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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왕들의 향연-187화 (187/215)

#187. 안 되겠습니다

어둠이 짙은 빈궁전.

예상치 못한 손님이 귀를 의심케 할 연유로 이레를 찾아왔다.

금어(禁語)로 여겼던 ‘십학사’란 세 글자를 저리 당당히 말할 줄이야.

잠시 잠깐, 빈궁전에 돌풍이 불었다.

별궁 삼파가 빈궁전 궁인들을 서둘러 단속했다.

그 사이 금정은 처소 한가운데 발을 내려 이레와 장무열 사이에 경계를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장무열은 석상으로 만든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소란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고요해진 이레의 처소로 장무열이 들어섰다.

발에 가려 표정이 보일 리 없건만.

이레는 할 수 있는 최대한 태연한 낯빛을 하였다.

“장 집의가 여긴 어쩐 일입니까?”

발 너머에 자리한 장무열을 향해 이레가 물었다.

자리에 앉은 그가 여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십학사와 관련하여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십학사…… 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대체 무엇인데 나에게 아뢴다는 말입니까?”

이레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시침을 뗐다.

그러나 장무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회합이 열릴 예정이라 합니다.”

“…….”

“공석으로 비었던 자리에 새로운 학사들이 들어온다더군요.”

장무열은 질주하는 종마 같았다.

좌우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이레가 물었다.

“그 말을 전하러 오신 겁니까?”

“……안 오셨으면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회합의 자리에 더는 오지 마십시오.”

“…….”

오지 말라 하였다.

장무열은 이레에게 회합의 자리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지 말라 했다.

그것은 이레가 십학사의 물이라는 것을, 또한 자신이 십학사의 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인정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모른 척하더니, 왜 갑자기……?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옹주전에서 이곳을 눈여겨보고 있사옵니다.”

“……옹주전에서 이것저것 세심하게 살펴주시는 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닌 걸 알고 계시질 않습니까.”

“…….”

“화완옹주께서 빈궁마마께 관심을 보입니다.”

둘러 말하는 걸 포기한 듯 장무열은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분께서 빈궁마마의 정체를 의심하고 계십니다.”

“의심한다면?”

“만사여의, 그리고…… 십학사의 물.”

“……!”

사슴이 알고 있었고, 해 역시 알고 있었으니.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언젠가 정체가 밝혀질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시기가 빨랐다.

뜨거운 것이 뒤통수를 훑고 지나갔다.

이레가 장무열에게 물었다.

“그 사실을 제게 귀띔해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헌부 장령이었던 장무열이 단숨에 사헌부 집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옹주의 입김 덕이었다.

장무열의 뒷배에 화완이 있음을 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왜……?

“…….”

이번엔 장무열이 침묵했다.

이레는 재촉하지 않고 침묵이 끝나길 기다렸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얼마 후.

“빈궁마마께서 안전하길 원합니다. 더는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집의께선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이레의 태연한 대답에 장무열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쳤다.

“지금까지완 다를 겁니다. 저들은 지금 궁지에 몰렸습니다. 자칫하다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함이 저들을 무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빼앗긴 걸 되찾기 위해선 뭐든 할 자들입니다.”

“그렇겠지요.”

“그걸 알면서도 계속 무모한 행동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이레는 입가를 길게 늘이며 되물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장 집의께서 이리 무모하게 저를 찾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

“이미 화완옹주의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 은자원과는 척을 지겠다고 선언하신 분께서, 이제 와 제게 호의를 베푸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정곡을 찌르는 이레의 질문에 장무열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답은 알고 있었다.

그저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뿐이다.

“이런, 제가 장 집의께 난처한 질문을 한 모양이군요.”

이레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곤 대답했다.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있습니다. 그 처한 상황에 어울리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장 집의께서는 장 집의께서 하실 일을 하십시오. 저는 제가 할 일을 할 겁니다.”

“자신의 위험을 담보로 마마께서 하실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항의하는 장무열에게 이레가 대답했다.

“그분을 지키는 일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망연해진 장무열이 다시 묻는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정녕코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제 일이니까요.”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쇠고집.

장무열은 기어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시는 분이 누굴 지키겠다는 겁니까!”

***

“장 집의…….”

이레는 장무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리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서강율이 살아 있을 땐 종종 보았던 장면이었건만.

은협의 죽음 이후, 장무열은 박제된 사람처럼 무심하게 변해버렸다.

잠시 잠깐,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였다.

반갑고도 당혹스러운 마음에 이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무열 역시 자신이 저지른 황망한 언동에 놀라 창백한 낯빛으로 침묵할 뿐이다.

잠시 후.

얼음물을 들이마신 사람처럼 장무열은 화들짝 놀라 이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빈궁마마. 감히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

“소인이 경거망동하였나이다. 빈궁마마께 감히 언성을 높였으니. 그 죗값을 달게 받겠나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장 집의의 말이 옳습니다.”

이레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일이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

드디어 자신의 무모함을 인정하는 이레의 답에 장무열은 고개를 들었다.

