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98화 (198/215)

#198. 무슨 말이 하고픈 게냐?

쿵!

정수리 위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왕은 소스라쳐 눈을 떴다.

오랜 병으로 맑은 총기 사라진 누런 눈동자로 빙그르르 주위를 살폈다.

밤의 고비를 넘긴 시각.

먹빛의 어둠을 밝힌 등잔불이 힘겹게 일렁거렸다.

왕의 발치에는 무릎을 꿇고 앉은 어의가 머리통을 좌우로 위태롭게 흔들며 졸고 있었다.

향 단지에서 피워올린 연기 때문인지.

그것이 아니면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노안 탓인지.

보이는 모든 것이 흐릿하였다.

비록 눈은 제구실을 못 했지만, 청력만은 여름 햇살처럼 쨍했다.

쿵!

증명이라도 하듯 왕의 귓가에 다시 그 서슬 퍼런 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고.

눈가를 찡그리는 그 모습에 어의가 화들짝 놀라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전하, 무에 필요하시옵니까?”

왕은 손을 들어 어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 무슨 소리더냐?”

어의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왕의 새된 음성을 듣고 상선이 달려왔다.

“전하, 어딜 가시려 하시옵니까?”

상선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왕을 부축했다.

“좀 전의 그 소리, 어디서 들려온 것이냐?”

왕이 다시 하문 하였다.

상선의 반응 역시 어의와 다를 바 없었다.

어리둥절한 그의 시선이 어의에게로 향했다.

‘무슨 소리 들었는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소이다.’

소리 없는 문답이 오갔다.

“전하, 꿈을 꾸신 듯하옵니다.”

상선이 왕의 눈치를 살피며 아뢰었다.

“꿈……?”

꿈이라기엔 너무도 선명한 소리였다.

그러나 상선과 어의의 표정을 보니, 거짓을 고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녕 꿈을 꾼 것인가?

의문을 품을 찰나.

쿵! 쿵!

사납고 둔중한 소리가 연이어 왕의 고막을 찢어발겼다.

머리 위로 곧장 천둥이 내리꽂히는 듯한 소리였다.

“이 소리, 정녕 너희는 이 소리가 안 들리느냐?”

양쪽 귀를 틀어막으며 왕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궁인들의 표정은 얼떨떨하기만 하였다.

“이 괘씸한 것들을 보았나. 이리 큰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뚝 떼다니. 너희가 나를 바보로 만들려 작정하였구나.”

“하오나 전하…….”

왕은 상선의 말허리를 잘랐다.

“시끄럽다. 어찌 이 소릴 못 듣는다는 것이냐. 정녕 이 소리가 안 들린단 말이냐?”

그는 기어이 성화를 부리며 어깨를 부축하고 있는 상선을 밀쳐냈다.

“저리 비켜라.”

“전하.”

“방 안 공기는 왜 이리 더운 것이냐?”

이번에는 찌는 듯한 더위가 왕을 엄습했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알몸으로 서 있는 듯했다.

게다가 무쇠솥 안에 갇힌 듯 밀려드는 텁텁한 습함은 어찌할 것인가.

“덥다, 더워.”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고, 연신 손 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더위는 쉬이 가시질 않았다.

“전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물, 물을 다오. 목이 말라 죽을 것 같구나. 물, 물이 어딨느냐?”

입안이 타들어 가는 조갈증을 해소하려 왕은 물을 찾았다.

상선이 황급히 자리끼를 대령했다.

허겁지겁 냉수 한 사발을 마셨음에도 목마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처소의 문이란 문을 죄다 열었건만, 갑갑증과 더위 역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쿵, 쿵, 울려대는 소리도 여전했다.

“안 되겠다. 내가 여기 있다간 죽겠구나.”

왕은 황급히 벗었던 옷을 도로 입었다.

황망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선에게 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얼 그리 보고만 있느냐? 출궁해야겠다. 어서 차비를 하라.”

상선이 왕을 말렸다.

“밤이 깊었사옵니다. 날이 밝으면…….”

그러나 왕은 막무가내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장 이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정녕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냐?”

“전하, 그 어인 황망한 말씀이옵니까. 소인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그럼 어서 출궁 준비를 하라. 어서, 서둘러라. 어명이다.”

왕은 주저하는 상선을 재촉했다.

발작하듯 명을 내리는 왕의 모습에 상선은 종종걸음으로 처소를 나섰다. 안의 소란에 귀를 기울이던 대전의 궁인들은 허둥지둥 출궁 준비를 서둘렀다.

***

“이 무슨 소란이냐?”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형운은 우왕좌왕하는 대전의 광경을 보며 소리쳤다.

“동궁저하.”

울상을 한 상선이 한달음에 형운의 앞으로 달려왔다.

“주상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지금 처소에 계시…….”

