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90화 (190/215)

#190. 갈까?

사랑채에 괴괴한 적막이 흘렀다.

아직 어둔 새벽.

그곳으로 가냘픈 몸피가 스며들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 그곳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존재는 화완옹주와 교전비 뿐이었다.

정후겸은 휘장 내린 동창을 응시했다.

작게 열린 동창 문틈으로 화완의 서찰이 비집고 들어왔다.

“답간(答簡)을 받아오라 하명하시었나이다.”

정후겸은 무심한 눈으로 서찰을 받아 펼쳤다.

흰 백지.

그 흔한 안부 인사 하나 적히지 않은 백지였다.

정후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서찰에 답간이라.

역시 어마마마시구나.

물음이 없음에도 답을 해야 한다.

그건 상대가 어떤 의중을 품고 있을지 모른 채 내가 지닌 속내를 모두 보여야 함을 의미했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오롯이 정후겸의 몫이었다.

어릴 적부터 양어머니가 그의 속내를 훑어낼 때 종종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방법은 무척 효과적이었다.

예전엔 답간을 요구하는 텅 빈 백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내가 무얼 또 잘못한 것일까.

그리하여 제 발 저린 아이처럼 해야 할 말은 물론이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과 끝까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할 말까지 토설하곤 했다.

‘아차’ 후회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머니께선 여전히 내가 어리게만 보이는가 보구나.”

정후겸은 긴 손가락으로 서찰을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접었다.

“감모(感冒)가 심하여 조석으로 누워만 지낸다 아뢰어라.”

“하오나…….”

“겨우 붓을 잡고 답간하려 하였으나 수전증이 일어 점 하나 찍을 수 없음을 지극히 망극해 하였다 하라.”

“대감…….”

“병증 나아지면 곧장 찾아뵐 것이다.”

“…….”

“그만 물러가라. 편편하지 않다.”

“그분이 성정, 뉘보다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이대로 빈손으로 갈 순 없나이다.”

“도로 누워야겠다.”

정후겸은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교전비의 고집과 정후겸의 모르쇠가 침묵 속을 유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인기척이 사라진 건 오시가 넘어서였다.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후겸은 굳게 닫아놓은 동창을 열었다.

사랑채 출입을 엄히 금했던 탓에 주위엔 작은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정후겸은 십학사의 회합이 있었던 그 밤을 곱씹었다.

그의 시간은 내내 그 밤에 멈춰 뱅뱅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균열을 감지한 그때를…….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일까?

이레에게 보낸 그의 무사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뒤늦게 그들이 사헌부에 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이지?

아니, 계획은 실패할 수 있다.

애초에 대단한 계획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레에게 따끔한 경고를 보내려 한 것에 불과했다.

십학사의 다른 학사들에게 보여줄 하나의 본보기.

문제는 계획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십학사의 학이 관리하는 사헌부에 잡혀갔음에도 자신이 알지 못하다니.

“집의 장무열.”

사헌부는 십학사의 학, 장무열이 실세를 잡고 있는 곳이었다.

자신이 보낸 무사들이 사헌부로 잡혀갔으면, 당연히 그곳을 관장하는 장무열이 소식을 전해왔어야 한다.

아니, 그전에 적당히 자기 선에서 손을 써서 풀어주어야 옳았다.

그러나 정작 장무열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네가 감히 내게 맞서겠다는 것인가?’

정후겸의 입가에 차디찬 웃음이 걸렸다.

언제나 무심하고 무표정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내.

학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적 없었다.

그러더니 요즘들어 서서히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

‘아마도 어머니의 뜻이겠지.’

십학사의 학, 장무열은 십학사 중 유일하게 정후겸의 의지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자였다.

오로지 어머니, 화완옹주의 뜻이었다.

그분의 의지와 바람으로 강요하듯 학의 자리를 꿰찬 사내였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은 이미 짐작한 일.

다만, 이렇듯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지난 회합에서 그가 보인 태도는 분명 적의였다.

‘어머니의 뒷배를 믿고 나와 붙어보겠단 심산이겠지.’

정후겸은 이번 일에 어머니의 속내가 묻어 있다 확신했다.

그분께선 변했다.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분의 따사로운 눈길이 어느새인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옹주의 양자가 된 이후부터 내내 그의 귓가에 속삭였던 화려한 미래.

꿈 같은 약조와 다짐을 언제부터인가 하지 않으셨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어마마마는 절대 변하실 분이 아니다.

주문처럼 되뇌던 정후겸도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욕망과 야망을 품은 어머니의 눈길.

그 눈동자에 다른 이의 모습이 새겨져 있음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엉켜버리기 시작한 것은.

탄탄대로라 생각한 길이 쪼개지고 불안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정후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려면 조급하여서는 아니 된다.

