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83화 (183/215)

#183. 밤놀이(夜嬉) (下)

멈춘 듯한 공기가 다시 흘렀다.

암담한 상황을 잠시 잊게 했던 달콤한 입맞춤의 끝으로 찬바람이 달려들었다.

“엣취!”

애써 참았던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얼른 고개를 돌린 이레는 콧등을 문질렀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인지라.

형운의 입가에 미소가 패였다.

또한, 한편으론 걱정의 마음도 우물처럼 고였다.

진흙에 빠졌던 터라 옷은 젖었고, 숲속의 밤은 유난히 더 매서웠다.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근심하던 형운은 얼른 이레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여기서 노숙을 할 순 없지 않소.”

“아는 곳이라도 있습니까?”

“오는 길에 관아를 보았소. 객사에서 잠시 신세를 질 수 있을 것이오.”

“동궁과 동궁빈이 이런 모습으로 가면 관아에서도 놀라지 않을까요?”

“그러니 그건 비밀로 해야지.”

형운은 품 안에서 동그란 마패를 꺼냈다.

언젠가 그의 아버지가 형운에게 줬던 그 마패였다.

“마패를 갖고 계십니까?”

“내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이오. 그땐 참 번거로운 물건이었소.”

“어째서 번거로웠습니까?”

“이 마패를 쓰려면 어떻게든 궁 밖으로 나가야 했으니까. 그것만큼 번거롭고 귀찮은 일도 없었소. 내 인생은 궁 안에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툭하면 궁 밖으로 나가질 않습니까?”

“이젠 알게 되었소.”

“무얼요?”

“내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세상은 궁 안이 아니라, 궁 밖에 있다는 걸 말이오.”

“그분께서 아시면 좋아하겠습니다.”

“이제야 알았느냐며, 또 면박이나 주시겠지.”

“그게 그분의 표현법인 걸 알지 않습니까.”

“면박이라도 좋으니. 다시 뵐 수만 있다면 좋겠소.”

담담히 말했지만, 은은한 그리움이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왕세자 살아 계실 땐, 그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해하던 형운이었다. 하지만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분의 마음을.

그분의 가슴에 쌓였던 울분을.

그리고…… 그 무뚝뚝했던 사랑을.

울컥, 목구멍으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형운은 이레의 손을 잡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반 시진쯤 걸었을까.

작은 규모의 관아가 눈앞에 나타났다.

워낙에 외진 곳에 위치한 관아인지라, 현령은 그저 명부에만 올라가 있을 뿐, 관아와 객사의 모든 일은 동네 토박이인 아전들의 손에서 다 해결되는 곳이었다.

그나마 이방과 형방과 공방은 일찌감치 퇴청(退廳)하여 집으로 돌아갔고, 늙은 호방이 텅 빈 객사를 지키고 있었다.

잠을 자다 일어난 호방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빛으로 이레와 형운을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잠시 신세를 졌으면 하오.”

형운이 마패를 내밀었다.

호방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외진 길목에 있는 관아지만, 제법 그럴듯한 마방(馬房)을 갖추고 있어 어사들의 출입이 아주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과 함께 온 어사는 처음인지라.

‘요즘은 여인도 어사 노릇을 하는가?’

힐끗, 이레를 곁눈질하며 호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객사의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불을 피운 방은 하나뿐입니다. 필요하면 지금이라도 아궁이를 지피라 하겠습니다요.”

“그건 되었고…….”

형운은 진흙으로 엉망이 된 자신과 이레를 응시했다.

“모양새가 험해서 그런데, 적당히 씻을 만한 곳이 있겠는가?”

호방은 객사에 딸린 작은 부엌을 가리켰다.

“부엌에 더운물은 충분할 겁니다.”

“혹시 갈아입을 만한 옷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사라졌다 돌아온 호방의 손에는 무명으로 만들어진 남녀의 옷이 각 한 벌씩 들려 있었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두 사람이 묵을 객사 방에 옷을 내려놓으며 호방이 물었다.

“마방에 있는 녀석에게 먹을 것 좀 내어줄 수 있겠소?”

“알겠습니다. 어사님은 뭐 안 드셔도 되겠습니까요?”

“우리는 되었소.”

“정말 괜찮겠습니까?”

부탁할 일 있으면 한 번에 몰아서 부탁하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형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조금만 쉬었다가 곧 다시 떠나야 하니. 우린 신경 쓰지 말고 푹 자면 되오.”