상선의 말이 채 끝나기 전.

왕의 처소 안에서 이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계십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형운을 비롯한 모든 궁인들의 시선이 이레에게로 집중되었다.

“빈궁, 그게 무슨 말이오?”

“전하께선 처소에 아니 계시옵니다.”

형운이 상선을 돌아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날카로운 추궁에 상선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환관들과 궁녀들 역시 고개를 좌우를 흔들었다.

난데없는 출궁 준비에 다들 반쯤은 정신이 나간 까닭이다.

“좀 전까지 분명 처소 안에 계시었사옵니다. 갑자기 덥다, 조갈이 난다 하시더니 출궁을 준비하라 하명하시었나이다. 소인들은 그 준비를 서두르느라 자리를 비웠사온데…….”

“그럼 그분을 홀로 계시게 하였단 말이냐?”

“어의, 어의는 어디에 간 게야?”

상선이 뒤늦게 어의를 찾았다.

“탕약을 준비하러 가셨사옵니다.”

문앞을 지키던 궁녀가 아뢰었다.

“그럼 아무도 주상전하께서 나가시는 걸 못 보았단 말이냐?”

형운이 목청을 돋웠다.

어디에서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일순, 형운의 눈에 푸른 불꽃이 일렁거렸다.

임금께 혹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주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자들을 향한 책망, 거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할아버지의 곁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이 더해져 분노라는 감정으로 뭉쳐졌다.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고 시린 분노가 상선을 매섭게 찔렀다.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보다 차고 시린 분노가 더욱 섬뜩하고 두렵다는 것을 상선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의 어깨가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움츠러든 목이 더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서릿발 같은 동궁의 눈씨에 작은 숨자락 한번 뱉지 못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한 공기가 대전을 뒤덮었다.

모두가 얼어붙은 채 형운의 눈치만 살피던 그때.

“저하.”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하도록 굳게 말아쥔 형운의 주먹을 따사로운 체온이 살포시 덮어왔다.

이레는 꽝꽝 얼어붙은 형운의 몸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듯 속삭였다.

“진정하옵소서.”

“하지만 할바마마께서 사라지셨소.”

“괜찮으실 겁니다.”

“…….”

“괜찮습니다.”

이레는 형운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을 가득 담았다.

행여 임금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려나…….

걱정하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재차 확신했다.

“저하, 괜찮습니다.”

“나는…….”

형운의 뇌리로 아버지를 잃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참담한 모습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아득함.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절망과 허망함을 다시 겪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그 무엇도 잃을 수 없었다.

아직은 그 어떤 것도 떠나 보낼 수 없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드러내지 않으려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껏 긴장한 그를 이레가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안달하지 마시어요.

그렇게 성화 내지 마십시오.

단단하고도 차분한 온기가 매섭게 얼어붙은 그의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얼음이 갈라지듯 얼어붙은 그의 마음에 균열이 일었다.

“정녕…… 괜찮겠소?”

다시 한 번 해답을 구하는 그에게 이레가 쐐기를 박았다.

“정녕코 괜찮을 겁니다.”

후, 다행이다.

비로소 숨통이 트인 형운은 낮게 숨을 뱉었다.

꼿꼿하게 세웠던 등골이 느슨해진 그는 이레의 어깨에 제 머리를 쿡 하고 묻었다.

“그대가 괜찮다고 하니, 괜찮을 터.”

“장담하지요.”

“하면, 어딜 가셨을까? 이 밤에 어딜 가신 것이려나?”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는 형운에게 이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분이 어디 계신지, 저하는 알고 계십니다.”

“내가?”

의외의 대답에 형운이 고개를 들어 이레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하라면 어딜 가고 싶으십니까?”

“……?”

“지금 저하께서 가고 싶은 그곳, 주상전하께선 분명 그곳에 계실 겁니다.”

***

밤새 울음이 들려왔다.

바람결에 바스스 부서지는 마른 가지 사이로 여린 싹이 빠끔히 머리를 보였다.

어느샌가 궁궐 후원엔 봄기운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 잃은 능허정만은 예외였다.

음울한 계절 한가운데 갇혀버린 듯 정자의 주위는 여전히 삭막하였다.

눅눅하게 내리덮은 어둠을 밟으며 형운은 능허정의 계단을 올랐다.

비님이라도 오려는지.

하늘엔 먹장구름이 가득했다.

땅도, 하늘도 어두우니, 능허정 안은 더더욱 어둠이 짙었다.

어둡고 삭막한 정자 안으로 들어선 그는 조족등을 내려놓았다.

이내 그는 큰 걸음으로 정자를 가로 질렀다.

한밤중에 처소에서 자취를 감춘 주상전하.

그분이 가신 곳을 몰라 걱정하는 그에게 이레가 말했다.

