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그해, 봄날
햇발이 닿은 자리마다 장한 생명들이 꿈틀거렸다.
잎을 틔운 여린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성큼성큼 자랐다.
분주한 자연의 섭리만큼이나 사람 사는 세상도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특히, 궁궐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떼와 시기에 맞춰 새로이 제작해야 하는 상의원의 장인들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봄맞이할 때면 매년 겪는 분주함이건만.
올해 유난스레 바쁜 까닭은 화완옹주 전각에 들일 병풍 때문이었다.
본디 옹주께선 흐드러지게 핀 모란과 나비가 어우러진 병풍을 들이시곤 하였다.
청상이 된 옹주께서 궁에 거처를 잡은 이후에도, 그 취향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상의원에선 자연스레 화사한 모란과 호랑나비가 팔랑이는 병풍을 준비했건만.
난데없이 장생 병풍을 들이라는 옹주의 명이 떨어졌다.
장생 불사를 의미하는 열 가지 물상이 수자 놓인 여덟 첩 병풍이 준비되기까지 꼬박 두 달의 시간이 소요됐다.
“참으로 보기 좋구나.”
두 달간 장인들이 밤을 새운 보람이 있었다.
늦은 밤.
화완의 처소로 장생 병풍이 들어가는 순간, 무심하던 옹주의 입가에 모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병풍을 배경으로 앉았다.
이제야 격에 맞는 옷을 입은 듯, 군림하는 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래, 군림.
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달콤한 단어인가.
십장생을 의미하는 십학사.
그들이 조선을 이끄는 실세라면 자신은 그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였다.
드러나지 않은 열한 번째 학사.
십학사의 진정한 주인.
그것이 자신임을 화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리며 양옆으로 늘어졌다.
일찍이 권력이란 사내들의 영역이라 구분 지었으나, 그것은 진정한 권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의 입방아였다.
권력의 세상에선 사내와 여인의 구분이 없었다.
그저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로 구분될 뿐.
한껏 도취된 그녀는 고고한 몸짓으로 보료에 기대었다.
가볍게 손짓하자 눈치 빠른 어린 궁녀가 달려와 그녀의 팔과 다리를 야무지게 주물렀다.
몸에 쌓인 피로가 눈 녹듯 녹았다.
화완은 스르륵 눈을 감고 잠시간 노곤한 기운에 몸을 맡겼다.
근래 들어 궁은 평화로웠다.
모든 것이 물처럼, 구름처럼 그리 안일하게 흘러갔다.
평온함이 지나쳐, 무료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온한 일상이 껄끄러워졌다.
목 안에 걸린 가시처럼…….
그녀가 알아야 할 무언가가 중간에 차단된 듯한 불쾌한 예감.
그리고 그 예감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마마…….”
곁방의 사잇문을 뚫고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 밖의 상황을 살피고 오라 명을 내린 것이 아침나절이었는데, 자정이 가까워진 후에야 돌아왔다.
화완은 어린 궁녀를 손짓으로 물렸다.
“무에, 알아볼 것이 많았더냐?”
어찌 이리 지체되었느냐, 질책 섞인 물음이었다.
곧 대답이 돌아왔다.
“지난밤, 십학사의 회합이 무산되었사옵니다.”
“무산?”
예상치 못한 보고에 화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건만.
화완은 눈을 감고 감정을 갈무리했다.
“연유가 무엇이더냐?”
“만사여의가 십학사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하옵니다.”
“그래……?”
“작은 언쟁이 있었다 하옵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회합에 참석한 학사들이 돌아갔사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낮은 한숨과 탄식으로 고요를 깬 화완이 입을 열었다.
“알았느니.”
눈을 감은 화완은 보료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곁방의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사헌부 뇌옥에 십학사 소속의 무인 셋이 갇혀 있다는 전언이옵니다.”
“……쯧쯧.”
이제야 입안을 맴돌던 껄끄러움의 연유를 찾았다.
상궁이 물고 온 소식은 마뜩잖았으나, 마음에 깃들었던 불길한 예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 성화도 일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화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건…… 무소식(無消息).
십학사의 회합이 무산되고, 그들의 무사가 사헌부에 잡혀가는 큰 소동이 있었음에도, 그 어떤 소식도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해와, 사슴.
둘 중 누구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무어냐? 무슨 꿍꿍이 속셈이냐…….”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화완이 눈을 뜨고 사잇문을 바라보았다.
