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하루
궁궐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공존하였다.
왕께서 승하한 지 나흘 후부터 수라간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요리가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왁자한 생기와 허기진 위장을 요동치는 냄새가 궁을 가득 메웠다.
오직 한 곳, 시신을 모신 빈전(殯殿)만이 싸늘한 고요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외로운 적막을 온전히 지키는 이는 형운뿐이었다.
벌써 나흘.
입에 아무것도 대지 않은 주군의 곁으로 최 내관이 다가왔다.
“저하.”
눈을 감고 있었지만, 형운이 잠을 자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최 내관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미음이라도 한술 젓수소서.”
“괜찮다.”
“이러다 옥체 상하실까 걱정이옵니다.”
“고작 며칠 굶는다고 어찌 되지 않는다.”
“하오나…….”
슬쩍, 주위 눈치를 살피던 최 내관이 나직하게 아뢰었다.
“급히 아뢸 것이 있나이다.”
형운은 조용히 눈을 뜨고 최 내관의 안색을 살폈다.
늙은 환관의 얼굴에 좀처럼 보지 못했던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눈으로 묻는 형운의 질문에 최 내관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하, 부디 이 늙은이의 소원이옵니다. 미음이 싫다 하시면 따뜻한 꿀물이라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간절한 청에 못 이긴 척 형운이 일어섰다.
한자리에 오래도록 앉아있던 탓인지, 잠시간 머릿속이 어질했다.
늘 늠름하기만 하였던 동궁은 몸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최 내관은 서둘러 그를 부축하였다.
“이것 보옵소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쉬옵소서.”
곁을 지키고 앉았던 삼정승(三政丞)도 최 내관의 말에 힘을 보탰다.
“그리하옵소서.”
홍인한의 말에 곁에 있던 좌의정과 우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소신들이 지킬 것이옵니다.”
“뭐하시는가. 어서 저하를 모시지 않고서.”
결국, 형운은 등 떠밀리듯 빈전을 나섰다.
삼정승의 시선은 그가 빈전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더냐?”
빈전의 솟을대문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형운이 물었다.
최 내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여나 지켜보는 눈과 귀가 있을세라 잔뜩 경계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저하를 뵙길 청하는 이가 있나이다.”
“지금 말이냐?”
형운의 질문에 최 내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전보다 더욱 깊게 허리를 조아린 채 종종걸음으로 길잡이를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동궁전의 후미진 행방 앞에 다다랐다.
그곳엔 최 내관이 손주처럼 여기던 소화자(小火者:어린 환관)가 잔뜩 겁에 질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아인 섬섬이가 아니냐?”
형운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최 내관과 어린 환관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눈빛을 빛냈다.
“혹여, 저 아이더냐?”
***
동궁전의 세작.
형운이 잠행을 나설 때마다 그의 잠행 일시와 장소, 세세한 옷차림까지 적들에게 알려주었던 간자(間者).
왕세손의 전각에 숨어있던 칼날이 고작 여덟 살밖에 안 된 소화자란 말인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간 동궁전에 숨어 있는 세작을 찾아내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공을 들였다.
최 내관과 홍인모, 최치정은 전각의 모든 궁인을 감시하였더랬다.
하지만 좀처럼 찾아낼 수 없었던 이유가 이제야 밝혀졌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웠다.
아니, 고작 여덟 살 된 어린아이가 세작 노릇을 할 줄을 그 누가 알았을까.
만약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은 비록 작고 무딘 칼날이지만, 머지않아 가장 매섭고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 동궁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네 살 무렵 궁으로 들어온 섬섬은 최 내관에겐 친손주나 다름없었다.
그런 아이가 세작이라는 알게 된 최 내관의 표정은 참담하였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듯 섬섬의 곁에 나란히 머리를 묻고 엎드렸다.
“저하, 모든 것이 이 늙은이의 불찰이옵니다. 바로 곁에 사나운 이리를 키우는 줄도 모르고…….”
최 내관의 말끝이 흐려졌다.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섬섬이 코를 훌쩍이며 어깨를 떨었다.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감히 우러르지 못할 분과 할아버지처럼 따르던 최 내관의 분위기가 사못 어두웠던 터라.
제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진 못하였지만, 섬섬은 자신이 무에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확신이 들었다.
“네 이놈, 왜 그런 짓을 하였느냐?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용서를 비는 섬섬에게 최 내관이 으름장을 놓았다.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아이는 연신 어른들의 눈치를 살폈다.
“동궁저하에 관한 이야기를 뉘에게 전한 것이냐? 누구냐? 누가 그런 일을 하라 하였느냐?”
“…….”
섬섬이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어허, 어서 실토하지 못…….”
