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격세감(隔世感)
중양(仲陽:음력 2월)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옷깃을 파고들던 바람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사람들은 추위에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하지만 대궐을 드나드는 조정 신료들의 어깨는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특히 하루가 멀다고 상소를 올리며 동궁의 처신을 질책하고, 반대했던 자들은 한껏 몸을 웅크렸다.
웅크린 것이 어디 몸뚱이뿐일까.
그들의 간덩이는 움츠러들다 못해 좁쌀처럼 쪼그라져 있었다.
주상께서 별안간 대리청정하는 세손에게 병권과 인사권을 쥐여주었으니.
믿었던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궁 안팎으로 삼삼오오 모인 관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앞으로의 처신을 의논하는 것이리라.
아침 문안을 올리고 빈궁전으로 향하던 이레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형운에게 힘의 추가 기울었다 하여 마냥 마음 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저희가 뿌린 씨앗이 있으니, 장차 맺히는 열매가 저들에겐 치명적인 독이 되리라.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겠지.
“무얼 그리 생각하시나이까?”
상념에 빠진 채 빈궁전 마당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이레의 앞으로 한서로가 다가왔다.
“왔습니까?”
이레는 한서로의 손을 반갑게 맞잡았다.
그들은 서둘러 처소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앞에 꽃잎을 활짝 펼친 매화꽃 차와 씨를 뺀 대추 속에 잣을 넣은 다과가 놓였다.
입안에 머금은 꽃차를 음미하며 한서로가 말문을 열었다.
“찻잔 속의 꽃도 따뜻한 기운에 활짝 피거늘. 이제 북풍한설도 지나갔건만, 빈궁마마의 옥안에 서린 한기는 어찌 여전하십니까?”
“내 표정이 그리 보입니까?”
“네. 듣자 하니 동궁 저하께 좋은 일이 생기셨다지요. 이제는 근심을 내려놓으소서.”
한서로의 말에 이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알지 않습니까. 본디 봄에 오는 추위가 가장 매서운 것을요. 따뜻한 볕에 자칫 방심하였다가 겨우내 피했던 고뿔이라도 들까 염려가 되는군요.”
돌려 얘기하는 이레의 속마음을 어찌 모를까.
동궁께서 병권과 인사권을 쥐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안심하는 적들을 바싹 경계하는 계기를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저들은 저희가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다시 말해 물불 가리지 않으리라.
“그래도 주상 전하께서 친히 신료들에게 보여주시지 않으셨나이까. 감히 왕권에 도전하면 어떻게 될지. 분명히 경고하셨사오니, 저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옵니다.”
“문제는 신료들이 아닙니다.”
이레의 한숨에 한서로가 의아한 눈빛을 하였다.
“신료들이 문제가 아니시라면 누가 문제입니까?”
“가장 큰 열쇠를 쥔 건 화완옹주십니다.”
“화완옹주라면…….”
말끝을 흐리던 한서로는 미간을 한데 모았다.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소문이요?”
“화완옹주가 십학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춘 한서로가 말을 이었다.
“설마 그분께서 십학사의 학사였던 겁니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학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레는 십학사의 학사들을 떠올렸다.
해와 사슴.
바위와 대나무.
그리고 의중을 알 수 없게 된 장무열까지.
모두 화완옹주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십학사에 끼치는 화완의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한서로가 다시 물었다.
이레는 찻잔을 들었다.
“당장 무얼 어찌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갈 생각입니다.”
딸깍.
찻잔을 내려놓은 이레의 앞으로 한서로가 바싹 다가와 앉았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올리는 말씀이옵니다.”
“무슨……?”
“제게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청에 이레는 의아했다.
그런 이레에게 한서로가 마치 조르는 아이처럼 말했다.
“모처럼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습니다.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구경거리요? 대체 어떤 구경거리이기에…….”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한서로는 이레의 등을 밀어 침소에 딸린 곁방으로 향했다.
이미 언질을 받은 듯 금정이 순순히 이레의 환복을 도왔다.
“너무 늦지만 마옵소서.”
겁쟁이 금정의 담담한 잔소리를 뒤로하고 이레와 한서로는 궁을 나섰다.
***
모처럼의 나들이인지라.
막상 궁 밖으로 나오자 이레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궁궐과 달리 궁 밖은 사방에 화사한 봄날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
좀 더 비싼 값을 받으려는 상인과 어떻게든 깎으려는 사람들로 시전은 왁자하였다. 활기찬 소란을 지나 수월이 있는 공방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레는 멈춰 서고 말았다.
공방 골목 앞.
사람들로 만들어진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이레의 물음에 한서로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다고요.”
“대체 그 재미난 구경거리가 무엇인데…….”
“사계 노인이 만든 작품들을 오늘 선보이려 합니다.”
“그렇다고 이리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단 말입니까?”
