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반전 매력
-뭘 어찌하랬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악이 물었다.
상의 당당한 대답이 서탁을 메웠다.
-이쯤 되었으면 이판사판이니. 언제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한 판 붙으라 했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치긴 누가 미쳐?
-미쳤지, 그럼 제정신으로 그런 조언을 했다는 것이야? 전쟁을 하려면 먼저 지피지기해야지. 나를 알고 적을 제대로 파악해도 이길까 말까한 것을. 아직 적들의 정체도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 선전포고부터 하라고 하면 어쩌란 것이냐?
-흥, 전쟁은 실전이야. 서탁 앞에 앉아 지피지기만 하다가 언제 경험을 쌓겠느냐?
-이런 화상을 보았나. 그래도 잘했다고 박박 우기는군.
-내가 못한 건 뭐냐?
-이런…….
악의 지청구가 이어지려는 찰나.
화가 끼어들었다.
-모처럼 아이와 은백이 승기(勝機)를 잡았으니, 이 기세를 몰아서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쩐 일인지 화가 상의 의견에 동조했다.
악이 어이없다는 듯 글을 휘갈겼다.
-얼씨구, 화까지 정신이 나갔구나. 그간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내 최측근들 회합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큰 사건이라도 생긴 것이냐?
-큰 사건이랄 것이 무에가 있겠소. 다만, 나 역시 이번엔 상의 의견에 동조하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하지 않았소. 지금 아이가 상대하는 자들이 뜻밖의 일로 우왕좌왕할 터이니. 이 기회를 놓쳐선 아니 된다 생각하오.
예까지 거들고 나서니, 악은 기세가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허허, 거참, 예까지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군. 그나저나 아이가 잘하는지 걱정이로다.
악의 말을 끝으로 서탁에 고요가 흘렀다.
비록 서로 의견은 달랐으나, 이레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한결같았다.
***
같은 시각.
십학사의 회합이 있는 안가에서도 깊은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서탁과는 결이 다른 고요였다.
서탁의 고요는 걱정과 염려가 담긴 침묵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서로를 향한 팽팽한 견제와 서늘한 날카로움이 가득한 침묵이었다.
너울을 쓴 이레와 정후겸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응축된 공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웠다.
숨 막히는 고요를 깬 건 정후겸이었다.
“지금……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였소?”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듯한 눈빛.
재차 확인하는 정후겸을 향해 이레는 단호히 대답했다.
“네, 이번엔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해의 눈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러나 미세한 동요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다시 평소의 나른한 모습을 되찾은 정후겸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물 학사께선 무언가 오해한 듯하오.”
“제가 무얼 오해했는지요?”
“십학사의 사병을 키우는데 자금을 동원해 달라는 말, 그건 부탁이 아니오.”
“…….”
“그건, 요청이오. 또한, 물의 자리를 차지한 대가로 그대가 짊어져야 할 당연한 책무이기도 하오.”
“책무라 했습니까?”
“그렇소. 만사여의, 그대를 십학사의 학사로 받아들인 건 그대가 가진 재력 때문이었소. 그러니 우리 십학사와 함께 하고 싶다면 학사의 책무를 충실히 이행해 주시오.”
“그렇군요.”
이레는 수긍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해 학사의 책무는 무엇입니까?”
이레의 물음에 정후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껏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해 학사께선 이 십학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저기 있는 구름 학사는 조정의 대신들에게 십학사의 의지를 전합니다. 송(松) 학사의 책무는 유생들과 지방에 있는 향리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지요. 바위께선 뒷골목의 세력을 규합하고, 사슴 학사는 기루의 기녀들을 움직여 정보를 모으고 전달합니다. 학 학사는 물론 영지 학사를 비롯한 대나무 역시 각기 정해진 역할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레는 거북에게로 향했다.
“저기 앉아있는 거북 학사도 하는 일이 명확합니다.”
“그렇쥬. 나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는 기가 멕히게 잘 죽이쥬. 사람 잡는 백정 중 나가 조선 최고 아니겠슈.”
이레는 박진봉의 소름 돋는 너스레를 뒤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해 학사께선 십학사를 위해 무얼 하십니까?”
“설마…… 정말 몰라 묻는 것이오?”
“제 식견이 얕아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알려주시겠습니까?”
이레를 비롯한 나머지 학사들의 눈길이 정후겸에게로 집중되었다.
피식, 정후겸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학사들의 시선을 하나씩 거둬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십학사의 뜻을 한데 모으고 있소.”