“정히 그러시면, 소인은 그만 물러갑지요. 혹여 필요한 일 생기면, 관아 안쪽에 있는 질청으로 오십시오. 한두 번 부르면 대답이 없을 겁니다. 소인이 워낙 잠귀가 어두워서. 그럴 땐 일어날 때까지 크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주 급하면 말입지요.”

어지간하면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가 다분한 말이었다.

관아 안으로 비실비실 사라지는 호방을 보며 형운과 이레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호방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이레가 형운을 응시했다.

“다시 떠나신다니…… 어딜 가시려고요?”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소.”

“그래도…….”

“그보다, 어서 씻어야겠소. 이러다 단단히 고뿔 들겠소.”

형운은 호방이 알려준 부엌으로 이레를 밀었다.

등 떠밀려 부엌으로 들어가면서도 이레는 궁금증을 버릴 수 없었다.

형운이 말하는 밤놀이라는 게, 대체 무얼까?

***

이레가 다 씻고 돌아왔을 때, 객방 툇마루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형운은 까무룩 졸고 있었다.

“은백.”

너무 곤히 졸고 있어,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그녀의 부름에 형운은 번쩍 눈을 떴다.

“피곤하시면 안으로 들어가 주무시어요.”

이레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꼴로 어찌 은랑 옆에 있을 수 있겠소?”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소.”

여인이나 사내나 연모하는 이에게 좋은 모습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이리라.

그 심정, 충분히 알기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다녀오셔야 합니다.”

“금세 다녀오리다.”

형운은 서둘러 부엌 쪽으로 향했다.

혼자 남게 된 이레는 객방으로 들어가 따듯한 이불 속에 몸을 절반쯤 묻었다.

긴장이 풀리고, 따뜻한 물로 씻기까지 한 터라.

노곤한 기운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몸이 얼음 녹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대로 바닥에 머리를 대고 한숨 푹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흐트러진 모습으로 형운을 맞이할 순 없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졸음을 쫓으려 이레는 연신 고갯짓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수마의 유혹은 뿌리치기엔 너무 달콤하고 치명적이었다.

어느 순간.

이레는 스르륵 이불 위로 무너져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잤을까?

단잠에서 깨어난 이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쯤이면 당연히 형운이 돌아왔으리라 생각했건만.

객방엔 여전히 그녀 혼자였다.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돌아왔다가 다시 나간 것이려나?

이레는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방을 나섰다.

어느새 까만 어둠 저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저하…….”

형운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대답하는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방에 가셔서 백마의 상태를 확인하시는가 싶어 살펴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도 형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의 부재.

더럭 겁이 났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시려나?

그것도 아니면 혹여……?

이레는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객사의 부엌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저기 계시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씻고 계신단 말인가.

제 어이없는 생각에 이레는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곳을 찾아보려는 생각에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혹시…….

만에 하나…….

아직도 부엌에 계신다면…….

“은백?”

부엌으로 다가가며 이레는 형운을 불렀다.

“은백. 아직, 여기 계십니까?”

단단히 닫힌 부엌문 앞에서 그녀가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아무도 없는 것이리라.

확신하지만, 눈으로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레는 주춤거리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굳게 닫힌 부엌문을 천천히 밀었다.

삐그그극.

나무문이 새벽 공기를 찢으며 안으로 열렸다.

그리고…….

이레는 그토록 염려하던 한 사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은백…….”

물이 가득 채워진 나무 욕조 안.

그 안에서 형운은 꼼짝도 않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에 매인 듯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은백!”

반가움과 안도감에 이레는 단숨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또르르.

그녀의 움직임을 형운의 눈동자가 따라왔다.

“놀랐잖습니까. 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이레는 형운을 향해 괜한 지청구를 날렸다.

역시나 그는 대답이 없다.

왜 이러실까?

“은백……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형운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창백한 혈색에 무심(無心)한 표정.

“왜 그러십니까?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십니까?”

이레는 재차 다급하게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뻣뻣하게 굳었던 형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거기.”

“네?”

“거기, 통 언저리를…… 조심하시오.”

입을 뗀 그가 그녀에게 경고했다.

통 언저리라면…….

이레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형운이 몸을 담고 있는 나무목욕통 언저리가 들어왔다.

그곳에 그녀가 몸을 씻을 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혹시 이것 때문에……?”

이레가 물었다.

형운은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고개를 외로 틀었다.

애써 외면하는 그 모습에 이레는 눈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이윽고…….

나무통 언저리에 매달린 진초록색의 작은 생명체가 그녀의 망막에 맺혔다.

“설마…….”

권모술수로 무장한 노련한 정치가들을 상대하면서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던 분이.

날카로운 창칼로 목숨을 위협하는 적들 앞에서도 한 치 물러섬 없었던 사내가.

