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나흘
가래나무로 만든 왕의 관(梓宮)이 빈전에 모셔졌다.
죽음을 위한 절차가 하나씩 진행될수록 곡소리는 높아졌다.
“저하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더냐?”
빈전이 마련되는 동안 처소에서 꼼짝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이 법도였던 터라.
형운의 안부가 궁금한 이레는 금정을 시켜 빈전의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금정이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기 전이건만.
이레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금정은 묻는 말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 저하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냐?”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금정을 다그쳤다.
그제야 반쯤 넋을 잃고 있던 금정이 아뢰었다.
“이틀째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으시고 호곡만 하시니. 눈에 띄게 수척해지시긴 했어도, 저하께선 무탈하시옵니다.”
“다행이구나.”
금정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던 이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다행이옵니다…….”
이어지는 금정의 읊조림에 께름칙한 여운이 느껴졌다.
“왜 그러느냐? 네 표정이 아까부터 어찌 그런 것이냐?”
이레가 물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금정의 낯빛이 창백했다.
“그게…….”
잠시 뜸을 들이던 금정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뭔가 일이 이상스레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빈전에서 안국동 홍 대감을 보았질 뭡니까.”
“안국동 홍 대감이라면…….”
동궁저하의 외조부가 아니시던가.
그분이 빈전이 있는 것이 무에 이상한 일이란 말인가.
이레는 되려 금정을 의아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속내를 읽은 금정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 홍 대감이 아니오라…… 홍인한 대감 말이옵니다.”
“홍인한 대감이라 하였느냐?”
“네?”
“무얼 잘못 보았겠지.”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하였사옵니다.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가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습니다. 홍인한 대감이 분명하였사옵니다.”
“삭탈관직하여 도성 밖으로 추방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궐 안에, 그것도 빈전에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까 말이옵니다. 게다가…….”
금정이 이레의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놀라지 마시어요, 빈궁마마.”
이미 놀랄 만큼 놀랄 이야길 들었다.
여기서 더 놀랄 일이 무엇이 있을까?
“홍인한 대감이 영의정에 제수되었다고 하옵니다.”
“무어라?”
이레의 목소리가 커졌다.
홍인한이 영의정이 되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윽고 들려온 금정의 목소리가 이레의 의문을 가중시켰다.
“어명이라 하옵니다. 주상전하께서 승하하시기 바로 전날, 홍인한 대감을 영의정에 임명한다는 어명을 내리셨다고 하옵니다.”
“……!”
금정의 말이 옳았다.
무언가 일이 이상스레 흘러가고 있었다.
***
빈전에 소리 없는 일렁임이 일었다.
각자의 자리에 앉은 대신들은 연신 상복 차림의 홍인한을 곁눈질했다.
저자가 다시 돌아오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도, 믿기지도 않았다.
그런 감정은 당사자인 홍인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의 시신이 모셔진 빈전에서 통곡하며 눈물을 쏟는 홍인한은 작금의 상황이 여전히 꿈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궁으로 돌아올 수 없을 줄 알았건만.
하지만 언제나 행운은 자신의 편이었다.
주군을 잃은 충성스러운 신하인 듯.
서글프게 눈물을 흘리는 겉모습과 달리 홍인한의 뇌리엔 간밤의 일이 가득하였다.
언제나처럼 억울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었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이어질 것 같았던 권세를 한순간에 잃고 조정에서 쫓겨나던 분통함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하였다.
어젯밤에도 초저녁에 겨우 든 노루잠에서 깨어나 담뱃대에 불을 댕기고 있었다.
그때 그가 찾아왔다.
언제나 눈엣가시였던 사내.
천하디천한 것이 옹주의 양자가 되어 왕족 행세를 하더니, 기어이 십학사의 해 자리를 차지했다.
어디 그뿐일까?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앞날을 막아버린 놈.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그놈, 정후겸.
그가 홍인한을 찾아왔던 것이다.
*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느냐?”
홍인한의 날 선 음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정후겸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성큼 문지방을 넘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호통에도 정후겸은 예의 느른하고도 느긋했다.
그 여유로움이 홍인한의 성화에 불을 지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단호히 축객령을 내렸으나, 정후겸은 보란 듯 홍인한의 앞에 당당히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림자처럼 납작 엎드려 숨만 쉬며 살 줄 알았는데. 아직도 기세등등하니, 보기 나쁘진 않소.”
“무어라?”
칭찬을 가장한 조롱에 홍인한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이놈을 끌어내지 않고 무얼 하느냐?”
더는 참을 수 없어 홍인한이 목청을 힘껏 돋웠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부름에 달려오는 이가 없었다.
“밖을 지키는 늙은이는 잠시 조용한 곳에 가뒀으니. 괜한 고생은 그만두시오.”
“네 이놈!”
“어허, 그리 목청 높이지 않아도 된다 하질 않소.”
“여긴 뭘 하러 온 것이냐? 왜? 임금에게 내쳐진 내가 얼마나 불쌍한 꼴로 살고 있는지 구경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볼만한 구경거린 도성에도 가득하니. 겨우 이런 모습 보자고 이 밤에, 여기까지 걸음 하였겠소?”
