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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왕들의 향연-182화 (182/215)

#182. 밤놀이(夜嬉) (上)

궁궐 길목을 밝힌 횃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먹장구름이 야윈 달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어둠에 잠긴 궁은 요요하였다.

안개 같은 공기가 주인 없는 빈궁전을 에워쌌다.

이레의 그림자 노릇을 한 금정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덕분에 바깥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리고 빈궁께서 소중히 여기는 서탁 위로 먹물이 강처럼 흘렀다가 모이길 반복하는 것도…….

그것이 급기야 제대로 된 글씨가 되는 것조차, 금정은 알 수 없었다.

-며칠 아이가 보이지 않는구나.

서탁 위로 악의 악필이 떠올랐다.

이내 상의 글씨가 바싹 뒤따라왔다.

-지난번 얼핏 듣자 하니, 불손인지 은백인지 하는 놈한테 상황이 유리하게 되었다던데. 저희끼리 잔치판이라도 벌이는 거 아니야?

-어허, 아이가 그리 의리 없진 않을 것이오.

예의 말을 상이 불퉁하게 되받아쳤다.

-이미 죽어 잡귀가 된 놈들한테 뭔 놈의 의리를 찾아?

-잡귀는 상, 네놈이고. 아이는 잡귀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느냐? 죽더니 귓구멍이 막힌 것이냐? 것도 아니면 눈깔이 썩어 글을 읽지 못하는 게야?

악의 휘갈겨 쓴 악필에 상이 버럭 화를 냈다.

-이런 근본 없는 놈을 보았나. 누구한테 감히 눈깔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럼 눈깔을 눈깔이라고 하지, 뭐라고 한단 말이냐?

-나처럼 귀한 사람의 눈깔은…….

-허허허. 드디어 인정하는구나, 눈깔이라고.

-이 잡귀 놈이! 네놈이 죽으려고 용을 쓰는구나!

악의 장난에 휩쓸려 스스로 자신의 눈을 눈깔이라 표현한 상이 길길이 날뛰었다.

-어허, 그만들 두시오. 어찌 만났다 하면 싸우는 것인지.

-예, 그냥 놔둬라.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정드는 법이다.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한 화의 한마디에 악과 상이 앞다퉈 성토했다.

-누가 누구랑 뭐가 들어? 정은 무슨 얼어 죽을 정! 에잇, 못 들을 소리 들었더니, 귀가 다 썩는 기분이네.

-저 봐라, 저놈 죽은 잡귀 맞지? 스스로 실토하잖느냐. 귀가 다 썩었다고. 내 장담하건대 상, 저 잡귀랑 내가 정드는 것보단 지렁이가 하늘로 승천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악, 네놈보다 내가 더 장담할 수 있다.

서로를 헐뜯는 악과 상의 글귀가 치열하게 서탁을 채웠다.

서슬 퍼런 필담 사이.

예의 글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다시 보니 화의 말이 맞는 듯싶소. 저 둘이 정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나 보오. 이젠 하는 짓이나 말투까지 비슷하니. 다른 이가 보면 한 핏줄이라고 해도 믿겠소.

-그러게나 말이다.

-그나저나 아이는 뭘 하느라 이리 바쁠꼬?

좀처럼 보이지 않은 이레의 안부가 궁금한 듯 예가 글귀를 풀었다.

웃음기 섞인 화의 대답이 이어진다.

-북풍한설도 지나갔겠다, 모처럼 봄바람 따뜻한 밤이니. 둘이서 밤놀이라도 하는 거겠지, 허허허.

-밤놀이라면……?

-두 성인 남녀가 하는 밤놀이라면 뻔하지 않은가.

일순, 서탁을 채우던 상과 악의 욕설이 사라졌다.

대신…….

-뭔데?

-뭐야?

궁금해하는 상과 악의 글씨가 동시에 떠올랐다.

***

숲의 어둠은 농도가 여느 곳보다 곱절은 더 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그러나 형운과 이레는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오직 서로에게 맞닿아 있는 전신의 감촉에 신경을 집중할 뿐이다.

불규칙하게 뛰는 형운의 심장 소리가 이레의 귓가에 바투 쳤다.

가끔 머리 위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을 때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사정은 형운도 다르지 않았다.

형운의 가슴에 안겨 있는 이레가 행여 꼼지락거릴 때면, 등줄기가 뻣뻣해지고 길고 날렵한 근육이 생기곤 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는 이 숨 막히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운 듯 형운이 입을 열었다.