“그만하라.”
형운은 음성을 높이는 최 내관을 말렸다.
그는 무릎을 굽혀 섬섬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왜 그런 일을 하였느냐?”
“…….”
“말해 봐라. 뭐든 정직하게만 말한다면 내 용서할 것이다.”
다정한 옥음에 섬섬이 주저주저 입을 뗐다.
“대전의 김 상책께서 그리하라고……흑흑, 그렇게 안 하면 궁에서 쫓아버린다고 하셨어요.”
“무어라?”
“지난번에 동궁저하 야식에 올릴 유밀과를 훔쳤습니다. 흐윽, 잘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맛있어 보여서 그만…….”
“그걸 상책이 안 것이냐?”
형운의 물음에 섬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저하께 아뢸 것이라 하였습니다.”
섬섬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이제…… 손목이 잘리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귀한 분께서 자실 음식을 감히 훔쳤으니, 양손이 잘릴 거라 했습니다. 그렇게 일평생 아무것도 못 하는 반병신으로 만들어 궁에서 쫓아낼 거라고…….”
형운은 바들바들 떠는 아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 줌도 안 되는 그 여린 것을 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겁박을 하는 어른이라니…….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정, 정말이옵니까?”
“감히 누가 네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혹여 다시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당장 내게 와서 고하라.”
“네?”
“내가 그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저하…….”
“섬섬아, 고작 음식 하나 가져갔다고 사람의 손목을 잘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너,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금은보화……아니옵니까?”
“틀렸다.”
“그럼……?”
“너다.”
“저요? 제깟 것이 무에 귀하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네가 귀하다.”
“…….”
“세상에서 사람만큼 귀한 것은 없느니라. 섬섬아, 다른 이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네가 참으로 귀하다. 그러니 너도 너를 귀하게 여겨라.”
뜻밖의 말에 섬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윽고 어린아이는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감읍하는 어린것의 모습에 형운은 가슴에 아릿한 가시가 돋았다.
쓸쓸하게 바라보던 그는 섬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군가 너를 하찮게 여긴다면 그런 자와는 상종하지 마라. 그럼에도 또 그런 소릴 한다면 그땐 싸워라. 다신 그런 소리 못하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라. 알겠느냐?”
“…….”
“대답 안 하느냐?”
“네? 네!”
“되었다. 이제 그만 가 보거라.”
섬섬이 고개를 들어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그냥요……?”
섬섬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형운은 최 내관을 돌아보았다.
“소주방에 일러 어린 궁인들의 먹거리에 신경 쓰라 하라.”
“명 받자옵니다, 저하.”
최 내관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섬섬을 일으켜 세웠다.
“그만 나가 보아라.”
작금의 상황이 어리둥절한 섬섬이 잠시 주춤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행방 문을 열고 나서려던 어린 환관은 문고리를 잡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무엇이냐?”
“이건 용화전에 있는 제 동무에게서 들은 건데요.”
“용화전이라면…….”
화완옹주의 전각이었다.
형운과 최 내관의 시선이 섬섬에게로 집중되었다.
“동궁저하께선…….”
연신 눈치를 살피는 섬섬에게 형운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무슨 말이든 하거라.”
“저…… 저기, 감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동궁저하께선 보위에 오르지 못할 거라고 했다 하옵니다.”
최 내관의 한쪽 눈매가 휘어졌다.
“감히 어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더냐?”
“그, 그건 잘 모르지만…… 옹주마마 전각으로 매일 밤마다 높은 분들이 드나드신다고 했어요. 중전마마의 아버지이신 부원군 대감께서도 몇 번 걸음 하셨다고 하옵니다.”
“그래?”
“그분들이 그랬대요. 저하께선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스스로 무너져?”
뜻밖의 이야기에 형운은 섬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내게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섬섬은 순진한 눈망울을 또르르 굴렸다.
“옹주께서 그러셨대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음…… 뭐랬더라?”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섬섬이 양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맞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이 아니다. 소중한 이를 무기력하게 잃어버린 자의 자책감.”
“…….”
“그 자책감과 원망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갉아 먹을 거라 했대요. 과거 연산군의 비극처럼 저하께서도 그렇게 무너질 거라고 했대요.”
“그래?”
“저하께서도 곧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불행을 겪게 될 거라고. 참으로 가여운 인생이라고 안타까워하셨다고 하옵니다.”
“소중한 것을 잃는 불행……?”
형운의 등줄기로 서늘한 불길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는 황급히 방을 나섰다.
곧장 동궁전으로 향하려는 찰나.
우르르 빈전(殯殿)으로 몰려가는 군졸 무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따라 빈전 마당으로 들어서는 형운을 맞이한 것은 홍국영이었다.