고작 동면에서 일찍 깨어난 저 자그마한 청개구리 한 마리.

저 작은 미물로 인해 이렇게 얼어버렸다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

긴 물음이 ‘설마’라는 한 단어에 함축되었다.

짧은 적막이 흘렀다.

아니다, 부정하지 못한 형운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풋.”

그 어쩔 수 없는 긍정의 몸짓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그 누구의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기세등등하셨던 분이 고작 청개구리를 무서워하신단 말인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였다.

이레는 허리를 굽혀 청개구리를 살며시 손바닥에 올렸다.

그리고 형운의 앞에 그것을 가져갔다.

“이런…….”

헛바람을 닮은 신음이 형운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의 낯빛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변했다.

“그 녀석, 저리로 치워…… 주겠소?”

저음의 목소리엔 자잘한 경련마저 깃들어 있었다.

찰나.

형운이 입을 열자, 제풀에 놀란 녀석이 펄쩍 날아올랐다.

하필이면 눈앞에 있는 형운의 콧잔등으로 내려앉았다.

“으읏!”

석상처럼 굳었던 형운의 몸이 한옆으로 허물어졌다.

이윽고 청개구리와 함께 물통 속으로 사라졌다.

“은백!”

동심원 모양의 파문과 함께 형운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한 눈길로 물속을 들여다보길 얼마나 했을까.

형운이 물속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 녀석은…….”

형운의 물음에 이레는 손가락으로 한옆을 가리켰다.

제 몸집의 몇천 배가 넘는 장신의 사내를 가벼이 물리친 청개구리는 유유히 물통 저편으로 헤엄쳐선 통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마저도 보기 어려운 듯 형운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이레는 저도 모르게 꺄르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문득 이레를 바라보는 형운의 눈빛이 바뀌었다.

“은랑.”

내 장난이 심하였나?

서둘러 웃음을 멈춘 이레는 형운이 있는 나무통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송구합니다. 저도 모르게…….”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겪는 이에겐 충분히 상처가 될 수도 있을 터. 그런 마음도 모르고 철없이 웃고 말았다.

“정말 미안합니다, 은백.”

사과하는 그녀에게 형운은 엉뚱한 말을 내놓았다.

“왜 몰랐을까.”

“네?”

“그대가 이리 웃을 수 있는 사람인 줄, 지금껏 왜 몰랐을까?”

굳어 있던 형운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곧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는 그녀를 응시했다.

“가끔 바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군.”

“바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어찌 보이오?”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사내.”

“…….”

“두 번 다시 없을 유일한 정인…… 제게 은백은 그런 사내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이는지, 걱정 마십시오.

“물이 다 식었겠습니다.”

이레는 환한 웃음과 함께 형운에게 자신의 양손을 내밀었다.

물속에 있는 그를 물 밖으로 당기려는 찰나.

“은랑이 따뜻하게 덥혀주면 되겠군.”

와락, 거친 완력이 그녀를 물속으로 잡아끌었다.

***

찰방, 물소리와 함께 이레의 작은 몸뚱이는 형운의 가슴에 온전히 안기고 말았다.

놀라고 당황한 이레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작게 버둥거렸다.

하지만 등 뒤에서 끌어안는 힘에 갇혀 금세 저항을 멈추었다.

대신 그를 설득한다.

“몸만 녹이고 바로 떠난다 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소.”

알고 있는데, 자꾸만 이러고 싶어지는 걸 어찌하오.

형운은 이레의 어깨에 턱을 괴며 느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레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향기에 취한 듯 눈을 감고, 입술 끝에 와 닿는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을 음미하였다.

뒷덜미의 솜털이 물기에 젖어 그의 입술 끝을 간질였다.

그 여리고 힘없는 것을 형운은 연신 물었다 놓아주길 반복하였다.

하아, 기어이 이레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내내 꼿꼿하던 등줄기가 조금씩 느슨해졌다.

기어이 그의 가슴에 온전히 등을 기댄 이레는 자신을 끌어안은 형운의 팔을 양손으로 꼭 그러잡았다.

마치 깊은 물 속에 빠진 사람처럼.

이 손을 넣으면 영영 사라질까 두려운 듯.

이레가 입은 저고리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형운의 맨 가슴을 쓸었다.

형운은 입술로는 이레의 목덜미를 훑고, 손으로는 그녀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찰랑거리는 물결 위로 곧 벗겨진 저고리가 떠올랐다.

