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변한 건 나였구나
“주상 전하 납시오.”
낭랑한 내관의 외침에 존현각에 있던 모두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께선 침소 밖으로 걸음조차 옮기지 못할 만큼 쇠하신 몸이라 하였는데.
그런 분께서 존현각으로 직접 행차하시었다고?
모두의 시선이 존현각 입구로 향했다.
잠시 후.
임금이 빈궁의 부축을 받으며 존현각의 붉은 중문을 넘어섰다.
“전하!”
“주상전하!”
놀라고 황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 신하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왕은 존현각을 가로질렀다.
형운이 왕에게 달려왔다.
“할바마마.”
“네가…… 고생이 많구나.”
왕은 이레에게 의지하고 있던 팔을 형운에게 건넸다.
형운은 이레에게 눈으로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예정에 없던 왕의 등장에 놀란 건 신료들만이 아니었다.
형운 역시 깜짝 놀랐다.
이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눈빛으로 대답을 마친 이레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왕은 형운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거친 숨을 길게 내 뿜은 왕은 주름진 눈으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조정 대신들의 얼굴과 상소를 올린 유생들.
좀 전까지 반대를 외치는 대신들과 홀로 맞서던 형운.
그리고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화완 옹주와 이레까지.
그들 모두를 찬찬히 쓸어본 왕이 다시 화완에게 시선을 옮겼다.
“화완아.”
“네. 아바마마.”
“내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아니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아니다. 내 총기가 예전 같지 않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네게 내 말을 전해달라 부탁한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턱이 있겠느냐?”
“……!”
화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왕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형운과 팽팽하게 맞선 것을.
왕을 들먹이며 형운을 난처하게 만든 것을.
그 모든 일을 직접 두 귀로 들은 것이다.
화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짧은 말로 화완을 물리친 왕은 시선을 다시 대신들에게로 돌렸다.
“내 잠시 밖에서 듣자 하니 동궁과 많은 일로 다투는 모양이더구나. 어이하여 그리 맞선 것이냐?”
대제학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저하께옵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하해(夏海)와 같사오나 아직 복잡한 법도를 모두 깨치기에 부족함이 있어, 소신들이 부족한 공부를 일깨워드리고 있사옵니다.”
“그리하였는가? 이상하군. 내가 듣기론 동궁이 무언가 하자 할 때마다 대신들이 너나없이 반대하느라 목소리를 높인다 하던데.”
“저하께서 품은 뜻이 크고 웅장하시니, 사소한 잡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소한 잡음이라. 하면 작은 실수만을 알려주고 동궁이 제 뜻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었던 말인가?”
“…….”
“왜 대답을 못 하는가? 동궁을 도와주었는가 묻지 않는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하께서 아직 모르시는 것이 많으신지라…….”
“좀 전엔 뜻이 크고 웅장하며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큰 바다와 같다 하였는데, 어찌 이번엔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하는가? 설마, 동궁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반대만 하는 것은 아닐 테지?”
“그것이…….”
대제학이 변명하려는 찰나.
“어의는 어디 있느냐?”
왕의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대제학의 말을 잘랐다.
이내 왕의 부름을 받은 어의가 달려 나왔다.
“소인 여기 있나이다, 전하.”
머리를 조아리는 어의에게 왕이 질문했다.
“어의가 보기에 앞으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그 어인 하문이시옵니까. 전하께서는 천세, 만세 무병장수…….”
쾅!
왕의 앙상한 주먹이 서탁을 거칠게 내리쳤다.
“입에 발린 거짓 말고, 어의는 한 치의 거짓 없이 제대로 말하라.”
놀란 어의의 목이 거북처럼 안으로 오그라들었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아,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전하께선 아직 강건하시오니. 모쪼록 아무 심려 마옵소서.”
왕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내 심신이 이토록 닳고 쇠하였는데, 강건하다니. 이곳에 진정 내 뜻을 헤아리는 신하는 없구나.”