주상전하가 계신 곳을 아는 이, 형운뿐이라고.

오직 동궁만이 그분의 행선지를 알 수 있다고.

그리고 그녀가 옳았다.

능허정.

돌아가신 왕세자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후원의 작은 정자.

눅진한 어둠과 쓸쓸한 바람만이 지키는 낡은 정자 한구석.

그 좁고 차가운 곳에 왕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지상에 존재하는 선인의 세상이라는 이 아름답고 화려한 궁궐의 주인께서 정작 자리한 곳은 궁 안에서 가장 초라하고 외로운 장소였다.

“할바마마.”

형운은 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잠깐.

왕의 시선이 형운을 향했다.

그러나 이내 어둠으로 공허한 눈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형운은 왕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나란히 앉은 조손(祖孫)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먹장구름이 바람에 밀려 정자 지붕 위에 다다를 때까지 침묵은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임금이었다.

“여기였다.”

형운은 노쇠한 왕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왕은 말을 이었다.

“여기서 그 아이에게 활쏘기를 가르쳤지.”

왕은 이제는 죽고 없는 아들을 떠올렸다.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일만 하던 아들.

아비를 거스르고 기어코 죽음을 선택한 괘씸한 왕세자.

하지만…….

지금 왕의 머릿속에 떠오른 왕세자는 가장 사랑스럽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어둠을 바라보는 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들 타고난 신궁이라 하였다.”

“…….”

“어린 것이 어찌나 힘이 좋던지. 어지간한 어른도 당지 못한 시위를 당겨 다들 얼마나 놀랐던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검술을 다루는 솜씨는 또 얼마나 능숙하던지.”

“…….”

“어지간한 무관 서넛은 한 손으로 제압하였지.”

“그분의 뛰어난 검술 실력은 소손도 알고 있사옵니다.”

“어디 무예만 뛰어났을까. 네 살도 안 되어 천자문을 떼었지.”

“신동 중의 신동이라. 소학이며 중요, 대학……. 그 총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왕실이 열린 이래로 가장 뛰어나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느니.”

왕은 잠시 말을 끊었다.

낮게 숨을 몰아쉰 그는 내내 입안에 머물던 말을 밖으로 뱉었다.

“……자랑스러웠다.”

“할바마마…….”

“내가 그 아이의 아비라는 사실에 절로 웃음이 나곤 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그리하셨습니까?

살아 계실 땐 왜 그리 못마땅해 하시었나이까.

왜 그리 질책만 하시었사옵니까.

어째서 그분의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주질 않으셨습니까.

온몸에 가득한 원망을 형운은 속으로 삼켰다.

삭인 말 대신 낮은 한숨을 잇새로 조용히 내쉬노라니, 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처럼 살지 않길 원했다.

“…….”

“나 같은 왕이 되질 않길 바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택군.”

“…….”

“신하가 선택한 왕.”

왕의 음성이 갈라졌다.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치부.

왕의 유일한 약점이자 곪을 대로 곪아버린 상처.

그 역린을 스스로 입 밖으로 꺼냈다.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한 반쪽짜리 임금, 그게 나였다.”

“…….”

“내 형님께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나는 동궁이 되었다. 그분이 갑자기 승하하시고 난 뒤 내가 보위를 이어받았지. 허나, 말이 좋아 임금이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노력했다. 탕탕평평을 목표로 열심히 공평한 세상을 만들려 노력했다.”

“…….”

“허나, 나는 비천한 무수리의 핏줄이었느니. 또한, 왕이 되기 위해 내 형님을 죽였다는 오해에 일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왕의 성음에 부르르 울림이 서렸다.

“만인지상 일인지하라. 권력의 정점에 존재하는 이가 왕이라 하였는고. 웃기는 소리. 이 나라는 선비의 나라다. 사대부가 조선의 진짜 주인이지. 왕은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면 그만이다. 특히 나같이 반쪽짜리는 더더욱…….”

“너도 보았을 것이다. 여전히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

“나는 오직 노론의 왕이었다. 선왕의 충신들은 아직도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은 내게 늘 죗값을 요구했느니.”

“…….”

“불안하였다. 단 한 번도 편히 잠을 자 본 적 없다. 꿈은 언제나 사나웠고, 현실은 더 치열하였지. 물 한 모금을 내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다. 어느 음식에 독이 있을지 알 수 없었느니라.”

“…….”

“그래서 네 아비만큼은…… 그 아이만큼은 완벽한 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

“내가 누리지 못했던 떳떳한 왕의 권좌. 정통성과 명분을 고루 갖춘 위대한 성군이 되길 기대했다.”

“…….”

“그러자면 저들보다 똑똑해야 했고, 저들의 능수능란한 술수에 빠르게 대처해야 했으며,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아니 되었다. 그래서…… 늘 그 아이에겐 꾸지람만 했더구나.”

