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우리 저하가 달라졌어요
이른 새벽.
형운의 귓가로 김기대의 볼멘소리가 파고 들었다.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는 이제 막 동궁이 전하는 서찰을 교리 심환지에게 은밀히 전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급하게 전해야 할 서신이란 말에 헐레벌떡 달렸다.
그 가쁜 숨이 채 가시기도 전.
기진맥진한 기색으로 은자원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동궁이 또 다른 서찰을 그에게 내민 것이었다.
“무슨 소리냐?”
서탁에 고개를 묻은 형운이 시선을 들었다.
빠르게 종이 위를 유영하던 그의 붓도 잠시 멈췄다.
“몰라서 묻습니까?”
기대는 지친 눈으로 형운이 내민 서찰을 쏘아보았다.
“모르니 묻는 것이 아니겠느냐?”
“지금 주시는 이 서찰, 누구에게 보내는 것입니까?”
“심 교리다.”
혹시나 싶었건만, 역시였다.
기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깜빡 잊으셨나 싶어 여쭙습니다만, 제가 방금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아십니까?”
“심 교리였지.”
홍문관 교리 심환지.
형운은 밤마다 여러 사람에게 은밀한 서신을 전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월등히 많은 서신을 심 교리에게 보냈다.
기대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제가 심 교리, 그 양반에게 몇 통의 서찰을 전한 줄 알고 계십니까?”
형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것까지 합하면 모두 서른여덟 통이다.”
“그걸 알고 계신 분이 또 이런 걸 제게 주신 겁니까?”
형운의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가 잘못됐느냐 되묻는 시선이었다.
답답해진 기대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이러실 거면 차라리 만나서 이야길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방이 훔쳐보는 자들인지라. 어디에 어떤 눈이 지켜볼지 알 수 없다.”
“그럼…….”
잠시 생각하던 기대가 말을 이었다.
“서찰을 한 번에 써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꼭 보낸 후에야 생각이 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오늘 제가 판 발품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아십니까? 비록 도성 안이라지만 왔다 갔다 바쁘게 뛰어다닌 거리를 합하면 한양에서 평양까지 다녀오고도 남을 겁니다.”
“날이 갈수록 그대는 허풍만 느는군.”
“저하께서 보내는 서찰만큼 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따라 불평과 불만이 유난하군.”
“하루 수십 리 길 다니느라 신이 닳을 지경이면 그런 말씀 못 하실 겁니다.”
“어쩔 수 없질 않은가. 나는 동궁이고, 그대는 팽례이니.”
“처음으로 팽례가 된 걸 후회하는 순간입니다.”
“후회한다고 왕의 팽례로 타고난 운명이 바뀌진 않는다.”
“안타깝게도 운명이나 사명감만으로 발바닥의 굳은살을 없애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사명감만으로 부족하다면 근성으로 버텨봐라.”
“근성 같은 건 그늘진 응지에 갖다 버린 지 오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서찰은 아침 강연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 심 교리와 내가 합을 맞출 수 있다.”
초지일관, 서찰을 강요하는 형운의 태도에 기대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못합니다. 아니, 안 할 겁니다. 더는 버틸 수 없단 말입니다.”
“어허, 왕의 팽례라는 제 본분을 망각하겠단 말이냐. 이 일로 삭탈관직당할 수도 있다.”
“그놈의 삭탈관직. 제발 그 삭탈관직이라는 걸 해주십시오.”
비장의 삭탈관직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기대의 반응에 형운은 잠시 고심했다.
“아무래도 네가 오늘은 조금 예민한 것 같구나. 알았다. 잠시 쉬어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기대는 반색했다.
“쉬라면 며칠이나…….”
형운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기대의 표정이 환해졌다.
“일 년입니까?”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기대의 눈꼬리가 슬며시 내려갔다.
“한 달?”
형운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기대의 입꼬리가 주저앉았다.
“열흘?”
“한 시진 주마.”
각박한 주군의 배려에 기대는 절망했다.
“그거 아십니까?”
“무얼?”
“저하는 조선 최고의 악덕 군주가 되실 겁니다.”
“허허. 조선 최고의 성군은 못 되어도 못난 사람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구나.”
“팽례를 험하게 대하는 군주 중에 성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반대 아니냐? 팽례가 힘들수록 군주는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는 증거일 터이니 말이다.”
기대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저하, 저하께서 이렇게 열심히 하신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저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은밀하니, 후대의 누구도 저하의 노력을 알지 못할 겁니다.”
“알고 있다.”