“도성에서 사계 노인의 물건이 없는 집안은 진정한 명가(名家)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답니다. 게다가 요즘엔 도통 물건을 만들지 않으니. 여러 개의 물건을 한 번에 선보인다고 하니. 진정한 명가 소리를 듣자고 저리 모여들었겠지요.”
“그 소문, 혹여 수월에서 퍼트린 건 아니겠지요?”
이레의 은근한 물음에 한서로는 웃음을 보였다.
“소문의 근원지가 대수겠습니까. 중요한 건 소문이 사실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계 노인이 만든 물건은 어느덧 하나의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 덕에 사계 노인의 물건을 지닌 사대부의 자부심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 모든 것이 한서로, 저 젊은 여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수완인지라.
이레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과연 재신(財神)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나저나.
재신의 총애를 온몸으로 받은 여인이 오늘은 무얼 보여주려나.
호기심과 궁금증을 지닌 채 이레는 한서로와 함께 수월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 사계 노인의 작품이 진열되었던 전각 앞에 너른 차일이 처져 있었다.
그 아래로 반원형의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서로가 이레에게 설명했다.
“이번 사계 노인의 작품은 경매 형식으로 판매하려고 합니다.”
“경매 형식이라면……?”
“네. 더 많은 값을 치르는 자가 물건을 취하는 것이죠.”
이레는 공방 골목 끝까지 길게 늘어선 줄을 떠올렸다.
“이 많은 재물을 어디에 쓰려는 겁니까?”
이레의 물음에 한서로가 대답했다.
“수월을 늘리는 일에 생각보다 많은 재물이 들어가더군요.”
“그렇겠지요.”
“아참, 그러고 보니 대목(大木) 어른이 집 짓기에 맞춤한 목재를 찾았다는 기별을 보냈습니다.”
“전각 지을 목재가 없어 고심하더니. 기어이 찾아냈나 보군요.”
반가운 소식인지라.
이레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바닥을 다질 질 좋은 소금과 숯도 닷새 후면 도착할 겁니다.”
“수월이 앞으로 얼마나 커질지 궁금합니다.”
“무얼 상상하시든, 아마 마마께서 상상하시는 그 이상일 겁니다.”
한서로의 호기로운 장담에 이레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웃음기를 거둬들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사건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높았던 까닭이다.
“저 많은 사람을 모두 수월 안으로 들였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소란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려고요?”
“그래서 마련한 것이 바로 저겁니다.”
한서로는 단상 앞에 있는 스무 개 남짓한 천막을 가리켰다.
두어 사람 들어가면 적당할 만한 작은 규모의 천막.
각각의 천막마다 수월의 무사들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한서로는 그중 가장 정중앙에 자리한 천막으로 이레를 이끌었다.
천막 앞을 지키던 천호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리 마련된 의자에 이레를 앉게 한 뒤 한서로는 설명을 이었다.
“빈궁마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 많은 사람을 수월로 들였다간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천막에 들어올 자격을 정했습니다. 합당한 자격을 지닌 사람만이 경매에 참여할 수 있게 규칙을 정했사옵니다.”
“천막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라면……?”
“첫 번째로 집안을 볼 겁니다.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이라도 그 집안사람들의 됨됨이가 선하다면 상관없습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당연합니다.”
한서로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천막 하나당 오천 냥의 자릿세를 받기로 했습니다.”
“오천……냥? 지금 자릿세로 오천 냥이라고 했습니까?”
“네.”
“설마 그 엄청난 값을 치르고 들어올 사람이 있을……?”
이레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다.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이레가 있는 옆 천막으로 누군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레는 놀랍고 황망한 시선으로 한서로를 응시했다.
“그 엄청난 값을 치르고 들어오는 사람이 정말 있군요.”
그래도 어쩌다 한 명뿐이겠지.
설마 오천 냥이나 하는 엄청난 자릿세를 내고 경매에 참여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레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소리와 함께 옆 천막의 주인이 정해졌다.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레에게 한서로가 속삭였다.
“벌써 놀라신 건 아니시죠?”
“이런 광경을 보고 안 놀라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요?”
“진짜 놀랄 일은 지금부텁니다.”
“설마, 더 놀랄 일이 있을까요?”
반신반의하는 찰나.
“네 이놈들!”
난데없는 소란이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했다.
***
경매가 열리는 전각의 대문 앞.
“내가 뉘인지 모르진 않을 테고. 네놈들이 죽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냐? 감히 내 앞을 가로막아?”
앙칼진 목소리 끝에 쫘악,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반가의 중년 여인이 자신의 앞을 막고 선 젊은 무사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그럼에도 분기가 풀리지 않는지 여인의 발길질이 무사를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한서로의 물음에 천막 앞을 지키던 천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국동 그분이십니다.”
“그분이 또 오셨군요.”
한서로와 천호의 대화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레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누군데 그러십니까?”
“홍인한 대감의 며느리입니다.”
“그니라면…….”
이레는 눈가를 가늘게 여미고 천막의 작은 틈새로 바깥을 살폈다.