“…….”

“어리석다 하였고, 잘못되었다고 질책하고, 비난했지. 내게 반기를 드는 대신들을 위협하려 그 어린 것을 앞세울 때도 있었다.”

“…….”

“아느냐? 네 아비, 여섯 살 때부터 석고대죄하게 했다. 신하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그 어린 것에게 양위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 어린 것은 몇 날 며칠을 이유도 모른 채 빌고 또 빌었지.”

왕의 눈가에 진득한 물기가 고였다.

“내가……그렇게 했다. 나는…… 그런 아비였다.”

“자책마옵소서…….”

“내가…… 내가 네 아비에게 바란 건 그저…… 왕이 되는 것, 그뿐이었다.”

“…….”

“그런데…….”

살아있는 석상처럼 무심했던 왕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내 손으로…… 이 손으로 그 아일, 그 갑갑하고 좁은 미물 속에 가뒀다.”

왕은 덜덜 떨리는 양손을 들었다.

신료들이 한목소리로 왕세자를 비난했다.

왕세자의 비행을 질책하고, 그를 모함했다.

억울하다는 아들을 외면한 채 그저 신하들의 이야기에만 귀 기울였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빌지 않는 아들이 원망스러웠다.

아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왕세자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기어이 왕세자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처소에 무기가 산처럼 쌓였노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반역을 꾀하는 왕세자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전 마당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 궁궐 창고에서 뒤주를 가져왔다.

그 안에 왕세자를 가뒀다.

분을 참지 못하고 박차고 나오는 아들을 다시 붙잡아 가두고 직접 미물의 뚜껑에 못질하였다.

쿵! 쿵! 쿵!

한밤에 왕의 잠을 방해했던 굉음의 정체.

그것이 미물 안에 갇혔던 왕세자가 들었던 못질 소리라는 걸 이곳에 온 뒤에야 깨달았다.

미칠 듯한 더위가…….

찢어지는 듯한 갈증이…….

목을 조르는 갑갑증이…….

“내가 했다. 내가…… 그리 했다.”

어찌 그 고통을 견뎠을까?

어찌 참아냈을까?

어찌 마지막까지 감내하였을까?

아니, 육체적인 고통은 어찌어찌 참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렸을 것이다.

아비였으니까.

아들을 지키는 것이 아비의 당연한 도리였으니.

“기다렸겠지. 마지막까지 이 아비가 와 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으렷다…….”

그 우직한 아이는 그리 믿고도 남았을 터.

왕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울컥거리는 울음이 가슴을 꽉 막아 숨을 쉴 수 없었다.

“할바마마, 이러지 마옵소서. 자책 마옵소서. 아바마마께서도…… 아바마마께서도…… 이런 모습 원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후회한다……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왕의 눈가에 쉼 없이 눈물이 흘렀다.

“언제고 손내밀면 다시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왕의 슬픔에 형운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하늘이 낮아졌다.

툭 건들면 먹장구름에서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질 듯하였다.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구나.

그랬으면…….

소리 없이 삼키는 할바마마의 울음을 듣지 않아도 되련만.

형운은 먹장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훑었다.

이윽고 사방이 뚫린 정자 난간으로 안개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건…….”

야무(夜霧).

형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절망하는 왕을 돌아보았다.

“할바마마, 저와 함께 갈 곳이 있사옵니다.”

***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서탁의 조화는 원한다 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진즉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무가 몰려오는 밤에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한동안 만난 적 없지만…… 혹여 오늘 밤엔 만날 수 있지 않으려나.

일말의 희망을 품은 형운은 서탁 앞에 앉았다.

그의 곁에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왕이 있었다.

왕은 형운이 하는 모습은 그저 말없이 지켜보았다.

형운은 깨끗한 종이를 서탁 위에 깔고 붓에 먹을 묻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이야기가 전해지기는 할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툭.

형운의 붓끝에 맺혔던 먹물 한 방울이 서탁 위로 떨어졌다.

만개한 꽃처럼 종이 한복판에 검은 점이 찍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스슷.

사방으로 흩어진 검은 점은 금세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 기묘한 조화에 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대체…….”

왕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다.

-누구냐?

웅혼함이 느껴지는 거침없는 필체.

-은백이냐?

붓을 들고 있는 형운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사이 서탁에 그려진 글씨는 사라지고 다음 글이 떠올랐다.

-하는 짓을 보니 은백이로군.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질 않고. 무얼 망설이는 것이냐? 애먼 먹물 그만 떨어트리고 말해 봐라. 무슨 말이 하고픈 게냐?

장난기 가득한 지청구.

그 익숙한 필체의 주인은 분명……은룡이었다.

형운의 아비이자 왕의 아들.

쓸쓸한 밤 안개와 함께 그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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