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사랑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왕의 선왕, 선왕의 선왕에게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으니.
왕가의 혈통만이 만날 수 있는 서탁이 있다 하였다.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그 서탁과 마주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
오래된 옛노래처럼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왕가의 비밀.
그저 삶이 지루한 누군가 만들어낸 허황한 이야기가 생각하였다.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 있느냐?
서탁 위로 떠오른 글씨를 보며 왕은 흐릿한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꿈인가?
내가 아직 미몽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눈앞의 현실을 왕은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정신을 한데로 모은 그는 곁에 있는 형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마주한 선명한 세손의 검은 눈동자.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젊은 동궁의 육신은 꿈의 한 자락이라 보기엔 너무도 또렷하였다.
“이 무슨…… 조화더냐?”
왕이 떨리는 음성으로 형운에게 물었다.
그러나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왕은 알고 있었다.
그저 왕가에서만 전해지는 옛이야기라 생각했던 왕의 서탁.
그것과 마주하고 있음을…….
결단코 믿지 않았던 왕실의 비밀이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왕은 떨리는 손끝으로 서탁의 낡은 모서리를 더듬었다.
“왜…… 내겐…….”
어째서 나에겐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냐.
아주 잠깐, 왕의 마음에 원망이 깃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귀가 붉어졌다.
-은백, 거기 있느냐?
은백이라는 이의 안부를 물어오는 글씨.
그것은…… 아들의 것이었다.
“그분이십니다.”
“허나,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아이가 아니냐?”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서탁에 계시는 분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어느 시절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인지. 하지만 이미 떠나신 그분도 이곳에 계십니다. 이렇게 야무가 넘실대는 날이면 젊은 시절의 그분께서 가끔 이곳을 찾아오시곤 하십니다.”
“그럴 수가…… 그럴 수가…….”
형운의 설명이 왕에게 남아 있는 한 톨의 의혹마저도 날려버렸다.
“서탁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름도,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그 어떤 이야기도 전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형운은 들고 있던 붓을 왕에게 건넸다.
“할바마마…….”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면 이곳에 하십시오.
혹여나 그분께 전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
왕은 말없이 형운이 건넨 붓을 받았다.
무슨 이야길 써야 하나…….
망설이던 왕은 떨리는 손으로 붓을 움직였다.
-나는…….
새하얀 종이 위로 한 획, 한 획, 떨리는 마음을 담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사라지지 않았다.
동궁의 붓끝에서 떨어진 먹물 한 방울조차도 집어삼키던 서탁이, 왕의 글씨는 못 본 척했다.
-세자…….
애절한 부름.
-선아…….
다시 부르지만, 여전히 종이에 머문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나는…… 내겐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서탁의 냉정한 외면이 왕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괴괴해진 눈을 감았다.
지나온 삶의 순간들이 편린처럼 떠올랐다.
언제나 가시덤불을 밟고 서 있는 듯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던 인생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곳곳에 그를 훔쳐보는 눈이 있었더랬다.
서늘한 칼날이 언제 목 밑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조마조마한 생이었다.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움켜쥐었다.
왕의 권좌, 그 높고 고독한 자리를…….
때론 독하게, 때론 치열하게 견뎌냈다.
그렇게 지킨 왕의 자리였건만.
남은 것은 그의 손으로 베어낸 수많은 목숨들이 내지르는 절규와 아우성뿐이었다.
그 비릿한 아우성 속엔 혈육의 것도 섞여 있었다.
죄인이로다.
내가 죄인이로다.
그러니 내게는 허락지 않는 것일 터.
절망하는 왕의 손을 형운이 잡았다.
“할바마마.”
왕은 눈을 뜨고 세손을 바라보았다.
자책으로 물든 왕의 눈동자를 세손의 따뜻한 시선이 어루만졌다.
“다시 한 번…… 해 보십시오.”
애처로운 이름이 쓰인 종이를 서탁에서 내린 형운이 깨끗한 종이를 올렸다.
