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샘샘, 강샘바람
건듯건듯, 잔바람이 목덜미를 훑었다.
바람의 첫머리는 시렸다, 지나간 계절에 대한 미련인 듯.
그러나 바람의 끝은 지척에 닿은 봄을 예견했다.
다사로운 훈김이 이레의 당의 자락을 파고들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은 해토되어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대며 생명이 움트는 소리를 자아냈다.
“참으로 긴 겨울이라, 영영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새 가지마다 봉오리가 맺혔습니다.”
들뜬 한서로의 목소리가 이레의 귓가에 날아 앉았다.
이른 아침.
한서로는 빈궁전에 놓을 새로운 대머릿장과 머릿장을 들고 입궁하였다.
때마침 날도 푸근한지라.
두 여인은 봄맞이 단장으로 분주한 빈궁전을 나와 궁의 후원을 산책 중이었다.
새로운 계절로 접어든 후원은 지금껏 보았던 것과는 다른 풍경으로 그네들의 마음을 유혹했다.
한서로는 후원 이곳저곳을 토끼처럼 뛰어다녔다.
이레는 한서로에게 후원에 자라는 풀과 나무, 봉오리 잡힌 꽃가지의 이름을 속속히 알려주며 피는 시기와 낙화의 때도 일러주었다.
그러나 정작 한서로의 시선이 맴돈 곳은 후원에 자라는 희귀한 화초가 아니었다.
이레의 손톱 끝에 피어난 봉숭아 빛 꽃물.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벽사의 붉은빛이 한서로의 눈망울에 꽃을 피웠다.
“참으로 곱고 든든한 꽃이 피었습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한서로의 목소리에 살포시 경련이 일었다.
지금껏 원하여 취하지 못한 것이 없었기에, 부러울 것도 없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식의 안녕을 염려한 어미의 마음.
그건 천금을 주고도 못 살 것인지라.
이레를 향한 한서로의 부러움은 진실하였고, 사뭇 진지하기에 쓸쓸하기까지 하였다.
그 표정이 마음이 쓰였던지라.
이레는 조심스레 한서로에게 제안했다.
“봉숭아 꽃이 피면 궁으로 청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효험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벽사를 바라는 마음을 한껏 담아 보겠습니다.”
한서로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저와 함께 꽃물들이기를 하자는 겁니까?”
이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고 싶은데. 혹여…… 이런 놀이는 즐기지 않습니까?”
만사여의, 한서로.
시전의 여장부에겐 어울리지 않는 놀이려나.
뒤늦게 ‘아차’ 생각이 들어 이레가 묻는다.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한서로는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즐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겸연쩍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대되어 한서로는 말끝을 흐렸다.
“정녕 한 번도 꽃물들이기를 해 본 적이 없단 말입니까?”
지역마다 그리고 집안마다 각기 법도와 가풍이 다르다고 하지만, 조선 팔도에 봉숭아 꽃이 피지 않는 곳은 없었다.
의아함에 이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한서로가 대답했다.
“세 살 땐가. 글을 가르치지 않은 어린 계집아이가 온갖 시들을 줄줄 외웠다고 합니다. 비록 여인이라 하여도, 손이 귀한 집안이었던 지라. 금이야 옥이야, 대접을 받았지요. 그러던 참에 신동 소리까지 듣게 생겼으니. 집안의 온갖 관심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좋아하는 글공부에 음률, 서화며 온갖 것들은 원 없이 해 보았지요. 대신 또래 아이들이 하던 놀이는 영영 모르고 살게 되었답니다.”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 한서로는 담담히 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내 그녀는 머루 같은 눈으로 이레를 응시했다.
“사실,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이에겐 내보인 적 없었던 속마음.
늘 대단하다는 칭송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신동 중의 신동, 재신의 현신……이라는 엄청난 수식이 한서로를 따라다녔다.
그러기에 항상 의연해야 했다.
행여 어린 태를 보였다간 약점이라도 잡힐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레의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경계를 풀곤 하였다.
무슨 조화인지…….
친혈육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던 천진한 모습을 이레에겐 허물없이 보일 수 있었다.
꽃물들이기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한서로는 양손을 포개어 가슴께에 올렸다.
저도 모르게 살금살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그녀는 한껏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이레는 기어코 작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원하는 것은 뭐든 해내고야 마는 만사여의가 아니던가.
겉으로 보기엔 아직 어린 여인이었으나, 평범한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대단한 수완가였다.