짓누르는 듯한 그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임금의 귀가 되고, 눈이 되고, 입이 되오. 그 말인즉…….”
정후겸의 상체가 이레를 향해 기울었다.
이레와 그와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검은 너울 너머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정후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이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답이 궁금한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후겸의 음성이 이어졌다.
“왕은 내가 들려주는 세상만을 보고, 듣고, 믿으니! 내 생각이 곧 임금의 생각이고, 내 의지가 곧 임금의 의지란 뜻이오.”
정후겸을 향한 임금의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
그것은 그의 막강한 무기였다.
그의 몇 마디 말에 정승과 판서가 바뀌었다.
어디 그뿐일까.
십학사의 해가 된 이후, 팔도 곳곳의 관직을 사고팔았으니.
한낱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지금은 하늘을 나는 새라도 떨어트릴 권세를 지닌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세월이 긴 탓이었을까?
정후겸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말을 뱉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
이레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정후겸이 보여주는 자신감.
그것은 자신감을 넘어선 자만이자 교만이었다.
“그렇군요…….”
이레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정후겸의 기세를 밀어내듯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가 오해했습니다.”
이레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오해라고 했소?”
“십학사가 조금이나마 이 나라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크나큰 오해.”
“무어라?”
정후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레는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학사들 개개인의 이해와 실리가 존재하긴 했으나, 적어도 이 조선을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대의는 있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착각이었습니다. 어쩐지 이 십학사가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한 조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군요.”
“말이 지나치오.”
“이런, 제가 실언을 했나 봅니다. 기분이 상하였다면 이해해 주십시오. 요즘 수월을 증축하는 일로 자금 사정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조금 예민해졌습니다.”
변명을 곁들인 이레의 사죄에도 정후겸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그녀로 인해 학사들의 가슴에 불만이 씨앗을 뿌렸다.
거북한 공기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여기저기서 언짢은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보다 못한 듯 이레가 다시 나섰다.
“제가 자리를 껄끄럽게 하였습니다. 이런 심정으론 아무래도 무언가를 논하기 어려울 듯한데. 오늘은 이만 파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물 학사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기다렸다는 듯 구름이 몸을 일으켰다.
카랑카랑한 음성만큼이나 꼿꼿한 성정인지라.
방을 나가는 그의 몸짓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험험. 나도 이만…….”
소나무가 서둘러 구름의 뒤를 쫓았다.
남겨진 학사들은 연신 해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전전긍긍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만 회합을 파하겠소.”
해가 선언했다.
제일 먼저 학이 방을 나갔고, 다른 학사들 역시 주춤거리며 뒤를 따랐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레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해가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라도 있소?”
“…….”
“왜? 이제 와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변명이라도 하려는 게요?”
“그럴 리가요.”
검은 너울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윽고 조용하고도 단정하게 이레가 속삭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상심하긴 이릅니다.
십학사라는 이 견고하고도 거대한 집단을 다 뺏고야 말 겁니다.
상심은 그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뒷말을 삼킨 이레는 정후겸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어디선가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말끔하게 씻은 달이 뽀얗게 대지(大地)를 밝혔다.
“달빛이 참으로 곱구나.”
희석된 어둠 저편.
봄밤이 어렴풋이 자태를 드러냈다.
***
텅 빈 안가에 정후겸만이 남았다.
그는 이레가 앉았던 물의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려들었다, 그녀의 의도된 도발에.
정후겸은 미간을 한데로 모였다.
고작 그따위 농간에 놀아나다니.
훼손된 자존심이 그를 뜨겁게 했다.
“감히…… 감히…….”
김이레.
만사여의이자 이 나라의 빈궁이라 하지만 그에겐 하루살이만큼 하찮은 존재였다.
언제고 자신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 있는…….
필요할 때 이용하고, 가치가 없어지면 언제고 내칠 수 있는 존재.
그런 그녀가…… 지금 그를 흔들고 있었다.
관계의 칼자루를 쥔 쪽은 자신이라 생각했건만.
이레의 칼날이 제 목덜미에 닿을 때까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꼬인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무엇보다 문제인 건…….
십학사 내에서 절대적이었던 그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화완의 입김이 들어갔다곤 하지만, 십학사의 학사들 대부분을 선택한 건 정후겸, 자신이었다.
그가 택한 자들이 자신에게 반(反)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젖는 줄도 모르는 사이, 십학사가 젖고 있었다.
저 물에게…….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새로운 구름은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을 지녔다.