“그럼, 적당히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누가 알아주는 게 무에 중요하겠느냐?”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형운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곳 은자원에 있었고, 밤을 새워 백성의 소리를 듣고 그에 답하였다. 그 소식을 나의 팽례인 그대가 전하였고, 그 소식을 누군가 받고 응하였다.”
“…….”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 그러니 그것으로 족하다.”
기대는 지그시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제가 기록할 겁니다. 겉으론 예의 바르고 다정하신 동궁께서 사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사실을요. 자신의 팽례를 얼마나 독하게 부려 먹으셨는지 날짜와 시간, 횟수와 내용까지 세세히, 조목조목,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정성스럽게 기록할 겁니다.”
“사사로이 사직에 관련한 기록을 하였다간…… 삭탈관직당할 수도 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삭탈관직되기 전에 제가 먼저 과로하여 죽어버릴 겁니다.”
기세등등하게 되받아치는 기대의 모습에 형운은 눈빛을 서늘하게 세웠다.
“끝내 못하겠다는 거냐?”
“감히, 저하께 고충을 토로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군.”
“네.”
기대는 팔짱까지 끼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배짱을 부렸다.
그를 무심히 노려보던 형운이 낮게 읊조렸다.
“내, 이런 말까지 않으려 하였건만…….”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간 형운이 기대의 귓가에 무어라 낮게 속삭였다.
“……!”
내내 기세를 꺾지 않던 기대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결국,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기대는 형운의 서찰을 들고 밖으로 사라졌다.
***
은자원에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형운은 멈췄던 붓을 움직여 수북하게 쌓인 문서에 비답을 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곧 아침 강연이 시작되리라.
오늘은 일이 많아 끝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형운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존현각으로 향했다.
소리도 없이 홍인모가 그의 뒤를 바싹 따라갔다.
그림자처럼 동궁의 뒤를 따르던 홍인모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걸 여쭈어도 되려나?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형운에게 물었다.
“저하, 무어라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형운이 걸음을 멈추고 홍인모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냐?”
“좀 전에 김기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옵니까? 무어라 하였기에 그 오만불손한 자가 군소리 없이 나간 것이옵니까?”
“아, 그거…….”
“네, 그거.”
홍인모의 궁금증은 깊어만 갔다.
대체 무엇일까?
그 기세등등했던 김기대를 단박에 온순하게 만든 방법.
홍인모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형운이 홍인모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이건 비밀이다. 그러니 우익위만 알고 있어야 한다.”
속삭이는 형운을 따라 홍인모의 목소리도 한껏 작아졌다.
“네, 저하.”
“내, 김기대를 협박하였다.”
“협박이라시면…….”
설마, 멸문지화라도 하겠다 하신 걸까?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나오면……?
“빈궁에게 확 일러버린다 하였다.”
“…….”
네?
무얼 잘못 들은 사람처럼 홍인모는 형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를 향해 형운은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미소를 한껏 지었다.
“저하…….”
홍인모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져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버려둔 채 형운은 존현각 안으로 사라졌다.
마치 좀전의 모습일랑 거짓말인 듯.
위엄과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왜 그러느냐?”
존현각 앞을 지키고 섰던 최치성이 홍인모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홍인모의 눈앞에 휘휘, 손을 내저으며 최치성이 물었다.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구나.”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
“꿈에서라도 내가 보고 싶었던 게냐?”
남의 속도 모르고 농을 건네는 최치성에게 홍인모가 눈매를 매섭게 치떴다.
“헛소리라도 그런 말 마라. 꿈자리 사납다.”
“죽고 싶으냐?”
“차라리 죽었다고 하면 이 상황이 이해될 것인데…….”
홍인모는 불끈, 주먹을 내보이는 최치성을 무시하고 존현각 안으로 들어섰다.
최치성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등에 바싹 따라붙었다.
“뭔데? 뭘 보았기에 그러느냐?”
“우리 저하…….”
“왜? 저하께 꾸지람이라도 들었느냐?”
형운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최치성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은근히 기대하는 그에게 홍인모의 지청구가 날아들었다.
“내가 네놈인 줄 아느냐?”
“그럼 뭔데? 우리 저하가 어찌하셨기에 그런 표정인 게야?”
“달라지셨다.”
너무도 반듯하여 옆에 있는 사람마저 답답하게 만들던…… 그리 융통성 없던 우리 저하는 어딜 가셨을까?
“뭔 헛소리냐?”
최치성의 물음은 홍인모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저하께서 달라지셨다.”
홍인모는 아침 강연이 한창인 존현각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동궁의 의견에 조심스레 반박하는 대신들과 유난히 목청을 높이는 심환지의 모습.