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눈에 보이는 실 끝을 잡아당겼다간 영영 풀 수 없어 잘라내야 할 매듭이 생기고 말 터이다.

정후겸은 동창 난간에 팔꿈치를 괬다.

문득 그의 뇌리로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난한 어부의 아내였던 여인.

그의 생모라 불렸던 여인.

순박한 웃음엔 그 어떤 저의도 품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

왜 지금.

오래전에 잊었다 생각한, 영영 인연이 끊어졌으니 더는 미련 두지 않으리라 생각한 그분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모든 게 귀찮아 도망가고 싶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후겸은 미련을 털어내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일은 벌어졌고, 남은 건 해결할 방책이다.

엉킨 십학사의 관계를 되돌려 놓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무엇이 실마리가 될 것인가.

어떤 일로 숨통을 트여야 할까?

이미 대화 몇 마디로 원만하게 정리할 수준은 아니다.

손가락 몇 마디가 잘려나갈 고통은 각오해야 하리라.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나리.”

중문 밖에서 청지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통이 왔습니다요.”

문이 열리고 청지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후겸은 청지기가 건넨 서찰을 빠르게 훑었다.

동궁전에 심어놓은 간자를 통해 알아낸 세세한 정보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형운의 잠행 일시와 장소, 차림새.

더불어 이번엔 가짜 동궁의 일을 훼방 놓기 위한 가짜 잠행과 진실로 백성들을 살피는 진짜 잠행의 일시까지…….

“어쩌면…….”

가짜의 행패로 진짜 동궁을 위협하려던 정후겸의 계(計)가 형운의 략(略)에 덜미를 잡혔다.

승패의 주도권이 어느샌가 형운에게로 기울어진 싸움.

그러나…….

정후겸은 간자의 서찰로 시선을 내렸다.

이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엉킨 매듭을 자르지 않고 실타래를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

누구에겐 치열하고, 다른 누군가에겐 느긋하며, 또 누군가에게 한없이 짧고, 다른 이에겐 길게만 느껴지는 하루가 끝나갔다.

낮이 기울자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유난히 밝은 달빛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레는 습관처럼 서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은랑.

형운의 부름에 그녀의 입가에 꽃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은백.

-무얼 하고 있었소?

-그냥 있었습니다. 은백은……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나갈 준비를 하던 참이었소.

-오늘도 잠행 나가시는 겁니까?

-나가야지.

-관상감에서 아뢰길, 새벽에 비 소식이 있다 합니다.

-돌아오는 길이 제법 운치 있겠군.

형운의 대답에 이레는 서탁 끝을 어루만졌다.

“그 운치, 혼자만 즐기시렵니까? 함께 즐기면 아니 됩니까?”

투정하는 아이처럼 이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만은 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서탁에 그 마음을 쓸 순 없었다.

-은랑.

갑작스러운 침묵에 형운의 걱정 섞인 부름이 서탁 위로 돋아났다.

-네, 은백.

-무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소?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사람처럼 그가 물었다.

제풀에 놀란 이레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있소.

-네?

-나는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그게 뭡니까?

이레가 물었다.

이윽고, 그리움 가득 담긴 한 마디가 서탁 위로 떠올랐다.

-그립소.

-…….

-보고 싶소.

절절한 마음이 서탁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궁궐이라는 같은 공간 속에 있음에도 두 사람이 만난 것이 까마득했다.

이런 법도, 저런 규범, 이런 사정, 저런 이유가 둘의 만남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곧 만날 겁니다.

이레는 형운을 다독였다.

또한, 자신에게 하는 위안이기도 하였다.

조만간.

곧.

그를 만나리라.

그녀는 목까지 차오른 감정을 애써 꾹꾹 내리눌렀다.

하지만…….

-이레야.

다정한 부름과 함께 서탁에 쓰인 한 마디.

-갈까?

-네?

-네가 오라 하면 내 지금 가마.

-괜찮습니다.

-역시, 안 괜찮구나.

-…….

-너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렷다. 오냐, 내 가마. 내 당장 너에게로 가마.

-은백!

황급히 형운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레는 분주히 붓을 움직였다.

-은백, 정말 오시는 겁니까?

-…….

-은백…….

-…….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이번엔…….

이번만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곁에 있어도 늘 아쉽고, 늘 안타까운 사람.

그런 사람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달려오는 만큼, 그녀도 달려가리라.

빈궁전을 나선 이레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 놀라고 당황한 궁인들이 허둥지둥 따라붙었다.

그러나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는 연인의 발길을 따라잡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마침내.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진 긴 돌다리 위.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뽀얀 달빛 아래, 다리 끝에 선 형운이 그녀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완전한 내 편.

온전한 나만의 사내.

그녀는 무람없이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널뛰듯 맥동하는 그의 심장 소리.

