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95화 (195/215)

#195. 동궁의 책사(策士)

생강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기루의 이 층 누각에 팔을 괴고 있던 사슴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바람은 시전의 초입에서 시작해서 끝자락으로 곧장 내달리는 북풍이었다. 봄바람치곤 제법 사나운지라.

바람결에 떨어진 연약한 꽃잎 한 장이 사슴의 손등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제 동료들과 어울려 있을 땐 한없이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그 연약한 식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어유,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어요.”

어린 시비가 숯이 든 화로를 사슴의 곁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행여 화로의 불씨가 바람에 날릴까 싶어, 간이용 병풍을 둘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으로는 연신 투덜대는 잔소리를 흘리지만, 사슴을 보는 시비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따뜻한 차라도 올릴까요?”

먼 어둠을 응시하던 사슴은 시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아야.”

“네.”

“너와 내가 얼마나 함께했지?”

“제가 태어나는 순간부터였으니, 어느새 십오 년이나 되었네요.”

“십오 년…….”

그 세월 속엔 행복한 시간도 있었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들어 있었다.

열다섯 살의 지아는 몰락한 가문의 여식인 사슴을 쫓아 이리저리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급기야 기루의 시비 노릇까지 하게 된 그녀의 운명이 어쩐지 제 탓인 것만 같아 사슴은 마음 한끝이 시렸다.

“지아야.”

사슴은 따뜻하게 덥힌 조약돌을 제 주인의 품에 안겨주는 지아를 다정하게 불렀다.

“너 시집보내주련?”

뜬금없는 물음에 지아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이제 너도 나 떠나 살 때도 되었고…….”

“이년이 아가씨 곁이 아니면 어디서 살아요? 왜 그러셔요? 쇤네가 무얼 잘못했어요? 제가 아가씨 마음에 안 드는 짓이라도 한 거여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왜요……?”

급기야 지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찼다.

“알았다, 알았어. 그냥…… 너 이리 사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내와 알콩달콩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랬어.”

“빈말이라도 그런 말씀 마시어요.”

“오냐.”

“쇤네는 아가씨 곁에서 죽을 때까지 꼭 붙어 있을 거여요.”

“그래,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사슴은 시비를 다독였다.

그래서 못내 불안한 듯 연신 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요즘 무슨 일 있으시어요?”

“일은 무슨…….”

“그런데 어째 눈빛이 달라지셨어요.”

“그래?”

“지난번에 만사여의께서 다녀가신 이후로 줄곧 그러신 것도 같고…….”

“이맘때면 마음이 서걱거려 그러는 거, 너도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걱정 마라.”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오갈 때였다.

“어허! 이미 늦었다니까.”

기루 대문 앞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비가 냉큼 누각 난간에 매달려 고개를 길게 빼내어 밖의 사정을 살폈다.

“무슨 일이냐?”

시비의 물음에 우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신경 쓸 거 없어.”

“뭘 신경 쓰지 말라는 거냐?”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애들이다.”

“그 소식……?”

“거시기 있잖어. 오늘 해질 때까지 사기로 한 물건.”

“아하.”

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몸을 사슴에게로 돌렸다.

“아무래도 뒤늦게 물건을 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래?”

힐끗, 누각 아래로 눈길을 보내던 사슴이 시비에게 말했다.

“올려보내라고 해.”

“하지만…… 이젠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바람이 차갑잖아. 이런 바람을 뚫고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서운하겠느냐.”

“우리 아가씨, 또 병 도지셨다. 이 사람 사정 봐주고, 저 사람 가엾다 퍼 주고. 그러다 돈은 언제 벌려고 그러셔요? 이렇게 한번 받아주면 분명 소문 들은 다른 아이들까지 찾아올 겁니다.”

“이번 한 번만 받아주자. 응?”

“하여간…… 못 말리신다니까.”

지아의 투덜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충직한 시비는 사슴의 명대로 누각 아래로 내려가 아이들을 데려왔다.

시비가 데려온 아이들은 오누이인 듯했다.

여덟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누이와 대여섯 살쯤 되는 어린 남동생.

누각으로 따라 올라오긴 했지만, 이런 상황엔 익숙하지 않은 듯 어린 오누이는 연신 쭈뼛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사슴이 물었다.

“이곳에서 이걸 산다고 들었소.”

낡고 헤진 입성과 푸석푸석 깡마른 겉모습과는 달리 대답하는 소녀는 당차고 의연하였다.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시전의 아이들과 광통교 아래에 사는 거지들과는 눈빛부터 달랐다.

