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호신의 기법
밤이 걷히고, 푸른 새벽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정후겸이 떠난 이후, 내내 누각에 남아있던 사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각 계단으로 발자국을 떼는 그녀의 뒤로 거북이 따라 붙었다.
돌아보는 사슴에게 거북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왜유?”
“날 감시하는 게요?”
“당연하쥬.”
“내가 만사여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서……?”
“뭐, 사실은 말을 하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슈. 쬐께 귀찮긴 하겠지만만…….”
“그럼 이렇게 붙어 있는 이유가 뭐요?”
“굳이 이유를 들자면…… 핑계쥬, 핑계. 이런 핑계라도 없으면 나가 그짝 옆에 언제 이리 있어 보겠슈.”
박진봉을 향한 사슴의 미간에 잔주름이 그려졌다.
그의 눈에 들러붙은 진득한 욕망이 고스란히 전해진 까닭이다.
“나가 쩌번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박진봉이 사슴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거 아주 안 좋은 거유. 암만 싫어도 그렇지, 사람이 앞에 있는데 뭘 그렇게 싫은 태를 팍팍 낸대유?”
“싫은 줄 알면서 자꾸 내 앞에 서 있는 그대의 잘못은 생각해 본 적 없는 게유?”
“내 맴이쥬.”
“뭐라?”
“그짝이 날 싫어하는 것처럼, 나가 그짝 좋아하는 것도, 그짝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도 다 내 맴이쥬. 그러니께 신경쓰지 말아유.”
능글맞게 웃는 박진봉을 향해 사슴이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뭐유, 나한테 궁금한 것도 있었슈?”
“십학사엔 왜 들어온 게요?”
“왜긴 왜유. 사람처럼 살게 해준다니께, 들어온 거쥬.”
“사람처럼이라…….”
거북의 말을 되새김하는 사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사람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 기껏 사람 잡는 백정 노릇이나 하는군.”
“그런거쥬, 뭐. 이렇게도 흘러가고, 저렇게도 떠밀리는 게 사람 사는 세상 아녀유.”
“제 생각 없이 남이 하라는 대로 사는 것이 어찌 사람 사는 세상이겠소. 그건 미물이나 다름없지. 그러다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정녕 모르오? 기껏 발 디딘 곳이 진흙탕이 될 수도 있소.”
사슴의 말에 거북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참, 별나네유.”
“무엇이?”
“그짝도 나처럼 살았잖유.”
“그랬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워떻게 이렇게 얼굴을 싹 바꾼대유?”
“사람답게 사는 게 어떤 건 줄 알아버려서…….”
거북은 허리춤에 있던 낫으로 정수리를 긁적였다.
“뭔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한대유? 그러니께 그짝은 나한테 사람 죽이지 마라, 그 말 하려는 거잖유?”
“그리할 수 있다면…….”
“에이, 그건 아니쥬. 지금이 어떤 상황이래유. 바짝 독이 올라 서로 싸우는 중인데, 나가 이 낫을 탁 놔버리면 지는 거잖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오.”
“그거야 만날 지는 놈들이 만들어낸 말이고. 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똥개도 비단옷 입는 세상이잖유.”
“…….”
“두고 봐유. 나가 꼭 비단옷 입고 금침 덮고 살라니까. 그땐 나를 보는 그짝 눈깔도 달라질 거유.”
“비단옷에 금침 덮는다고 해도 똥개는 똥개일 뿐.”
“뭐유?”
“그리고 한 가지, 지금 상대하는 사람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어야 할게요.”
낮게 경고하는 사슴에게 거북이 이죽거렸다.
“어이쿠, 그래유? 그런데 그거 알아유?”
벼린 낫을 쓰윽, 사슴의 턱밑으로 들이대며 거북이 말했다.
“지키려는 놈하고, 그냥 미친놈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 거 같아유?”
“…….”
“미친놈이 이겨유.”
“…….”
“그런데…… 나가 그 미친놈이유.”
히죽, 불길한 미소를 지은 박진봉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께 그짝은 암것도 하지 말아유. 괜히 지랄 발광하다 고운 면상에 흉이라도 지면 워쩐대유.”
날카로운 거북의 낫 끝이 사슴의 하얀 얼굴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명백한 위협.
사나운 겁박에 사슴은 잠시간 굳어버렸다.
경직된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던 박진봉이 누각을 내려갔다.
건들거리며 기루의 대문 밖으로 나간 그는 사슴을 향해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러곤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길 끝으로 궁궐의 높은 담벼락이 자리하고 있었다.
***
밤이 어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방안 깊숙하게 스며들어 그림자를 만들었다.
서탁 앞에 앉아 서책을 들여다보던 이레는 고개를 들었다.
“저하께선 아직 기별이 없으신가?”
