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그날
궁궐의 후원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봄에는 여린 화사함을 여름에는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무장했다.
후원의 가을은 자연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색이 어우러져 있었고, 하얀 겨울은 차갑고 시린 날 선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유혹했다.
그러나 주군이 세상을 떠난 후원은 생기를 잃은 채 파리하였다.
창백한 언덕으로 화완옹주가 올라섰다.
아버지를 잃은 옹주는 허허로운 시선으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금빛 아침 햇살이 대궐의 지붕을 덮었다.
햇발이 움직임에 따라 궁의 정경이 하나둘 드러났다.
선왕의 죽음 이후, 무거운 슬픔에 잠겼던 궁이 술렁거렸다.
새로운 임금을 맞이하는 즉위식의 날이었던 까닭이다.
빈전의 대문 앞에 넓고 거대한 차일(遮日)이 쳐졌다.
즉위식을 위한 단상이 만들어졌다.
단상의 동쪽엔 선왕의 유언인 유교가, 서쪽에는 대보(大寶)가 놓일 자리가 마련되었다.
서열에 맞춘 신료들의 자리와 비록 연주는 하지 않지만, 악공들을 위한 자리도 갖추었다.
상중(喪中)이었으나,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장엄하고도 위엄있는 식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신들과 궁인들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졌다.
아무리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점철된 것이 삶이라지만, 슬픔과 새로운 희망의 설렘이 뒤엉킨 모습이라니.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이도 이보다 더 우스울까?”
바람과 함께 씁쓸한 미소가 화완의 입언저리에 머물렀다.
“괜찮겠습니까?”
옹주의 곁으로 느린 걸음이 다가왔다.
영의정, 홍인한이었다.
그는 궁궐을 내려다보는 화완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일을 진행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
“선왕께서 살아생전, 그리 경계하던 무리가 정감록을 믿고 따르던 무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선왕의 시신에 온기 사라지기도 전에 도성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죽은 잔당들의 품에선 정감록의 글귀가 발견되는 망극한 일이 생기다니. 섣불리 움직였다간 역당의 무리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정감록이라…….”
훗, 옹주의 잇새로 낮게 조소가 새어나왔다.
정감록이 무엇이던가.
백성들 사이에 은밀히 떠도는 비결의 서책이 아니던가.
예언서를 흉내 낸 서책에는 이씨 왕조가 세운 나라가 망하고 정씨 성을 가진 자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거라 하였다.
앞날을 예언한답시고 무지한 백성들을 선동했던 삿된 것이라.
그 누구도 읽거나, 소장해선 안 되는 금서(禁書)였다.
그 금서가 사슴의 기루 앞에서 죽은 자들에게서 나왔다.
걱정하는 홍인한을 향해 화완이 미소 지었다.
“한양 땅을 떠나있는 동안 대감의 고초가 심했나 봅니다. 고작 이런 일에 이토록 몸을 사리는 것을 보니.”
“험험.”
“이래서야 어찌 큰일을 함께 도모할는지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홍인한의 귓전으로 날아들었다.
“어찌할까요? 이쯤에서 그만둘까요? 여기서 그만두면 대감이…… 그리고 내가 편안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옹주의 앙칼진 물음이 홍인한을 바싹 얼어붙게 하였다.
홍인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긴장한 듯 어색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는 그를 보며 화완이 불현듯 웃음을 터트렸다.
“농입니다, 농.”
“네?”
“대감께서 하도 걱정이 많으니. 내가 농 한번 던진 것인데. 어찌 그리 정색하는 겝니까?”
“허허, 못 뵙는 사이, 옹주께선 많이 짓궂어지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잠깐 사이, 이 늙은이 수명이 한 뼘은 줄어버렸습니다.”
“이런, 그래선 아니 되지요. 누려야 할 것이 태산처럼 쌓였거늘. 그 좋은 시절을 다 못 누리면, 억울해서 눈이나 감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화완을 닮은 웃음이 홍인한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화완이 물었다.
“준비는 되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꼼꼼히 준비했습니다.”
“그만 가보셔야지요. 중요한 자리에 영의정께서 아니 계시면, 아랫사람들이 찾지 않겠습니까.”
“그만 저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홍인한은 화완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늙은 대신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화완의 모습은 일국의 옹주가 아니라 권좌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군주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궐을 어슬렁거리던 햇발은 후원의 나무 사이를 파고들더니 화완의 치맛자락 밑까지 다가왔다.
“어머니.”
어미의 부름으로 후원을 찾은 정후겸이 화완의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의 습격으로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정후겸의 안색이 창백했다.
화완은 비스듬히 왼 고개를 틀었다.
“왔느냐?”
나지막한 한 마디가 얼음처럼 쌍클했다.
눈치 빠른 정후겸이 연유를 모를 리 없었다.
새벽에 일어난 소동 때문이리라.
“송구하옵니다.”
정후겸의 머리가 바닥을 향해 한껏 내려갔다.
“소자,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이다.”
“어디 그것이 네 탓이겠느냐.”