그 대단한 여인이 고작 꽃물들이기 하자는 한 마디에 저리 좋아할 줄 그 누가 알 것인가.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요즘 같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한서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레도 덩달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을 응시했다.
한서로의 말처럼, 궁으로 들어온 이후 요즘처럼 숨통이 트인 적도 없었다.
궁궐의 군권과 인사권이 동궁의 손에 들어온 이후, 사사건건 날을 세우던 대신들의 항의가 사라졌다. 강연 때면 기세등등하여 동궁과 맞서던 자들이 이제는 머리를 짓수굿하게 조아렸다.
하지만 호사(好事) 뒤엔 다마(多魔)라.
좋은 일엔 꼭 훼방 놓는 나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레는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스란치마 아래로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제법 길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이레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좇으며 한서로가 물었다.
“아직입니까?”
이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긴 수다에 지쳤는가 봅니다. 지금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
얼마 전부터, 이레는 자신을 훔쳐보는 눈과 귀가 있음을 알았다.
바스락대는 작은 기척.
숨어 엿보는 시선.
다른 사람들은 절대 듣지 못하는 소리와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던 건 별채에 갇혀 살다시피 했던 어린 시절의 고립 덕분이었다.
항상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경계해야 했던 서글픈 습성.
그것이 이리 요긴하게 쓰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를 훔쳐보는 인기척은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이후로, 이레는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한서로를 만나도 그저 일상적인 수다만 떨 뿐,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꼭 할 말이 있다는 눈짓을 한서로가 보내왔다.
이레는 후원의 산책을 핑계 삼아 감시자를 따돌렸다.
예상한 대로 하하호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여인들의 잡다한 수다에 감시자도 지친 모양이었다.
내내 질기게 따라 붙었던 인기척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레는 왔던 길을 되밟아 후원의 오솔길을 내려가며 한서로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입니까?”
낮아진 이레의 음성만큼 한서로도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도성에 허황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허황한 소문이라면?”
“동궁께서 밤이슬을 밟기 시작하더니, 무뢰배와 어울려 부녀자들을 상대로 상스러운 일을 벌이고 다닌다는 소문입니다.”
“…….”
“그뿐만 아니옵니다. 주상전하를 병환이 나날이 깊어진 것도 동궁전의 저주 때문이라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게다가…….”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워 한서로는 주춤했다.
이레는 눈짓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동궁저하의 처소에 과거 세자저하께서 만드신 것과 똑같은 무기고가 지어지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동궁께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역심을 품었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작금은 아닌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세상이었다.
세 명의 입이 모여 거짓을 사실로 만들었다.
아비의 권력을 탐한 아들이 역심을 품었다는 죄로 죽임을 당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건만.
이제는 손자가 할아버지의 왕좌를 넘보기 위해 역모를 도모한다는 소문이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하는 한서로의 음성에 분기가 섞였다.
“돌아가신 세자저하의 비행을 동궁저하께서 고스란히 따라 한다는 말이 떠돌고 있사옵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동궁께 힘을 실어 주신 일이 저들을 초조하게 만든 모양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까. 제가 저들이라면 지금이라도 과거를 뉘우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몸을 낮출 겁니다.”
한서로의 말에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자들이 아닙니다.”
벼려진 칼날처럼 단호한 확신이 이어졌다.
“자신들이야말로 이 조선의 진정한 주인이라 생각하니. 앞을 막으면 치워버리면 그만이고, 귀찮게 훼방 놓는 건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장애물이 있다 하여 길을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참으로 잔인한 자들입니다. 설마, 아버지의 비극을 아들에게까지 대물림하려는 건 아닐 테지요?”
“저들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아니, 벌써 시작하질 않았습니까. 저하와 관련한 소문이 도성에 돌고 있으니, 주상전하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어떻게든 전하와 동궁저하를 이간질하려는 계략이 틀림없어요.”
이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말아쥔 손톱 끝이 손바닥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듯 한서로는 미간을 한데 모았다.
“주상전하께서 이번에도 삿된 소문에 현혹될까요? 평소 저하께서 그리 반듯하고 곧게 행동하셨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전하께서 쉬이 믿을 리 없사옵니다.
이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세 치 혀만큼 무서운 것도 없답니다.”
“…….”
“어이없고 헛된 소문들이라 하여도 자꾸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불신의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쌓인 불신에 불을 댕기는 건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요.”
후원의 백 년 묵은 거대한 아름드리 참나무 아래에 서자, 궁궐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이레는 서로 어깨동무하듯 기와를 마주한 전각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순간.
그녀의 시선이 멈췄다.
화완옹주의 전각이 있는 곳이었다.
