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놀자
“참으로 놀랄 노(浶) 자네요.”
이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신 탄성을 흘렸다.
단상 위에는 사계 노인이 만든 다섯 가지 물품이 차례로 놓였다.
사계 노인의 첫 번째 작품은 노란 달맞이꽃이 정교하게 수자 놓인 당혜였다.
낮에는 연한 꽃잎을 수줍게 오므렸다가, 달밤에만 환하게 피어나는 달맞이꽃 당혜는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탐을 낼 만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혜는 삼천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렸다.
두 번째는 햇살이 닿는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는 진귀한 비단이었다.
어찌 보면 붉은빛이 나는 듯싶고, 다른 쪽에서 보면 푸른 빛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짙은 청록의 빛깔을 그리고 때론 이른봄의 진달래 빛이 감도는 비단 스무 필.
이 역시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가격으로 주인을 찾았다.
세 번째 물건은 봉황이 정교하게 새겨진 옥 가락지였다.
“단단한 옥을 저리 정교하게 세공할 수 있는 사람은 쉬이 찾을 수 없답니다.”
한서로의 말에 이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설명이 없어도 눈앞의 옥가락지가 얼마나 귀한 물건인 줄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만 냥이라는 거금에 물건이 팔렸다.
네 번째, 금과 은 그리고 진주를 섞어 만든 비녀에는 무려 삼만 냥이라는 엄청난 가격이 매겨졌다.
그렇게 한바탕 치열한 시간이 지나고 사계 노인의 다섯 번째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으로 보여드릴 작품은 사계 노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겁니다.”
단상 위에 있던 사내의 말에 전각 마당이 술렁거렸다.
“사계 노인의 마지막 작품이라니……?”
“그럼 저걸 끝으로 더는 물건을 만들지 않겠다는 말인가?”
여기저기서 의문이 터져 나왔다.
중년 사내는 묵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계 노인은 이 물건을 마지막으로 그 어떤 물건도 만들지 않겠다고 했습지요. 그러기에 이 마지막 작품은 더 의미가 깊을 겁니다.”
중년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커다란 비단보에 쌓인 물건으로 향했다.
이목이 쏠린 가운데 시비가 천천히 비단 매듭을 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천막 안에서 크고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사계 노인의 마지막 작품 역시도 여인들을 위한 패물로 생각했건만.
지금까지 선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물건이 비단보 안에서 나왔다.
이레의 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게 뭡니까?”
한치 너비에 높이는 대략 한치 반 정도의 황동 상자.
상자의 앞쪽에는 동그란 모양의 홈이 패여 있었고, 홈의 가장자리로 십이지상(十二支象)은 차례로 새겨져 있었다.
홈의 정중앙엔 두 개의 짧고 긴 바늘이 각기 다른 십이지상을 가리켰다.
이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귀한 물건의 정체를 한서로에게 물었다.
대답은 단상 위에 있던 중년 사내에게서 들려왔다.
“사계 노인의 마지막 작품은 자명종입니다. 상자 속의 태엽을 감으면 저 짧고 긴 황금 바늘이 스스로 움직여 하루 열두 번 시간을 알려주는 희귀한 물건이지요. 어디 그뿐일까요. 자명종에 대한 이야길 접하신 주상전하께서도 곁에 두길 원하셨다고 합니다.”
사계 노인의 마지막 작품.
쉬이 접할 수 없는 진귀한 물건.
주상 전하께서도 곁에 두길 원하셨던 명품.
중년인이 언급한 몇몇 단어가 가져온 파장은 상당했다.
경매장의 공기가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자명종의 가격이 얼마가 되든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취하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천막 곳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 경매를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열다섯 번째 천막 안에서 ‘오만 냥’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칠만 냥을 내겠소.”
“팔만 냥, 팔만 냥을 부르겠네.”
자명종의 가격은 순식간에 천정부지로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십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경매장을 관통했다.