“그럼 왜…….”
찰나.
정후겸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왕께서 승하하셨소.”
“지, 지금 무어라 했느냐?”
“오늘 새벽, 전하께서 승하하셨소.”
“이런…….”
낮은 탄식이 홍인한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풋.
맞은편에 앉은 정후겸이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홍인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정후겸은 서둘러 변명했다.
“대감의 그런 모습을 보니, 진실로 이 나라와 임금을 걱정한 충신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소. 기분 상하였다면 미안하오.”
사과하는 정후겸에게 홍인한이 물었다.
“주상의 죽음을 알리려 나를 찾아온 건 아닐 테고.”
“…….”
“용무가 무엇이냐?”
정후겸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적막이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가라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궐로 돌아오게 해 주겠소.”
“뭐라?”
“대신, 대감이 해 줘야 할 것이 있소.”
“하하하……!”
홍인한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불쑥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내 웃음은 사라졌다.
그는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정후겸을 응시했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가졌다고 하지만, 어떤 수로 나를 다시 궐로 부를 수 있단 말이냐?”
“대감의 말이 맞소. 나는 못하는 일이지. 허나…….”
정후겸의 느긋한 음성이 이어졌다.
“어명이라면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을 것이오.”
“어명?”
쾅!
홍인한은 거칠게 서탁을 내리쳤다.
“네놈이 나를 갖고 장난질을 치는 것이냐? 네놈 입으로 좀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주상이 이미 죽었다고. 죽은 자가 어떻게 명을 내릴 수 있단 말이냐?”
추궁 섞인 그의 물음에 정후겸은 한쪽 입술을 슬쩍 올렸다.
“승하하기 직전에 내린 어명이 있을 수 있질 않겠소.”
“승하하기 직전에 내린…… 어명?”
정후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전하께서 그런 명을 내렸단 말이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모호한 답.
“똑바로 말하라. 어명을 내렸다는 것이냐? 아니란 것이냐?”
“선택은 대감의 몫이오.”
“그게 무슨 뜻이냐?”
“나와 손을 잡는다면 어명을 내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대감은 죽을 때까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
다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홍인한이었다.
“내가 무얼 하면 되겠는가?”
정후겸을 향한 홍인한의 눈빛과 말투가 변하였다.
언제나 팽팽하게 대립했던 두 사람이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대감을 궐로 부를 것이오. 대신 대감은 어떻게든 동궁이 보위에 오르는 걸 막아야 하오.”
“그리하지.”
“장담할 수 있겠소?”
“장담하리다.”
“행여 동궁을 죽여야 한다고 해도?”
정후겸의 물음에 홍인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본디 권력이란 많은 피를 볼수록 더욱 두렵고 단단해지는 법이지.”
홍인한은 버릇처럼 수염을 쓸어내렸다.
“자, 이제 내 마음을 보였으니, 그대는 방도를 보여주게나.”
기다렸다는 듯 정후겸은 품에서 붉은 비단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하얀 백지 위에 붉은 인장이 찍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홍인한의 눈에 놀람이 가득 찼다.
“왕의 어보가 찍힌 백지이니. 여기에 무얼 쓰던 그것이 어명이 될 것이오.”
“대체 이걸 어떻게……?”
“전하께서 특별히 내게 내린 총애쯤으로 생각하시오.”
“…….”
거짓말.
의심 많은 임금이 어보 찍힌 백지 서찰을 남의 손에 쥐여줄 리 만무했다.
저 요사한 자가 부린 삿된 술수가 분명하리라.
그러나 홍인한은 모른 척하기로 하였다.
남은 일생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기회였다.
이대로 놓아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정후겸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그의 붓끝에서 왕의 필체와 똑같은 글씨가 흘러나왔다.
왕의 곁에서 왕의 그림자처럼 살더니.
필체마저도 저리 감쪽같이 흉내 내는구나.
어쩌면 지금까지 내려온 어명 중 저자의 손에서 나온 어명도 있을 수 있으리란 의심마저 들었다.
그의 속내를 읽은 듯 정후겸이 말했다.
“진실이 무엇인가는 상관없소.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사실이지.”
정후겸의 느른한 미소가 홍인한을 향했다.
호시탐탐, 남의 것을 노리는 빼앗는 사납고 야비한 날짐승의 웃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할까.
홍인한은 정후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어명을 품에 안았다.
워낙 변덕 심하고, 감정의 기복 심하셨던 분인지라.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하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이 밤이라도 당장 출발해야 할 것이오.”
“말해 무얼 할까.”
홍인한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도 염원하던 조정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그의 차비가 분주하였다.
*
“홍인한 대감이 돌아왔다…….”
이레는 금정이 전한 소식을 입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정말 전하께서 내린 명일까?
승하하시기 얼마 전부터 왕께선 기존의 총명함을 잃으셨다.
가끔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종종 잊고 하셨다.
그러니…….
홍인한을 다시 영의정에 임명한다는 어명을 진실로 내리셨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일로 형운이 해결해야 할 장애물 하나가 다시 늘어났다.
이 일을 어찌 대체해야 하나.