호수처럼 잔잔했던 이레의 눈동자에 불현듯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애써 마음을 진정하는 이레에게 한서로가 물었다.
“하오면, 어찌하오리까?”
대답 대신 이레는 눈을 감았다.
바람이 잦아든 숲은 고요했다.
진공의 공간에 홀로 갇힌 사람처럼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이레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그것은 선포였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삶을 흔들고, 생사를 결정짓는 오만한 자들을 향한 경고가 이어졌다.
“이젠 돌려주어야겠습니다.”
이레의 눈동자에 맺힌 푸른빛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대신, 오랜 시간 억누르고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 슬픔과 비릿한 분노.
처절한 외로움과 망연한 고독.
저릿한 상실감, 그리고 공허한 허무.
수천, 수만 번 담금질한 쇠처럼 단단하게 정제된 감정들.
그 지독한 아픔들이 하나둘 머리를 치켜들었다.
***
며칠 후.
어스름한 저녁이 내려앉을 무렵, 화완옹주의 전각에 작은 소동이 일었다.
세답방의 어린 생각시가 화완 옹주의 전각으로 끌려왔다.
엊그제 여덟 살 생일을 갓 넘긴 계집아이라.
저를 둘러싼 상궁들의 엄한 시선과 휘황찬란한 옹주전의 위엄에 지레 놀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부모 떨어져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동안 이부자리를 적시었는데. 그것 때문에 옹주마마께서 혼을 내시려는 걸까?
더럭 겁심이 솟구치자 어린 눈에 그렁그렁 눈물 열매가 열렸다.
열두 폭 병풍을 철벽처럼 등에 두르고, 거대한 수틀을 맞잡고 있던 옹주를 향해 아이는 무조건 머리부터 조아렸다.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어요. 살려 주세요.”
무얼 잘못했는지.
어떤 죽을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궁에선 무조건 이리해야 살 수 있다 하였다.
고사리손을 파리발처럼 한데 모으고 마냥 싹싹 빌었다.
동그란 이마를 연신 바닥에 콩콩 찧으며 살려달라 애원했다.
그 간절한 마음에 답이라도 하듯 옹주가 잡고 있던 수틀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곤 난데없는 명을 내렸다.
“아까 했던 노래, 다시 해 보겠느냐?”
“……네?”
어리둥절해진 생각시는 법도를 어기고 머리를 반짝 들었다.
“어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상궁이 엄한 불호령을 내렸다.
에구머니나!
아이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바닥으로 시선을 깔았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위로 옹주의 음성이 다가왔다.
“아까,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며 하던 노래, 다시 해 보라.”
무채색의 음성을 감히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 울음 반 섞인 노래가 생각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궁궐에는…… 땅땅, 땅에도 이름이 있고, 둥둥, 하늘에도 이름이 있다네. 솔솔 봄바람도 이름이 세 개나 있으니. 지나가는 꽃샘바람, 훑고가는 잎샘바람, 동궁에만 부는, 강샘바람. 샘샘, 꽃샘바람 지나가니 꽃이 피고요. 샘샘, 잎샘바람 훑고가니 잎이 피었네. 샘샘, 강샘바람 불고가니 임이 떠났네…….”
겨우겨우 노래를 끝낸 생각시는 연신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 이 귀한 곳으로 사람을 끌고 와선 노래를 하라시는 걸까?
영문을 몰라 커다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아이의 앞으로 스란치마 끌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옹…… 옹주마마…….”
귀한 분인지라. 발치에서마저 향긋한 내가 풍겼다. 생각시는 바싹 다가온 존재가 두렵고 황송하여 더욱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 아이의 뒤통수로 옹주의 자상한 물음이 떨어졌다.
“그 노래, 어디서 배웠는고?”
고운 목소리였건만, 이상하게도 칼날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탓에 아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시는 황급히 체머리를 저었다.
“며, 며칠 전 사가에 다녀올 때 우리 성이 부르는 걸 따라서…….”
“네 언니가 그 노랠 지은 게냐?”
“아, 아니어요.”
“그럼?”
“배운 건 아니고, 그냥요…… 흐윽, 그냥…… 부르는 것이어요.”
“그냥……불러?”
고개를 갸웃하는 옹주에게 아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냥 다 부르는 거라 했어요. 한양 사는 애들은 다 부르는 노래라고…….”
“…….”
“잘못했어요, 옹주마마. 이제 안 부를게요, 흑흑.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하시어요.”
생각시는 급한 마음에 덜컥 옹주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어허! 감히 옹주마마께 어인 짓이냐.”