화완은 천천히 양아들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부덕하여, 너를 그리 키운 게지.”
“…….”
화완옹주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정후겸의 뒷덜미를 응시했다.
정씨 성을 가진 자가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정씨 성을 가진 자, 정씨 성을 가진 옹주의 양자…….
“아무것도 무지렁이인 줄 알았는데, 그 속에 구렁이를 품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눈앞에 없는 박진봉에게 하는 말이었다.
또한, 그녀의 눈앞에 있는 정후겸을 향한 말이기도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양아들의 속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미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인 줄 알았건만.
어쩌면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꼭두각시는 저 아이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구나.
화완의 가슴에 독을 품은 가시가 돋았다.
하지만 속내를 숨긴 그녀는 아들의 양어깨를 토닥였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터인데. 그만 일어나거라.”
“소자,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니다, 아니야. 너도 사람이거늘, 어찌 실수가 없겠느냐. 다만, 계획에 차질이 생겼으니, 당분간은 자중하자꾸나.”
화완은 다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하오나…….”
정후겸은 말끝을 흐렸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궁궐에선 즉위식을 위한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형운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막을 기막힌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계획들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하나를 빼앗았다 싶으면 둘을 빼앗기고, 둘을 빼앗으면 또다시 셋을 빼앗겼다.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동궁으로 기울어진 것도 그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
새벽의 일만 해도 그러하였다.
이레를 궁 밖으로 불러내어 처리하려던 그의 술수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도 사슴으로 인해…….
사슴, 그녀를 동료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마지막을 함께할 신의(信義) 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목표는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뒤집어엎고 싶은 건 오직 정후겸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슴은 보란 듯 그를 배신하였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여인이 제 목숨을 걸고 한 사람을 지키려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언짢은 소식이었다.
게다가 정후겸의 칼날 노릇을 자청하던 거북마저 버려야 할 패로 전락했다.
정감록이라니.
그런 기막힌 계획을 이레는 어찌 생각해낸 걸까?
그녀에게 죽은 제갈량의 혼백이라도 깃든 것이 아닐까하는 허황한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제 어찌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그의 어깨를 옹주가 다독였다.
그녀는 개의치 말라는 듯한 눈빛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앞으로의 일은 이 어미에게 맡겨두려무나. 그보다 뒷단속은 어찌 되었느냐?”
달아난 거북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다.
정후겸의 눈가가 서늘해졌다.
“이미 조치하였사옵니다.”
***
“이런 니기미, 쳐 죽일 놈들, 찢어 죽일 놈들…….”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박진봉의 입에선 연신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못한 채 달리고 있었다.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산을 오르던 박진봉은 지나온 숲길을 돌아보았다.
“귀신같은 놈들.”
산자락 아래로 검은 무복 차림의 무사들이 산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박진봉은 검붉은 핏물로 흥건하게 젖은 낫을 보았다.
“나가 이렇게는 못 죽지. 억울혀서라도 이렇게는 안 죽지.”
낫 끝에 묻은 진득한 핏물을 보며 그는 어금니를 으득 갈았다.
박진봉은 천근의 추를 매단 듯 무거운 발을 다시 움직였다.
그의 뇌리로 도성을 떠나던 몇 시진 전의 일이 떠올랐다.
*
날이 밝지 않은 어둔 새벽.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성문 앞에 다다른 거북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멈춰라.”
아직 성문이 열리기 전이라.
문을 지키던 군졸들이 창을 세웠다.
박진봉은 느긋하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패를 꺼냈다.
십학사의 학사만이 지닐 수 있는 통행패.
이 통행패만 있으면 언제,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이번에도 자신만만하게 패를 내밀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느 때와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이건…….”
서로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하던 두 명의 군졸들이 거북의 목덜미를 향해 창끝을 바싹 들이밀었다.
“뭐여?”
난데없는 반응에 박진봉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정색하며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여?”
그러나 군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퉷, 바닥에 침을 뱉은 박진봉의 목청이 더욱 커졌다.
“이것들이 정신이 나갔나? 이건 뭔 줄 알고 나를 막는겨? 이 패가 워떤 건 줄 알어? 니들 웃대가리가 뉘여?”
“그건 알아서 뭐하려느냐?”
군졸들의 등 뒤에서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헌부 집의, 장무열이었다.
이윽고 그의 등 뒤에서 반갑지 않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그놈 참, 예전부터 겁없는 건 알았지만. 간덩이 큰 거 하나는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버젓이 성문으로 나갈 생각을 다 하다니.”
기대가 팔랑팔랑 부채질을 했다.
“어라? 그짝들이 여긴 워쩧게 알고 찾아왔대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촤락, 부채를 접은 기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장 어떻게 도망을 칠 것인가, 그걸 고민해야지 않겠느냐.”
“나가 도망을 왜 친대유? 뭘 잘못했다고?”
“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기대가 소맷자락 안에 손을 넣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간밤에 한양 최고의 기녀가 어떤 미치광이에게 죽임을 당하였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자가 역모를 꾀하였지 뭔가.”