“은랑…….”

“……네.”

“부탁이 있소.”

“말씀해 보십시오.”

“그대가…… 내 가슴으로 손을 넣어주었으면 하오.”

“……!”

돌연한 요구.

이레는 멈칫했다.

그의 가슴팍에 바싹 밀착되어 안겨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안으로 손을 넣어달라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미세한 반응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으리라.

“싫소?”

단박에 물음이 들려왔다.

“아닙니다.”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수줍고 당혹스러웠다.

“그럼 내 가슴으로 손을…….”

형운이 다시 한번 요구했다.

행여 그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되어 이레는 조심스레 형운의 저고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있는 저고리 고름을 풀고, 비단 앞섶을 조심조심 헤집었다.

잠시 후.

그의 탄탄한 맨살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이리하면 되겠습니까?”

이레가 물었다.

평소 차분하던 것과 달리 말 마디마디에 파르르한 경련이 머루처럼 매달렸다.

“거기서 조금 더 아래로…….”

형운 역시 반쯤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말입니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좀 전보다 커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내뱉는 그의 숨결이 깊어졌다.

이레의 심장 박동 역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거기가 아니라, 좀 더 아래로…….”

“좀 더 아래라 하시면, 여깁니까?”

“아니, 좀 더 아래요.”

형운의 인도에 따라 손을 움직이던 이레가 불현듯 멈칫했다.

“잠, 잠시만요.”

한껏 곤두세운 그녀의 오감이 손끝에 집중되었다.

형운이 가리키는 대로 아래로, 더 아래로, 향하던 손가락에 문득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매끈한 비단에 휩싸인 단단하면서 낯선 느낌의 그 무언가가 만져진 것이다.

“설마…… 이겁니까?”

“그렇소.”

휴우, 마른 한숨과 함께 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럭 겁이 난 이레가 물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소. 아니, 그대만이 할 수 있소.”

“하지만…….”

“은랑, 어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급박한 어조.

간절함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이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원하고 있다.

그가 이토록 갈망하고 있다.

이레는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매끄럽고 단단한 것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동시에 형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은랑…….”

“혹여 실수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저도 처음 하는 것인지라.”

재촉하는 형운을 보며 이레의 마음도 급해졌다.

그녀는 낯선 이질감이 느껴지는 물건을 형운의 몸에서 낚아챘다.

그리고 매끈하고 단단한 그것을 양손에 나눠 쥐고는 힘껏 맞부딪쳤다.

순간 파팟!

엇갈리는 마찰음과 함께 부시와 부시 깃이 푸른 불씨를 튕겨 냈다.

형운의 품속에서 휴대용 부싯돌을 꺼낸 이레는 사력을 다해 불꽃을 피우려 애썼다.

그렇게 몇 번을 애쓴 탓에, 드디어 작은 불빛이 피어올랐다.

“됐습니다, 되었어요.”

작게 환호하며 이레는 서둘러 간이용 횃불에 불꽃을 옮겨 붙였다.

이윽고, 내내 캄캄한 밤의 베일이 휩싸였던 숲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

“그럴 리가 있겠는가!”

최치성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사람을 어찌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

자신을 향한 홍인모와 최 내관의 못 미더운 시선을 보고 있노라니, 그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동궁의 좌익위이거늘.

게다가 그들과 함께 보낸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저를 이리 미덥지 못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내 이번에는 정녕 그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다네.”

최치성은 어울리지 않게 눈까지 흘기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성화를 부리는 그의 모습에 홍인모가 그제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군. 그간 하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누구인가. 우리 저하를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 하게. 그런 나를 이토록 불신하다니.”

단단히 수틀린 최치성은 홱 돌아앉았다.

최 내관이 그를 달랬다.

“어허, 좌익위 마음 푸시오. 우익위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나를 못 믿는가 말이오. 그리고 말이 나와 하는 말이지만, 내가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게 어디 나의 미흡만 때문일까. 그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생긴 일들이건만.”

최 치성의 항변이 최 내관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맞아요. 좌익위께서 워낙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생긴 일이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최 좌익위, 믿습니다. 암요, 좌익위를 아니 믿으면 누굴 믿는단 말입니까.”

그나마 마음 알아주는 최 내관의 모습에 최치성은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 말하니, 고맙소.”