이레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러다 조선의 모든 재물이 수월로 모이겠습니다.”
반 농담 섞인 이레의 말에 한서로가 맞장구쳤다.
“어디 조선뿐이겠습니까. 장차 세상의 모든 재물을 모을 작정입니다.”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앉은 한서로를 보며 이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지금까지 이레는 한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다.
시전의 여장부, 만사여의.
이레는 그녀가 재신의 총애를 받고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한서로, 그녀는 재신의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재신 그 자체였다.
저 작은 체구에 담긴 배포가 역사에 기록된 영웅들의 그것과 비견해도 절대 뒤지지 않으리라.
대체 한서로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들어 있는 것일까?
아지랑이 같은 궁금증이 이레의 뇌리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또 하나의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레는 한서로에게 머물던 시선을 단상 위로 돌렸다.
저 자명종의 주인, 과연 누가 되려나?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경매가 끝나고 이레와 한서로는 수월의 내실로 자리를 옮겼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기분입니다.”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한서로는 앓는 소리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경매란 창과 칼을 대신하여 재물로 치르는 또 하나의 전투였다.
“이제 그 물건들은 어찌 되는 겁니까?”
“주인의 품으로 들어가겠지요.”
“다른 것도 대단했지만, 그 자명종이라는 건 정말 엄청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쑥 궁금증이 떠올랐다.
이레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대체 사계 노인은 어떤 분입니까?”
“글쎄요…….”
한서로는 말끝을 흐리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사계 노인의 정체를 선뜻 밝힐 수 없음을 용서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 속내를 모르지 않기에, 이레 역시 웃음을 보였다.
“크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궁금한 것뿐입니다. 저런 대단한 물건이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해서요.”
“언젠가 뵐 수 있을 날이 올 겁니다.”
“그러게요. 꼭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여인은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경매장에서 내내 온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탓인지.
아늑한 내실로 들어서는 순간, 긴장이 풀리며 동시에 마른 숨이 푹 내쉬어졌다.
“하아…….”
“휴우…….”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미리 약조라도 한 사람들처럼 똑같은 행동을 하던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풀썩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런 느슨한 분위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레와 한서로의 만남 이후.
나날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런 것들에 익숙해진 탓일까?
작금의 평안함이 다소 낯설고 어색하였다.
그럼에도 이 느긋함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문풍지로 스며드는 붉은 노을.
바람이 흔들린 풍경 소리.
그리고 낮게 가라앉는 고요함.
모처럼 가뿐해진 마음으로 이레는 이 순간을 즐겼다.
한서로 역시 같은 마음으로 여유를 만끽했다.
두꺼운 얼음장을 깨고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처럼, 시간은 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흘렀다.
붉은 노을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거무스름한 어둠이 더께처럼 밀려들었다.
때마침 밖에서 청지기가 인기척을 냈다.
“주인님, 마포 나루에 상선(商船)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레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런, 내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한서로의 일에 방해될까 싶어 서두르나 찰나.
어쩐 일인지 한서로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닙니다. 나루엔 천천히 나가봐도 됩니다. 좀 더 머물다 가시지요.”
평소답지 않은 모습인지라.
이레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일과 관련한 것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한서로가 아니던가.
“무에 제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한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이레가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대답하는 한서로의 시선은 이레가 아닌 문밖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한서로는 힐끗대며 중문 밖을 살피곤 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예리한 이레가 그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누굴 기다리십니까?”
“아닙니다.”
“그럼 나를 이곳에 잡아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잡, 잡아두긴 누가 잡아두었다고 그러십니까?”
펄쩍 뛰는 한서로를 향해 이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심하게 부정하시네요.”
“그럴 리가요.”
“장사수완은 타고나셨지만, 거짓 연기는 영 서투신 거 아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레는 먼 허공을 응시하는 한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듯 날카로운 눈빛.
집요한 시선은 진실을 말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따라붙을 것만 같았다.
