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대체 뉘일까?
“워메, 저 아까븐 거시 거냥 다 타네, 다 타.”
“어쩔까나, 저 불을 어쩔까나.”
“뭔 놈의 바람은 이리 세게 부는고. 어디서 안 되라, 안 되라 고사를 지내지 않고야 이럴 수는 없지, 정말 이럴 수는 없지.”
사람들의 안타까운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무섭도록 거대한 화마(火魔)가 수월의 곳곳을 덮치고 있던 까닭이었다.
제일 먼저 불을 발견한 사람은 유경이었다.
오늘 하루 수월에 들인 물품과 나간 물품을 정리한 목록을 꼼꼼히 확인한 그녀는 내실로 걸음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비단을 쌓아 둔 창고에서 불길한 검은 연기가 새어나왔다.
저게 무엇이려나?
유경은 은 고개를 갸웃하며 창고를 열었다.
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불길은 창고 밖으로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놀란 유경은 꽈당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동시에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불이야, 불! 불이 났소! 불이오, 불!”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수월 곳곳을 지키던 무사들이 달려왔다.
한창 잠에 빠져들어 있던 행랑채의 식구들도 문을 열고 하나둘 졸린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사방에서 솟구치는 불길에 놀라 맨발로 뛰쳐나왔다.
그 사이 물동이를 가져온 유경이 거대한 짐승 같은 불길에 물을 끼얹었다.
고작 물동이 하나로는 어림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악착같이 달려들어 불길을 잡으려 애를 썼다.
느닷없는 화재에 갈팡질팡하던 사람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화마와의 싸움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한곳의 불길을 잡으면, 다른 곳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여기서 잠재우면 저기의 불씨가 화르륵 솟구치고, 저기 불길을 겨우 다독이면 또 다른 곳에서 붉은 불꽃이 혀를 날름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작정하고 수월을 태우고 있는 듯했다.
이럴 때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겨울 가뭄과 봄 가뭄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계절이었다.
거기다 오늘따라 바람은 왜 이리 사나운 것인지.
원망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땀방울이 유경의 턱 끝에서 떨어졌다.
워낙에 절박한 상황인지라.
검은 재가 얼굴을 더럽히고 손가락 끝이 터지고 갈라지는 줄도 몰랐다.
“안 돼! 저긴 절대 안 돼! 서둘러요, 저긴 사계 노인의 물건이 있는 곳이란 말이오!”
급기야 사계 노인이 만든 옷과 패물들이 전시된 전각에 불씨가 옮겨붙었을 때 유경은 발작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저것들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데.
사계 노인이 만든 것들은 단순히 물건을 넘어선 작품들이었다.
그 귀한 것들이 화마에 삼켜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건져내야겠다는 일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경은 물동이를 든 시비를 발견했다.
그녀는 시비의 손에서 물동이를 빼앗아 제 머리 위에 끼얹었다.
금세 온몸이 물에 젖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하는 양을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랑곳하지 않은 유경은 그대로 불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몇 발짝 떼지 못하고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만둬!”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놔, 이 손 어서 놓지 못할까.”
버럭 고함을 지르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의 한서로와 시선이 마주 닿았다.
“만사여의…….”
내내 경직되었던 유경의 표정이 단박에 와르르 무너졌다.
수월의 진짜 주인이 나타났다.
시전의 여장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해내고야 마는 만사여의가 나타났으니, 이제 이 불길도 곧 잡히리라.
그녀는 다급히 한서로에게 그간의 사정을 전했다.
“갑자기 비단 곳간에서부터 불길이 솟았어요. 그러더니 수월 곳곳에서 불길이 일지 뭡니까. 얼마 전에 콩기름 담뿍 묻힌 종이로 새로 벽이며 바닥이며 단장했던 전각들에도…….”
찰나.
“알고 있어, 그러니 그대로 내버려 둬.”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유경의 말허리를 잘랐다.
“네?”
잘못 들은 거라 확신한 유경이 되물었다.
그런 유경을 한서로는 걱정 담긴 눈길로 응시했다.
“몸은? 다친 곳은 없지?”
“그렇긴 합니다만…….”
“쯧쯧, 얼굴이며 옷이며 다 더러워졌네. 손가락부터 치료해야겠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어요. 저 귀한 것들이 죄다 사라지고 있단 말이어요. 사계 노인의 작품이 전시된 전각마저도 불이 붙었어요.”
유경이 재차 확인시키듯 말했다.