이토록 열심히 그대를 향해 달려왔노라.

거침없고, 거짓 없는 명징한 고백의 증좌.

형운의 입술이 이레의 이마에 닿았다.

여린 감촉이 주는 저릿한 감각에 그의 앞섶을 맞잡은 이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녀에게로 형운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조갈 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단박에 머금었다.

살풋한 살구 향과 함께 말캉한 앵두의 감촉이 그녀의 입안에 가득 들어왔다.

사르르 단침이 고였다.

꼴깍, 향기로운 과즙의 삼키듯 이레는 그의 숨결과 그만이 품은 청아한 감로를 한껏 들이마셨다.

바싹 메말랐던 심장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사나운 불길로 가득했던 가슴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쿵쿵, 머릿속을 짓누르던 아찔한 삶의 순간도 일순간 정지했다.

안식과 평화.

행복한 충만함.

혈관을 채운 팽팽한 긴장이 자취를 감추었다.

유난히 뽀얀 달빛 아래.

그녀는…….

그는…….

온전히 서로에게 충실하였다.

다리 밑을 졸졸 흐르던 물줄기가 숨을 죽였다.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던 바람마저도 조심조심 제 몸짓을 한껏 움츠린 채 두 사람을 비껴갔다.

***

주인 없는 이레의 처소.

내내 고요하던 서탁 위로 몽글몽글 검은 물기가 솟아올랐다.

한데 뭉치고, 다시 여러 갈래로 흩어지길 반복하던 물방울은 곧 글씨가 되었다.

-만났을까?

화의 필체에 악의 악필이 따라왔다.

-만났겠지.

-만났을게요.

-만나긴 개뿔, 백귀들 주제에 만나긴 뭘 만나?

예까지 동조하였건만, 상은 부득불 반대의견을 냈다.

급기야 악의 지청구마저 붙었다.

-저 진상. 저 아이들은 백귀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저 못된 심보는 어째 한번을 순순히 수긍하지 않는 건지.

-그리 믿지 않으면서도 내내 서탁을 떠나지 않으니. 나는 오히려 그 이유가 더 궁금하오.

예의 궁금증에 상은 벌컥 성화를 냈다.

-갈 거다. 그렇지 않아도 두 번 다시 안 하려던 참이다.

악이 그를 놀렸다.

-개가 똥을 끊지. 서탁질 끊겠다는 네 말, 이번에 들으면 꼭 일천 번째다.

화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나는 이천 번하고 스무 번은 더 들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야.

-이것들이…….

-밤도 깊었고, 이제 구경거리도 없으니, 잠이나 자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안질이 생겨 애를 먹는 참이라.

시큰둥해진 악이 작별을 고했다.

상이 곧바로 응답했다.

-나는 아직 안 졸리다.

아랑곳하지 않은 대답이 줄을 이었다.

-다들 좋은 꿈들 꾸시오.

-나 역시 곤하군.

악이 떠난 후, 예와 화가 차례로 서탁을 떠났다.

-이놈들아, 내 말은 콧구멍으로 듣는 것이냐? 너희만 자면 돼? 나는? 내가 여기 있는데……. 나는 졸리지 않아.

상이 투정을 부렸지만,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갔냐?

-…….

-진짜 다 간 게냐?

재차 묻는 물음에도 서탁은 침묵했다.

-다 갔구나. 정말 갔구나. 나 할 말이 있었는데…….

상의 글이 이어졌다.

-나…… 정말로 서탁질 끊어야 할지도 모른다.

서탁에는 여전히 쓸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놈들아, 내가 이놈의 서탁질 정말 때려치우게 되었단 말이다.

상은 무에 역성이 났는지, 떼쟁이 아이처럼 버럭질을 해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지금껏 서탁에서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어조로 상이 글을 썼다.

-다들 그간 즐거웠다. 아느냐? 사람에겐 네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 즐거운 마음과 유쾌한 놀이가 그것이라 하였다. 내 좋은 시절 이곳에서 너희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정취로 마땅히 마음 즐거웠으니, 참으로 유쾌한 놀이를 하였구나.

상의 긴 이야기가 서탁을 가득 메웠다.

비록 보는 이 없으나, 그는 이레에게 남기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이야, 사람 사는 인생이란 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는 일이나 마찬가지니. 부디 불손…… 아니, 은백과 어울려 타고난 네 명운을 다 하길 바란다.

서탁은 상의 글을 단숨에 머금었다.

잠시 고요가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상의 마지막 글이 이어졌다.

-부디 모두…… 성불하시게들.

진실이 담긴 상의 글은 고스란히 서탁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온점마저도 남긴 없이 머금은 서탁은 본연의 빛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소 무심하고, 무정한 모습.

교교한 달빛만이 상의 마음을 부드러이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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