학의 의뭉스러움은 끝을 보이지 않았고, 소나무와 바위의 역시 속내를 알 수 없음은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영지와 대나무도 각자의 처신을 저울질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거북과 사슴은…….
한번 시작된 의심의 가지는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다.
그러다 한순간.
“하하하!”
정후겸은 불현듯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만사여의, 네가 원한 게 이런 것인가?”
끊임없는 의심.
저마다의 이득과 손실을 저울질하고 원초적인 습속에서 비롯된 배신.
이레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심리를 자극했다.
그리하여 정후겸이 자신이 만든 완벽한 세계를 의심케 하려 했던 것이다.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엔, 맹랑하기 그지없었다.
정후겸의 눈동자에 느른한 살기가 서렸다.
그는 허공에 매달린 매듭을 잡아당겼다.
차랑차랑.
맑은 방울 소리와 함께 검은 무복 차림의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십학사의 수장인 해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세 명의 호위.
그들에게 정후겸이 명령했다.
“학사 물이 십학사의 율법을 어겼으니.”
감히 해의 권위에 도전하였으니…….
“경고(警告)로 율법의 엄중함을 알게 하라.”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오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언행을 했는지 알도록, 뼛속 깊숙이 각인시켜라.
흑의인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정후겸은 평소처럼 여유롭고도 나른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술잔을 기울였다.
***
얼마 후.
소박한 치장을 한 사인교가 시전의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가마를 멘 네 명의 가마꾼 외에도 앞뒤로 호위하는 무사까지.
치장에 비해 가마를 둘러싼 사람의 수가 범상치 않았다.
가마는 넓은 대로(大路) 대신 인적이 드문 뒷길로 재게 움직였다.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얼마나 갔을까?
앞에서 길잡이를 하던 호위무사, 천호가 갑자기 가마를 멈췄다.
숨을 죽인 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잘못 들었나……?”
천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무슨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그러나 캄캄한 골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는 멈췄던 가마를 다시 움직였다.
가마꾼들은 수월을 향해 다시 바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은밀히 가마를 쫓던 흑의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손끝이라도 까딱했다간, 바로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니.”
나지막하지만,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음성.
시험 삼아 움직여볼까, 어쭙잖은 객기를 부리려는 찰나.
타탁!
사나운 기세가 전신으로 짓쳐들어오는가 싶더니, 돌연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뻣뻣해진 흑의인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
전광석화(電光石火).
흑의인을 제압하는 장무열의 모습은 그야말로 서책에서 보던 글자를 현실로 보여주는 듯했다.
“역시 대단합니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장무열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긴 어떻게……? 가마의 호위가 엄중하여 거기 타고 계신 줄 알았는데…….”
“늘 뒤를 조심하라.”
“네?”
“어릴 적부터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오늘 회합을 그리 망쳤으니, 뒤통수가 여간 가려워야지요. 이럴 땐 그저 몸 사리는 게 최고라고 배웠습니다.”
“주변에 좋은 어른들이 많이 계신가 봅니다.”
“좋은 동료들도 많습니다.”
이레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장무열의 발치를 응시했다.
혼절한 흑의인이 널브러져 있었다.
장무열은 짐짓 딴청을 부리며 발치에 있는 흑의인을 슬쩍 밀어냈다.
그 모습이 마치 입가에 밥풀을 잔뜩 묻힌 누렁이가 짐짓 아무것도 안 먹은 시늉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풀썩, 웃음을 터트렸다.
장무열의 눈썹이 휘어졌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낸 그가 이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용무가 바빠 이만…….”
바삐 등을 돌리는 그를 이레가 잡았다.
“그거 아십니까?”
“…….”
“궁녀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
돌아보는 그에게 이레가 대답했다.
“어느새 닷새입니다.”
“하오나…….”
“하긴, 조선 최고의 무사에게 호신법을 배울 절호의 기회이니. 누군들 기대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럼 아침에 뵙지요.”
“그럴 일은 없을…….”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제가 뱉은 말이 아닙…….”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 하질 않았습니까.”
번번이 말허리가 잘린 장무열이 빠른 어조로 되받아쳤다.
“이렇게 억지를 부리실 줄 몰랐습니다. 저하께서 마마의 이런 모습을 알게 되시면 뭐라 하실까, 걱정입니다.”
이번엔 끝까지 했다.
승리의 미소가 장무열의 입가에 피어날 찰나.
“반전 매력 저는군.”
장무열의 귓가에 저음의 음성이 꽂혔다.
