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숨겨둔 한 수
검은 그림자가 싸리 담장을 뛰어넘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사랑채까지 접근한 사내가 헛기침 소리를 냈다.
인기척을 내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왔소?”
심환지는 사내의 방문을 크게 반겼다.
그의 환대에 기대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볼 때마다 질색하더니 오늘은 왜 이리 반기십니까?”
“그분의 말씀이 여느 날과 다르니 그러는 게 아니겠소. 잔말 말고 내놓으시오.”
“누가 보면 연서라도 받는 줄 착각하겠습니다.”
기대는 그에게 서찰을 넘겨주었다.
형운이 전하라 명한 서찰이었다.
심환지는 서찰을 받자마자 급히 내용을 확인했다.
평소라면 서찰 빼곡하게 적혀 있을 내용이 오늘은 짧은 몇 글자만 있었다.
서찰을 확인한 심환지의 표정이 구겨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대가 물었다.
“이번엔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지난번과 같소.”
“이번에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시었단 말입니까?”
심환지는 답답한 한숨을 토해냈다.
“대체 동궁 저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나로선 짐작도 못하겠소.”
“궁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던데……. 혹,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심환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얼들의 과거를 허용한 일로 정국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소. 더는 동궁 저하의 파행을 용납할 수 없다며 신료들이 잔뜩 벼르고 있소이다.”
“파행은 무엇이고, 용납은 다 무슨 소립니까? 감히 누가 누굴 용납한단 겁니까?”
“저들에게 저하는…….”
심환지는 뒷말을 삼켰다.
기대는 그가 차마 뱉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은 형운을 자신의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리라.
“그게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은 분위기가 크게 다르니. 무언가 사달이 나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려.”
“그럼 교리께서 평소처럼 더 큰 맞불을 일으켜 기세를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심환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그러지 말라 하시니, 근심하는 것이 아니겠소.”
한숨을 쉬던 심환지는 기대를 돌아보았다.
“혹여 무언가 짚이는 거라도 있소?”
심환지가 아는 형운은 무서울 정도로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런 분께서 이대로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을 거라고?
절대 그럴 리 없다.
무언가 다른 대책을 세워두시진 않았을까?
심환지의 물음에 기대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없습니다.”
사실 신경 쓰이는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며칠 동궁의 은밀한 행보가 있었더랬다.
비밀리에 사람들을 만나고,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하월네였다.
팽례들의 어머니라 불리는 노파를 동궁 저하께서 무슨 이유로 만났는지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번에 벌어질 험악한 사태에 관련한 대책일 거로 추측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빈궁이자 기대의 누이인 이레의 움직임도 분주하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그리 바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아,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터인데.
기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음흉한 한 사람과 순진한 누이.’
기대에게 이레는 한없이 순진하고 여린 누이일 뿐이다.
그런 누이가 무언가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면 필시 어느 음흉한 사람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 터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할꼬.”
심환지가 어지러운 국정을 걱정할 때, 기대는 엉뚱하게 누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가만있자. 지금 이 시각이면 주상전하께 아침 문안을 갔으려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매일 아침 찬 바람 맞아가며 문안을 가야 하니, 가여워서 어찌할꼬, 내 누이.’
***
스란치마 끝에 간밤에 내린 눈이 쓸렸다.
기대의 짐작대로 이레는 아침 문안을 위해 왕의 침전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그대는…….”
이레는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홍 호위가 아닙니까?”
형운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홍국영이었다.
“빈궁마마를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소?”
“염려해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여 형운이 이레보다 빨리 주상전하께 아침문안 오신 것이 아닌가 찾아보는 것이다.
이레의 기색을 알아차린 홍국영이 미소 지었다.
“저하께서는 존현각에 계시옵니다.”
조강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곳에서 또 얼마나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있을까.
고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형운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할 수 있다면 그의 곁을 지키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형운에게 그의 일이 있듯 이레에게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분을 잘 부탁합니다.”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빈궁마마.”
홍국영과 인사를 끝낸 이레는 침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왔느냐?”
그녀가 침소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왕의 반기는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이레가 곁으로 다가가자 왕이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실까?
“무에 불편한 것이라도 있으시옵니까?”
“할바마마라 부르라, 몇 번을 말하였느냐?”
“송구하옵니다, 할바마마.”
이레가 할바마마라 고쳐 부르니 그제야 파리한 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래. 그리 부르니, 얼마나 다정하고 좋으냐.”
“할바마마, 오늘은 무슨 이야길 해 드릴까요? 어제 하다 만 불손의 이야기를 이어 할까요?”
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오늘은 네 할아버지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구나. 유달리 역정을 잘 내는 할아버지가 뉘라 하였지?”
말을 건네는 왕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잔잔하였다.
“상 할아버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오늘은 상 노인의 이야기를 해다오. 그 성급한 백귀가 신하들을 무어라 하였다고?”
“그분께선…….”
이레는 상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냈다.
바람에 쓸린 구름이 하늘 저편으로 흘러갔다.
자분자분한 이레의 목소리와 함께 왕의 침전은 평온한 하루를 시작하였다.
***
“아니 되옵니다.”
