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진실과 진실
시전 구석의 허름한 세책방.
오래된 세책방 특유의 먼지내와 묵향으로 가득했던 그곳에 오늘은 이질적인 향기가 맴돌았다.
푸른 자두의 달콤새콤한 향기와 함께 치자꽃의 연보랏빛 향내.
향기의 근원은 세책방의 오른쪽 책장 뒤편이었다.
얼굴을 가린 너울을 걷고 형운에게 온전히 제 얼굴을 보이고 만 이레.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이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찌한다?
이리 맥없이 들키고 말았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꿈이면 좋으련만.
아니,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
질식할 듯한 충격에 이레는 차라리 현실을 부정했다.
그런 그녀에게 형운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 따뜻하면서도 촉촉한 감촉
감미롭게 입안을 감도는 아릿한 두드림.
온몸을 나른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작은 혈관 하나하나마저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아찔한 입맞춤.
그 꿈결 같은 입맞춤으로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금의 상황이 꿈이 아닌 것을.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을.
거짓과 핑계, 그 어떤 것도 소용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다사로운 입맞춤의 끝으로 깊은 침묵이 따라붙었다.
그것은 믿었던 여인이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과 그에 따른 분노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자신의 여인을 이런 위험한 일에 발 디디게 한 자책.
무기력함과 괴로움.
지금껏 묵묵히 인내하고 침묵하며 느꼈던 쓰라림.
이레를 향한 형운의 눈동자에 온갖 감정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처연한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이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안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비밀을 들켜버려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상처가 두려웠다.
그를 실망하게 한 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났다.
행여 이 일로 형운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라도 생긴다면…….
입안이 바싹 말라 들었다.
숨 막히는 고요의 시간이 흘렀다.
그 적막의 끝자락.
드디어 형운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숨길 작정이었소?”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 이곳에서 그대를 보았을 때부터.”
“아!”
이레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뱉었다.
형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사여의의 모습으로 스쳐 지나가는 그대를 보는 순간, 알게 되었소. 아니 알 수밖에 없었소. 그대의 작은 몸짓 하나, 내뱉는 숨결 한 조각조차도 모를 수가 없었소.”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형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했단 말입니까?”
왜 그리하셨습니까?
어째서……?
“내가 아는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
“그대가 그리하였을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그의 배려에, 자상한 이해에 코끝이 알큰해졌다.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행여 눈물을 보일세라, 이레는 서둘러 너울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형운은 그런 이레의 손길을 가로막았다.
“이제 그만하면 아니 되겠소?”
그의 커다란 손에 그녀의 하얗고 작은 얼굴이 고스란히 갇혔다.
저도 모르게 몽글 솟구치는 눈물이 형운의 양 엄지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고맙소. 날 위해 이리하는 것임을 내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이젠 싫소. 내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 무기력한 내가 견딜 수 없소.”
“저하…….”
“그대를 지키고 싶소. 세상이 모두 내게 아니 된다 하여도 그대만큼은 지킬 것이오. 그러니…… 그만하면 아니 되겠소?”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레에게로 전해졌다.
이 사람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며 이레는 침묵했다.
그때였다.
때마침 조용하던 세책방 안으로 두 사내가 들어왔다.
***
“들었는가?”
잿빛 도포 차림의 젊은 사내가 곁에 선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그 소문을 들었기에 여기에 온 게 아닌가.”
사내와 그의 친구는 무언가 잔뜩 흥분한 눈치였다.
“정말 그 소문이 진짜라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아무렴. 서얼들에게도 과거를 볼 기회를 준다면, 당연히 우리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서책들을 정리하지 않는 건데.”
“그러게나 말일세. 쓸데없는 글공부는 해서 무얼 하나 싶은 마음에 어릴 적 보던 소학까지 죄다 처분했는데.”
책장을 뒤지는 두 사내의 눈동자는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서책을 고르는 행동에 흥분한 기색이 완연하였다.
세책방 구석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레와 형운은 조용히 시선을 맞추었다.
‘서얼들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말은…….’
‘그렇소. 이번에 간신히 작은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소.’
‘잘하셨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오.’
형운과 이레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불쾌한 감정이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앞서 들어온 사내들과 비슷한 또래의 사내 셋이 세책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자네, 정래가 아닌가?”
“오셨소?”
먼저 온 사내 중 하나가 머쓱한 표정으로 알은 척을 했다.
늦게 들어온 두 명의 사내가 제 동료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물론 알지. 이 사람은 최 진사의 서자일세. 어이쿠, 윤 처사의 얼자도 있군. 끼리끼리 논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군.”
먼저 온 사내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손가락질하던 사내가 최 진사 댁 도령의 손에 들린 서책을 노려보았다.
“그건 대학이 아닌가? 서자가 대학은 읽어 뭐하려고?”
“그게…….”
“설마, 서얼에게도 과거시험을 허락했다는 그 소식을 듣고 이 소란인 건가?”
“…….”