하얀 속적삼이 벗겨지고, 단단한 치마의 매듭도 풀어졌다. 가슴을 묶은 가슴 가리개까지 떨쳐내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짧은 순간, 처음 세상에 태어난 모습으로 형운을 마주하게 된 이레는 수줍음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몇 시진 전, 진흙이 범벅인 채로 무람없이 형운에게 입맞춤하던 여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처음 꽃잠 자는 어린 신부처럼.

한없이 여리고, 수줍은 모습으로 형운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파르르 몸을 떨고,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불에 덴 듯 흠칫했다.

진실로, 그의 입술이 지나간 그녀의 하얀 나신엔 하나둘 붉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길고 하얀 목덜미에, 둥근 어깨 위에, 그리고 여린 날개 죽지 위에…… 작고 큰, 꽃이 피어났다.

제가 만든 꽃밭이 흡족한 듯 형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만을 믿고, 자신만을 의지하는 제 여인의 존재가 너무나 곱고 어여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고작 뒷모습인데도 이리 아름다우면, 앞태는 얼마나 고울 것인가.

이미 알고 있음에도…….

이미 여러 번 눈에 담아, 머릿속에 각인된 그 아찔한 모습을 보려 형운은 천천히 이레의 어깨를 돌렸다.

얼굴에 튄 물방울 탓일까?

검은 눈동자가 선명하도록 요요하였다.

붉은 입술은 무르익은 석류알 같았고. 벌어진 잇새로 흘러나오는 숨결은 푸른 자두처럼 달고 새콤하였다.

홍조를 띤 투명한 뺨은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와스스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러기에 조심스러웠다.

또한, 저 여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거칠게 소유하고 싶었다.

가슴 명징한 사내의 욕망.

이 나라의 동궁이라는 신분은 지금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한 여인의 사내라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였다.

저 여인의 오직 하나뿐인 사내가 되고 싶은 마음.

열렬한 갈망이 형운을 채근했다.

이레의 이마와 눈두덩과 콧잔등을 쓸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녀의 숨결과 터져 나오는 탄식마저 제 입속에 담았다.

하릴없이 허공을 맴도는 그녀의 손을 제 목덜미에 두르게 하고, 형운은 아래로, 더 아래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의 뒷덜미를 수놓았던 붉은 꽃이 뒤로 젖힌 그녀의 쇄골 언저리에도 새겨졌다.

감내하기 어려운 농밀한 감각에 이레는 형운의 양어깨를 잡았다.

“이리하는 건…… 이러는 건…….”

입안에 연신 단침이 고였다.

그러나 애써 그것을 꼴깍 삼킨 그녀는 하얗게 바란 머릿속을 정리하여 안간힘을 썼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정인과 함께 겪을 아찔한 환의 세계.

그 아득한 천상의 세상을 생각하면 이대로 그에게 몸을 맡기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갈라진 음성으로 이레가 말했다.

왕실의 법도.

엄격한 궁의 격식에는 맞지 않았다.

본디 왕실의 여인과 사내의 행위에는 정해진 절차와 규범이 있으니.

이리 은밀한 곳에서, 이리 무람없이 서로를 갈구하여서는 아니 되었다.

아무리 서로를 연모하고, 그 연모가 넘쳐 참을 수 없다 하여도.

참고, 인내하며…….

“헉!”

일순, 이레의 입에서 놀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그의 입술.

장난기 가득한 그 입술이 돌연 물 위에서 찰박대는 연분홍빛 꽃판을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아득한 감각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훅, 숨을 들이마셨다.

형운의 어깨를 짚은 그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법도요.”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거칠어졌다.

미지근하게 식었던 물의 온도가 다시 달아올랐다.

***

같은 시간.

“저하, 저하!”

어둠 가득한 숲이 갑자기 환해졌다.

말 탄 무사들이 횃불을 밝힌 채 열을 지어 숲을 가로질렀다.

멀리서 들려오던 짐승의 울음소리가 뚝 멈췄다.

“저하, 어디 계시옵니까?”

일행의 가장 선두에 있던 최치성이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는 들고 있던 횃불을 들고 휘휘,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내.

“큭!”

최치성은 코를 감싸고 말았다.

주변에 온통 죽은 늑대들이 가득했던 까닭이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홍인모가 미간을 한데 모았다.

“저하께선 보이지 않는군.”

“행여 무슨 일은 없으시겠지?”

최치성의 물음에 홍인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고가 생겼다면, 분명 발견되었겠지. 이리 아니 보이시는 걸 보면 다행히 저하께선 무탈하신 듯한데…….”

“그럼 저 늑대들은 대체 누가 저리했단 말인가?”

최치성이 물었다.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지라.

홍인모 역시 답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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