찰나,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발을 치우고 이레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스스럼없는 다가섬과 함께 이레가 말을 이었다.

“허나, 그것을 상기시키는 장 집의의 행동은 확실히 법도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

“이대로 넘어갔다간 궁의 기강이 흩어질 것이니. 장 집의께서는 그 죗값을 받아야겠습니다.”

건조하고 딱딱하게 굳은 음성이 장무열에게 내리꽂혔다.

장무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잇새로 결연한 대답이 새어 나왔다.

“어떤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나이다.”

“그리 말하니, 내 더욱 편히 벌을 내릴 수 있겠군요.”

“…….”

“사헌부 집의 장무열은 감히 빈궁전에서 언성을 높였으니. 이는 엄격한 왕실의 법도를 어기고 기망한 것이라. 비록 집의의 충심에서 비롯된 간언이라 하여도 가볍게 넘길 죄가 아니니. 하여, 집의가 지은 죄에 타당한 벌을 내리노니.”

지금 이레와 장무열은 은자원의 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때 혼인을 운운하던 사내와 여인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사헌부의 집의요, 빈궁이었을 뿐이다.

각자가 처한 명확한 신분과 서열을 알려주는 듯, 이레가 명을 내렸다.

“사헌부 집의는 들으세요. 앞으로 내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호신술을 가르쳐줄 것을 명합니다.”

“……네?”

뜻밖의 벌에 장무열이 다시 법도를 어기고 말았다.

고개를 번쩍 들어 이레를 올려다보는 그에게 그녀가 고갯짓을 했다.

“빈궁의 얼굴을 함부로 올려다보고 있으니, 집의께선 또 법도를 어기고 있습니다.”

그녀의 조언에 장무열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제가 어찌 빈궁마마께 호신술을 가르칠 수 있단 말입니까. 명의 거두어 주옵소서.”

“장 집의의 말처럼 지금의 나는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 수 없으니, 나를 비롯한 내명부의 궁녀들에게 자신을 지키는 호신의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 말씀은……?”

“우선은 빈궁전의 궁녀들부터 시작하지요.”

“마마…….”

“여인으로 살아가는 게 생각만큼 녹록지 않은 세상입니다. 울타리 없는 여인에겐 방문 밖이 모두 위험이고, 행여 지켜주는 바람막이가 있다 하여도 언제 어느 때 위협을 당할지 모릅니다. 이는 비단 사가 여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궁궐의 여인들 역시 어느 덫에 발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사가의 여인들보다 더 많은 올무가 궁 안에 있지 않을까 싶군요.”

“…….”

“그러니 그만두라 할 때까지 나를 포함한 빈궁전의 여인들에게 간단한 호신법을 알려주세요. 그게 내가 장 집의께 내리는 벌입니다.”

“하오나…….”

잠시 생각하던 장무열은 서둘러 변명거리를 내놓았다.

“동궁 저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하의 허락은 제가 받겠습니다.”

“하오나…….”

“이제 와 못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럼 이만 그만 물러가 보세요.”

“빈궁마마…….”

“가르칠 시간과 장소는 따로 소식 보내겠습니다.”

“…….”

“금정아, 장 집의 물러가신다.”

단호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빈궁전의 문이 열렸다.

별궁 삼파에게 단단하게 교육받은 빈궁전의 궁녀들이 양옆으로 도열 해 서서 장무열이 나오길 기다렸다.

무언의 축객령에 등 떠밀린 장무열은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레는 내내 참고 있던 미소를 슬그머니 입가에 떠올렸다.

***

반 시진 후.

사헌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장무열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예의 집의처를 제집인 양 활개 치던 김기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딜 다녀오는 것인가?”

“또 너냐.”

“거참, 자네도 딱하구먼.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말을 하는 기대의 얼굴을 장무열은 빤히 응시했다.

기대의 얼굴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신중하여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하더니, 이번엔 엉뚱함으로 자신을 당혹스럽게 하는 여인.

뚫어지라, 자신을 바라보는 장무열을 보며 김기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에 못 볼 꼴이라도 본 것인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표정이 왜 그런가?”

뱅글뱅글, 주위를 맴돌며 무에 이야깃거리를 찾는 김기대를 보며 장무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전생에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이 틀림없다.”

“갑자기 웬 전생 타령인가?”

기대의 물음에 장무열은 눈에 불을 켰다.

“얼렁뚱땅 사람을 포섭하는 버릇, 네 집안 내력인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했기에 남의 집안 내력까지 운운하는가.”

그때 밖에서 헛기침이 들려왔다.

권문이었다.

“집의 나리.”

“무슨 일이냐?”

“지금 당장 처결하셔야 하는 문서입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권문은 김기대와 장무열을 번갈아 보았다.

뭔가 염탐하는 눈빛인지라.

“어찌 그러느냐?”

장무열의 목소리에 푸르게 서릿발을 섰다.

권문은 황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그는 산더미 같은 문서를 장무열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서둘러 집의처를 나갔다.