문풍지에 그려진 상궁의 그림자는 여전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더냐?”
궁 밖에 머물렀던 시간만큼이나 상궁은 많은 소식을 물고 온 모양이다.
“하옵고…….”
문 너머로 주춤,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화완은 한쪽 눈썹을 버릇처럼 휘었다.
“무슨 일인데, 뜸을 들이느냐?”
“금일 묘시, 빈궁전의 궁녀들이 호신의 무예를 배울 거라 하옵니다.”
“호신의 무예?”
“네.”
머리를 조아리는 상궁의 그림자에 화완은 한쪽 입아귀를 비틀었다.
궁녀들에게 호신의 무예를 가르친다?
빈궁이 무에 착각해도 단단히 하는 모양이다.
자신이 선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모르고.
아슬아슬한 칼날 위에 있음을 까맣게 모른 채 무료할 만큼 평온한 일상에 묻혀 소꿉놀이라도 하려는가 보다.
모든 세상 만물이 제 원하는 뜻대로 흘러간다 하여 ‘만사여의’라는 별칭이 붙었다더니. 이 궁에서도 그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화완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놔둬라. 누릴 수 있을 때 실컷 누려야지.”
그래야 훗날 바닥으로 고꾸라질 때 더 고통스러울 터.
화완은 빈궁전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찰나.
“호신법을 가르칠 무관이 사헌부의 장 집의라 하옵니다.”
상궁의 이어지는 보고가 화완의 귓속을 사납게 긁어냈다.
내내 무심하던 얼굴에 흉한 균열이 생겼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묻는 목소리에 잔경련이 담겨 있었다.
화완은 잡힐 듯, 잡힐 듯, 좀처럼 잡히지 않는 사내를 뇌리에 그렸다.
장무열.
이름 석 자를 떠올리는 순간, 유난히 넓고 무심한 사내의 뒷모습이 뒤따라왔다.
감정 없는 석상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내.
세상을 준다 하여도 미동조차 않는 그 사내.
그 사내가 누구에게 무얼 한다고?
보료에 기대고 있던 화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분노의 불꽃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녀의 눈동자를 메웠다.
***
묘시(卯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이른 새벽부터 궁이 술렁거렸다.
궁녀들의 속닥거림과 발소리가 빈궁전을 맴맴 돌았다.
은근한 설렘과 호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톰해졌다.
빈궁전 대청마루에 의자가 놓이고, 돌계단 아래에는 빈궁전 소속의 나인 대여섯이 쭈뼛거리며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전각의 담벼락 너머, 까치를 닮은 머리통들이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다른 전각의 궁녀들이 꽁지발을 하고 빈궁전의 사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푸른 당의를 입은 이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행여 호신의 기법을 배우기에 거추장스러울까, 최소한의 치장만을 한 빈궁에게선 정갈한 위엄이 느껴졌다.
담벼락 너머로 빠꼼 훔쳐보던 머리통들이 약조한 듯 일제히 사라졌다.
마당에 서 있던 궁녀들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이레는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오른편에 금정이 시립하고, 등 뒤론 별궁삼파가 병풍처럼 늘어섰다.
“장 집의께선 아직인가?”
이레의 물음에 금정이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이 나가서 살펴볼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
대답이 채 끝나지 않았건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금정이 쪼르르 대청마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단숨에 빈궁전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정 상궁은 쯧쯧 혀를 찼다.
“저런 촐랑이를 보았나.”
정 상궁은 금정의 조급한 행동이 마음에 차지 않은 듯 연신 혀를 찼다.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호기심이 많을 테지요.”
모 상궁의 한 마디에도 정 상궁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리긴 뭐가 어리다고 그러오. 나 때는 저리 경거망동했다간 큰 상궁 마마님께 경을 맞았다오.”
“모두 옛날 말이지요. 지금 아이들에게 그런 소리 해 봤자, 뒷방 늙은이 소리만 들을 겁니다.”
이 상궁이 자신의 어깨로 정 상궁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속삭였다.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은…… 쯧쯧.”
양옆에서 한마디씩 거드니.
더는 입찬소리할 수 없어진 정 상궁은 주름진 입술을 뾰족하게 모았다.
부루퉁해진 노파는 의자에 앉은 이레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정 상궁…….”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이레가 정 상궁을 불렀다.
“네, 마마.”