늙은 임금의 탁한 시선이 자신의 신하들과 형운에게로 향했다.
“그대들도 알겠지만, 내 근자에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루에 제대로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니. 이젠 하루 한 시진조차 버겁다.”
“…….”
“이런 내가 조정의 일을 어찌할 것이며, 나라의 중차대한 일은 어찌 감당할까.”
왕의 한탄에 영의정이 나섰다.
“전하, 어찌 그리 말씀하시나이까. 어의의 말을 듣지 않으셨사옵니까. 앞으로 전하께선 천세, 만세를…….”
“헛소리!”
“전하…….”
“한심하구나. 그대들은 언제까지 내 입만 바라볼 것인가? 내일 당장 내가 죽기라도 하면 이 나라가 어찌될까 두렵구나. 오늘처럼. 지금까지 내내 그런 것처럼 동궁이 무언가 말할 때마다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옵니다만 반복할 것이 아니냐?”
“전하. 그런 일은…….”
“오늘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들었으니, 더는 허튼소리 말라. 오늘에서야 이 혼란한 상황을 알게 된 것이 답답할 노릇이다. 내가 당장 죽기라도 하면 이 나라 조정이 그대들의 반대로 파탄 나지 않을까 두렵구나.”
나직한 일갈로 대신들의 입을 막은 왕은 숨을 한껏 들이쉬며 지금까지의 모든 논란을 짧게 결론지었다.
“앞으로 모든 일을 동궁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라. 더는 날 들먹이며 동궁에 반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왕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간 관례와 관습을 들먹이며 동궁의 행사를 사사건건 반대했다. 하지만 이제는 동궁의 미숙함을 핑계 삼는 일조차 쉽지 않게 된 것이다.
“전하…….”
대신들은 급히 목청을 돋웠다.
하지만 노련한 왕이 준비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궁에게 순감군(巡監軍)을 수점(受點)하도록 명한다.”
“전하, 그 어인 천부당만부당한 명이시옵니까?”
“아직 전하의 옥체 정정하시거늘. 부디 명을 거둬주옵소서.”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명이 떨어졌다.
대신들의 반대가 사방에서 빗발쳤다.
순감군이 무엇이던가.
도성 안의 순찰을 맡던 관아의 순장과 감군을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순감군을 수점하는 일이란, 도성의 병권을 동궁인 형운에게 쥐여주겠다는 뜻이었다.
도성의 병권을 쥐는 것은 그저 허수아비 마냥 대리청정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대신들이 놀랄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왕은 대신들의 반발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술렁임이 줄어들자 탁하게 갈라진 왕의 음성이 존현각의 공기를 매섭게 깨트렸다.
“나아가 이비(吏批:문관 임용자 명단)와 병비(兵批:무관 임용자 명단)의 수점 역시 동궁의 의사에 따르도록 하라.”
“……!”
도성의 병권은 물론이고 문무백관의 임명조차도 동궁의 손에 들어갔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권력이 동궁에게 들어갔음을 뜻했다.
“아니 되옵니다.”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전하의 옥체 강건하시온데, 연치 어린 동궁께서 그 막중한 책임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임금의 뜻을 받들지 못하겠다며 신료들이 반발했다.
일순, 왕이 허공으로 손을 들었다.
순간.
우르르르.
무장한 무사들이 존현각을 에워쌌다.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호하는 상군과 협련군이었다.
오직 왕만을 위해 존재하며, 왕의 명령만을 따르는 조선 최고의 무인들이 당장이라도 검집에서 검을 뽑을 태세를 취하였다.
상황의 흉흉함에 신료들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직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왕은 신료들을 보며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내 명에 다른 생각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라.”
그러나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행여 입을 열었다간 자신들을 둘러싼 무사들의 검날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견이 없으니. 그럼 나는 그대들 역시 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알겠다. 앞으로 이 일에 대하여 입을 여는 자가 있다면 반역으로 간주할 것이니. 그리 알고 물러들 가라.”