결국, 한서로는 패배를 인정했다.
“실은 말입니다…….”
***
잠시 후.
이레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궁궐이 아닌 남산골이었다.
땅거미가 드리워진 하월네의 집.
한서로의 실토로 이레는 이곳에 형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시래요.”
마당으로 들어서는 이레를 보고 강현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잘 지내는가?”
“저야 당연히 잘 지냈지요. 이봐, 뭘 하는가. 귀인 오셨소.”
그의 부름에 강현보의 안사람도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손을 행주치마에 닦으며 그녀는 이레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셨어요?”
“뭣해? 어서 뭐라도 내오질 않고서.”
“어머나, 내 정신을 좀 봐.”
내외는 안팎으로 수선을 떨었다.
이레가 서둘러 그 두 사람을 말렸다.
“지나가다 잠시 들린 것이라네. 그리 신경 쓸 것 없으이.”
강현보의 아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가 섭섭합니다요. 우리 이 양반 살린 생명의 은인께 신경을 안 쓰면 어디에 신경을 쓴답니까요.”
“그 일일랑은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이미 베푼 것보다 내 받은 것이 훨씬 많다네. 그것보다…….”
이레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강현보가 씩, 머쓱한 웃음을 떠올렸다.
“빈궁마마…….”
강현보가 뒤꼍의 작은 별당으로 눈짓을 보냈다.
하월네를 찾은 이레의 이유.
저 별당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리라.
“오셨다고 고할까요?”
강현보가 물었다.
이레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 기다릴 것이니, 자네도 자네 할 일 하게.”
그녀는 마당 한쪽에 있는 정자 계단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런 그녀가 신경 쓰이는 듯.
강현보 내외는 연신 눈치를 살폈다.
이레는 손을 내저었다.
‘정말 괜찮으니, 일 보게.’
단호한 손짓에 강현보의 아내는 부엌으로, 그리고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난전의 상인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월네의 집에는 물건을 구하러 온 난전의 상인과 보부상들이 짐을 부리거나 꾸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이레의 시선이 한 잡화상이 챙기는 물건으로 향했다.
도투락 댕기, 은비녀, 제비꽃 모양의 머리꽂이…….
불현듯 물안개 같은 웃음이 이레의 입가에 피어오른다.
어떤 날의 기억이 뇌리로 떠오른 까닭이다.
서탁에서 만난 오만불손했던 백귀.
자신이 죽은 귀가 아닌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나갔던 대광통교.
두려움과 설렘이 반반씩 뒤섞였던 그 봄날.
왕세손을 보겠다고 몰려든 군중들 사이에서 그녀 홀로 곁눈질로 다른 이를 찾고 있었더랬다.
눈앞에 그림처럼 흘러가는 왕세손의 행렬을 두고서…….
진실로 그녀가 만나고자 했던 백귀가 다름 아닌 왕세손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만약 서탁을 불손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라버니를 찾겠노라, 초간택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지금쯤 어느 어귀를 맴돌고 있을까?
기다림의 시간만큼 상념의 깊이도 깊어졌다.
“마마, 이제 끝났는가 봅니다.”
강현보의 목소리에 이레는 잠에서 깨듯 눈을 떴다.
때마침 별채를 나오던 형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빈……아니, 은랑.”
지금껏 무심하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경계심.
저도 모르게 빈궁이라 부르려던 형운은 서둘러 호칭을 바꿨다.
방 안에 함께 있던 사내들을 의식한 까닭이다.
뒤따라 나오던 사내가 물었다.
“아는 분이시옵니까?”
무어라 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형운을 대신하여 노파, 하월네가 대답을 가로챘다.
“귀인께서 걸음 하셨군요.”
“귀인?”
“누구시기에……?”
방 안에 있던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사대부 사내의 복식부터 시작하여 패랭이 차림까지.
다양한 차림새의 사내들이 목을 길게 내밀었다.