최치성은 홍인모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홍인모, 잘 들어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이번 임무는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저하와 빈궁마마께서 봄밤을 즐기시기에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길목을 비우고, 점검하는 일인데. 그런 일을 하는데 실수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그리 장담하니, 내 믿겠다. 그럼 우리는 저하의 다음 명에 따라, 준비를 하고 모이면 되겠구나.”

홍인모의 말에 최 내관은 소맷자락 안에서 작은 서책을 꺼냈다.

서책 안에는 도성 인근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저하께선 지금쯤 여기 계실 것이오.”

홍인모가 지도 한 지점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럼 우리는 날이 밝기 전에 여기로…….”

말을 하는 찰나.

최치성이 돌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뭐가 아니야?”

“저하께선 지금쯤 여기 계실 것이야.”

그는 홍인모가 짚었던 곳보다 훨씬 나아간 지점을 검지로 짚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말을 빠르게 달린다고 하여도 절대 그만큼 갈 수 없을 터인데.”

“이런 융통성 없고, 정보력 없는 자를 보았나.”

쯧, 낮게 혀를 차며 최치성은 지도의 한 곳을 스윽 손끝으로 그었다.

“여기, 범인들은 잘 모르는 지름길이 하나 있지.”

으쓱한 표정의 그는 팔짱을 끼고 홍인모를 응시했다.

홍인모가 놀란 눈으로 최치성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걸 어찌 알았느냐?”

“동궁저하의 우익위씩이나 되는 자가 그런 걸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이냐.”

가소롭다는 듯 웃는 그의 말끝에 홍인모의 다급한 음성이 달라붙었다.

“그럼 그것도 아느냐? 몇 해 사이, 그 길에 늑대떼가 출몰하여 사람에게 위해를 끼쳤다는 거. 그래서 그 길을 폐쇄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느냐?”

“……그런 일이 있었느냐?”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최치성이 순진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멍청한 놈을 보았나!”

버럭 고함을 친 홍인모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뒤를 쫓아가던 최 내관이 갑자기 되돌아와 최치성에게 조용히 한마디 했다.

“좌익위를 믿는다는 말, 취소하겠습니다.”

황급히 밖으로 사라지는 홍인모와 최 내관을 보며 최치성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하, 저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부디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저하!”

***

“그만 포기하는 게 좋겠소.”

형운의 말에 이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횃불을 밝혀놓아 주위는 환했다.

그러나 이레와 형운이 처한 상황은 암담했다.

시작은 좋았다.

밤놀이 가자는 형운의 말에 이레는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꼬인 건 숲에 막 들어서면서였다.

숲의 입구.

무언가에 놀란 듯 두 사람을 태운 백마가 갑자기 앞발을 들고 심하게 투레질을 해댔다.

겨우 진정시키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형운이 발을 굴렀지만, 어쩐 일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얼핏, 바람결에 비릿한 혈향도 느껴졌다.

어쩌면 숲 어딘가에서 산짐승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 무언가를 백마가 감지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 하지만, 저리 겁을 먹고 저항하니.

무언가 께름칙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그들은 지름길을 포기하고 둘러가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제야 백마는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일이 틀어지려 작정한 것일까?

어둠 속을 걷던 백마는 늪을 보지 못하고 덤벙 발을 딛고 말았던 것이다.

사정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불을 밝혀 주위를 살피고 난 뒤였다.

이레는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녀가 무사히 수렁 밖으로 몸을 피하자, 그제야 형운 역시도 말에서 내려 단단한 땅에 발을 디뎠다.

문제는 백마였다.

수렁에 빠진 녀석은 연신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삶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녀석의 몸은 점점 깊게 빠져들었다.

“워워, 그렇게 몸부림치면 안 돼.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오자. 옳지.”

이레는 겁먹은 말을 다독이며 어떻게든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백마의 몸부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졌다.

이레는 녀석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형운도 그녀를 도와 고삐를 당겨 보았지만, 두 사람의 힘만으론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갔다.

허우적거리는 백마도, 녀석을 잡아당기는 이레와 형운도 기진맥진해졌다.

“이젠 틀린 것 같소.”

형운이 말했지만, 이레는 포기할 수 없었다.

녀석의 커다란 눈망울이 자기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녀석을 버려둔 채 돌아선다면 일평생 저 눈빛이 가슴에 비수처럼 남아 견디기 어려우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우리 애써봐요.”