권문이 기다리기 무섭게 김기대가 장무열의 턱밑으로 다가섰다.

“뭔가? 무슨 일인데, 낯빛이 그러는가?”

눈을 반짝거리며 묻는 그를 피해 장무열은 문서 더미로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에 맴도는 잡다한 생각을 털어내려 문서에 집중했다.

이내 사헌부 집의처엔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기다림에 지친 기대는 장무열의 곁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이 귀찮은 자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작정인가?

김기대를 힐끗 곁눈질하던 장무열은 문득 손길을 멈췄다.

“이건…….”

-매월(每月), 닷새, 열닷새, 스무닷새, 묘시.

“이건 뭔가?”

어느새 깼는지.

어깨 너머에서 김기대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알 필요 없다.”

장무열은 서둘러 서찰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 서찰의 앞부분을 훔쳐본 김기대가 입을 열었다.

“뭔가? 죽는 날이라도 받아온 겐가?”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뭔데?”

“시끄럽다.”

“뭔지 말해 봐라.”

“귀찮다. 저리 가라.”

“어허, 우리가 예사 사이도 아니고…….”

장무열은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 김기대를 질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 오라비에 그 누이라고.

이 밤에 동궁 저하의 허락까지 받고 이리 소식을 보냈다.

한번 고집을 세우면, 좀처럼 꺾지 않으니.

엉뚱하고 질긴 쇠고집은 저 집안의 내력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젠 영락없이 궁녀들에게 호신의 방도를 가르치게 생겼다.

이레를 포함하여…….

머리를 감싸 쥐며 장무열은 한숨을 흘렸다.

문서에 다시 집중하려 하였지만, 도무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 흘러갔다.

봄 단장을 끝낸 동궁전에선 강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형운이 본연의 책무에 충실할 때, 이레 역시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형운의 옆, 동궁빈의 자리로.

그리고 또 하나.

만사여의의 모습으로 십학사의 은밀한 회합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가(安家)에 마련된 회합 자리는 전에 없이 무거웠다.

왕명으로 십학사의 입지가 한순간에 반 토막 나고 말았다.

전전긍긍하는 저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물의 자리에 앉은 이레는 해를 바라보았다.

정후겸은 언제나처럼 느른한 눈빛을 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옅은 주향.

이번 일은 그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게 틀림없었다.

“오셨습니까?”

어느새 이레의 옆자리에 앉은 사슴이 인사를 건넸다.

평소 수다스럽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불편하진 않았으나, 다소 어색한 침묵이었다.

괜스레 앞에 놓인 찻잔을 비우노라니, 비어 있던 학사들의 자리가 하나둘 채워졌다.

새로운 구름이 자리에 앉고 작은 체구의 사내가 영지(不老草)가 그려진 면사를 쓰고 의자에 앉았다. 듣자 하니 구름의 추천으로 들어온 학사라 하였다.

그 뒤로 바위가 들어왔다.

이전의 바위를 대신하여 사슴이 끌어들인 학사였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추천한 사람은 해였다.

형형한 눈빛의 대나무는 어가의 행차 때 형운을 죽이려 했던 전(前) 대나무의 먼 인척이라 하였다.

능글거리며 거북이 들어왔고, 학의 입장을 마지막으로 십학사의 회합이 시작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정후겸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험험.”

구름이 불편한 헛기침을 흘렸다.

그러나 정작 입을 연 것은 새로이 자리에 앉은 대나무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주상께서 궁궐의 병권과 인사권을 동궁에게 건넸소.”

자리에서 일어난 대나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이 해의 탓인 듯 원망하는 눈빛이다.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에 다다랐는지 알 수 없으나, 이제 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진들 무엇하겠소.”

해가 자신을 향한 대나무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해의 물음에 대나무가 대답했다.

“비록 군권은 빼앗겼으나, 순순히 물러날 순 없소.”

“그래서?”

“지방에 있는 사병들의 수를 더 늘릴 생각이오.”

“나쁘지 않은 생각이오.”

“이미 적당한 자들을 물색하고 훈련을 할 수 있는 장소도 마련하였소. 다만…….”

“필요한 것이 무엇이오?”

“모두가 알겠지만, 사병을 키우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오.”

대나무의 요구에 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이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회합의 목적.

바로 이것이었다.

회합에 모인 다른 학사들 역시 그녀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해가 이레를 향해 느른하지만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대나무의 의견에 나 역시 찬성하는 바이오. 그러니 물, 그대가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야겠소.”

정후겸은 다시 대나무를 응시했다.

“대나무는 얼마의 자금이 언제 필요한지 물 학사에게 연통을 넣으면…….”

찰나.

“안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해의 말허리를 잘랐다.

모두 정지된 듯 굳어졌다.

“지…… 금, 뭐라 하였소?”

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레를 보며 다시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레는 학사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러곤 조금의 동요 없이 단정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도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

늘 느른했던 해의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반면, 너울 뒤에 감춰진 이레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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