몰락한 양반의 아이들이 분명했다.

소녀의 다 헤진 소맷자락은 껑충하게 짧아져 손목을 훤히 보이고 있었다. 생쥐를 잡느라 엎어진 것인지, 소녀의 찢어진 치맛자락 사이사이로 상처가 가득했다.

궁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자존심만은 내려놓지 못한 소녀의 얼굴 위로, 사슴은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였다.

“양반댁 아가씨인가 봅니다.”

“양반은 팔 수 없는 것이오?”

소녀의 물음에 사슴을 고개를 저었다.

“물건에 문제만 없다면 파는 사람이 양반이든 중인이든, 혹은 천민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살펴보겠소?”

사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소녀가 등 뒤로 감추고 있던 무명 자루를 앞으로 내밀었다.

입구를 살짝 열었다.

소녀가 자루 안에 담아 온 것은 다름 아닌 살아있는 생쥐 세 마리였다.

***

잠시 후.

“세상에! 이제는 쓸모도 없는 생쥐 값을 마리당 한 냥씩이나 주시다니.”

오누이가 사라진 골목을 내려다보며 시비가 소리쳤다.

사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게다가 아가씨가 가장 아끼는 치마와 저고리까지 얹어주시다니. 왜 그러셨어요? 대국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비단으로 만든 것이라고 얼마나 좋아하셨어요. 그런 걸 그리 턱 내어 주시다니.”

“핑계 삼아, 이참에 새 옷 좀 장만하려고 그런다.”

소녀의 낡고 해진 옷이 영 마음에 걸렸더랬다.

제가 건넨 옷이면 소녀는 물론이고 그 아이의 어미까지 새로운 치마저고리 한 벌쯤은 능히 만들고도 남으리라.

하지만 자존심 강한 소녀에겐 내색하지 않았다.

물론 말 많은 제 시비에게도…….

“하여간 이 변덕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이리 생겨 먹은 걸 어쩌겠느냐.”

“정말 못 말리겠습니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여기 앉아라.”

사슴은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손짓했다.

하는 수 없이 주인의 곁에 궁둥이를 붙인 시비가 물었다.

“하나만 여쭈어도 됩니까?”

“무어가 그리 궁금한 게냐?”

“갑자기 생쥐는 어디에 쓰려고 그리 사들이신 겁니까? 광통교 거지들이며 시전의 아이들에게 생쥐란 생쥐는 다 잡아오라 하시니. 암만 생각해도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시비의 물음에 사슴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비밀인데, 지킬 자신 있느냐?”

비밀……?

시비의 눈에 동그란 호기심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입술을 꽉 다문 그녀는 사슴을 향해 크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믿어달라는 의미였다.

생긋, 미소를 보이던 사슴은 검지를 펼쳐 허공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보이는 먼 풍경 속.

활활 불타오르는 수월의 모습이 들어왔다.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하의 수월에 저런 불이 났을 땐, 누군가 작정을 하였겠지?”

“하지만 듣자하니 지키는 눈이 한둘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눈이 지켜보는 건 사람뿐이질 않느냐.”

“그럼?”

“작은 미물들은 지키는 자들의 관심 밖이었단다.”

사슴은 오누이가 잡아온 생쥐가 든 자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쥐들의 꼬리에 불을 붙여 풀어놓았단다. 한번에 수십 마리의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어느 누가 그 불길을 잡을 수 있겠느냐.”

“세상에…….”

시비의 눈동자에 놀람이 가득 들어찼다.

“그런 생각은 대체 어찌하신 것이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네?”

“대체 그분은 그런 생각을 어찌하였을까?”

사슴은 이레를 떠올렸다.

동궁의 피습을 핑계 삼아 십학사 전체를 철저한 감시하기 시작한 정후겸.

그의 감시로 인해 그 어떤 일도 실행할 수 없었다.

이대로 둔다면 정후겸이 원하는 대로 모든 상황이 흘러가리라.

동궁은 겨우 쥐었던 권력을 다시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다.

수월 역시 정후겸이 원하는 대로 사병을 키울 자금을 지원해야 했으리라.

그러나 정후겸의 계략은 이레의 기지로 보기 좋게 무산되었다.

꽁지에 불이 붙은 쥐들은 수월의 곳곳에 불을 질렀다.

덕분에 정후겸에게 집중되었던 세간의 이목은 수월에게로 옮겨졌다.

그뿐일까.

수월은 막대한 후원을 원하는 십학사의 요구를 당당히 거절할 명목이 생겼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동궁께서는 또 다른 일을 획책하고 있었다.

