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06화 (206/215)

#206. 과인은…….

즉위식 두 시진 전, 인시말(寅時末:새벽 5시).

빈전으로 최 내관이 들어섰다.

“저하.”

조심스러운 부름에 형운은 바싹 마른 시선을 돌렸다.

“중궁전에서 옥새와 임명서 내렸사옵니다. 오늘이 성복(成服)일 인지라. 즉위식 준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

알고 있다.

그리해야 한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혈육을 잃은 상실과 슬픔이 그의 양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게 했다.

“저하…….”

다시 주군을 부르는 늙은 내관의 음성이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파르르 떨렸다.

형운의 쓸쓸한 등을 지켜보던 최 내관은 기어이 낮은 시름을 뱉고 말았다.

저 마음을 어찌 모를까.

어린 시절부터 온갖 아픔과 고통을 겪은 분이 아니던가.

궁궐의 높디높은 담벼락 안에서 걷는 걸음걸이는 물론이고 숨 쉬는 것조차도 예법에 따라 살아왔다.

행여 작은 허물이라도 보일까, 어린 나이에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셨다.

그럼에도 결국엔 허무하게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말았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안해야 할 궁 안이 동궁에겐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어디서 적의 칼날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작은 허물을 꼬투리 삼으려는 신료들의 눈길과 수시로 동궁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의 승냥이 같은 눈빛을 견디고, 버텨내신 분.

자신의 감정일랑 그저 안으로, 더 깊은 속으로 곱씹고 삭일 줄만 알았던 터라.

슬픔을 아릿한 슬픔으로, 기쁨을 온전한 기쁨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모르셨다.

그러기에 지금도 속으로만 통곡하실 뿐, 겉모습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너무도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이었기에…….

참으로 의연하고 위엄 가득한 표정이었기에…….

형운을 향한 최 내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아프고, 쓰라렸다.

동궁의 가슴에 쌓인 한과 시름이 얼마나 깊을 것인지, 늙은 내관은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리 있을 순 없었다.

어서 움직이시라, 등을 떠밀어 즉위식을 준비해야 했다.

“상의원에서 면복(冕服)을 대령했나이다.”

최 내관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빈전 안으로 면류관과 곤복(袞服), 규와 상, 폐슬, 방심곡령과 화대, 수 그리고 패, 말과 석이 담긴 상자가 차례로 들어왔다.

빈전에 한동안 침묵이 흘렸다.

“저하, 시간이 없사옵니다.”

어쩔 수 없이 재촉하는 최 내관에게 형운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후.

“알았느니.”

형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비록 임금은 세상을 떠났으나, 백성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군주란 세속의 감정을 초월해야 하는 존재이니.

이제 그는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통곡하는 손주가 아닌, 왕조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왕이 되어야 했다.

눈 그늘에 매달린 감정을 훌훌 털어낸 그는 빈전에 딸린 곁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뒤로 상의원의 궁인들이 줄줄이 뒤따라 들어갔다.

반 시진 후.

상복을 벗고 면복으로 갈아입은 형운이 밖으로 나왔다.

빈전의 대문 앞에선 왕의 상징인 옥새를 사왕(嗣王)에게 전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

두둥.

대보(大寶)를 전해 받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좌통례(통례원 정삼품 으뜸벼슬)가 형운을 이끌고 전정(殿庭) 길 동쪽에 들어와 섰다.

형운은 향을 하나 피워 올리고, 빈전을 향해 사배했다.

영의정의 선왕의 유언을 읽고, 좌의정이 옥새가 담긴 대보상자를 형운에게 올렸다.

형운은 좌의정에게서 받은 대보상자를 곁에 있는 최 내관에게 건넸다. 그러곤 다시 사배를 올린다.

일련의 과정을 끝낸 형운이 중문을 나와 이미 마련된 악차(幄次)로 들면 종친을 비롯한 문무백관들 역시 중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의식은 별 탈 없이 치러지고 있사옵니다.”