이레의 상념이 깊어질 때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처소 문앞을 지키고 선 금정의 음성이 날카로웠다.
“무슨 일이냐?”
이레의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처소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문 앞에는 눈에 쌍심지를 켠 금정과 함께 사슴의 모습이 보였다.
금정의 어깨너머로 이레와 시선을 맞춘 사슴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레는 금정을 향해 명을 내렸다.
“안으로 뫼셔라.”
“하오나…….”
“금정아.”
단호한 음성이 금정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입을 삐죽거리던 금정이 마지못해 한옆으로 비켜섰다.
궁녀의 복색을 한 사슴이 금정을 지나쳐 이레의 앞으로 다가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예를 갖춘 사슴의 물음에 이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국상 중이니. 잘 지낸다고 하면 불충일 것이나, 무탈하네.”
“그렇군요.”
“오늘은 무슨 일로……?”
“회합이 열릴 것이옵니다.”
“오늘 밤?”
“왕께서 승하하셨으니. 논해야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사슴은 하얀 당의 자락 뒤에서 서찰을 꺼냈다.
서찰 속에는 회합의 시간이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여느 때라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건네며 수다를 떨었을 사슴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슴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러가는 그녀에게 이레가 말했다.
“지난번 일은 참으로 고마웠네.”
수월에 불을 내기 위해 살아있는 쥐를 모아준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사슴이 잠시 고개를 들고 이레를 바라보았다.
이내 입가에 보일 듯 말듯 미소가 떠올랐다.
“크게 마음쓰지 마십시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지라. 제가 받은 호의에 대한 답례일 뿐입니다.”
“그렇군.”
“그럼 저는 이만…….”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사슴을 이레가 다시 한 번 붙잡았다.
“그대, 나와 손을 잡아 볼 생각은 없는가?”
이레의 물음에 사슴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이레에게 공손하게 답하였다.
“송구합니다. 귀한 분의 손을 잡기엔 너무 더러워진 손이랍니다.”
사슴의 얼굴에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이 떠올랐다.
부드러운 거절을 남긴 채 그녀가 물러갔다.
홀로 남은 이레는 어둠이 스며들 때까지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홍인한의 귀환과 십학사의 회합.
잠시 멈췄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시작된 싸움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리라.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리라.
그러나…….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기꺼이 걸어야지.
그래서 그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목숨이 아니라 더한 것도 걸 수 있었다.
이레의 눈동자에 단단한 의지가 들어찼다.
***
자시(子時)가 가까워진 시각.
수월의 동쪽 협문이 열리고 가마 한 대가 밖으로 나왔다.
네 명의 교꾼과 두 명의 호위가 지키는 가마는 시전의 좁은 골목을 돌아 목멱산으로 향했다.
산자락의 어귀에 들어서자, 밤의 어둠과 숲의 어둠이 더해져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앞에 선 호위가 조족등을 들고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를 따라 교꾼들은 부지런히 걸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산길을 따라 걸었을까?
길잡이 하던 조족등이 무언가에 걸린 듯 바닥으로 덜컥 떨어졌다.
“무슨 일인……?”
가마의 뒤를 따르던 호위가 물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채 매듭 짓지 못했다.
어둠 속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호위의 목덜미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렀다.
그의 입에서 짧은 단말마가 새어나왔다.
동시에 그는 바닥으로 맥없이 고꾸라졌다.
“뭐냐?”
“누구야?”
가마를 멘 교꾼들이 우왕좌왕하였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표창이 교꾼들의 가슴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컥.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교꾼들이 나동그라지고, 그들이 메고 있던 가마 역시 바닥으로 덜커덩 주저앉았다.
“뭐여? 뭐가 이래 쉬워?”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 뒤에서 흐느적거리며 거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기대했던 싸움이 허무하게 끝나자, 김이 샌 듯 그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허리춤에 들린 낫을 들고 정수리를 긁적대던 그가 가마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뭐한대유?”
누런 이를 드러내며 거북, 박진봉이 소리쳤다.
“그만 나와유.”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에 떠밀려 안에서 한 여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복색에 검은 너울을 드리운 여인.
그녀는 벼린 낫을 들고 있는 박진봉을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당하다 못해 위엄 넘치는 모습.
살려달라 애원할 줄 알았건만…….
기대와는 많이 다른 모습에 영 재미가 없어진 박진봉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말했다.
“아시쥬? 그짝한테는 별 감정 없어유.”
“그럼 이러는 이유가 뭐냐?”
“뭐긴 뭐유? 나는 그저 명령을 받은 대로…….”
대답을 하던 거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상하네유…….”
거북이 무람없이 검은 너울을 잡아챘다.
부욱,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너울 뒤에 숨어 있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여?”
언제나 능글능글 웃음이 걸려 있던 박진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짝이 왜 여기 있슈?”
순박함을 가장한 박진봉의 눈동자에 한 여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분명 만사여의의 가마를 뒤쫓았건만.
가마 안에서 나온 여인은 이레가 아니었다.
사슴이 박진봉을 향해 예의 초승달 모양의 예쁜 눈웃음을 보였다.
“왜? 따로 찾는 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