“말세로다, 말세야. 나라 꼴이 어찌 돌아가려 이러는 것인지.”
자줏빛 도포 차림의 사내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곤 뒤에 서 있는 제 동료를 돌아보았다.
“군주가 어리석으면 백성 역시 어리석어진다는 말이 있질 않은가. 지금 이 꼴이 딱 그 짝이로군.”
“그러게나 말일세. 서자에 얼자가 과거라니, 허허허. 사람이란 무릇 타고난 그릇대로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거늘. 감히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들을 보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로세.”
뒤늦게 세책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들은 두 명의 서얼들에게 들으라는 듯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최 진사의 서자와 윤 처사의 얼자는 입 한번 떼지 않은 채 그 수모를 묵묵히 견뎌냈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노 대감댁 큰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세책방 주인이 젊은 선비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줏빛 도포 차림의 선비가 한껏 턱을 치켜들었다.
“여기 필요한 서책 목록이 있으니. 알아서 챙겨라.”
노비 부리듯 노 도령은 세책방 주인에게 서책 목록이 적힌 종이를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살피던 세책방 주인이 이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송구하오나, 다른 건 준비할 수 있으나, 대학은 당장 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요.”
“그 무슨 헛소리냐?”
“서얼의 과거시험을 허락한다는 소문이 돈 이후로, 갑자기 주문량이 많아졌습지요. 죄다 팔려서 남은 것이 없습니다요.”
주인의 설명에 노 도령은 최 도령을 눈짓했다.
“저 서자가 들고 있는 건 뭐냐? 설마 자격도 안 되는 얼뜨기들에게 저 책을 팔 생각은 아니렷다?”
“하지만…….”
세책방 주인이 주저하며 두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최 도령은 품에 안은 서책을 힘껏 끌어안았다.
“이 서책은 내가 살 것이오.”
“쯧쯧. 이게 다 널 위해 하는 일이다. 되지도 않을 헛짓에 길지도 않은 인생 낭비하는 걸 막아주고 있는 것이란 말이다.”
“헛된 망상이 아니외다. 동궁저하께서 서얼들의 과거시험을 허락한다 하셨으니…….”
“정말 그렇게 될 거라 믿는 것이냐?”
“동궁께서 그리한다 하셨으니, 당연히 그리되지 않겠소?”
“딱하구나. 무릇 나라의 법은 모두 나름의 도리와 까닭이 있기에 그리 정해진 것이거늘. 서얼이 과거에 응시한다니. 나라가 뒤집히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 이미 전국 팔도에서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 한다. 뜻을 품은 고관대작들도 이번엔 단단히 마음먹었다 하니, 곧 없던 일이 될 것이다.”
노 도령은 최 도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그건 내게 넘겨라.”
그의 협박과 회유에도 최 도령은 책을 놓지 않았다.
“싫소.”
노 도령은 코웃음을 치며 세책방 주인에게 말했다.
“저 서책, 값을 치렀느냐?”
“아직 치르지 않았습니다.”
“저 서책을 내게 팔면 값을 곱절로 쳐주지.”
“네?”
세책방 주인의 눈이 커졌다.
“아니, 저 서자가 주는 값의 다섯 곱을 주마. 잔말 말고 저자의 품에 있는 서책을 챙겨라.”
“…….”
세책방 주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울상을 지었다.
“저 발칙한 놈들을 보았나.”
지켜보던 형운의 안색이 변했다.
해괴한 작태에 그가 당장 뛰어 나가려 할 때였다.
이레가 그의 팔을 잡았다.
“빈궁.”
“지금 저하께서 가시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이레는 너울을 내리고 옥신각신하는 사내들 틈바구니로 걸어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그 서책은 그쪽 분껜 팔지 않을 것입니다.”
면사를 쓴 묘령의 여인이 등장하자 사내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뭐야?”
노 도령이 이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때, 세책방 주인이 이레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대행수님.”
그의 공손한 태도에 사내들은 당황했다.
“여인이 대행수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던 사내들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시전 상가의 3할 이상을 차지한 여장부.
최근 그녀가 너울을 쓰고 시전을 활보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저 여인이 만사여의?”
이레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 세책방의 진짜 주인입니다.”
“허허, 만사여의를 직접 보게 되다니. 오늘 일진이 무척 좋을 모양이구려.”
상대가 만사여의라는 사실을 알게 된 노 도령의 태도가 변했다.
하지만 그를 보는 이레의 눈초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제가 지켜보니 서책을 두고 작은 다툼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소. 서얼 출신의 이 사람이 언감생심 허황된 꿈을 꾸고 있어 말리는 중이었소.”
“그리하셨군요. 그래서 서책 값을 더 쳐주신다 하신 겁니까?”
“어험, 그렇소. 어차피 저자가 가져가 봐야 소용도 없을 것이니. 내게 이 서책을 팔면 다섯 곱을 더 쳐주겠소.”
“백 곱입니다.”
“무어라 하였소?”