하지만 저 귀하디귀한 것들이 눈앞에서 죄 타고 있음에도 한서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시전의 여장부이니, 저런 대범함은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여느 때라면 감탄사를 흘렸으리라.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유경은 느긋한 한서로의 태도에 갑갑증이 일어 제 가슴을 쾅쾅 쳐댔다.
“하나라도 건져내야지요. 저 귀한 것들이 타고 있잖습니까.”
“물건이야 언제든 다시 만들면 그만이야.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이 다쳐선 아니 되지. 우선은 안전한 장소로 몸부터 피하자.”
“…….”
피하자고 하셨어요?
지금 저것들을 다 포기하자는 말인 건가요?
그래, 한서로의 말처럼 사람보다 귀한 건 없었다.
그러니 안전한 장소로 피하자는 그녀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한서로는 상인이 아니던가.
상인에겐 사람보다 자신이 거래하는 물건이 중요하다고 늘상 말하던 그녀였다.
또한, 그 누구보다 수월을 아끼고 제 몸처럼 살피던 한서로가…… 화마로 인해 무너지는 수월을 보면서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문득 발을 동동 구르던 유경의 미간에 묘한 균열이 일었다.
혹시 이 불을 낸 사람이…… 한서로?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어!
짧은 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을 유경은 나무랐다.
그럼에도 무언가 머릿속에 끈끈한 것이 달라붙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연신 한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주저주저 유경이 입을 열었다.
“이 불, 설마…….”
쉿!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이건만.
한서로는 제 입술 위로 검지를 올렸다.
“……!”
비명이 터져 나오는 제 입을 양손으로 막았다.
행여 듣는 이가 없는가 싶어 주위를 살폈다.
다른 이들은 불길을 잡는데 여념이 없던 터라.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유경이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한서로에게 물었다.
“왜요? 왜 그런……?”
“설명은 나중에! 우선은 사람들부터 밖으로 대피시켜!”
단호한 말과 함께 한서로는 허공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북쪽으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손바닥으로 느꼈다.
“다행이다.”
불길에 집어삼킨 수월은 하나씩 차례로 무너지고 있었다.
높은 수월의 담벼락 안이 폐허로 변하고 있었건만.
정작 주인인 한서로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바람이 거칠어 좀처럼 불길을 잡기 어렵다고 하옵니다.”
금정이 물고 온 소식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궐 밖이 보이는 빈궁전 누각에 오른 그녀는 수월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화재 때문일까?
밤이 깊었건만, 수월이 있는 곳에선 노란 기운이 번져 보였다.
“다른 곳은 어떠하다더냐? 혹여 시전의 다른 곳에도 불이 난 곳이 있다더냐?”
걱정 섞인 이레의 물음에 금정이 허리를 낮췄다.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있사옵니다. 그 연유로 골목 끝자락에 있는 수월의 불길이 거세어졌을 뿐, 다른 곳으로 옮기진 않은 듯합니다.”
“다행이구나.”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쉰 그녀는 금정에게 그만 물러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또 다른 소식이 들려오면 지체하지 말고 내게 알려야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금정이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잠시 고요가 누각에 머물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레는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언제까지 그리 계실 겁니까?”
팔각 모양의 누각 한 모서리.
밤의 그늘이 만들어 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역시, 귀신을 속이면 속였지 우리 빈궁마마를 속일 순 없군요.”
입가에 예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묻힌 기대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빈궁마마께서 누각에 오르실 때부터 있었지요.”
기대의 존대에 이레는 서운한 기색을 비쳤다.
“아무도 없습니다. 이럴 땐 그저 누이와 오라비가 되면 안 됩니까?”
“명이십니까?”
“명이라면 따르시렵니까?”
“그래야지.”
금세 말끝을 툭 내려놓은 기대가 다시 활짝 미소 지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이레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기대가 답을 이었다.
“주인에게 원하는 서찰을 전하고 오는 길이다.”
“원하는 대답이라면…….”
오라버니를 바라보는 이레의 입가에도 기대를 닮은 미소가 피어났다.
기대가 어딜 다녀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동궁인 형운의 대리청정에 불만을 가진 자들에게 서찰을 전하고 돌아오던 참이었다.
며칠 전 있었던 정후겸의 피습사건으로 궁 안팎의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형운을 바라보는 사대부들의 시선이었다.