한 손엔 동궁의 손을 잡은 왕이 다시 서탁 위로 붓을 움직였다.
-나는…….
왕의 글씨가 내려앉았다.
순간, 내내 매정했던 서탁이 반응했다.
종이 위의 글씨가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여러 갈래로 흩어진 먹물은 서탁의 나뭇결을 따라 스며들었다.
***
-새로운 귀인가?
사라진 글씨 대신 힘찬 물음이 돌아왔다.
-귀……?
-이곳에 새로 발을 들인 백귀로구나. 이런 은백인 줄 알았건만.
-섭섭한 것이냐?
-섭섭한 것이 무엇일까. 그저…… 안부가 궁금했을 뿐. 아니다. 되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살아생전, 그 패기 넘치던 모습 그대로구나.
왕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왕세자의 글이 떠올랐다.
-필체에 힘이 없구나.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먼 훗날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추억이 될 것이다.
-추억으로 곱씹기엔 참으로 아픈 삶이구나.
-아프다? 대관절 무슨 일이기에……?
-들어주겠느냐?
-어차피 밤은 길고, 이 밤을 함께 할 벗도 없으니. 어디 들어보자꾸나. 무슨 이야기냐?
왕세자의 물음.
왕은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간 하지 못했던 말을 서탁에 썼다.
-후회한다.
-무얼?
-내 아이를 외롭게 했던 나를 후회한다.
백일도 안된 어린 것을 어미의 품에서 떼어내 커다란 전각에 홀로 지내게 하였다.
장차 왕이 될 아이이니.
외로움 따윈 견디라 하였다.
아직 말도 못하는 어린 것을…… 홀로 울게 하였다.
-내 아들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했던 나를 후회한다.
-…….
-잘하였다, 칭찬 한마디 하질 못했던 나를…… 늘 질책만 하던 나를 후회한다.
언제부터인가, 아비의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던 세자를 떠올렸다.
총명하고 기세 당당하여 늙은 대신들조차 주눅 들게 했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언제나 힐난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심을 말하면 진실하다 꾸지람하였고, 거짓을 고하면 정직하지 못하다며 비난했다.
아들의 마음이 시름시름 병들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고개 돌렸다.
-끝끝내 내 아들을 외면했던 나를 후회한다. 한 나라의 세자이거늘, 지켜주지 못할망정 벼랑 끝까지 내몰았던 나를 후회한다.
왕의 붓끝에 뒤늦은 후회와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처절한 외로움과 고독의 근원.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의 정체가 사무친 그리움인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노라.
-그리하지 마라.
절절한 아픔을 위로하는 한 마디가 서탁으로 떠올랐다.
-본디 아비란 그런 존재인 것을, 그대의 아들이 그런 아비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정말 그 아이가 알았을까?
-알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한다면 나를…… 용서해 줄까?
-허허허, 어찌 아들이 아비를 용서한단 말인가. 자신에게 피와 살을 나눠준 것이 아비인 것을. 자신의 생(生)을 잘라 그 자식에게 나눠준 것이 부모인 것을. 세상 그 어느 자식이 감히 부모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인가. 그저 따르는 것. 그것이 자식의 도리인 것을…….
-허나…… 용서받고 싶다. 용서를 빌고 싶구나.
왕의 글씨가 다시 서탁을 메웠다.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무어라?
되묻는 글씨에 털털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무슨 소린 줄 모르겠구나. 어쩌자고 내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냐?
세자의 물음에 왕은 대답할 수 없었다.
네가 그 아들이노라.
내가 너의 아비이노라.
밝힐 수 없었다.
고요한 죄책감이 서탁을 가득 채웠다.
그 적막을 깬 것은 세자였다.
-용서하지.
-정녕……?
-그대의 필체에 서린 간절함이 내게 전해지니. 이렇게라도 하여 그대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용서하겠다.
투명하도록 선명한 마음이었다.
부끄럽도록 호탕한 선함이었다.