존현각의 하루를 여는 첫 마디가 울려 퍼졌다.
누각 위의 신료들과 누락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유생들은 한목소리를 냈다.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대체 무어가 아니 되고, 무엇을 통촉해 달란 말이오?”
형운의 물음에 대제학이 고개를 들었다.
“서얼들의 과거를 허락하신 이후로 도처에서 혼란과 불만이 가중되고 있사옵니다.”
“그 일이라면 이미 그대들과 논의를 끝내지 않았소?”
“논의하였다 하시나 정작 납득한 이는 드무니. 어찌 불만이 없을 수 있겠사옵니다.”
“좋소. 그럼, 그 일을 다시 논하자는 것이오?”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또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국정의 중차대한 일을 매사 신료들과의 논의 없이 결정하시니. 신하들의 불만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논의 없이 결정하다니. 그러하면 매일 아침 이곳에서 그대들과 나눈 대화는 대체 무어란 말이오? 모든 사안에 사사건건 반대를 외치는 그대들의 행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정치라 함은 무릇 나라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이옵니다. 그러한 결정을 어찌 하루 이틀의 논의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언제나 앞날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하였으나, 저하께선 충분한 논의 없이 결정하시고 실행하시니. 뜻있는 자들의 걱정이 속출하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매번 반대만 외치는 것이오?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걱정만 하고 안주할 것이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니, 정체되고 구린내가 나면 마땅히 물꼬를 열고 흐름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소?”
“정체되고 더뎌 보여도, 오래 두고 보면 실상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옵니다. 부디 심사숙고하여 주옵소서.”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러니 불합리하고 잘못되어도 계속 지켜보기만 하라. 이런 말이오?”
“오랜 협의 끝에 만들어진 관례이옵고, 관습이옵니다.”
“관례이고 관습이라.”
대제학의 말을 곱씹던 형운은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
“어째 나는 심사숙고하고 자중하라는 말이 협박으로 들리는군.”
“저하, 신들의 충심을 부디 곡해하지 마십시오.”
“좋소. 내 이 나라를 사랑하고 나를 연민 하는 그대들의 마음을 어찌 모른 척 외면할 수 있겠소. 귀를 기울여 들을 터이니 대안을 내어 보시오. 아니 된다, 통촉하라, 그 소리 외에 정체되고 고여서 끝내 썩어가는 부조리를 해결할 방도를 제시해보란 말이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불합리하여 보이는 것도 하나하나 따지고 짚어가면 실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고칠 필요 없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것이 법도였고 관례였사옵니다.”
“법도와 관례를 핑계로 변화를 거부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는가? 서얼들의 과거를 반대한다 하였소? 할바마마께서는 늘 고르게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하시었소. 지역과 파벌조차 마음에 두지 않으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거늘, 서얼이라 차별하는 것이 어찌 마땅하다 외치는 것이오. 그분의 마음을 신하들이 이리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얼마나 슬플 것인가.”
형운의 말 속엔 임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신료들을 향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러나 신료들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보는 심환지는 속이 타들어 갔다.
예상대로 대신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유생들마저 수북하게 쌓인 상소를 앞세워 형운의 뜻을 반대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그에 반해 형운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설마 동궁께서 마음을 접으신 건 아닐까?’
거듭된 반대와 충돌.
제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다 하더라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억지에 꺾이지 않을 도리가 없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심환지의 눈에 구석진 곳에서 슬그머니 움직이는 사람이 잡혔다.
‘저자가 왜 여기에……?’
왕의 팽례, 김기대의 모습에 심환지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은밀히 왕의 서신을 전하던 그가 무슨 이유에선지 존현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기대는 최 내관에게 접근해 두툼한 두루마리를 넘겼다.
몇 마디 언질까지 전해 들은 최 내관이 형운에게 다시 두루마리를 넘겼다.
대신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가운데 형운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꿈틀.
형운의 굵은 눈썹이 휘어졌다.
곧이어 무겁게 내려앉은 그의 입가가 슬며시 들려 올라갔다.
‘저 두루마리에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 걸까?’
어떤 내용이기에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궁께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일까.
곧 그 비밀이 밝혀졌다.
“형조참의.”
형운의 부름에 형조 참의 송무현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사옵니다.”
“그대의 조카가 사헌부의 송지원이라 하였던가?”
“그렇습니다만.”
“보름 전 시전에서 사헌부 관원, 송지원이라는 자가 난전 상인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행패를 부려 수사에 나섰는데, 어찌 된 이유에선지 제대로 결론이 나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하던데.”
“그, 그럴 리 없사옵니다. 저하.”
“그렇소? 당연히 그렇겠지. 그대는 난전에 관한 내 말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그 명분으로 백성의 형편을 예로 들었는데, 당연히 그대의 사촌 조카가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
형운은 두루마리의 다음을 읽었다.
“사간원 교리, 이은선.”
“소, 소인 이곳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대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챙겼다는 항소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내게 보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구려.”
“매관매직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옵니다.”
“그대는 함경도를 비롯한 척박한 북방 지역의 세금을 감해야 한다는 내 말에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으니, 마땅히 스스로 청렴해야 할 테지.”
