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이틀
이레를 태운 가마가 수월을 나섰다.
가마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궁으로 갈 수 있는 골목으로 길머리를 잡았다.
그러나 교꾼들은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춰야 했다.
“기루로 가세나.”
가마 안에서 들려온 이레의 음성에 가마 뒤를 따르던 천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서둘러 가마 창가로 다가간 그가 다시 물었다.
“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대로 돌아가기엔 마음이 너무 무겁네. 나 때문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람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 도리 아니겠는가.”
“하오나…….”
여기에서 사슴의 기루로 가자면 큰길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할 시기였다.
국상 중에 빈궁께서 궐 밖으로 허락 없이 행차했다는 사실을 행여나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구설에 오를 수 있었다.
게다가 빈궁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 사슴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런 와중에 사슴의 기루로 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사람의 도리와 의리도 중요했지만, 빈궁의 생명은 더 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세나.”
감히 거역하기 어려운 묵직한 명이 가마 안에서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천호는 가마 머리를 홍등가로 돌렸다.
너른 대로를 지나 기루가 즐비한 골목으로 가마가 들어섰다.
군데군데 대문 앞에 등을 달아놓은 기루도 있긴 하였으나, 손님이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국상을 당하고 닷새 동안은 모든 상행위(商行爲)를 금지하는 국법이 지엄했던 까닭이었다.
한적하다 못해 거리는 깊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 고요한 골목의 끝자락에 가마가 다다랐다.
가마에서 내린 이레는 주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사람 없는 홍등가는 을씨년스러웠다.
문득 그녀는 사슴이 앉아 있던 기루의 누각 이 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누각 난간에 턱을 괸 채 골목을 내려다보던 사슴의 모습이 어둠에 겹쳐 보였다.
매일같이 저곳에서 사슴이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이 외로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녀가 본 곳은 이 허허로운 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눈동자는 비록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정작 사슴이 보고 싶은 건 멀고 먼 곳에 있는 다른 풍경,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깨닫자, 명치가 싸르르 아려왔다.
언제나 웃고 있기에 유난히 웃음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실은 그 웃음 뒤에 울음을 감추고 있는 줄 몰랐더랬다.
언제나 수다스럽기에 마음에 품은 말 같은 건 없는 여인인 줄 알았다.
실은,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것도 모르고…….
“그대를 오해해서 미안하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여인을 향해 이레는 뒤늦은 사과를 건넸다.
“그대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하였소. 하나, 약조하지요. 그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나에게 베풀어 준 선의, 어떻게든 되돌려 줄 것이오. 그대의 분통함을 내가 풀 것이오.”
이레는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단단한 결의와 각오가 그녀의 크고 검은 눈동자에 형형하게 맺혔다.
“아유, 그게 맴처럼 쉽간디. 세상만사 맴 먹은 대로 다 풀리고, 말한 대로 다 되면 잼없쥬. 안 그래유?”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기루의 담벼락 위에서 들려왔다.
훌쩍, 뛰어내리는 그림자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이레의 코끝으로 닿았다.
***
“네놈은…….”
이레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뒤로 물렸다.
눈앞의 사내에서 멀어지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뭐여? 뭔 사람이 그런대유? 엉뚱한 사람을 내보내면 워쩐대유.”
미리 약조라도 한 사람처럼 거북은 이레를 타박했다.
그러곤 천연덕스레 피 묻은 양손을 내보였다.
“나가 그짝땜시 헛고생 했잖유. 이것 좀 봐유.”
“…….”
“엄한 사람 죽이고 나가 발 뻗고 잠도 못 잘 뻔 했슈. 그래도 뭐, 괜찮아유. 늦더라도 이렇게 만났으니 됐네유.”
“무어라?”
“허탕이라도 치면 워쩌나 나가 이만저만 걱정한 게 아녀유. 나가 그래도 명색이 십학사 거북이잖유. 꼴랑 계집 하나 워쩌지 못하고 돌아가면 영 낯이 안 선단 말이쥬.”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그런 말, 종종 듣네유.”
거북의 얼굴에 히죽, 웃음이 떠올랐다.
그 미소만 보면 그야말로 세상 물정일랑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사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전신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살의(殺意).
이레의 전신으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런 자를 홀로 상대했을 사슴을 떠올리니, 거대한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이런 두려움, 이런 공포를 안고 죽임을 당했을 그녀가 가여웠다.