이내 그들은 검은 너울을 쓴 이레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중 이레를 아는 이가 없었다.
팽례들의 어미라 불리는 하월네를 제외하곤.
하월네는 이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치 빠른 노파는 형운을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뒷정리는 이 늙은이가 하겠나이다.”
“그래 주겠소?”
“기다리신 지 오래되신 듯합니다.”
형운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
하월네의 시선을 좇아 눈길을 돌리니, 소맷자락 밖으로 드러난 이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에 붉어진 작은 주먹.
형운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서둘러 마루를 내려섰다.
“뜻깊은 시간이었소.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하겠소.”
“기별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이레와 함께 하월네의 집을 빠져나갔다.
“저들은 다 뉘옵니까?”
“더러는 서자(庶子)고 더러는 얼자(孼子)들이니. 세상에 존재하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오.”
“가슴에 품은 불꽃이 범상치 않은 모양입니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옵니다.”
“배움과 학식이 남다른 자들이오. 다음엔 은랑에게도 소개하고 싶소.”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야 겨우 걸음을 멈춘 형운은 이레를 돌아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찌 알았소?”
“정신일도(精神一到) 하면 못 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오늘은 꼭 내가 그댈 마중 나가려 하였거늘.”
형운은 차갑게 얼어붙은 이레의 손을 자신의 손안에 담았다.
“누가 마중 나오는 것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그래도 번번이 그대가 먼저 나를 찾으니. 다음엔 꼭 내가 찾을 것이오.”
다짐하는 형운에게 이레는 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씀 올리기 송구하오나,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듯싶습니다.”
단정 짓는 그녀에게 그가 불퉁한 눈빛을 보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는 말투인 거요?”
이레는 두 사람이 걷는 길을 가리켰다.
“이 길은 궁으로 가는 길이 아니질 않습니까. 궁으로 돌아가는 길도 찾지 못하시니. 어찌 저를 마중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대를 찾는 길은 절대 잃지 않을 것이오.”
“…….”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지금 우린 궁으로 가는 게 아니오.”
“궁으로 가는 게 아니면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형운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들려오는 대답.
“불필지.”
“네?”
“알 필요 없소. 아니, 알려주지 않을 것이오.”
예측이 불가한 그의 모습에 이레는 잠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형운이 잡아끌었다.
멀지 않은 곳에 하얀 백마 한 마리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까지 타야 합니까?”
다시금 물었지만, 형운은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말에 태우고 그 뒤에 바싹 앉을 뿐이다.
얼결에 말고삐까지 쥐게 된 이레가 나름 저항했다.
“정녕 무얼 하시는 겁니까?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데도 아니 갈 겁니다.”
제 말을 증명하듯 고삐 쥔 손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대답해 주시지요.
기세등등한 얼굴로 돌아보려는 찰나.
등 뒤에 있던 형운이 돌연 이레의 오른쪽 어깨 위에 제 얼굴을 괬다.
그러곤 귓가에 속삭였다.
“놀러 갑시다.”
“……네?”
전혀 뜻밖의 대답인지라.
이레는 제 손등을 감싸오는 형운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의 뜻이 무엇일까.
형운의 속내를 가늠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 뭘 하자고 하셨습니까?”
확인하는 이레의 귓속으로 형운의 또박또박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놀러 갑시다.”
이레의 손등을 감싸 쥔 형운이 고삐를 당겼다.
놀란 그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바싹 붙어 있던 형운의 입술이 이레의 귓불과 뺨을 어루만졌다.
돌연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
갑작스러운 수줍음에 이레의 얼굴이 붉어졌다.
반면,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봄밤의 초승달인 듯.
시리도록 옅은 눈웃음을 매달고서 그가 말했다.
“나랑…….”
“…….”
“놀자.”
“…….”
“나랑 놀자, 이레야.”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하얀 백마가 어둠을 향해 내달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설렘이 이레를 급습했다.
그녀의 심장이 저리도록 쿵쾅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