이후로도 형운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신들과 관련한 비리와 의혹들을 읊었다.
그 수가 수십에 이르니.
형운이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읽어나갈수록 대신들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했다.
심환지는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과연 동궁 저하께서는 계획이 있으셨구나.’
어째서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으실까 걱정하였는데, 알고 보니 완벽한 대책을 준비하고 계셨다.
사사건건 반대를 외치는 대신들의 치부를 수집한 것이다.
왜 오늘만은 맞불을 놓지 않으라 하셨는지도 이해되었다.
형운은 대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일일이 자신의 뜻에 맞선 것을 예로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저 많은 치부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형운의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심환지는 조용히 존현각에서 물러나는 김기대를 보았다.
왕의 서신을 전하기 위해 전국 팔도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틀림없이 저 사람의 활약이 있었으리라.
그사이 누각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민심 운운하며 반대하던 대신들은 명분을 잃었다.
어려운 국면을 다시 형운이 틀어쥔 것이다.
심환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되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동궁 저하를 대놓고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틀어쥔 동궁에 대한 대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그날의 위기는 무사히 끝나는 듯 보였다.
“조강이 벌써 끝난 것입니까?”
나긋나긋한 음성과 함께 한 여인이 존현각으로 들어섰다.
당당한 걸음으로 누각을 가로지른 여인, 바로 화완이었다.
***
“옹주께서 여긴 어찌…….”
형운의 눈초리가 가볍게 들썩였다.
불신과 반발로 가득했던 존현각의 공기를 간신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던 참이다.
이런 상황에 불쑥 나타난 화완의 존재가 썩 반갑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형운의 등줄기를 훑었다.
“감히 여인이 조정의 일을 논하는 자리에 불쑥 찾아온 것을 용서하세요, 동궁저하.”
예의 뽀얀 미소를 지으며 옹주는 형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강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달리 용무가 없으시면 나중에 뵈어도 될는지요.”
“오늘은 아바마마의 마음을 전하고자 이리 걸음 한 것이옵니다.”
화완의 말에 존현각은 일순 고요해졌다.
동궁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음에도 왕의 위엄은 여전하였다.
형운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화완이 허리를 펴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내내 큰 목소리를 내며 반대를 외치던 신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녀를 힐끔거렸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즐기던 화완이 준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 작금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으시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
“이 무슨 해괴한 작태란 말입니까? 어찌하여 나라의 신하 되는 사람들이 툭 하면 반대의 상소를 올리고 통촉하여 달라는 말밖에 하질 못한단 말입니까.”
“…….”
“연치 어린 동궁께서 국사의 일을 처음 겪다 보니, 때론 실수도 있을 것이며, 때론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매번 반대만을 외치면 어찌합니까.”
화완의 카랑카랑한 호통에 신료들은 고개를 낮게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나이 많은 늙은 신료가 옹주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동궁께서 앞날을 계획하고 예측하기엔 아직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궁을 돕는다면 장차 단단한 군주가 될 것임을 이 화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답니다. 그러니 앞으로 동궁을 도와 복잡하고 다단한 정사를 부디 큰 이견(異見) 없이 잘 해결해주세요.”
왕의 말을 전한다 하면서 화완은 교묘히 제 뜻임을 밝혔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동궁께서 경험이 얼마 되지 않아 간혹 실수가 있을 수 있겠지요. 때로 대신들의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듯 대립하여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마땅히 관례를 따라야 합니다. 오랜 경험으로 얻어진 결론은 무릇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화완의 말에 형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말은 동궁의 편을 들어주는 듯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대신들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어렵게 기울여놓은 저울의 추가 또다시 저들에게로 기울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화완에겐 왕의 말을 전한다는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혼란한 시국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안정이 중요한 법이지요. 섣불리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선 아니 될 것입니다. 부디 이 조정에 평온함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이 화완의 바람이자, 주상 전하의 염원입니다.”
말을 끝낸 화완옹주는 누각 위의 신료들과 누각 아래의 유생들을 한 사람씩 눈에 담았다.
그 무언의 행위가 묘한 긴장감을 불러왔다.
제게 옹주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긴장한 사람들은 더욱 몸을 낮추고 충성의 몸짓을 보였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화완의 모습은 왕의 서녀(庶女)로 태어난 열 번째 옹주가 아닌 흡사 나라의 명운을 한 손에 쥔 여제(女帝)을 떠올리게 했다.
형운의 말엔 무조건 반대를 외치던 대신들이 옹주의 앞에선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 궐의 실세가 누구인지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심환지는 탄식했다.
좋지 않다.
옳지 않은 흐름이다.
겉으로는 신료들에게 곤란함을 겪는 동궁을 돕는 모양새였으나, 실상 옹주는 이 조정의 실세가 뉘인지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이 정국을 움직이는 사람이 동궁이 아닌 화완옹주, 그녀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기울어진 분위기는 좀처럼 다시 바로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울분과 초조함으로 심환지가 이를 악물 때였다.
내내 굳게 닫혔던 존현각이 열리며 내관이 소리쳤다.
“주상전하 납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