좀처럼 고삐를 놓지 못한 채 이레가 말했다.

형운은 물끄러미 그녀와 백마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가 늪 가장자리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갔다.

“저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거길 왜 들어가시는 겁니까?”

놀란 이레가 다급히 형운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살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그대가 살리고 싶다면, 살려야지. 어떻게든…… 살릴 것이오.”

어느새 백마의 바로 곁까지 간 형운이 녀석의 몸통을 힘껏 밀었다.

“뭐 하고 있소? 은랑, 어서 고삐를 당기시오!”

“네? 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이레는 할 수 있는 힘껏 고삐를 잡아당겼다.

제발.

제발…….

제발……!

“휘이이잉!”

백마가 긴 울음을 토하며 쑤욱, 늪 밖으로 퉁겨지듯 뛰쳐나왔다.

녀석의 꼬리 끝을 잡은 형운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저하, 저하!”

이레는 한달음에 형운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의 얼굴에 묻은 진흙을 닦으며 이레는 연신 형운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괜찮으시어요?”

“은랑이 보기에…….”

잔기침과 함께 헉헉, 마른 숨을 토해내며 형운이 말을 이었다.

“내가 괜찮아 보이오?”

이 와중에도 농 섞인 그의 물음에 이레는 눈가가 붉어졌다.

동시에 풀썩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저하…….”

“은랑, 그거 아시오?”

“무얼 말입니까?”

“내가 아는 여인 중 은랑만큼 고집 센 여인도 없다오.”

“그러는 은백께서는 아십니까?”

“무얼?”

“제가 고집 피운다고 나무라지 않는 분은 은백이 처음이십니다.”

“……늘 옳은 고집이니까.”

“…….”

“은랑은 고집은 늘 옳았소. 그러니 어찌 나무랄 수 있겠소.”

“…….”

이 사내는 모르는 듯했다.

자신의 그 여상한 말이.

지나가는 듯 담백하게 내뱉는 이야기가 제 연인의 심장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자신을 이렇게 깊게 믿고, 신뢰하는 사내가 있다는 것이 어떤 울림을 주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붉어졌던 이레의 눈가에 기어이 슴벅한 물기가 고였다.

무너진 둑처럼 후두둑, 흘러내리는 눈물에 형운이 놀란다.

“내가 또…… 그댈 울린 것이오?”

형운은 진흙 범벅이 된 손으로 이레의 눈가를 닦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다행이다 싶어서요. 이렇게 모두 괜찮으니…… 안심이 되어 그럽니다.”

“그럼 웃어야지. 다행이다, 안심이다 싶으면 웃어야지, 어찌 우는 것이오?”

“울지 않습니다. 이제 아니 울 겁니다.”

이레는 주먹을 들어 눈가를 쓱쓱 닦았다.

그러곤 머쓱한 상황을 전환하려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은백, 이런 상황에 적당한 물음일지 모르겠지만…….”

“말해보오.”

“이게 저와 하고 싶었던 그 ‘밤놀이’는 아니겠지요?”

“…….”

형운이 먼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뭡니까? 왜 대답을 아니 하셔요?”

어리둥절하여 다시 묻는 이레에게 형운이 짓궂은 웃음을 보였다.

“이리 은랑이 즐거워하니. 그렇다고 할까, 고민 중이오.”

“뭐라고요?”

기가 막힌 듯 이레는 핫,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이내 형운과 시선이 마주했다.

진흙에 빠졌다 나온 터라. 그 어느 때보다 엉망인 모습이지만.

눈부신 미려함과 태연한 귀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은 여전하였다.

그 어느 것으로 저 사내의 본질을 덮을 순 없었다.

그런 사내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원하고, 그녀만을 갈망하였다.

이레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즐겁습니다.”

“무어가?”

“은백과 함께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무엇이라도?”

“네. 가령…….”

“가령…… 이런 것도 좋습니다.”

이레의 입술이 형운의 입술을 매끄럽게 어루만졌다.

오뚝한 콧날이 비끼듯 엇갈리고, 서로를 향해 내뿜던 숨결은 본디 하나인 듯 이레의 입안으로 모였다.

서걱대는 달콤함이 그녀의 입안을 간질였다.

목덜미를 파고들던 눅진한 바람은 형운에게 가로막혀 더는 이레를 괴롭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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