주상전하께서 동궁에게 궁의 실권을 내어주신 이후로, 형운이 행하는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비록 죽은 세자의 아들이긴 하였으나, 임금께서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이면서까지 명분을 준 것으로 보아 다음 보위를 잇게 하려는 것이 명백하였다. 대세가 기울었으니, 그에 맞춰 새로운 동아줄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후겸이 동궁에게 피습당했다는 사건이 생기고는 그들은 몸을 사렸다.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으니, 이미 죽은 제 아비의 원한은 그냥 묻어두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제 아비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정후겸을 찌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동궁이 왕이 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눈에 선했다.
피의 보복이 이어지리라.
말로만 듣던 연산군의 비극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왕세자의 죽음 이후, 각자의 셈속으로 분열되었던 당파가 다시 한마음으로 모여들었다.
어디 그뿐일까.
각기 다른 생각을 품었던 십학사의 학사들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감시할 수 있었다.
그 주요 대상은 단연 수월이었다.
수월과 만사여의.
해인 정후겸의 입지를 흔들린 근본.
정후겸은 자신의 무사들을 수월로 보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곧 수월의 재산이 십학사의 재산…… 아니, 자신의 재산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째로 정후겸이 얻은 것은 민심이었다.
그가 왕세손의 칼에 찔렸다는 소문은 금세 도성 안팎의 백성들에게 전해졌다. 이 일로 한동안 형운에게 집중되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정후겸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그간 가짜 동궁이 저지른 행패가 모두 사실이었으며, 그 모두가 가엾은 옹주의 양자를 죽이려는 전조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민심은 가엾은 옹주마마의 양자인 정후겸에게 동정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정후겸은 이번 일로 주상의 총애마저도 되찾았다.
워낙에 마음의 변덕이 심하신 분인지라.
아프고 가여운 이를 보면 눈물을 흘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분의 귀에 정후겸이 당한 일은 충격이었다.
주상께서는 죄없이 다친 정후겸에게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내보였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내의원의 의원을 매일같이 보내 그의 안부를 물으시니.
정후겸에게 일어난 불행은 되려 그를 살리는 행운이 되어 되돌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아도 이레와 형운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정후겸이 세운 계략임을.
정법(正法)으로 상대하기엔 상대의 술수가 잔악하였다.
이럴 땐 상대가 전혀 예상하기 어려운 전술을 펼쳐 역공하는 것이 수리라.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수월의 화재였다.
정후겸이 제 뼈를 내주고 살을 취했다면, 이쪽에선 살을 내주는 척하며 뼈와 살을 모두 취하는 방도를 모색한 것이다.
그 첫 번째로 단합되는 사대부들의 마음을 다시 돌리는 것이었다.
그 덕에 형운의 팽례였던 기대는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성 이곳저곳을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일까.
정후겸의 피습사건으로 그의 일거리가 훨씬 수월해졌다.
형운의 서찰을 받아야 할 상대들이 정후겸의 병문안을 이유로 그의 객방에 모두 모여 있었던 까닭이다.
“이런 걸 두고 꿩 먹고 알 먹는다고 하지.”
“서찰을 편히 전한 것 말고도 다른 이득이 있었습니까?”
이레의 물음에 기대가 두둑한 제 배를 두드렸다.
“역시 권세 있는 집안인지라. 손님 대접이 이만저만 대단하지 않았다. 이참에 그 주인의 병세가 다 나을 때까지 매일 찾아가 볼까 생각 중이야.”
못 말리겠다는 듯 이레가 고개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누이야.”
“네, 오라버니.”
“수월의 불은 어찌 된 것이냐?”
기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수월은 누이에게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 곳을 어쩌자고 태워버렸을까?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귀띔해다오.”
“그럼 다시는 우리 저하께 투정부리지 않을 겁니까?”
“…….”
“저하하시는 말씀에 이런저런 이유 달며 항명하지 않을 것인지요?”
“내 누이가 많이 달라졌구나.”
“제 오라버니는 늘 똑같지요. 그래서 저는 정말 좋습니다.”
해사한 웃음의 이레에게 기대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졌다. 그러니 말해봐라.”
“우선…… 민심의 방향을 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정후겸을 동정하는 백성들이 수월의 화재에 관심을 두게 하려는 것이렷다?”
“당연하지요. 높은 담벼락 안의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안위보다야, 늘 오며가며 보았던 수월이 폐허가 된 것에 더 관심이 쏠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나.”
“그뿐이 아닙니다.”
“그뿐이 아니면……?”
“수월의 화재로 사계 노인이 만든 패물들이 잿더미 안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혹시 압니까? 잿더미 속에서 귀한 가락지를 찾아내거나, 아니면 귀한 보석이 박힌 비녀를 찾아낼지…….”