빈전 앞에서의 의식을 지켜보던 금정이 한걸음에 달려와 이레에게 소식을 전했다.

“다행이구나.”

사방이 그야말로 가시덤불이었다.

형운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은 여전히 많았다.

십학사는 물론이고 왕세자의 죽음에 손톱만큼이라도 관련된 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동궁이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죽인 자의 자식이 왕이 된다면 그들의 앞날이 어찌 될 것인지 뻔한 일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벼랑 끝에 매달린 자들이 어떤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일각, 일각이 불안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였다.

이젠 하늘의 뜻에 따를 뿐이다.

“옥새가 담긴 대보상자를 받았으니, 이미 의식의 절반은 지난 것이나 마찬가지옵니다. 이제 어좌에 앉으실 일만 남았사옵니다.”

정 상궁이 이레의 곁으로 다가왔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으나, 빈궁의 눈빛에 실린 불안감을 읽은 것이다.

겨울 호수처럼 잔잔했던 이레의 표정이 흔들렸다.

딴에는 감정을 숨기려 애썼건만, 별궁 삼파 앞에선 소용없었다.

경험 많고 연륜 깊은 세 명의 상궁들은 이레의 속내를 귀신같이 읽어내곤 하였다.

결국, 이레는 팽팽하게 다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 사람들 앞에선 조금 흐트러진 모습 보여도 상관없으리라.

이레는 한껏 세웠던 등줄기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렇지요.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테지요?”

모 상궁과 이 상궁이 입을 모았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저들이 설령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이미 즉위식이 시작되었사옵니다. 이를 막을 재간은 없사옵니다. 그러니 빈궁마마, 마음 놓으시어요. 더는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이레는 즉위식이 열리고 있는 정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오가 막 지난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한 하늘처럼, 오늘 즉위식도 부디 아마 탈 없이, 말끔하게 끝나길…….

이레의 염원이 붉은 꽃물들인 손톱 끝으로 모였다.

어머니가 들여주신 벽사의 꽃.

감히 삿된 것들이 범접할 수 없는 이 꽃의 기운이 형운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노라니, 정전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의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는 북소리였다.

***

어좌가 정전 한가운데 자리했다.

임금의 보물, 즉 옥새를 올려놓는 보안(寶案)과 향합을 올려놓는 향안(香案)이 남향에 마련되었다.

병조의 군사들이 정전의 양옆으로 정렬하였다.

전악(典樂:장악원 정육품)이 악부를 설치했다. 상중인지라 흥겨운 연주를 할 순 없었으나, 임금의 즉위식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종친과 대소신료들이 들어와 어좌 앞에 섰다.

이어 내관이 악차에 있는 형운에게 청했다.

“어좌에 오르시옵소서.”

검은 석(舃:신발)을 신은 고귀한 존재가 정전을 가로질러 어좌로 향했다.

형운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정전에 있는 신료들의 고개가 차례차례 아래로 향했다.

마침내 새로운 왕이 어좌에 올랐다.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선을 든 내관과 호위관, 승지와 사관, 사금이 어좌의 주위를 시위하고 섰다.

두둥.

의식의 마음 행보를 이으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옥새와 옥보를 맡아 관리하는 상서원의 상서관이 대보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커다란 직각 상자로 만든 보록은 초주지로 두르고 봉해져 있었다. 무위소 제조의 도장이 찍힌 종이를 거둬내니 놋쇠에 금으로 도금한 자물쇠가 보였다.

상서관은 자물쇠에 걸려 있는 열쇠집에서 열쇠를 꺼내어 자물쇠를 열었다.

상자의 뚜껑을 여니 향긋한 향내가 진동했다.

보록의 빈 공간을 채운 흰 솜을 거둬내고 붉은 비단 보자기로 싸인 보통(寶筒)이 나왔다.

정전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상서관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누구 한 사람 숨소리 하나 흘리지 않았다.