그런 그들을 동요 없이 응시하는 형운이 보였다.
***
같은 시각.
내내 사랑채를 떠나지 않았던 정후겸이 오랜만에 방을 나섰다.
얼마 후, 그가 모습을 보인 곳은 별채로 향한 세 번째 중문 앞이었다.
비록 옹주의 양자라 하였으나, 주상께서 총애하는 존재였다.
높은 담벼락 안, 정후겸의 집은 아흔아홉, 으리으리한 세간을 자랑하였다.
집안에 기와집이 스무 채였다.
각기 다른 양식의 정원이 일곱이었고, 못과 정자가 각각 다섯 개씩 있었다.
높지 않았으나, 작은 언덕도 갖추고 있었으니.
스스로 몸을 휘청이며 바람 소리를 내는 대숲 언덕이 그것이었다.
정후겸이 걸음 한 곳은 대숲 중앙에 자리한 목옥이었다.
“있느냐?”
물음과 동시에 정후겸은 목옥의 대청에 올랐다.
오른쪽 방문이 열리고, 이십 대 초반의 장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사내다운 이목구비.
여린 듯하지만, 굽이쳐 흐르는 물길처럼 단단함이 느껴지는 체격.
반듯한 느낌의 사내는 놀랍게도 형운을 닮아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운을 닮도록 만들어 낸 정후겸의 작품이었다.
정후겸은 공들여 만든 자신의 작품을 느른한 시선으로 감상하였다.
형운과 비슷한 체격과 용모를 지닌 사내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남사당패를 따라다니며 어설픈 재주를 팔던 사내라고 하였다.
처음 사내를 마주했을 때, 정후겸은 전율을 느꼈다.
얼핏 옆모습만 보만 동궁의 쌍생아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그날 이후, 사내를 집안에 들여 수련을 시켰다.
제법 눈썰미 좋았던 사내는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고스란히 흉내 냈다.
가짜 동궁 노릇을 하기에 미흡함이 없었다.
수련을 마친 사내는 정후겸의 명에 따라 동궁의 옷차림을 하고 패악을 저질렀다.
갖은 행패를 부리며 돈도 벌 수 있었으니.
사내에게 이보다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처음 한동안은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동궁께서 죽은 제 아비의 길을 고스란히 밟는다는 소문이 사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족적처럼 남았다.
소문이 쌓일 때마다 동궁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쏟아져나왔다.
남사당패와 어울려 지내던 시절에 비하면 한없이 안락한 일자리에 사내는 더욱 신이 나 가짜 노릇에 전념했다.
역할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이 정말 동궁이라는 착각 속에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껏 올랐던 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사내가 행패를 부리던 그 시각에 또 다른 동궁이 도성 곳곳에 나타난 기이한 일이 일어난 까닭이다.
정후겸의 계략에 맞선 형운의 전략이었다.
형운은 동궁 행세를 하는 가짜를 잡는 대신 더 많은 가짜를 사방에 풀어놓은 것이다.
‘내가 이 나라의 동궁이다.’
이 한 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등 뒤에 정후겸이 붙여준 호위까지 대동하게 다니니.
그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벌벌 떨던 사람들이 사내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이쪽에서도 동궁, 저쪽에서도 동궁이라 하니.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다 보니 진짜가 가짜가 되었고, 가짜도 가짜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동궁 행세를 하다 뭇매를 맞을 뻔도 하였다.
무릇 보는 관객이 있어야 흥도 이는 법인데.
속는 사람이 없으니, 사내의 열정도 서서히 식어 버렸다.
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후겸이 사내에게 서찰을 건넸다.
동궁전.
그 내밀한 곳에 박아둔 정후겸의 세작이 보낸 밀서.
“대감, 이 일을 계속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불만 섞인 말을 뱉었다.
일을 벌이면 벌일수록 가짜 동궁이라는 증좌만 불어날 뿐이었다.
그를 정후겸이 나른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권태로움이 가득한 정후겸의 눈 밑으로 그늘이 짙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깃든 어둠은 묘한 매력으로 상대를 짓눌렀다.
가당찮게 의견을 내뱉던 사내는 그 눈빛에 억눌러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
용서의 말은 없었다.
대신 정후겸은 엉뚱한 말을 사내에게 던졌다.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은덩이를 줄 것이다.”
“네?”
한바탕 벼락을 맞을거라 생각한 사내는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후겸의 입에선 더욱더 놀랄 말이 튀어나왔다.