“그럼…….”
“당분간 도성 안팎이 수월에 묻힌 보물찾기로 떠들썩하겠지요.”
“하하하, 우리 누이가 참으로 묘한 수를 내었구나.”
“그 시끌벅적한 사이, 저하께선 저하의 일을 하실 겁니다.”
“붕당과 파벌로 흩어진 저 사대부들을 설득하는 것 말이냐?”
“네.”
“그게 쉬울까?”
“당연히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분이라면 꼭 해내리라 믿습니다.”
물끄러미 이레를 바라보던 기대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할머님 마음이 이제야 이해되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어찌하여 너를 별채 밖으로 내놓지 않으셨는지.”
“네?”
“네가 이런 사람인 줄 아신 것이겠지. 겁도 없이, 그저 네 신념 하나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을 그분은 진즉 아셨던 것이야.”
“오라버니도 걱정되십니까?”
“걱정된다. 행여 네가 위험한 길도 마다치 않고 갈까 봐.”
“그럴 땐 오라버니가 절 잡아주시면 되질 않겠습니까.”
진심이 듬뿍 담긴 이레의 시선에 기대는 머리를 저었다.
“참으로 후회되는구나.”
“뭐가 말입니까?”
“그때 내가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나만 아니었으면, 네가 간택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랬다면 지금의 이런 아슬아슬한 일들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말씀 마시어요. 저는 지금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실로 맑은 웃음이 맺혔다.
“이레야…….”
기대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고아하고 아름다운 누이의 미소.
너무도 맑아 눈이 시렸고, 너무도 투명해 마음이 아려왔다.
“하나만 약조해다오.”
“무얼 말입니까?”
“아무리 저하께서 함께 가자 하여도 그 앞에 날카로운 가시덩굴과 독을 품은 뱀이 있다면 절대로 함께 가선 아니 된다.”
“날카로운 가시덩굴은 함께 치우면 될 것이고, 독을 품은 뱀은 스스로 물러나도록 오라버니가 도와주시면 될 게 아닙니까.”
“너는…….”
“저와 동궁껜 오라버니처럼, 그리고 지금 이 누각 아래서 우리 이야길 듣고 계시는 분처럼 든든하고 우직한 동료들이 있질 않습니까.”
미소 짓는 이레의 말에 기대는 누각 끝으로 다가가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 누가 있단 말이냐?”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렵니다.”
작별을 고한 이레는 사박사박 비단 자락 쓸리는 소리와 함께 회랑 끝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등 뒤로 기대의 눈길이 오래도록 따라 붙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대 홀로 있는 누각으로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뭘 그리 보고 있느냐?”
장무열이 기대에게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그 아래에 숨어서 뭘 했는가?”
“지나가는 길이었다.”
“흥, 어딜 가는데 빈궁전 안을 지나가는가?”
“그건 네가 알 거 없다. 그런데…….”
장무열은 기대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이레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기대는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왜 그러느냐?”
장무열의 물음에 기대의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우리 동궁께선 왕이 되시려나 보네.”
“무슨 헛소리냐?”
동궁이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거늘.
이 녀석만 만나면 덩달아 바보가 되는 기분에 장무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귓가에 기대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그냥 왕이 아니라, 진짜 왕 말이야. 진실로 왕다운 왕, 나라를 태평성대로 만들 그런 대단한 왕이 될 것 같단 말이지.”
문득 기대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뭐라?”
“그럼 그분이 얼마나 악독하게 나를 부려 먹었는지, 내가 쓴다고 해도 믿질 않을 게 아닌가.”
“…….”
“그럼 안 되는데…… 어찌한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걱정하며 누각을 나서는 기대를 장무열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번번이 말려들지 않겠다, 생각했건만.
기대와 이레.
두 남매만 보면 저도 모르게 말려들곤 하였다.
다시는 상대하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하며 장무열은 눈길을 먼 곳으로 돌렸다.
수월이 있는 곳이 낮처럼 환했다.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모양이다.
듣기론 정후겸의 무사들이 안팎을 지키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자연적인 발화란 말인가?
하지만 정황을 놓고 보면 절대 자연적으로 난 불이 아니었다.
수월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빈궁전, 이레의 처소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불빛이 처소 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까 들었던 남매의 대화로 보아 저 처소의 주인께서 불을 놓으라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많은 시선을 속이고 불을 낼 수 있는 이, 대체 뉘일까?”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장무열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