“뭐여? 지금 그짝이 그런 눈빛하고 있을 때가 아니어유.”
“무슨 뜻이냐?”
“사슴 생각한 거 아녀? 그 계집, 불쌍하게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잖유. 아녀유?”
이레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거북이 말했다.
“그렇게 불쌍하면 같이 가유.”
“…….”
“그러고 보면 나가 참 정이 많은 사내유. 지금도 봐유. 사슴, 그 계집년, 저승길 동무하라고 이 밤에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다니잖유.”
“헛소리! 그리 호락호락 죽어줄 듯싶을까.”
“호락호락 죽어주려고 이짝으로 온 거 아녀유?”
거북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입속에 넣었다.
휘익.
뿔피리를 닮은 소리가 밤공기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길게 늘어선 홍등가의 담벼락 너머로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가 훌쩍훌쩍 뛰어내렸다.
그림자들은 곧 거북의 등 뒤에 부채꼴 모양으로 섰다.
짐승을 잡을 때 쓰는 칼과 도끼를 든 자들의 몸에선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마마.”
천호와 백호가 검을 뽑아들고 이레의 앞을 막아섰다.
가마를 메고 있던 교꾼들 역시 등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둥글게 이레를 보호하는 그들을 보며 거북이 피식 조롱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뭐여? 몇 놈이여? 하나, 둘, 서이, 너이…….”
이레의 곁에 있는 사내들의 숫자를 세던 거북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작 일곱 놈이 우덜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겨?”
“싸움을 입으로 하는 놈이로구나.”
천호가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을 가로지른 그의 검이 거북의 가슴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순간, 거북과 천호의 사이로 손도끼를 든 사내가 끼어들었다.
카캉.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튀었다.
바닥으로 발을 디디며 천호는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으악!”
비명과 함께 사내가 들고 있던 손도끼가 저 멀리로 떨어졌다.
천호의 검에 손도끼 사내의 팔 하나가 잘려나갔다.
“상인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품팔이 검객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벼?”
거북의 얼굴에서 흐물거리던 웃음이 사라졌다.
피를 쏟는 사내를 발길질로 밀쳐낸 거북이 허리춤에 걸린 낫을 빼 들었다.
“모처럼 낫질할 만 나네.”
퉷퉷.
손바닥에 침을 뱉은 그는 낫을 고쳐 잡았다.
그러곤 탐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날짐승처럼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곧 벌어질 살육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방에서 살점이 튀고, 뜨거운 핏물이 솟구치리라.
그 속에서 한바탕 춤을 추듯 사람을 베고 또 베어낼 생각을 하며 십학사의 거북, 박진봉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뉘여? 누가 젤 먼저 죽을 텨?”
휙휙, 벼린 낫이 어둠을 베었다.
그의 광기에 이레를 지키는 천호는 물론 백호마저도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싸움의 가장 기본은 기세라 하였다.
기세에서 밀리는 순간, 싸움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형님은 귀한 분 지키십시오. 저 미친놈은 내가 맡겠습니다요.”
백호가 성큼 거북의 앞으로 다가섰다.
“백호야.”
천호의 부름에 백호는 뒤를 돌아보며 씨익 미소를 보였다.
“알잖소, 형님. 일평생 왈짜 패하고 어울려 사람 구실 못하고 진창을 뒹굴며 살아온 납니다.”
백호가 거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내가 고귀한 분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행여 이 자리서 죽는다고 해도 여한도 없고 미련도 없습니다. 그저 귀한 분만 무사히 지켜낼 수 있다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이 말이오.”
백호의 손에 쥔 검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번뜩였다.
거북이 누런 이를 보이며 히죽 웃었다.
“뭐여?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조심해라, 이 말이여?”
“말귀는 그래도 알아듣는구나.”
백호의 말에 거북이 입을 열었다.
“뭘 모르네. 우덜은 말여, 첨부터 암것도 못 봤단 말여.”
“뭐라?”
“진창인 줄 알고 뒹구는 놈이 막 나갈까? 아님, 거가 진창인 줄도 모르고 뒹구는 놈이 더 막 나갈까?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이란 걸 해보란 말여.”
“무슨 소리야?”
“아, 됐어. 그 머리로 뭔 생각을 하것어? 쓸모라곤 암것도 없는 그 머리통, 힘들게 달고 다니지 않게 할 줄 테니, 고맙다는 인사부터 혀.”