반 시진 전에 물었던 질문이었다.
문 앞을 지키던 정 상궁이 반 시진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직 소식이 없사옵니다.”
“그렇구먼.”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이레는 다시 고개를 내려 서책에 집중했다.
그러나 형운에 대한 생각으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왜 아직도 동궁께서 돌아오지 않으실까?
궁금증만 늘어날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하께선…….”
서책 한 장을 겨우 읽은 이레가 다시 물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은 들려왔다.
“아직이옵니다, 빈궁마마.”
“그래, 그렇구먼.”
이레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보다 못한 정 상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그곳으로 가시어 좋아하시는 문서라도 살피옵소서.”
그곳이라면 은자원을 뜻하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가짜 세자빈 노릇에 울상을 짓던 금정마저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네네, 빈궁마마. 여긴 소인이 잘 지키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마음 푹 놓으시고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등 떠밀리듯 이레는 궁인의 복색을 하고 빈궁전을 나섰다.
저녁이 가까워진 시각.
궁궐을 지키는 군졸들과 번을 서는 궁인들이 서로 위치를 바꾸며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부산한 틈바구니를 이용하여 이레는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은자원에 다다랐다.
은자원의 대문을 열자 특유의 묵향과 먼지 냄새, 그리고 겹겹이 쌓인 세월의 향기가 느껴졌다.
순간, 온종일 이상스레 불안하던 마음이 한풀 가라앉았다.
빛을 가리기 위해 내려진 덧창.
책상마다 어지럽게 늘어진 문서들.
이미 정리를 끝낸 문서와 아직 처리하지 못한 문서들이 분류된 책장.
이레는 은자원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럴 때마다 새록새록 추억이 되살아났다.
흐릿한 등잔 밑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던 형운의 모습.
제대로 된 인사 한 번 없었지만, 꼭 필요한 말은 무뚝뚝할지언정 그녀에게 전했던 그를 떠올리니 풋하고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무너진 책장 아래에서 그와 마주했던 숨결을 떠올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던 형운이 지금이라도 저 책장 뒤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니, 이대로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레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머리 위,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서책을 꺼내려 애쓰던 그때처럼.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를 대신하여 서책을 꺼내주었던 그 순간처럼.
종일 형운만을 기다리는 그녀의 눈앞에 그가 나타나 주길 염원하였다.
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겠지.”
이레는 자신의 헛된 상상에 마른 웃음을 흘렸다.
찰나.
책장을 향해 서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등 뒤로 성큼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설마……?”
놀라고 기대하는 그녀의 귓가로 낮고 굵은 음성이 헤집고 들어왔다.
“이곳에 계셨군요.”
기다리던 형운이 아니었다.
이레의 눈동자에 굳은 표정의 장무열이 박혔다.
“장 집의가 여긴 어쩐 일로……?”
이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장무열은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왜…… 이러십니까?”
답은 없었다.
대신 그의 커다란 손이 와락 이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악력에 숨통이 막혔다.
또한,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장 집의, 내게 왜 이러는 겁니까?
***
묵직한 두려움이 이레를 짓눌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무열의 무심한 눈길과 제 목을 압박하는 감각에 이레는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놀란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숨통이 막힌 탓인지, 아찔한 어지럼증마저 느껴졌다.
찰나.
“상대가 이리 목을 잡으면 한쪽 팔을 드셔야 합니다.”
장무열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따라 이레는 손을 들었다.
“이제 손을 든 반대편으로 몸을 비트십시오.”
장무열이 이르는 대로 따라 하니, 안간힘을 쓰며 밀쳐낼 때와는 달리 수월하게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갑,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겨우 풀려난 이레가 장무열에게 따졌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릴랑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장무열은 묵묵히 제 할 말만 했다.
“자,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마마의 목을 이리 잡으면 팔을 들고 몸을 반대편으로 비트세요. 이때 상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질 겁니다. 그 순간, 팔꿈치로 힘껏, 퍽 소리가 나도록 치는 겁니다.”
“장 집의…….”
갑작스럽게 나타나, 호신의 무예를 가르치는 장무열을 이레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장무열은 다음 호신법을 알려주었다.
“또 누군가 마마의 팔목을 허락 없이 잡고 끌고 가려 할 땐, 팔목을 잡고 있는 상대의 엄지 방향으로 손목을 틀어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의 모습.
이레는 저도 모르게 장무열이 가르치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말입니까?”
“네. 잘하셨습니다.”
“또 하나, 누군가 등 뒤에서 마마를 끌어안는다면…….”
“안는다면?”
“팔꿈치로 상대의 명치를 힘껏 치고, 살짝 무릎을 굽혀 상대에게서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런 다음, 머리로 상대의 얼굴을 들이박아 버리세요. 적어도 코뼈 정도는 부술 수 있을 겁니다. 다음은…….”