아직 예법에 익숙지 않은 어린 생각시를 향해 상궁의 사나운 손짓이 달려들었다.
촤악!
옹주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던 아이는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옹주가 다시 물었다.
“다른 건 없느냐?”
“……네?”
“밖에 나가서 다른 건 들은 게 없느냐?”
이런 기이한 노래를 배울 호기심이라면 필시 다른 소문도 들었을 법한데.
그러나 기대와 달리 어린 생각시에게선 재깍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
또르륵, 또르륵, 좌우로 눈을 굴리며 거듭 생각하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없…… 없습니다.”
옹주의 미간이 미세하게 휘어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더니.
모두 옛말이로구나.
동궁에 관련한 소문 내라 한 것이 언제이거늘. 아직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저 어린것도 못 들은 것이겠지.
“되었다, 그만 치워라.”
화완이 턱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송구하옵나이다, 마마.”
상궁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어린 생각시를 데리고 옹주의 처소를 나갔다.
질질 끌려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화완은 귓전에 맴도는 노랫말을 작게 읊조렸다.
“동궁에만 부는 강샘바람, 강샘바람 지나가면 임이 간다네…….”
얼핏, 아이들이 장난삼아 부르는 노랫말 같았지만…….
아니었다.
죽은 왕세자의 죽음이 누군가의 강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둘러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란…….
“샘샘 강샘바람.”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운율과 강샘이라는 독특한 어감 뒤로 불현듯 화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오죽이나 할까.
“감히…….”
입꼬리를 비틀며 화완은 서늘히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화완은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수틀을 잡았다.
“정 대감에게 기별을 넣어라. 사냥개에 섞여 들어온 하룻강아지가 주인도 몰라보고 짖어대니. 눈앞에서 치우라 하라.”
옹주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잇문 너머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동시에 퉁.
날카로운 바늘이 비단을 관통했다.
***
“……헉!”
이레는 낮게 탄식을 지르며 눈을 떴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화들짝 잠에서 깨는 이레를 금정이 걱정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보료에 기댄 채 까무룩 선잠이 들었었나 보다.
“악몽이라도 꾸시었나이까?”
“아니다.”
“어인 일로 쪽잠을 다 주무시니.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시온지요?”
“간밤에 조금 뒤척인 탓이다.”
이레의 대답에 금정이 뾰족하게 입술을 모았다.
할 말이 있지만, 감히 하지 못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왜? 무어?”
다음 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이레가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밤 나들이를 조금 줄이시면 아니 됩니까?”
금정의 투정이 이어졌다.
“소인, 팔자에도 없는 귀한 분 그림자 노릇에 간덩이가 깨알처럼 작아졌사옵니다.”
“이리 댕댕거리며 잔소리하는 걸 보니, 그리 작아진 건 아닌 듯하구나.”
“하오나…….”
“그런데 무슨 일이더냐?”
이레가 용무를 물었다.
금정이 아차 하며 제 머리에 종주먹을 날렸다.
“제정신 좀 보십시오.”
“네 정신은 나중에 보마.”
“마마, 설마…… 웃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시지요?”
정색하는 금정의 표정에 이레가 물었다.
“안 웃기더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웃기진 않았사옵니다.”
“이상하다. 저하께선 배꼽이 빠지라 웃으시던데.”
이레의 혼잣말에 금정이 중얼거렸다.
“두 분께서 다정하시니, 참으로 왕실의 흥복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
이런 거로 무슨 왕실의 복까지 찾을까.
머쓱해진 이레는 헛기침을 흘리며 매무시를 다듬었다.
“그런데 아직 말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더냐?”
“그것이…….”
금정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졌다.
“마마, 누가 뵙길 청하였사옵니다.”
“나를……?”
“네.”
“뉘인데?”
금정의 대답 대신 문전비의 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궁마마, 사헌부의 집의 입시옵니다.”
일순, 이레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사헌부 집의라면…….
은자원의 은자였던 사내.
십학사의 학이 되어 이레의 앞에 다시 나타난 그 사내, 장무열.
그가 이 저녁에 여길 왜……?
이레의 궁금한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걸까.
장무열이 돌연한 방문의 연유를 밝혔다.
“사헌부 집의 장무열, 십학사의 일로 빈궁마마를 뵙길 청하옵니다.”
“십학사……?”
이레는 제 귀를 의심했다.
퉁겨지듯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굳게 닫힌 처소 문을 응시했다.
하얀 문풍지 위.
장무열의 긴 그림자가 유난히 선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