박진봉의 낫이 허공 위로 치켜 올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
백호의 코앞으로 바싹 다가온 그의 낫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선을 그었다.
그의 낫 끝에 백호의 몸통이 두 동강 날 찰나.
카캉.
무언가가 날아와 거북의 낫을 쳐냈다.
“이게 뭐여?”
낫질을 방해받은 거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바닥에 나뒹구는 쥘부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부챗살에 나무 대신 쇠를 넣어 만든 쥘부채.
“어떤 놈이 감히……!”
흰자에 핏줄을 세운 거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기루의 대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위에서 쥘부채의 주인이 뛰어내렸다.
툭툭,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김기대는 바닥에 뒹구는 쥘부채를 주워들었다.
그러곤 씨익,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이래서야 원,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잖으냐.”
***
“오라버니!”
고아한 부름에 기대는 천호와 백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이레가 두 사람의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그래, 이 오라비가 왔느니라.”
“연통 넣은 지가 언제인데, 이제 오십니까?”
사슴이 자신을 대신하여 수월을 나섰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레는 강현보를 통해 서찰을 보냈더랬다.
적을 속이기 위해선 아군조차도 속여야 한다 하였다.
사슴은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자신에게 회합의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끝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사슴 덕분에 오늘은 무사히 넘겼다고 하지만, 이레를 죽이려는 무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하여, 이레는 도망치는 대신 맞서 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위험해질 경우를 대비하여 오라버니에게 힘을 보태 달라는 서찰을 띄웠다.
“이 오라비가 공사다망한 것을 너도 알잖느냐. 그나저나 어찌 오라비 말을 듣지 않는 것이야. 밤길 조심하라고 그리 일렀거늘. 이래서야 오라비가 마음 놓고 돌아다니질 못하잖느냐.”
기대의 지청구에 이레가 귀엽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두 사람의 사이로 박진봉이 끼어들었다.
“난 또, 누군가 했슈. 단양에서 내 칼에 찔려서 죽을 뻔했던 양반이네유.”
“기억력 하난 좋구나. 사람 백정으로 불릴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놈이 내 얼굴을 다 기억하다니.”
“그짝이 워낙 잘 생겼어야쥬. 곱상하고 야리야리한 게. 나는 꼭 계집인 줄 알았다니까유. 그런데 워쩐대유.”
박진봉이 기대의 얼굴에 난 흉터를 가리켰다.
“고운 얼굴에 슝이 나서 나가 다 속이 상하네유.”
자신으로 인해 생긴 흉터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라니.
어이가 없어 기대는 마른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걱정 마라.”
“미안혀서 그렇쥬, 미안혀서…….”
박진봉은 허리춤에서 또 하나의 낫을 꺼냈다.
양손에 낫을 든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번엔 아무 슝없이 제대로 목숨줄 끊어드릴게유.”
“누구 마음대로!”
그때, 나무 뒤에서 칼날처럼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은호!”
검은 방갓을 쓴 장무열을 발견한 이레의 낯빛이 한층 밝아졌다.
“어째 나보다 더 반기는 것 같구나.”
기대의 목소리에 장무열을 향한 은근한 경계가 섞였다.
“두 분이 같이 오신 겁니까?”
반기는 이레의 목소리 뒤로 박진봉의 음성이 뒤따랐다.
“이봐유, 지금 상황을 잊은 모양인데, 그렇게 좋아할 때가 아녀유.”
거북을 향해 김기대가 시선을 돌렸다.
“너는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구나.”
“뭐라는 거래유?”
“지금이라도 달아나는 것이 좋을 텐데.”
“뭐여?”
두 사람 사이로 장무열이 끼어들었다.
“이놈이 확실하냐? 너를 절벽에서 밀었다는 그놈.”
기다렸다는 듯 기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냥 민 것도 아니고, 칼질과 낫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꼭 형에게 일러바치는 아우의 모습이었다.
“악랄하군.”
“자네보다 더 독종이야.”
“죽고 싶으냐? 저런 자와 나를 감히 비교하다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떻게 내가 자네와 저놈을 비교할까.”
“저기유, 나가 안 보이나 봐유. 이게 안 보이쥬?”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거북이 손에 들고 있던 낫을 휙휙 내질렀다.
그러다 한순간.
이레의 등 뒤로 다가온 박진봉이 그녀의 목에 날카로운 낫 끝을 들이댔다.
잠시간 농담을 주고받던 김기대와 장무열의 얼굴에 팽팽한 긴장이 들어찼다.