홍인한의 며느리 이 씨가 반쯤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산발을 한 채 패악을 떨고 있었다.
“저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소란을 피운답니까?”
가라앉은 시선으로 이 씨를 살피던 이레가 한서로를 바라보았다.
“또 고리채를 빌리러 온 모양입니다.”
“고리채라면……?”
한서로가 대답했다.
“예전에 빈궁마마와 함께 수월의 물건을 사갈 때 고리채를 빌려 주었더랬습니다.”
“그 후에도 고리채를 또 썼단 말입니까?”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이지요.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열 번 되는 건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체 얼마나 가져다 쓴 겁니까?”
“집안의 전답 문서를 담보삼아 가져다 쓴 것이 이미 삼천 냥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쓴 겁니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곱고 어여쁜 것은 보이는 족족 사들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요즘엔 투전판에도 기웃대는 모양입니다.”
“고리채에 투전까지…….”
이레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집안에선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알면 저리 두겠습니까? 그 댁 노마님 성정,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서로의 대답에 이레는 성성한 눈빛의 노마님을 떠올렸다.
홍 씨 집안의 며느리인 이 씨가 저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걸 아신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와스스 소름이 돋았다.
보는 사람의 간담은 서늘하건만.
정작 이 씨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이보게, 만사여의. 나, 안국동 홍 대감댁 작은 며느리일세.”
이 씨가 마당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여기 있는 거 다 듣고 왔으이.”
“…….”
“내 오늘 당장 꼭 써야 할 곳이 있어 그러니 돈 좀 빌리세. 백 냥, 아니…… 오십 냥, 아니…… 열 냥만이라도 빌려주면 내 금세 되갚음세.”
이 씨의 다급한 음성이 마당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지금까지 빌린 것까지 한 번에 갚을 것이야. 내 열 배, 스무 배로 이자를 쳐 줄 테니…….”
이 씨의 애원에도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았다.
기어이 이 씨가 제 성깔을 드러냈다.
“이런 고약한 것들을 보았나.”
“…….”
“천한 상것이 돈 좀 있다고 감히 양반을 능멸하는 것이냐? 반상의 법도가 엄연하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
“당장 기어와 싹싹 빌지 않으면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어 까마귀 밥으로 만들어…….”
저주와 욕지거리의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한서로가 천호에게 명을 내렸다.
“귀한 분들을 모신 귀한 자립니다. 더는 시끄러워선 아니 될 겁니다.”
“송구합니다.”
천호가 서둘러 밖으로 사라졌다.
이어 그의 지시를 받은 무사들이 서둘러 이 씨를 끌어냈다.
“이보시게,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시게나. 이보시게…….”
기어이 이 씨의 입에서 울음 섞인 애원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든 끌려나가지 않으려 그녀는 자신을 잡은 무사의 팔을 물어뜯고 발길질을 연신 해댔다.
그러나 잘 훈련된 무사를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수월의 무사들에게 끌려 밖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어느 천막에선가 팔랑거리는 쥘부채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다른 천막에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홍 대감의 며느리라 하였습니까? 반가의 여인이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찌 저런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 물을 제대로 흐리는군요.”
“쯧쯧, 망국동의 망 대감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더니. 나라가 망하기 전에 그 집안부터 망하려나 봅니다.”
“험험, 누가 듣겠소.”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누가 들은 들 무에 대수겠소.”
“그나저나 내뱉는 욕지거리며 하는 행태를 보아하니. 시중에 떠도는 소문이 말짱 헛말은 아닌 듯싶소.”
“시중에 무슨 소문이 났답니까?”
“홍 대감의 며느리가 무녀를 불러 굿판을 벌였다 하오.”
“굿판은 왜요?”
“작금의 동궁을 해코지하는 굿판이라는 말이 횡행하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하였소.”
본디 좋은 일에는 입을 다물어도 남 안 되는 일에는 한 입씩 보태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사방이 가로막힌 터라.
옆에 누가 있는지, 누가 어떤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
사람들은 거침없이 붉은 속내를 드러냈다.
한낱 부질없는 것이 사람 사는 인생이고, 그보다 더 하찮은 것이 권세라 하였던가.
한때는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기고만장하던 이 씨가 이제는 양반의 체면을 무너트리는 천덕꾸러기가 될 줄 어느 누가 짐작하였을까.
씁쓸한 격세지감(隔世之感).
이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곁눈질로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한서로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곧 경매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밝은 목소리를 좇아 이레는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단상 위엔 중인 복색의 사내가 서 있었다.
“긴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중인 사내가 목청을 돋웠다.
“그럼 지금부터 사계 노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들을 선보이겠습니다.”
술렁이던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 정적을 즐기듯 잠시 뜸을 들인 사내는 오른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다섯 명의 시비가 각기 다른 다섯 색깔의 비단 보퉁이를 안고 들어왔다.
잠시 후.
경매를 시작하는 징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