부풀어 오른 긴장감이 정전을 휘감았다.

상서관은 조심스레 보통을 묶고 있는 자주색 명주 끈을 풀었다.

스르륵.

명주 끈을 푼 상서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구름무늬가 수 놓인 붉은 비단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이제 왕의 힘, 권좌의 징표라 할 수 있는 옥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차례였다.

***

“어림도 없지.”

양화전, 자신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화완은 입아귀를 비틀었다.

붉은 입술에 떠오른 미소는 아름다움과 함께 섬뜩한 공포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제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리라.”

화완은 다음 소식을 기다리며 정전을 응시했다.

정전의 소식을 시시각각 전해 듣는 그녀는 무언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보록을 풀었다고 하옵니다.”

“자물쇠를 열고 보통을 꺼냈사옵니다.”

“보통을 싸고 있는 명주 끈을 풀었사옵니다, 옹주마마.”

“지금 막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사옵니다.”

궁인들이 물고 온 소식들을 들으며 화완은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대보상자를 받았으니, 제가 왕이 된 줄 알았으렷다.

하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보상자에서 엉뚱한 것이 튀어나온 것을 보며 다들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가장 궁금한 건 형운의 표정이었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동궁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자신의 눈으로 봤어야 했는데.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소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직이냐?”

연달아 이어지던 소식이 갑자기 끊겼다.

가장 기대하던 순간이건만.

어찌하여 소식이 없는 것인가?

화완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그려졌다.

조급증으로 인해 성화가 솟구치려는 찰나.

정전에서 막 도착한 궁녀가 헉헉 마른 숨을 삼키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찌 되었느냐?”

막 피어나는 모란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화완이 물었다.

아니, 아니.

어찌 되었느냐 묻는 것이 아니라 다들 어떤 표정을 짓더냐, 이리 물었어야 옳았다.

“그래, 다들 어떤 꼴들을 하고 있더냐?”

잔뜩 기대하는 화완에게 궁녀는 좀처럼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저…… 그게…….”

“뭐냐? 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엉망이더냐? 그리 우스웠더냐?”

재촉하는 옹주를 향해 궁녀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옹주마마…….”

“어인 연유로 이리 뜸을 들이는 게야?”

대답을 주저하는 궁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

하지만 옹주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이번 일은 잘못될 리 없었다.

자신이 직접 가짜 대보상자를 중전에게 전했다.

아바마마의 침전에 있던 진짜 대보상자는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곳에 숨겨두고 중전에겐 가짜를 전했는데……

“어서 말하지 못할까?”

기어이 옹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놀란 궁녀가 바닥에 납작 몸을 엎드렸다.

“옥새가…… 옥새가 전하께 전해졌사옵니다.”

“뭐라?”

화완은 황당한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네가 무얼 잘못 본 것이 아니냐?”

어린 것이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이리라.

하지만 소식을 물고 온 궁녀는 두려움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아뢰었다.

“승하하신 전하의 옥새가 분명하였사옵니다.”

“……!”

그럴 리 없다.

화완은 믿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선왕의 인정을 받지 못한 반쪽짜리 왕.

그것이 화완이 목표한 바였다.

만인의 앞에서 어보를 물려받지 못한 형운의 추태가 백성들에게 전해지리라.

그렇게 동궁은 정통성을 잃고, 끝내는 스스로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믿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보가 나왔단 말인가?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눈짓을 보낸 화완은 서둘러 처소 곁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곁방의 동쪽에 있는 나비장을 한옆으로 밀었다.

나비장이 사라진 벽 뒤로 작은 미닫이문이 나타났다.

그곳에 중전에게서 바꿔치기한 대보상자가 있었다.

화완은 황급히 상자를 풀었다.

“가짜다, 동궁이 가짜 옥새를 가져온 것이 틀림없어.”

조급한 손길이 꽁꽁 쌓여 있던 상자를 거칠게 풀어냈다.