“몰락한 양반에게서 사들인 호패도 주마. 내가 주는 재물과 그 호패만 있다면…… 도성 오십 리 밖에선 일평생 양반 행세를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
사내는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참으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대감을 위해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무얼 하면 말씀하신 것들을 제게 주시렵니까?
속내가 빤히 보이는 물음에 정후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서탁 위에 펼쳐놓은 서찰의 말미를 길고 하얀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
“닷새 후, 파루가 치고 성문이 열리면 잠행 나간 동궁 일행이 도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간자의 서찰에 그리 쓰여 있었다.
아무리 잠행이라 하여도 다음 보위를 이을 동궁의 행차였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 그를 지키는 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하자면 동궁의 정확한 동선과 시간은 정확해야 했다.
지금까지 지켜본바, 동궁은 늘 계획에 따라 철저히 움직였다.
이번에도 동궁은 틀림없이 서찰에 쓰인 대로 움직이리라.
“소인은 무얼 하면 됩니까?”
사내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정후겸의 속내를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내 사내의 귓가로 정후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같은 시각, 나는 오랜만에 궁궐의 어마마마와 주상전하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나설 생각이란다.”
“그럼…….”
흐릿해진 사내의 말끝에 정후겸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죽여라.”
“죽, 죽이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내의 안색이 금세 파랗게 질렸다.
“설마, 저더러 동궁을 죽이라는 건 아시지요? 무예 출중한 무관들을 새떼처럼 몰고 다니는 동궁이 아닙니까. 그런 분을 제가 어찌…….”
정후겸은 사내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말했다.
“나를 죽여라.”
“네?”
놀란 사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후겸에 붙들린 그의 손에 경기가 일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후겸은 사내의 손가락을 자신의 심장 오른쪽으로 아래로 옮겼다.
심장에서 오른쪽으로 반 치 아래.
정확히 찌른다면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으리라.
대신 많은 피를 흘리게 되겠지.
그리고 동궁은…… 평소 눈엣가시 같았던 옹주의 양자를 습격한 살인자가 되리라.
또한,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던 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사건이 될 것이다.
저희가 죽인 자의 아들이 보위를 잇게 되면 벌어질 미래의 모습.
그 두려운 미래를 보는 순간, 균열은 말끔하게 메꿔지라.
느슨해진 관계는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해지리라.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잔인하고 촘촘한 술수.
그것은 가장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자만이 설계할 수 있는 교활한 올무였다.
“정확히, 이곳! 여길 찔러야 한다. 너무 깊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얕게 찔러도 아니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비켜 찔러 내가 죽는다면…… 네게 약조한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너 역시도 사라지겠지.”
“…….”
“하지만 일만 제대로 끝낼 수 있다면, 너는 자유다.”
“만약…… 그 자리에서 잡히기라도 한다면 어찌합니까?”
“네가 가짜인 줄 아무도 모를 터이니. 감히 동궁의 옥체에 몸을 댈 자가 뉘 있겠더냐. 혹여. 잡힌대도 하여도…….”
“…….”
“걱정마라. 내가 널 풀어줄 것이다.”
정후겸의 장담에도 사내는 쉬이 결심을 내릴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과도 영원히 이별할 수 있다. 뿐이랴, 사람답게. 그것도 양반으로 살 수 있다. 어떠냐? 하겠느냐?”
재촉이 이어졌으나, 사내는 여전히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생사를 건 도박이었다.
그러나 생사를 걸 만한 일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사내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하겠습니다.”
사내의 대답에 정후겸은 그린 듯 아름답고도 잔인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그것은 승리를 자신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
닷새 후, 새벽.
“마마, 마마.”
다다다.
회랑을 울리는 다급한 발소리가 고요한 빈궁전을 가득 채웠다.
“어허, 마마께서 아직 침수 중이시거늘. 어인 소란이냐?”
번을 서던 이 상궁이 금정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루잠이 들었던 이레는 밖의 소란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등잔에 불을 켜고 매무시를 다듬었다.
“들어오너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금정이 떼구르르 구르듯 이레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마…… 놀, 놀라지 마시어요.”
하얗다 못해 파랗게 사색이 된 금정이 와들와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너부터 진정해야겠구나.”
“그게 하도 갑작스러운 소식인지라…….”
“무엇인데 그러느냐?”
이레가 물었다.
이내 금정이 와들와들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정후겸 대감, 습, 습격을 당했다고…… 하옵니다.”
“습격?”
“하온데…….”
“한데?”
“그 범인이 동궁 저하라는 소문이…….”
“……!”
이레는 퉁겨지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청마루로 나온 그녀는 동궁전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에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