“저하!”
적막에 휩싸였던 빈전 마당이 왁자했다.
빈전을 지키던 삼정승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번잡한 소란에 하나둘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이냐?”
형운은 자신에게로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홍국영에게 물었다.
이내 심각한 음성으로 홍국영이 고하였다.
“한 시진 전, 시전의 한 골목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고 하옵니다.”
“무어라?”
홍인한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 뒤로 따라붙은 대신들이 언짢은 표정으로 한 마디씩 보탰다.
“국상 중에 어떤 자들이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어허, 이런 불경을 보았나.”
“그만!”
형운은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그는 매서운 눈길로 홍국영을 재촉했다.
“자세히 말하라.”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한 홍국영이 이야기를 이었다.
“처음에는 뒷골목 왈짜와 반촌의 반인(泮人)들 간의 시비로 인한 싸움인 줄 알았사옵니다. 하온데…….”
“한데?”
“죽은 반인들의 품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사옵니다.”
“이상한 것?”
홍국영이 여러 장의 종이를 형운에게 올렸다.
<이씨의 나라가 망하고 정씨 성을 가진 자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
군데군데 핏물로 얼룩진 종이엔 찍어낸 듯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형운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홍문관 교리, 심환지에게 종이를 건넸다.
심환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하, 이는 명백한 역모입니다.”
“역모라니. 그 어인 무서운 말을 하는가?”
영의정 홍인한이 심환지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듯 낚아챘다.
이내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궁금해진 대신들이 앞다퉈 홍인한의 손에 들린 문서를 읽었다.
“이건…….”
“정감록이외다.”
“정감록이 무엇이외까. 오래전부터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예언서라 떠들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했던 괘서가 아닙니까.”
“필시 수상한 시절을 틈타 백성들을 선동하는 무리가 또 활개 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홍 교리의 말처럼 이건 역모요.”
“저하, 궁의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옵소서.”
“즉위식이 거행될 때까지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이자들을 이끌던 수괴가 뉘인지, 기필코 찾아내셔야 하옵니다.”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인한 역시 그들에 섞여 음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의 미간에 서린 낭패와 당혹감을 형운은 놓치지 않았다.
무언가 저들이 세운 계획이 어긋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형운은 최 내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인모와 치성인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네, 저하.”
“당장 빈궁전으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라.”
“명을 받잡겠나이다.”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최 내관이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형운은 태연한 모습으로 삼삼오오 모여 상황을 의논하는 대신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의 뇌리엔 오직 한 사람.
이레만이 가득했다.
빈궁, 괜찮소?
***
-저는 괜찮습니다.
서탁 위로 이레의 글씨가 흩어졌다.
-할아버지들께서 조언해주신 대로 일부러 요란을 떨었습니다. 덕분에 저들이 더는 크게 일을 벌일 순 없을 듯합니다.
이내 악필이 서탁을 한가득 채웠다.
-것 봐라. 내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였지?
-그래도 무모한 일이었소.
예의 서체에 불만이 들어차 있었다.
화 역시 예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 역시 예와 같은 생각이다.
-그럼 어쩔 것이냐? 어쨌든 저놈들이 당장은 꼼짝 못 하게 되었으니. 잘 된 것이 아니냐.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랬소?
-은백 녀석이 제 호위를 아이의 뒤에 떡하니 붙여 두었다질 않아. 그것도 모자라 아이가 제 오라비까지 불렀으니. 그만하면 되었지. 그리고 원래 이런 일은 다소 위험부담이 있는 법이다.
악이 해명했지만, 예와 화는 여전히 냉랭했다.
-악은 아이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하질 않아 우리 마음을 모르는 듯싶소.
-내 말이. 하필이면 내가 그때 자리를 비워 저자의 농간에 아이가 넘어가는 걸 그대로 두었으니.
-나 역시 알았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아이를 말렸을 것이오.
화와 예의 불만에도 악은 기세등등했다.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그만이라고. 어쨌든 한동안은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거다.
-어허, 큰일 날 자로다.
화의 걱정에 예 역시 깊은 근심을 드러냈다.
-상이 성불하여 안심했더니. 또 다른 백귀가 아이를 충동하는구려.
예의 글씨가 안개처럼 서탁에서 사라질 때였다.
-성불은 누가 성불을 해?
불퉁한 말투의 글씨가 서탁에 떠올랐다.
-이것들이 나 죽기만을 기다린 거냐?
참으로 오랜만에 등장한 글씨에 한동안 서탁은 잠잠하였다.
-뭐야? 지금까지 조잘조잘 잘도 떠들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 이젠 대놓고 사람 무시하느냐? 내 이것들을 그냥 콱……!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글귀에 이레 역시 두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상 할아버지……?