정 상궁은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 아이들이 그 아이들인가?”
“네, 빈궁마마.”
노파는 한껏 낮춘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빈궁전 나인 중 골격이 튼튼하고 재빠르며, 영리한 아이들만 추렸사옵니다.”
“행여 이번 일을 벌인 속내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겠는가?”
묻는 이레의 목소리에 근심이 서리처럼 끼어 있었다.
사실, 그녀가 장무열에게 이런 엉뚱한 요청을 한 건 이유가 있었던 까닭이다.
십학사에겐 있었으나, 이레와 형운에게 턱없이 부족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동궁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을…….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형운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양성할 수 있었을 것을…….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그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을…….
늘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한탄한다고 없는 시간이 만들어질 리도 없는 법.
이레는 작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작은 무예라도 익히는 것.
기꺼이 곁을 맡길 수 있도록, 든든한 자신의 호위를 만드는 것.
그래서 빈궁전의 궁녀 중에서 쓸만한 사람들을 추려내어 가르치려는 것이다.
조선 최고의 무사 중 한 사람이라 칭송받는 장무열이 스승이 되어 가르친다면, 절정의 고수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흉내는 낼 수 있으리라.
그리된다면 형운도 조금은 안심하리라.
적어도 큰 걸음으로 나아가는 그의 행보에 방해되진 않으리라.
그래서 이런 엉뚱한 일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걱정도 깃들었다.
근심하는 이레에게 모 상궁의 대답이 들려왔다.
“빈궁마마, 저희 세 늙은이의 나이를 모두 합하면 이백 년은 족히 넘사옵니다.”
“늙은 게 무에 자랑이라고…….”
모 상궁의 말에 이 상궁은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콱!’
‘그 입 좀 다무시오.’
모 상궁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이 상궁을 겁박했다.
중앙에 선 정 상궁은 이 상궁의 두툼한 발등을 지그시 밟았다.
‘아픕니다.’
‘아프라고 밟았소.’
두 노파가 조용히 아옹대는 와중에도 모 상궁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이 늙은이들 속에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 똬리를 틀었고, 구미호 꼬리가 수백 개는 더 달려 있사옵니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은 물론이고 궁중전(宮中戰)까지 모두 겪은 저희들이옵니다. 이런 일은 홍시 발라 먹는 일보다 더 쉽사옵니다.”
“그러니 걱정 말라?”
“네, 마마. 게다가 중궁전은 물론이고 혜빈궁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시었사옵니다. 내명부에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법도와 예법을 어긴 것도 아니니, 근심 마옵소서.”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였는가, 궁금해하진 않으시던가?”
“궁금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모처럼의 구경에 신명도 났답니다.”
이레의 물음에 답한 것은 낯선 음성이었다.
어느샌가 돌계단 아래에 중전과 중궁전의 궁인들이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구경꾼의 등장.
“중전마마!”
놀란 이레는 한달음에 대청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
빈궁전 대청마루에 새로이 의자가 놓였다.
이레는 중전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른 시간에 어인 걸음이시옵니까?”
“무료한 궁에 모처럼 재미난 구경이 생겼는데, 놓치면 나만 손해지요.”
“송구하옵니다. 괜한 일을 벌여 내명부를 시끄럽게 하였나이다.”
“아닙니다. 그런 일이라면 내 어찌 이 일을 허락하였겠어요.”
이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형운이 허락했다 해도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 용인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중전은 흔쾌히 이레의 청을 들어주었다.
“저 아이들을 보세요.”
이레는 중전의 시선을 좇아 마당을 메우고 있는 궁녀들을 바라보았다.
중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기 맨 오른쪽에 있는 아이는 열너댓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군요. 저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봐야 기껏 스물 안팎일 겁니다.”
“…….”
“한창 궁금증도 많고 호기심도 많을 때 아닙니까. 그런 아이들이 궁이라는 높은 담벼락 안에 갇혀 매일 쳇바퀴 돌듯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조금은 가엾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네, 그래서 허락한 거랍니다. 저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 하나쯤 만들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궁녀들을 바라보던 이레는 중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백자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는 잔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깊고 선명한 눈매와 의연함이 느껴지는 콧날.
그리고 시리도록 붉은 입술.
그린 듯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내명부 권력의 정점인 중궁전의 주인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녀 역시 여인이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젊은 여인…….