그 마음을 왜 미처 알지 못했을까.
-고맙구나.
왕의 글씨와 함께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이 서탁의 나무결 사이로 사라졌다.
-참으로 행복하겠군.
-행복? 누가 행복하단 말이냐?
-그대의 아들 말이다.
-…….
-그대와 같은 아비를 두었으니, 참으로 복된 인생이겠구나.
서탁으로 전해지는 세자의 글씨에 외로움이 가득했다.
왕의 목 끝까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서탁의 글씨를 움켜쥐듯 왕은 손을 뻗었다.
“선아……!”
공허하고도 헛헛한 부름이 애처롭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마치 답이라도 하듯 서탁 위로 글씨가 차올랐다.
-참으로 부럽구나, 그대의 아들이.
웅혼했던 세자의 필체에 아련한 그리움이 들어찼다.
그러나 그 그리움은 처음의 그것보다 눈에 띄게 흐릿해졌다.
어느 사이, 방안에 가득했던 야무가 물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음을…… 서탁의 조화가 이제는 끝나고 있음을 왕은 직감하였다.
왕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었다.
그는 서둘러 붓을 움직였다.
정녕코 하고 싶었던 한 마디.
살아있던 아들에겐 끝끝내 하지 못했던 한 마디.
-사랑한다.
서탁 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흘렀다.
얼마 후.
왕세자의 글씨가 떠올랐다.
-사내가 남세스럽군. 그러나…….
-…….
-내 그대의 아들에게 전하겠소.
-…….
-지금의 그 마음, 그 진심…… 기억하겠소.
-…….
-대신 그대도 내 아버지께 전해 주시겠소?
-무슨……?
갑작스러운 부탁.
왕의 눈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들어찼다.
이윽고.
살아서는 알지 못했던 한 사내의 마음이 서탁 위로 떠올랐다.
-원망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니, 평안하옵소서. 부디…….
매듭짓지 못한 말이 밤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뒤늦게 알아차린 마음이 밤 안개와 함께 물러갔다.
-선아! 내 아들 선아!
왕의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을 부르는 그의 붓끝이 서럽게 떨렸다.
늙은 왕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
새벽의 푸른 휘장 속으로 밤이 허리를 숙이고 스며들었다.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는 시각.
처소로 돌아온 왕의 표정은 전에 없이 편안했다.
무언가,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모두 털어낸 듯 후련한 모습의 왕은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
“전하께선 아직도 주무시옵니까?”
저녁 무렵, 왕의 침소를 찾은 이레는 형운과 마주했다.
그는 가벼운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간 곤하셨는가 보오.”
왕은 마치 갓난아기처럼 깊은 단잠에 빠져있었다.
“오늘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지난밤부터 내내 왕의 곁을 지키는 형운이 걱정되어 이레가 말했다.
하지만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킬 것이니, 빈궁은 돌아가 쉬시오.”
“그렇지만…….”
말을 하려는 찰나.
잠든 왕의 입가에 불현듯 미소가 떠올랐다.
“할바마마께서 좋은 꿈을 꾸시는가 봅니다.”
“그런가 보오.”
“무슨 꿈을 꾸시기에 저리 웃으시는 걸까요?”
“글쎄…….”
형운과 이레는 조용히 앉아 잠든 왕을 응시하였다.
언제나 사나웠던 왕의 꿈결에 누가 찾아온 것일까?
어느 뉘가 저분을 저리 웃게 하는 것이려나?
*
“아바마마…….”
후두둑.
겨울의 끝자락을 알리는 빗방울이 대전의 지붕을 사납게 두드렸다.
흠뻑 물기 먹은 공기와 함께 울먹이는 음성도 들려왔다.
“아바마마, 잘못하였습니다.”
올해로 네 살이 된 왕세자는 아직 여물지 못한 음성으로 아비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딴에는 열심히 참고 있었으나…….
크고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그득했다.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오물 씹는 모양새로 보아, 울음보를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그런 왕세자를 향해 왕은 엄한 목소리를 냈다.