반역.
단 두 글자에 무시무시한 협박이 서려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신료들이 하나둘 존현각에서 물러났다.
결국, 그곳에 남은 사람은 왕과 형운, 이레와 화완옹주뿐이었다.
“아바마마, 어찌 그런 결정을 내리셨나이까.”
화완이 뾰족한 목소리로 항의의 뜻을 전했다.
왕은 무심히 대꾸했다.
“해야 할 일이었다.
“하오나…….”
왕은 손을 들어 화완의 입을 막았다.
“완아.”
“네, 아바마마.”
“이 일은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아바마마, 그리 말씀하시면 이 화완은 섭섭하옵니다. 저는 다만 아바마마의 건강이 걱정되어…….”
화완옹주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번만은 왕은 존현각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볕이 좋구나. 오늘은 오랜만에 동궁과 함께 산책하고 싶다.”
화완이 재빨리 왕을 부축했다.
“이 화완도 함께하여요, 아바마마.”
왕은 슬그머니 화완이 잡은 손을 밀었다.
“완아.”
“네, 아바마마.”
“내가 동궁과 할 이야기가 있구나.”
그 온화한 거절에 화완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왕은 형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산책하지 않겠느냐?”
형운이 왕을 부축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소손이 함께하겠나이다.”
***
존현각을 나온 왕과 형운은 나란히 후원을 걸었다.
“오늘 모처럼 푸근하구나.”
왕의 혼잣말에 형운은 숨이 턱 막혔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살이 에일 듯했다.
왕은 그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날이 무척…… 따사롭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산책하였더니 곤하구나. 저기서 잠시 쉬어갈까?”
“네.”
왕과 동궁.
늙고 어린 조손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가만 겨울 햇살을 더듬던 왕이 입을 열었다.
“조강을 지켜보니, 신료들의 반대가 범상치 않더구나.”
“소손이 어리고 미숙하니,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동궁이 미숙하다? 허허, 그런 사람치고는 그리 불안해 보이지 않더구나. 내가 괜한 일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어찌 그 큰 은혜가 실수일 수 있겠습니까.”
화완으로 인해 위기를 맞은 순간, 왕은 그에게 상상치도 못한 선물을 건넸다.
군권을 넘겨받았으니, 사실상 가장 큰 힘과 권력을 쥐게 된 셈이다.
권력의 구조는 법도와 명분으로 지켜지는 것 같아도 실상은 권력으로 우열이 정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형운이 군권을 쥐었으니, 연일 ‘아니 된다, 통촉하여 달라.’ 외치던 자들의 목소리 또한 전과 같지는 않으리라.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고개를 주억이던 왕이 문득 물었다.
“힘들지 않으냐?”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니, 어찌 제 육신의 노고를 상관하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것이 당연한 군주의 덕목이지.”
왕이 주름진 눈가를 여몄다.
“앞으로도 힘든 일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어려울 때도 있겠지.”
먼 곳을 바라보던 왕이 손주를 보았다.
“동궁, 부디 네 사람을 만들어라. 어느 때라도 등을 맡길 수 있는 영원한 네 편을 찾거라.”
‘이미 찾았나이다.’
형운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영원한 내 편.
내 사람.
문득, 형운이 물었다.
“홍 호위는 할바마마의 사람이었습니까?”
“그래. 홍국영은 내가 보냈다. 오래전, 그에게 네 신변을 지켜달라 부탁하였지.”
비로써 형운은 홍국영이 왜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신에게 가담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임금의 사람이었다.
“한동안 내 주위가 어수선하여 그를 만나지 못하였는데, 며칠 전 그가 날 찾아왔더구나.”
홍국영은 왕과 만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십학사와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철저하게 왕의 주변을 감싼 통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오늘 왕이 조강에 몸소 행차하신 것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명심하겠나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나이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일이거들랑.”