동궁에게 기울었던 권력의 추가 다시 정후겸에게로 기우는가 싶더니, 도로 동궁에게로 돌아왔다.

그 모든 계획의 이면에 이레가 존재했다.

동궁의 든든한 책사(策士).

그것이 동궁빈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정후겸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리라.

평소 정후겸을 비롯하여 화완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슴에겐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건만.

이상하게도 가슴에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심지어 설레기까지 했다.

대체 이 두 사람이 보여줄 마지막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마지막까지 볼 수 있을까?

문득 불길한 예감이 사슴의 등줄기를 훑었다.

사슴은 곁에 앉은 시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아야.”

“네, 아가씨.”

“너, 내 부탁 하나 들어주련?”

“갑자기 무슨 부탁이요?”

“남산골에 하월네라는 노파가 사는 집이 있단다.”

“하월네라면 난전에서 장사하는 그 노인네 말입니까?”

“그래. 그 노파에게 찾아가 전해주겠느냐? 주문했던 노리개는 아무래도 쓸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주문을 취소하겠다고.”

“이 밤에 말입니까?”

“꽤 값비싼 것이란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가서 취소 좀 해주련?”

“아가씨…….”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시비는 쉬이 발자국을 떼지 못했다.

“지아야, 혹여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혹여 구할 수 있으면 청귤도 하나 구해다 주면 정말 좋겠구나.”

“아가씨…….”

“어서 가거라. 더 늦으면 그 심보 고약한 노인네의 성화를 옴팍 뒤집어쓸 수도 있어. 그러니 한 발짝이라도 서둘러라.”

사슴의 재촉에 시비는 마지못해 누각의 계단을 내려갔다.

조잘대던 아이가 사라지니, 금세 주위가 고요해졌다.

마치 갑자기 진공의 공간 속에 홀로 남은 듯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참으로 시끄러운 계집이구나.”

어둠이 짙은 누각의 계단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뚜벅뚜벅.

큰 걸음으로 사슴에게 다가온 이는 정후겸이었다.

사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가득했다.

***

같은 시각.

도성에서 말을 달려 반 시진 떨어진 숲 속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더는 말이 들어갈 수 없는 길목에 다다르자 사내는 말에서 내렸다.

그는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맨살이 드러난 곳마다 날카로운 풀잎이 작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사내는 작은 봉분 앞에 걸음을 멈췄다.

돌보는 손길이 없었던 듯, 봉분은 잡풀로 무성했다.

문득 사내의 가슴에 뜨거운 불길과 얼음처럼 차가운 비수가 동시에 치솟았다.

“아바마마.”

좀처럼 입에 올리지 못한 이름이 사내, 형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해도 왕세자의 무덤이었건만.

죽은 아비의 무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모두 자신의 죄인 듯했다.

명치에 벼린 칼날이 돋아나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듯했다.

목구멍으로 연신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울컥 넘어왔다.

쓰고 비릿한 감정을 연신 억눌렀다.

눈가가 붉어지고 말아쥔 주먹은 연신 경련을 일으켰다.

아직은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가 이토록 분할 수 없었다.

내 아버지를 이리 거칠고 척박한 땅속에 잠들 게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그의 숨통을 옥죄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형운은 가슴에 치미는 울분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러곤 평소 아버지가 즐기던 맑은 국화주 한 병을 품에서 꺼냈다

“용서하십시오.”

살아생전, 다정히 아비와 술잔을 나누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늘 자신에게 불퉁했던 그 이면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지, 서탁을 통해 알아버린 터라. 그 죄스러움이 더했다.

형운은 아비를 잃었던 임오년의 여름을 떠올렸다.

그 처참하고도 잔인했던 계절.

그때 이 국화주 한 잔이라도 아비에게 전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바마마의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 있었더라면, 그분께서도 기꺼이 행복하게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모두가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다.

심지어 자신마저도…… 결국 그분을 지켜내지 못했다.

궁궐의 규율과 법도, 엄격한 규범이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니, 그건 어쩌면 핑계일 수도 있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한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훗날 알게 되었다.

서탁 속의 백귀들을 통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군주란, 제대로 된 제왕이란 유연함을 잃어선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올곧음은 쉽게 부러질 수 있고, 정의와 진실은 대의와 명분에 함몰될 수 있음을.

그래서 생각했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서인들이 저희만의 붕당과 파벌을 만들 듯, 그 역시도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기로.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적과의 타협도 서슴지 않았다.