“이놈, 뚝 그치지 못할까?”
“아바마마…….”
“한 나라의 세자가 어디서 눈물을 보이려느냐?”
어린 세자는 서둘러 눈가를 문질렀다.
“우는 거 아니옵니다. 빗물이 묻은 것이옵니다.”
애써 물기를 지우는 세자의 모습은 앙증맞기 이를 데 없었다.
여느 때라면 그만하고 이리 오너라, 손짓했을 왕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이른 새벽.
전각에서 사라진 세자를 찾느라 온 궁궐이 발칵 뒤집혔던 까닭이다.
“어딜 다녀왔느냐?”
왕의 물음에 세자가 흡, 숨을 들이마셨다.
눈가의 물기는 지웠으나, 목까지 차오른 울음기를 미처 지우지 못했다.
후, 내뱉는 숨결로 울먹임을 감춘 어린 아들은 아비의 하문에 답했다.
“후원엘 다녀왔습니다.”
“후원에? 종일 말이냐?”
“네.”
“거긴 왜?”
“…….”
“어찌 대답을 못 하느냐?”
“그게…….”
“이놈, 공부하기 싫어 꾀를 낸 것이렷다?”
“아닙니다.”
“허면?”
“그냥…….”
다시 우물거리는 세자를 향해 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허!”
아비의 음성이 높아지자, 서둘러 답이 들려왔다.
“돌이요.”
“돌?”
난데없는 답에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돌을 주웠습니다.”
세자는 소맷자락에 가득 품고 있던 것을 꺼내놓았다.
와르르르, 작은 조약돌들이 왕의 앞에 흩어졌다.
“이게 다 무엇이냐?”
“작은 돌을 데워 가슴에 품고 있으면 춥질 않다고 하여서요.”
“무어라?”
“상선이 아바마마 감모 드셨다고 귀띔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돌로 아바마마 따뜻하게 해드리려고…….”
“무어라? 이 아비 감모 때문에 종일 후원을 헤맸단 것이냐? 이리 비가 오는데?”
겨울이 끝났다고 하지만, 봄의 초입은 여전히 매서웠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날이라.
시린 기운이 곱절은 더하였다.
그런 날에 아비의 건강을 걱정한 어린 것이 후원의 산길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그 기특한 마음에 왕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가가 붉어지는 아비를 보자 어린 아들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잘못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못한 공부만큼 내일 더 할게요……흐윽.”
“이놈!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하라 하였느냐.”
괜스레 목청을 돋웠으나, 왕은 어린 아들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들.
이 귀한 것을 얻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왕은 제 품을 비집고 들어온 어린 것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제야 붉게 얼어붙은 고사리손이 아비의 목을 감았다.
차가운 냉기가 아비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우리 세자가 아비를 이리 걱정하는 줄 몰랐느니. 허나…….”
토닥토닥, 아들의 등을 다독이며 왕은 타일렀다.
“다음부턴 이러지 마라.”
네, 따르겠나이다.
고분고분 대답할 줄 알았건만.
어쩐 일인지 세자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습니다.”
“무어라?”
“아바마마 아프시면 또 이럴 겁니다.”
“…….”
“그러니 아바마마, 아프지 마십시오.”
더더욱 깊게 왕의 품을 파고들며 세자가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는 소자의 인즉천(人卽天)이십니다.”
어린 것의 엉뚱한 말에 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무어라? 인즉천? 네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왕의 물음에 세자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에 스승님께 배웠습니다. 인즉천, 하늘만큼 귀한 것이 사람이랬습니다.”
“오호, 그래?”
“아바마마는 소자의 하늘이시니. 인즉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냐, 오냐.”
이 예쁜 것.
이 사랑스러운 것.
세자를 끌어안는 왕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세자.”
“네, 아바마마.”
“비밀 한 가지 알려주랴?”
왕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무엇이옵니까?”