“네.”
“빈궁을 찾거라.”
“빈궁을 말입니까?”
왕은 꽤 즐거운 표정으로 형운을 바라보았다.
“동궁, 그거 아느냐?”
“무얼 말이옵니까?”
“빈궁에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주가 있더구나.”
뜬금없는 이야기가 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형운의 얼굴에 놀라고 황망한 빛이 떠올랐다.
“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동궁도 몰랐던 모양이구나.”
“무슨 말씀이시온지.”
왕은 이레의 할아버지들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아이에겐 내가 갖지 못했던 지혜가 있었다. 듣다 보면 앞길이 보일 것이야.”
-너의 할아버지들은 참으로 좋은 분들이구나. 그분들을 만날 수 있었음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더러는 풀지 못했던 난제를 쉽게 풀 수도 있을 터이고…….”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이따금 부족함을 느낀다. 만 수레의 책을 읽고 연륜이 쌓여도 가끔은 풀지 못할 난제를 만나곤 하는구나. 때로,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구나. 그럴 때면 나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진단다. 다행히 빈궁, 너는 할아버지들에게 물으면 되니 얼마나 복된 일이냐.
“무엇보다 나처럼…….”
왕은 눈물을 흘렸다.
“과거의 실수로 후회하는 일도 적어지겠지. 그러니 동궁…….”
그는 동궁의 손을 잡고 다정히 다독였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빈궁의 말을 꼭 들어보아라.”
왕의 간곡한 말에 형운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네, 할바마마. 꼭 들어보겠사옵니다.”
***
기루의 누각.
화로에 올려놓은 차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었다.
사슴은 언제나처럼 누각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였거늘.”
사슴은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뜻밖의 인물이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만사여의가……아니십니까.”
청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한 번도 스스로 자신을 찾아온 적 없는 만사여의, 아니 빈궁의 방문에 사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요?”
이레는 사슴의 곁에 앉았다.
빈 찻잔에 스스로 차를 따르고 따뜻한 온기로 손을 녹였다.
“간밤에 의금부의 옥사에서 한 죄인이 스스로 목을 맸답니다.”
“…….”
“그 죄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서찰 한 통을 남겼다 합니다.”
이레는 사슴의 앞에 서찰과 함께 바싹 말라비틀어진 청귤 하나를 내려놓았다.
“언제고 다시 만날 옛 정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레의 말에 사슴은 일순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이 뻣뻣해졌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치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사슴은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할 말이 끝났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박자박.
누각의 계단을 내려서는 발소리가 사슴의 귓가를 때렸다.
이레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사슴의 눈길이 난간 위에 놓인 청귤에 닿았다.
‘녹아…….’
언제고 자신을 부르던 소년의 음성이 사슴의 귓전을 맴돌았다.
늘 차갑게 메말랐던 사슴의 눈가에 눈물벽이 들어찼다.
한 번도 진심으로 울어본 적 없었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청산은 변하였건만, 내 정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네. 변한 건 내 믿음이었으니. 결국, 등을 돌린 건 내 정인이 아니라…… 나였구나.”
씁쓸한 미소가 녹아의 입가에 맺혔다.
새콤한 청귤의 향이 입안에 군침에 돌게 하였다.
입안 가득 고인 향내를 사슴은 차마 삼키지도 못한 채 푸르르 입 밖으로 쏟아내었다.
십 년을 참았던 울음…….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던 통곡이 사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누각 아래, 검은 너울을 쓴 만사여의의 모습이 보인다.
그 팔랑 걸리는 검은 나비의 뒷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것으로 사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완벽히 패배했다.
하지만 그 패배가 마냥 씁쓸한 것만은 아니니…….
사슴의 얼굴에 눈물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이레를 향해 사슴은 고개를 숙였다.
누구 하나 듣는 이 없으나, 진심이 담긴 한마디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