적의 적을 동지로 만드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서찰로 그들과 의견을 교류했다.

덕분에 그의 팽례는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히고 연신 투덜대길 반복했다.

그리고 오늘, 지금까지 들인 정성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왕실에 적의를 드러내던 사람들에게 서찰을 보냈다.

노론으로 가득한 작금의 조정을 뒤엎자 하였다.

그저 말만 앞세운 탕평책이 아닌 진실로 탕탕평평,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한번 만들어 보자 하였다.

과연 몇 명이나 그의 서찰에 응답을 할 것인가.

쏴아아.

풀숲에 바람이 일었다.

아비의 무덤에 국화주를 부은 형운은 팔베개를 한 채 자리에 누웠다.

하늘의 별이 무성했다.

이제부터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되리라.

그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있을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몸이 불편하다 들었습니다. 이리 늦은 밤에 운신하여도 되는지요?”

갑자기 나타난 정후겸을 보며 사슴이 걱정 섞인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말 많은 계집이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비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정후겸이 말했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아이라, 가끔 말벗으로 삼곤 하였지요.”

“말벗이든 수다쟁이든, 그대가 내보내지 않았으면 내가 베어버릴 뻔하였다.”

정후겸의 모습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언제나 느긋함을 잊지 않는 그의 몸짓에 성급함이 보였다.

“무에, 마음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나 봅니다.”

정후겸을 자리에 권하며 사슴이 물었다.

“마음 언짢은 일이 벌어졌지.”

정후겸은 턱짓으로 불이 난 수월을 가리켰다.

그러곤 물었다.

“왜 그리하였느냐?”

“네?”

사슴은 시침을 뚝 떼며 되물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정후겸은 툭, 꼬리 잘린 쥐 한 마리를 던졌다.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도 하였지”

“…….”

“이런 미물을 이용하여 내 뒤통수를 치다니. 아무리 적이라 하여도 그 기발함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그래도 네 선택은 옳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줄 몰랐던 건 아닐 테고. 결국, 이것이 네 모습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지 못한 것이냐?”

정후겸의 겁박 섞인 말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슴은 연민 섞인 표정으로 죽은 쥐를 응시했다.

“이런, 가엾은 것을 보았나. 어쩌자고 저런 사람의 손에 걸렸느냐.”

“네가 지금 이깟 미물의 죽음을 동정할 때더냐?”

“그럼 무얼 할 때입니까?”

당당한 시선이 정후겸을 향했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가 대답했다.

“변명.”

“…….”

“그게 아니라면 애원을 하던가.”

“싫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마지막 발버둥도 쳐보지 않을 테냐?”

사슴은 화로 위에 올려놓은 차 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어쩌지요?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니…….”

“무어라? 네 정녕 죽길 작정하였느냐?”

사슴은 천천히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보고픈 것을 보고,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었더니. 삶이 무료하더이다. 이젠 그 어떤 미련도 애착도 없답니다.”

“그래서…… 배신을 택한 것이냐?”

정후겸의 분노 섞인 물음에 사슴을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서로가 믿질 않았는데, 배신이라 하시니, 조금 당황스럽군요.”

“그래서 나와 척을 지겠다?”

“저는 늘 그랬듯, 구경이나 하렵니다.”

“그래?”

“네.”

“그럼 그 두 눈 똑똑히 뜨고 봐 둬라. 감히 내 뜻을 어긴 자들이 어떤 말로를 겪게 될 것인지.”

정후겸의 위협에도 사슴은 태연자약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후겸이 돌연 누각의 어둠 속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있느냐?”

곧 대답이 들려왔다.

“있기야, 아까부터 있었쥬.”

느릿느릿한 걸음과 함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사 거북, 박진봉이었다.

사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반대로 정후겸은 평소의 느른함을 되찾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십학사의 정화를 시작해야겠다.”

거북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허리춤에 걸린 낫을 꺼내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 얘기, 언제 나오나 기다렸슈.”

거북이 눈빛을 번들거렸다.

정후겸은 품에서 명단이 적힌 서찰을 꺼냈다.

그러곤 한 글자, 한 글자, 귀에 박히도록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그 첫 번째는…….”

사슴은 눈을 감았다.

분명 그녀가 처음이리라.

그러나…….

“학사, 물. 만사여의가 그 첫 번째 대상이다.”

쨍그랑.

사슴의 손에 들린 찻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정후겸은 유유히 누각을 떠났다.

저 멀리 수월의 불길은 바람을 타고 더욱더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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