“잠시만, 장 집의. 잠시 기다리세요.”
애초 호신의 기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한 건 이레였다.
하지만 정작 장무열이 알려준 건 기마자세를 취하는 것뿐이었다.
이레를 비롯하여 궁녀들을 가르치는 일에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던 장무열이 갑자기 쫓기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무심하다 생각했던 그의 눈동자에 연유 모를 불안함도 보였다.
“장 집의,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이레의 물음에 장무열은 침묵했다.
침묵은 짧았다.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가 이레에게 말했다.
“빈궁마마께선 왜 그리하셨습니까?”
“네?”
“수월의 화재, 빈궁께서 계획하신 일입니까?”
“…….”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화재 현장마다 불에 탄 쥐들이 나왔습니다.”
“쥐가 나온 것이 특별한 일입니까? 배고픈 쥐들이야 어느 곳에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화재 현장에 쥐가 나온 것이 무에 특별하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꼬리만 탄 쥐들이 여럿 발견되었습니다.”
“…….”
“누군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수월에 풀어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랬군요.”
전혀 알지 못한 이야기인 듯 이레는 시침을 뗐다.
“처음에는 수월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의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곤 수월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더군요.”
“그래서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확신하고 있습니다.”
“…….”
“제가 알아차릴 정도면, 저들 역시 곧 알아차릴 것이지요.”
“그래서 갑자기 나타나 그런 호신법들을 가르쳐 준 겁니까?”
“제가 먼저 여쭈었습니다. 왜 그리하신 겁니까?”
“사헌부의 집의로 묻는 겁니까?”
장무열은 잠시간 입을 닫았다.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은자원의 은호가 동료 은랑에게 묻는 겁니다.”
이레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은호가 묻는다면 기꺼이 대답하겠습니다.”
“…….”
“네, 제가 꾸민 일입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제 사방에서 은랑을 노리는 적들이 나타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왜 그런 무모한 일을…….”
“하나를 잃어 네 가지를 얻을 수 있다면 은호는 어찌할 겁니까?”
“네?”
“첫 번째는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성공하셨습니다. 지금 장안에 온통 수월 이야기뿐이니…….”
“두 번째는 동궁저하를 위협하는 자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목적은 이루셨군요.”
정후겸의 피습으로 다시 한데 뭉치려던 무리들은 다시 제각기 흩어져 제각기 저마다의 궁리를 모색했다.
“세 번째, 지난 십학사의 회합에서 자금 요청을 거부한 일로 만사여의에 대한 학사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지요. 하지만 수월에 이런 불행이 생겼으니, 저들의 요구를 거부할 정당한 명분이 생겼습니다.”
천천히 설명하는 이레의 얼굴을 장무열이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윽고.
“은랑의 표정을 보니, 정작 중요한 건 안전한 곳에 치워둔 모양입니다?”
“그렇게 티가 납니까?”
“허허…….”
기가 막힌 장무열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네 번째 이득은 무엇입니까?”
“불난 자리에 집을 지으면 재산이 불처럼 활활 인다지 않습니까.”
“한동안 수월에서 좋은 숯과 소금을 대량으로 사들인다더니. 이런 계획이 있었군요.”
“사헌부에서 그런 것도 조사하십니까?”
“암행대의 눈과 귀는 조선 팔도 모든 곳에 있습니다. 저기 해남 땅에서 집 짓기에 아주 적합한 목재들이 한양으로 출발했다는 소식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은랑이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네?”
“대단하다 해야 할지, 대범하다 해야 할지.”
그때 두 사람의 어깨 사이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무모한 게지.”
“오라버니!”
마음에 들지 않는 기대의 평가에 이레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반대로 장무열의 표정에는 흡족함이 들어찼다.
그런 둘을 번갈아 보며 기대가 물었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하는 게야?”
“알 것 없다.”
무뚝뚝한 장무열의 말 위로 이레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별일 아니어요.”
이레의 태연한 대답에 장무열이 눈빛을 빛냈다.
“이게 별일이 아니면 어떤 게 별일일지 궁금합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장무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그가 선포하듯 이레에게 말했다.
“다음 무예 수련 때까지 아까 가르쳐 드린 걸 완벽하게 숙지하십시오.”
“그러지요.”
“그토록 원하셨으니 앞으론 호신의 기법, 제대로 가르칠 겁니다. 기대하십시오.”
불끈 주먹까지 쥐며 의지를 다진 장무열이 은자원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이레가 기대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저거 어째 협박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어느새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기대가 대답했다.
“걱정하는 거다.”
“무슨 걱정을 저리 살벌하게 합니까?”