열여섯 어린 나이로 예순이 훌쩍 넘은 임금과 혼인하였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국모라는 지고지순한 자리의 주인이 되었으나, 자기 인생의 주인은 될 수 없는 쓸쓸한 운명을 예감하였으리라.
어쩌면, 궁녀들을 가엾게 바라보는 그 눈빛으로 매일 아침 면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으리라.
“중전마마…….”
구중궁궐.
거대한 아홉 개 궐문 안에서의 삶.
화려하지만 생기를 잃은 일상에서 느끼는 모처럼의 설렘인지라.
중전의 하얀 뺨에 은은한 열기가 번져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
이레는 자신의 욕심으로 내명부의 위상을 손상한 건 아닐까 하는 염려를 마음 한쪽으로 미뤄두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중전이 동그란 시선을 던졌다.
“듣기로는 묘시라고 하던데. 어찌 무관은 안 보이는 겁니까?”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이레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은 어느덧 묘시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영 탐탁잖아 하더니, 정말로 안 올 작정인가?
이레는 전각의 거대한 솟을대문을 응시했다.
활짝 열린 대문 앞에는 지키는 문군사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무리였나 보옵니다.”
정 상궁이 한숨 섞인 탄식을 흘렸다.
장무열이 뉘던가.
명문가 집안의 사내였다.
괜한 일에 휘말려 가문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진 않으리라.
어디 그뿐일까.
장무열의 뒷배에 화완옹주께서 자리하고 있으니.
행여 그분의 눈 밖에 날 일을 삼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처럼 기대했거늘…….”
중전은 아쉬움을 덜어내듯 치맛자락을 털었다.
빈궁전 담벼락 너머로 빼곡했던 나인들의 머리통 숫자도 하나둘 줄었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중전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순간.
“왔습니다.”
대문 밖으로 작은 그림자가 또르르 달려 들어왔다.
숨이 목까지 차오른 금정이 재차 소리쳤다.
“빈궁마마, 그분이 오셨사옵니다.”
“정녕, 왔단 말이냐?”
애써 태를 내지 않았지만, 이레의 커다란 눈망울 아래로 실망이 그늘지고 있었더랬다.
그녀는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솟을대문을 응시하였다.
이내 빈궁전 문턱 안으로 철릭을 입은 무관(武官)이 들어섰다.
사헌부의 집의, 장무열이었다.
***
“참으로 가관이구나.”
빈궁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누대 위.
화완은 바람 소리가 나도록 휙 치맛자락을 돌렸다.
새치름히 발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도깨비불 같은 살기가 둥둥 떠올랐다.
빈궁전으로 들어서는 장무열의 모습을 기어코 보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제 눈을 당장에라도 도려내고 싶었다.
언제나 그녀에겐 거부의 몸짓을 하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 사내에게 저리 허술한 면모가 있을 줄 몰랐다.
왜 내가 아니고 빈궁일까.
왜 내가 아니고 내 오라비의 며느리일까.
왜 내가 아니고……!
같은 어미와 아비에게서 태어났다.
총명함을 따지자면 왕의 자식 중에서 자신을 넘어설 자는 없으리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니 스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의 오라비는 되었고 그녀는 안되었다.
아니,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의 법도가 그러했고, 궁궐의 규범이 그러하였으므로.
몸속에 흐르는 피는 같아도 왕의 아들은 다음 보위를 승계받을 수 있었고, 여식은 공주도 아닌 옹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불공평했다.
불합리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그래서 질투했다.
그래서 간절히 탐하였다.
우뚝, 걸음을 멈춘 화완은 고개를 돌려 빈궁전을 응시했다.
“그런데 어이하여 그대마저 날 외면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무열에게 따지듯, 사납게 말끝을 쏘았다.
문득 무심한 아비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완아, 그러지 마라.’
아비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그녀에게 언제나 말했다.
‘네 것이 아닌 건 탐하지 마라.’
화완은 고개를 저었다.
“탐할 겁니다.”
‘원한다고 하여 모든 걸 가질 순 없느니.’
“가질 겁니다.”
‘완아, 네게 허락된 것에 만족하거라.’
“싫습니다, 아바마마.”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화완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갖질 못하면 더욱 탐이 나니. 기어코 가질 겁니다, 빼앗을 겁니다. 설령, 그것이 피를 부른다고 하여도……. 그 피가 내 혈육의 것이라 하여도…….”
낮게 읊조리는 화완의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