주위를 에워싼 무사들 역시도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했다.
“워뗘? 이래도 사람을 무시할 텨? 나가 귀신이여? 왜 멀쩡한 사람 앞에 세워두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겨? 나가 꼭 이래야 말을 들어 처먹지?”
“사람이 사람 같아야 사람 대우를 할 것이 아니냐.”
그에게 잡혀있던 이레가 말했다.
“뭐라는겨?”
박진봉이 물었지만, 이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팔꿈치를 세워 박진봉의 명치를 힘껏 내리쳤다.
“컥!”
연약한 여인이라 생각하고 방심했던 거북이 낮은 비명을 토했다.
찰나.
무릎을 굽혀 몸을 낮게 낮춘 이레는 빙글 어깨를 돌려 박진봉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물러서기 무섭게 장무열의 검날이 박진봉의 손에 들린 낫을 거침없이 쳐냈다.
뒤이어 기대가 서강율에게서 배운 특별한 포박술로 박진봉의 양팔을 제압했다.
순식간에 포박된 박진봉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뭔 상황이래유?”
언제나 장난기 가득했던 김기대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전에 없이 진지한 그가 발길질로 박진봉의 뒷무릎을 걷어찼다.
절로 무릎을 꿇고 앉은 거북의 귓가에 독종 장무열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상황이겠느냐. 네놈이 죽게 된 상황이지.”
“…….”
박진봉이 두 눈을 끔뻑이며 장무열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히죽, 박진봉의 얼굴에 불현듯 순박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가…… 그렇게 쉽게 죽어줄 순 없쥬.”
그의 잇새에서 휘파람소리가 흘러나왔다.
휘익.
내내 꿈쩍도 않고 서 있던 그의 패거리들이 갑자기 와악하고 달려들었다.
***
그들에겐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사냥감을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들처럼.
좌우 살피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무사와 무사의 싸움이 아닌 그야말로 개싸움이었다.
박진봉이 데려온 자들은 처음부터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듯 보였다.
적과 아군의 구별 또한 없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도끼와 칼을 휘둘렀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단 하나.
눈앞에 있는 상대의 목숨을 앗는 것.
그 한 가지만이 그들에게 내려진 사명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핏물이 흘렀다.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살아남은 자보다 죽은 자의 수가 더 많은 싸움이 끝났다.
죽은 자의 대부분이 거북과 함께 온 자들이었다.
그 치열한 싸움 속에서 박진봉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런 망할!”
기대의 입에서 거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레 역시 허망한 눈빛으로 새벽이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 사람.
장무열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뛰어봤자 벼룩이다.”
“뭐?”
“이제 슬슬 잡으러 가 볼까?”
“어디로 갔는지 종잡을 수 없는 자야. 그런데 어떻게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냄새.”
“그게 무슨 말인가?”
“제아무리 신출귀몰하여도 제 체취를 숨길 순 없지.”
장무열은 박진봉의 체취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바람결에 언뜻언뜻 느껴지는 미세한 냄새건만.
그는 자신 있게 걸음을 옮겼다.
“역시 은협의 말대로 독종은 독종이로군.”
“무어라?”
“자네가 잡겠다고 목표를 세우면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자라 하여도 끝내 잡힌다지?”
“…….”
“오죽하면 은협마저도 혀를 내둘렀겠는가.”
“시끄럽다.”
“이참에 나를 목표로 삼아볼 생각은 없는가?”
“귀찮다.”
“나도 알고 보면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네.”
“꺼져!”
“어허, 자네 이러긴가.”
“거추장스러우니, 따라붙지 마라.”
“따지고 보면 그자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은 건 나라네. 그러니 함께 가세. 어허, 그리 빨리 걸으면 내가 뒤쫓기 어렵잖은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내내 지켜보던 이레는 가마에 올랐다.
“궁으로 돌아가세나.”
또 다른 적이 있는 곳.
그리고 그녀의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아침 태양이 궐의 처마 끝에 매달렸다.
영의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종묘와 사직에 왕의 죽음을 고하였다.
이제 대보를 동궁에게 전하는 의식이 있으리라.
왕의 진정한 힘.
모든 권력의 근원인 어보(御寶).
그 강력한 힘을 전해 받는 순간, 동궁의 권위는 더욱 단단해지리라.
이레는 장엄한 의식이 치러질 궐의 문턱을 넘었다.
물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시간이 유유히 흐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