덩달아 소곤거리는 어린 세자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통통한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며 왕이 속삭였다.
“내 하늘은 너이니라.”
“정말이십니까?”
귀한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 눈에 환희가 떠올랐다.
이윽고.
화답하듯 세자가 왕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아바마마, 그거 아십니까?”
“무얼?”
“소자는 세상에서 아바마마가 제일 좋습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왕의 얼굴에 꽃처럼 피어났다.
“아바마마.”
“오냐.”
“아바마마.”
“그래.”
삐약삐약, 어린 병아리처럼 아들은 연신 아비를 불렀다.
하늘의 태양을 끌어안은 듯 왕의 가슴은 뜨겁고 그득했다.
듣고 또 들어도 기분 좋은 부름.
아바마마…….
아바마마…….
아바마마…….
*
“할바마마…….”
단잠에 깨어난 왕의 눈동자에 형운의 모습이 맺혔다.
사위는 칡꽃처럼 어두웠다.
“밤이더냐?”
바싹 마른 목소리가 형운을 향했다.
“새벽이옵니다.”
“내가 또 얼마나 잤더냐?”
“꼬박 사흘을 주무셨사옵니다.”
“그랬구나.”
언제부터인가,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든 시간이 길어졌다.
어느 날은 하루, 또 어느 날은 이틀을…… 그리고 이렇게 사흘을 내리 잠을 자는 날이 잦아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왕은 곁을 지키고 앉은 형운에게 물었다.
“내가 잠든 동안 내내 여기 있었느냐?”
답은 없었다.
왕이 잠든 사흘 내내 여기 있었다는 침묵이었다.
“우직한 것은 아비를 고스란히 닮았구나.”
“…….”
또다시 이어진 침묵을 깨며 왕이 말했다.
“세손.”
“네, 할바마마.”
“사람이 하늘임을 아느냐?”
“…….”
“나는 너무 넓은 세상을 꿈꾸었다. 먼 곳에 있는 하늘을 살피느라 정작 내 머리 위에 있던 하늘은 잊고 살아왔다.”
“…….”
“너는 나와 같은 실수 하지 마라.”
자조 섞인 왕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와 같은 후회를 반복해선 아니 된다.”
조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절대 그 손 놓아선 아니 될 것이다.”
“네, 할바마마.”
“너는 네 하늘을 잃지 마라.”
“그리하겠나이다.”
“그럼 이제 나가보거라.”
“하오나…….”
형운이 고집을 부리자 왕이 고개를 돌렸다.
왕의 시선을 따라 동궁의 눈길도 움직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시선이 멈춘 곳은 굳게 닫힌 처소의 방문이었다.
촛불에 비친 단아한 그림자가 문풍지 위로 어룽거렸다.
형운이 왕의 곁을 지키는 동안, 이레 역시 그곳에 있었다.
“저기에 네 하늘이 있잖으냐.”
그러니 가거라.
나는 이젠 되었으니…… 너는 네 사람에게로 가거라.
왕은 머뭇거리는 손자의 등을 떠밀었다.
소리 없는 축객령에 형운이 왕의 처소를 나섰다.
처소 문풍지 위로 나란히 마주 선 형운과 이레의 그림자가 보였다.
왕은 다시 누웠다.
사흘 밤낮을 잤건만,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바마마…….’
그리운 목소리가 왕을 이끌었다.
‘소자는 아바마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습니다.’
순간, 왕은 깨달았다.
이것이 질곡으로 가득했던 생의 마지막 꿈이라는 것을…….
왕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맺혔다.
“나도…… 네가 좋구나. 아비도…… 너를…….”
사랑한다.
왕은 아득한 나락으로 가뿐가뿐 걸음을 옮겼다.
물 좋고 산세 좋은 곳으로 소풍을 나선 듯…….
나풀나풀, 하얀 봄 나비처럼…….
***
병신년 3월 5일, 묘시(卯時 : 새벽 6시).
왕께서 경희궁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니, 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