
살랑이는 바람이 채어가 버리니.
봄은 봄이로되, 내 봄날 아니고.
꽃은 꽃이로되, 내 꽃 아니로다.
나의 봄날은 덧없고.
나의 꽃은 헛헛하니.
생(生)은 그저 허망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