사라진 줄 알았던 상 할아버지의 재등장에 이레의 목구멍으로 울컥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은 여전히 심통 가득한 서체로 답을 건넸다.
-그래, 나다.
-정말 상, 너냐?
화가 물었다.
-성불 안 했어? 아님, 하늘에서도 거부당한 거냐?
악의 악필에 상이 버럭 화를 냈다.
-거부라니? 감히 나를 거부할 자가 어딨단 말이냐?
-그간 어찌하여 소식이 없었소?
예의 물음에 상이 은근한 서체로 물었다.
-왜? 내가 없으니 궁금했더냐? 너희들, 사실 나 기다렸지? 나 없으니 심심했으렷다?
-심심은 개뿔. 보기 싫은 놈 안 봐 속이 시원했는데, 또 보게 생겼구나.
악의 투덜거림에 상이 달려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느냐?
-네놈 때문이라도 내 기필코 서탁질 계속 할 거다.
화가 상과 악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언제는 서탁질 끊겠다고 하더니.
-악, 저거 성불하는 꼴 보기 전엔 이놈의 서탁질 절대 못 끊지. 두고 봐라.
악이 유유히 상의 말을 되받아쳤다.
-두고 보자는 놈치고 끝까지 가는 놈 못 봤다.
-나는 한다면 하는 분이시다.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하는 두 할아버지를 보며 이레는 코끝이 알큰하게 달아올랐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빈자리는 크다 하였던가.
상 할아버지의 부재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쉴 새 없이 서탁을 채우는 글씨를 보며 이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앗!”
조용하던 밖에서 짧은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벌컥 방문이 열렸다.
무람없는 침입자에 놀란 이레의 눈동자에 한껏 굳은 형운의 얼굴이 들어왔다.
“저하!”
놀람이 지나간 이레의 얼굴에 반가움이 들어찼다.
그러나 형운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그녀의 어깨에 형운의 양손이 내려앉았다.
“그대…….”
자신을 향한 형운의 눈빛에 짓눌려 이레는 마냥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어찌하여 그렇게 화가 나신 거여요?
한참을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다시 열었다.
“……괜찮소?”
이레가 했던 모든 일이 자신을 위한 일임을 어찌 모를까.
그럼에도 화가 났다.
그것은 그녀가 아닌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더 단단한 사내가 되지 못함에 성화가 치밀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레를 찾아왔다.
“괜찮소?”
이레야, 괜찮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대답했다.
그 자상한 목소리.
한결같은 한마디.
다정한 숨결에 굳어있던 그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되었다.
그럼 되었다.
형운은 이레의 어깨를 한껏 끌어당겼다.
잠시 둥지를 떠났던 작은 새가 다시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저하.”
형운의 팔 안에 갇혀버린 이레는 가만가만 그를 토닥였다.
휴우.
안심하는 낮은 한숨이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적셨다.
귓가를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살 수 없노라고.
너 없인 삶을 버텨낼 수 없노라고.
그 명징한 고백에 이레는 미소 지었다.
***
-아이야…….
화가 이레를 불렀다.
-어째 아까부터 조용하다?
상의 필체에 서운함이 깃들었다.
-성불한 줄 알았던 네가 다시 왔으니. 아이가 실망한 거지.
악이 놀리듯 말했다.
-네 이놈! 너는 이미 죽은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어허! 오랜만에 만났거늘. 그만들 하는 게 어떻겠소.
예가 둘의 다툼을 말렸다.
-그나저나 그놈은 어찌 되었을꼬? 도망을 쳤다고 하는데, 또 언제 나타나 아이에게 위해를 가할지 걱정이구나.
화가 화제를 돌렸다.
-그놈? 그놈이 누군데?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려던 놈이 있소.
예가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상의 글씨가 눈에 띄게 커졌다.
-그런 십장생에 핀 개나리 같은 놈을 보았나. 감히 뉘에게 해코지한단 말이냐. 불손, 그놈은 뭐했다더냐? 그런 놈은 두 번 다시 세상 구경하지 못하게 뿌리까지 뽑아, 마디마디 잘라버렸어야지.
-걱정 마라. 아이가 벌써 손을 썼으니.
-손을 써? 어떻게?
악이 흥분하는 상을 말리며 글을 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발 빠르고 사람 찾기 잘하는 자와 포기라는 걸 모르는 독종이 뒤를 쫓고 있으니. 지금쯤 아마 지옥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야.
악의 글씨에 은근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화와 예가 맞장구쳤다.
-그렇겠지?
-그럴 것이오.
어리둥절한 상의 글씨가 서탁을 물들였다.
-뭔데?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