“내 말이. 어지간하면 저렇게 걱정할 친구가 아닌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기대가 휙, 이레를 돌아보았다.
“뭔 일 저지른 건 아니렷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리되었군요. 그럼 오라버니,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급히 사라지는 누이를 보며 기대가 중얼거렸다.
“했네, 했어. 우리 빈궁께서 또 뭔 일을 하셨네.”
대체 뭔 일을 한 거야?
***
-은백
빈궁전으로 돌아왔지만, 형운의 환궁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탁의 글씨마저도 사라지지 않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레의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형운이 소론과 노론, 남인과 서인의 새로운 기수들을 설득하기 위해 궁을 떠난 것이 어느덧 이틀째였다.
오랜 시간, 저마다의 신념으로 똘똘 뭉쳐 반목을 이어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그러나 형운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일 할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에 기대보겠노라며 떠났건만…….
무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걸까?
아니다.
그분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믿자.
다른 사람은 다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어도 그녀만은 그를 믿으리라.
이레는 서걱대는 마음을 다잡으려 방을 나섰다.
뒤를 따르겠노라는 궁인들을 물리고 밤 그늘 짙은 빈궁전 뒤뜰을 걸었다.
발밑으로 여린 초록의 계절이 느껴졌다.
자박자박.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그리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하늘 중앙에 걸렸던 달이 기울어졌다.
이레의 걸음 자리 마다 반들거리는 족적이 새겨졌다.
기다림의 시간은 참으로 느렸다.
그리 느리게 흐르는 견뎌내길 얼마나 했을까?
여리게 부는 바람 속에 선선한 여름 대숲의 향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다른 이에게선 절대 느낄 수 없는 정인의 체취.
자박거리던 이레의 걸음이 한순간 뚝 멈춰 섰다.
서걱대던 심장도 덩달아 멈춰 버렸다.
세상 모든 것이 멎어버린 듯 느껴지는 찰나.
이레의 양쪽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따뜻한 온기.
작은 등에 와락 와 닿는 단단한 가슴.
후우.
길고 고된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듯 안도와 그리움이 뒤섞인 나지막한 한숨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어깨에 형운이 얼굴을 괬다.
“다녀왔소.”
이레의 귓불을 쓸어내리는 나른한 속삭임.
“별일 없으셨습니까?”
“어찌 별일 없었을까. 그러나 무탈하게 넘겼다오.”
“다행입니다.”
“그런데 빈궁은 이 밤에 예서 뭘 하고 있었소? 혹시…….”
은근한 기대감이 형운의 눈동자에 서렸다.
“날 기다린 것이오?”
“바람이 좋아 밤산책을 즐기던 중이었사옵니다.”
“정말이오?”
“정말이옵니다.”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이레의 확고한 대답.
형운은 심술 돋은 아이처럼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궁 안이라 하나, 삿된 무리가 있으면 어쩌려고 혼자 이리 있는단 말이오?”
“다 방도가 있사옵니다.”
“방도?”
“네.”
“무슨 방도가 있단 말이오?”
“알고 싶으십니까?”
“당연하오.”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빈궁과 관련한 일에 후회 같은 건 없소. 그러니 말해 보오. 방도라니?”
“그리 원하신다면…….”
이레는 팔꿈치를 들어 자신을 끌어안은 형운의 양팔을 벌렸다. 그러곤 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한순간, 따뜻한 체온을 놓친 형운이 놀란 눈으로 이레를 응시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호신의 기법을 조금 배웠지요.”
“호신의 기법?”
“네. 누군가 저를 등 뒤에서 안았을 때 이리 빠져나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엔…….”
이레는 그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저도 모르게 긴장된 듯, 형운이 물었다.
“그다음엔?”
“머리로 얼굴을 힘껏 박으라 하더이다.”
“…….”
“배우긴 배웠으나, 연습할 상대가 없어 통할지 안 통할지 몰랐는데. 손쉽게 저하의 품을 빠져나오니, 첫 번째 방도는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방도는 아무래도 무리겠지요? 지금이라도 그만하라 하시면 그만두겠습니다. 혹여 귀한 옥체 상할까 저어되옵니다만.”
이레의 은근한 도발에 형운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정색한 그가 말했다.
“얼마나 배웠는지, 마음껏 기량을 뽐내보시오.”
“아직 기량을 뽐낼 정도는 아니고. 그저 제 소신대로 해 보려 합니다.”
“그러시오.”
“많이 서투릅니다. 감당하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나이다.”
“내 힘껏 감내해보리다.”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이레의 작은 머리통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순간, 빠르게 피하면 되리라.
그녀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며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순간, 이레의 얼굴이 형운의 코밑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봄 나비처럼, 바람에 흩날린 꽃잎처럼…….
여리고 달콤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살포시 덮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