그렇게 보록을 풀고, 자물쇠를 열어, 붉은 비단으로 감싸고 있는 것을 꺼냈다.

잠시 후.

“이, 이건…….”

눈앞에 드러난 물건을 보며 화완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 옥새가 있어야 했건만.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던 손바닥만 한 돌멩이였다.

그녀가 이런 일을 벌일 줄 짐작하고 있었던 듯 왕은 가짜를 준비해놓았던 것이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아바마마!”

화완은 경기를 일으키듯 선왕을 부르짖었다.

‘완아, 네 것이 아닌 걸 탐하지 마라.’

죽은 왕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왜 저는 안 됩니까? 왜 제겐 아니 주시는 겁니까?”

다른 건 모두 주셨으면서…….

그녀의 아비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원하는 그 한 가지는 주지 않았다.

“왜 나는 안 됩니까? 왜! 왜!”

원망이 담긴 절규가 전각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정전에서는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신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의가 ‘산호’라고 창했다.

종친과 백관이 공수하며 이마에 대고 소리쳤다.

“천세(千歲)!”

“산호!”

“천천세(千千歲)!”

귓전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화완은 핏발이 곤두선 시선을 돌렸다.

동궁,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떤 조화를 부린 것이야?

***

조화를 부린 건 형운이 아니었다.

며칠 전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이레의 서탁 위로 악 할아버지의 확신에 찬 글이 떠올랐다.

-바꿔치기할 게 틀림없다.

-일국의 옹주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지만, 악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짓을 보면 백 번을 하고도 남음이다.

-그런데 말이다…….

화가 말끝을 흐렸다.

-나도 악과 생각이 같다.

오랜만에 상이 동조했다.

-하긴, 그 아비에 그 딸이렷다.

상의 말을 악이 받았다.

-그럼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일찌감치 예상했을 터.

-그렇지.

-그럼 그 중요한 물건을 어디에 숨겼을까?

악의 글씨가 곧바로 이어졌다.

-아이야, 무에 짚이는 건 없느냐?

-짚이는 것이요?

이레의 시선이 문득 책장으로 향했다.

승하하신 선왕께서 한서로를 통해 전한 물건이 거기에 있었다.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

참으로 기이한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자명종이라…….

잠시 생각하던 악이 글을 이었다.

-죽음을 앞둔 자가 선물을 남겼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아이야, 그 물건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아라.

악의 조언에 이레는 형운에게 전하지 못한 자명종을 꺼내 살피기 시작했다.

태엽을 감아서 돌아가게 하는 물건이라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임금의 죽음으로 태엽 감는 것을 잊었던 탓에 자명종은 멈춰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라 하였던가?”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이라.

시간에 맞춰 태엽을 감는 찰나.

뎅, 뎅, 뎅…….

여섯 번의 생황(笙篁) 소리가 끝나고 딸깍,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자명종의 앞부분이 속내를 드러냈다.

그 속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

이레의 등줄기로 아찔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임금께서 형운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의 정체.

왕의 진정한 힘.

옥으로 만들어진 선왕의 어보(御寶)가 그곳에 숨어 있었다.

***

어좌에 앉은 형운은 깊은 시선으로 옥새를 응시했다.

저 보물을 품고 왔던 이레의 모습 위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더랬다.

형운을 지키기 위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시선을 돌렸다.

망연자실한 신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낯빛의 정후겸과 홍인한.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무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혼자 보기 참으로 아까운 광경이었다.

형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눈의 눈빛은 더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의 당혹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닌 두려운 일이 펼쳐질 것이다.

그간 받았던 모든 것들을 곱절로 되돌려 주리라.

형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신료들을 한 사람씩 짚었다.

이윽고 그가 전교를 내렸다.

“과인은…….”

“…….”

모두 침묵한 채 새로운 왕의 전교를 기다렸다.

이윽고.

꾹꾹 눌러두었던 형운의 마음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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