이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빛을 등진 채 자신과 이레를 바라보는 이는 분명 형운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보면 모르느냐. 망나니짓하고 돌아가는 중이다.”
“네?”
어리둥절한 장무열과는 달리, 이레는 태연하게 형운을 맞이하였다.
“좀 전에 반전 매력 전다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알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미혹하니.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은랑의 매력에 내 푹 절여졌다오.”
“그런 말씀도 하실 줄 아십니까?”
“망나니짓 하다 보니, 이리저리 배우는 게 제법 많소.”
“오늘도 망나니짓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레의 말에 형운은 싱긋 미소 지었다.
망나니짓이라니.
예전의 그였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고, 지켜야 할 것이 많아졌기에 못 할 일이 없었다.
그가 이 괴상한 행동을 시작한 것은 도성에 돌기 시작한 소문 때문이었다.
동궁의 미행이 잦아졌다 하였다.
술에 취한 동궁과 동궁의 일행에게 봉변을 당한 여인이 한둘이 아니라 하였다.
어느 날엔 길 가던 행인을 이유 없이 뭇매질하고, 또 다른 날엔 남의 집 귀한 장독을 모조리 깨부수었고, 시전의 물건을 멋대로 가져가는 패악을 저질렀다 하였다.
소문은 끝이 없었다.
급기야 동궁의 허물을 질책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올라왔다.
때마침 목격자도 나타났다.
목격자는 패악의 현장에서 주운 옥관자를 증좌로 내밀었다.
왕과 왕세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옥관자라…….
연로한 왕께서 궁 밖 출입 안 하신 지 오래되었으니, 동궁의 소행이 확실하다 하였다.
모두 억울한 모함이었다.
가짜가 만들어낸 명백한 거짓.
그러나 하필이면 형운이 잠행을 나가는 밤에만 벌어진 사건인지라.
의심하는 눈길이 더욱 깊어졌다.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왕세자를 모함할 때와 똑같은 수법.
형운은 묵묵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제일 먼저 동궁전에 있는 적들의 세작부터 가려내야 했다.
잠행의 일시는 물론이고 형운의 복색에 관한 정보마저 정확히 넘겨주는 자가 있었다.
품 안에 칼을 안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형운은 팔자에도 없는 망나니짓을 시작하였다.
물론, 피해당하는 상대와 미리 합을 맞춘 망나니짓인지라.
망나니는 있어도 그 일로 피해당한 사람은 없었다.
대신 적들은 혼란스러우리라.
가짜가 해야 할 패악질을 진짜가 나타나 먼저 하고 있으니.
어디 그뿐일까.
한날, 한시, 똑같은 복색을 한 여러 명의 동궁이 도성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사건이 벌어진 자리마다 어김없이 옥관자가 떨어져 있으니.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동궁의 망나니짓’이 아닌 ‘동궁’에게로 쏠렸다.
누가 진짜 동궁이고, 누가 가짜 동궁이란 말인가.
아니, 지금 도성을 휘젓는 망나니들 모두 가짜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동궁이 저지른 망나니짓 역시 가짜 동궁의 소행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난날, 왕세자의 비행 역시 삿된 무리가 만든 억울한 누명일 수 있다는 의구심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원하는 바,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잦은 잠행이 마냥 고된 것만은 아니었다.
형운은 걱정하는 이레의 손을 잡았다.
“은랑이 하는 일에 비한다면 내 망나니짓이 무에 대수겠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저자의 표정을 보니, 내 노력이 아직 미흡한 것 같소. 한눈에 딱 봐도 개망나니처럼 보여야 하거늘.”
아쉬움에 탄식하는 형운을 이레가 격려했다.
“그리 자책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충분히 개망나니처럼 보입니다.”
다정히 주고받는 부부의 대화가 참으로 기이한지라.
장무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기대에게 흐르는 피가 이레에게도 흐르니.
빈궁마마 엉뚱한 건 그렇다고 치고.
지켜보는 사람조차 갑갑할 만큼 항상 바르고 단정했던 동궁이 아니던가.
하지만 눈앞에 있는 형운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맞습니다.”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레가 말했다.
“네?”
“이분…….”
그녀가 형운을 가리켰다.
“은자원의 은백이 확실합니다. 그럼 은호, 아침에 뵙지요.”
이레는 형운과 발걸음을 옮겼다.
자정을 훌쩍 넘긴 밤하늘엔 기운 달을 대신하여 새벽 별이 무성했다.
곧 아침이 밝아오리라.
어제와는 또 다른 아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