“헛소리도 자꾸 듣다 보니, 이젠 기대 되네유. 다음엔 워떤 참신한 헛소릴 할거래유?”
검지로 귓속을 후비던 박진봉이 길게 손가락 끝에 묻은 귓밥을 훅 불었다.
더러운 것을 피하려 기대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이야기를 이었다.
“그 미친놈이 부리던 자들의 품속에서 이런 것이 발견되었느니.”
기대는 글귀가 쓰인 종이를 휙, 던졌다.
박진봉이 그것을 주웠다.
“정씨 성을 가진 자가 새로운 왕조를 만든다……?”
글을 읽던 박진봉의 눈귀가 일그러졌다.
“이게 뭐여?”
“네놈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좌.”
“이건 계획에 없던 거인디.”
“원래 사람 사는 게 그런 거다. 계획처럼 착착 진행되면 세상살이 힘든 사람이 어딨겠느냐. 매사 계획한 대로 안 되니, 사는 것이 곤하다는 게지.”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이거 그짝이 만든 거여?”
김기대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떠올랐다.
“누가 만든 게 뭐가 중요하겠느냐? 중요한 건 지금 네놈이 역모의 수괴가 되었고, 이렇게 떡하니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는 것이지.”
“그럴 리 없는데…….”
박진봉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럴 리 없었다.
자신이 뉘던가.
십학사의 학사가 아니던가.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는 순간, 다른 이들 역시 무사치는 못하리라.
그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장무열의 고저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십학사에 은밀한 밀명이 내려졌다.”
“……?”
“멸구(滅龜). 학사 거북을 제거하라.”
“…….”
“이용가치가 없어진 자는 가차 없이 버린다. 이것이 십학사의 불문율이란 걸 모르진 않을 터.”
일순, 박진봉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니기미! 나가 이래서 양반놈들을 믿지 못 하는겨.”
욕지거리를 입에 담으며 박진봉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소맷자락 안으로 슬금슬금 집어넣었던 손을 허공을 향해 내뻗었다.
일순간, 회백색의 가루가 사방을 뿌옇게 만들었다.
‘이때다.’
도망치려는 찰나.
“참으로 한결같구나. 이걸 심지가 굳다고 칭찬을 해야 하나, 창의력 없다고 질책해야 하는가.”
기대의 한숨 섞인 혼잣말과 함께 뜨거운 감각이 박진봉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마에서 시작한 상처가 왼쪽 뺨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핏물이 눈앞을 가렸다.
그러나 상처를 돌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가루를 방패 삼아 박진봉은 황급히 성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
박진봉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십학사의 무사들을 따돌리기 위해 가시덤불이 가득한 숲길로 들어섰다.
전신을 찌르는 아찔한 감각에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어떻게든 살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서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들의 모가지를 모두 베고 말리라.
“나가 이렇게는 못 죽지. 절대 안 죽지.”
박진봉의 눈에 시퍼런 광기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
“언제까지 이리 뒤만 쫓을 셈인가?”
나무 위에서 달아나는 박진봉을 지켜보던 김기대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맞은편 나무 위에 서 있는 장무열에게 답을 재촉했다.
“안 되겠네. 자네가 나서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기대가 박진봉을 잡으려 덤불 속으로 뛰어들려 하였다.
순간, 장무열이 기대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뭐하는 겐가?”
“배고프다.”
“무어라?”
“밥 먹고 가자.”
“지금 이 상황에 그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오다 보니 국밥집이 있더군.”
“어라? 이건 뭔가 이상한데. 보통 그런 말은 내가 하는 거 아닌가? 뭔가? 무슨 꿍꿍이야?”
“모든 사람이 꿍꿍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하지만…… 자넨 아니잖아.”
기대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장무열을 응시했다.
“뭔가? 무슨 속셈인가? 말해 보게. 비밀이 뭔가?”
뱅뱅, 주위를 맴돌며 묻는 기대를 뿌리치며 장무열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비스듬히 누운 그림자가 그가 내딛는 발치 끝에 매달렸다.
그림자의 길이로 보아 오시(午時)가 가까워졌음이라.
곧 즉위식이 시작될 것이다.
신성한 의식 전에 피를 뿌려 삿된 기운이 깃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한 여인을 위한 장무열의 작은 배려였다.
***
둥둥둥.
웅혼한 북소리가 궐을 가득 채웠다.
백색의 차일 아래엔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 위한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흰색의 최복을 입은 신료들이 한 사람을 기다렸다.
두둥.
다시 북소리가 들렸다.
양옆으로 갈라선 신료들의 머리가 천천히 아래로 조아려졌다.
이윽고.
상복을 벗고 면복을 입은 형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면류관의 구슬들이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차랑차랑 맑은소리를 자아냈다.
빈전이 있는 곳을 향해 곧장 앞으로 나아간 형운은 천천히 신료들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두둥, 두둥.
즉위식을 시작하는 북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왕,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