“백 곱을 더 주신다면 고민해 보겠다 했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서책은 지금 하나밖에 없고, 원하시는 분은 여러 사람이니. 당연히 가치가 오를 수밖에 없지요.”
이레가 최 도령을 보며 물었다.
“어떠십니까? 백 곱을 더 쳐서 주신다 하면 파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최 도령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백 곱이라면…….
“그, 그 정도라면 생각해 보겠소.”
최 도령의 대답에 이레는 다시 노 도령을 돌아봤다.
“들으셨지요? 백 곱이면 파실 의향이 있으시다 하십니다.”
“백 곱이라니. 그 무슨 터무니없는 폭리란 말인가?”
“물건의 가치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원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답니다. 안타깝게도 적정한 가격을 제시하지 못하시니, 사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양에 세책방이 여기밖에 없는 줄 아느냐? 내 다른 곳에서 살 것이야.”
흥분하여 소리친 노 도령은 함께 온 사내들과 함께 세책방을 나갔다.
이레는 세책방의 주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지금 당장 도성의 세책방에게 연통을 돌리게. 세책방에 있는 ‘대학’을 모두 거둬들이라 하게. 누구도 저 사내들에겐 서책을 팔지 말라 전하시게.”
세책방 주인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명을 받잡습니다.”
노 도령은 대학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도성의 거의 모든 세책방은 만사여의의 소유이거나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가였다.
노 도령은 대학을 구하기 위해 온종일 도성을 헤매다 결국 최 도령을 찾아갈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필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리겠지.
‘만사여의’의 힘으로 사건을 정리한 이레는 형운을 돌아보았다.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레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지고한 동궁이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 일을 이레가 대신하겠다는 말이었다.
‘당분간, 제가 저하의 일을 도와드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형운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다.
아직 내 힘이 부족하나, 언젠가…….
언젠가 반드시 그녀를 빈궁의 자리로 돌려놓겠다.
이레가 나서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도록.
내가 강해지겠다.
완전한 사람이 되겠다.
***
성 동쪽.
월근문(月覲門) 근방.
그곳에 전향사(典享司) 소속의 허름한 전각 한 채가 있었다.
몇몇 사람에게 은자원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한 사내가 굳게 닫힌 은자원의 문을 열었다.
형운이었다.
이레와 헤어진 그는 동궁전으로 가는 대신 이곳 은자원을 찾았다.
마음이 번잡하여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마땅히 어둠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은자원의 실내.
놀랍게도 그곳에 유등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희미한 유등 아래, 한 사내가 서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처음엔 김기대인 줄 알았다.
‘서책을 읽다니, 별일이군.’
그리 가볍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선객(先客)은 형운이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늘 운이 좋은 모양입니다.”
형운을 향해 미소를 짓는 사내.
“이곳에서 동궁 저하를 뵈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정후겸이었다.
잠시 묵직한 정적이 흘렀다.
형운은 청하지 않은 불청객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차갑지만 담담한 반응.
정후겸의 미소가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놀라지 않는 겁니까?”
“무엇이 말이냐?”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정후겸이 은자원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은자원은 형운과 몇몇 은자들만의 비밀이었다.
바로 그 비밀이 드러났음을 의미했다.
또한, 형운이 은자원의 일원이며, 현재도 이따금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마저 드러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형운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은자원의 비밀도 언젠가는 드러날지 모른다 생각했던 까닭이었다.
되려 놀란 표정을 짓던 정후겸은 허탈한 웃음을 툭 뱉었다.
“이런, 제가 잘못 짚었군요.”
형운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요즘 술친구를 잃어버려서 외롭답니다.”
정후겸은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저와 술이나 한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어두운 실내.
퀴퀴한 종이 냄새와 묵 향기만 감돌던 은자원에 향긋한 주향이 퍼졌다.
정후겸은 시원하게 술잔을 털어내는 형운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아십니까? 오늘 실로 여러 번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저하께서 정말로 술을 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술도 먹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느냐?”
“금주령이 내려지지 않았습니까. 법도와 예법은 철저히 따르고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 그러했지.”
“이젠 아닙니까?”
“오늘만 예외로 해두자.”
“예외라…….”
“그런데 무슨 일로 왔느냐?”
“동궁 저하께서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실패한 모양입니다.”
정후겸은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내내 궁금하였지요. 바르고 또 바르신 동궁 저하께서 갑자기 변하신 이유가 무얼까. 주위에 변한 것은 없으니, 다른 곳에 이유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였습니다.”
“직접 본 소감은 어떠하냐?”
형운의 물음에 정후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군요. 어둡고,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퀴퀴합니다. 동궁 저하께서 이런 곳을 좋아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의 박한 평에도 형운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직하게 웃음을 보였다.
“예전의 내가 이곳을 보았다면 분명 너와 같은 말을 했겠지.”
“지금은 다릅니까?”
“너는 죽어도 이곳의 특별함을 모를 것이다.”
정후겸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곳의 무엇이 그리 특별하단 말입니까?”
형운은 대답 대신 텅 빈 자리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그가 어찌 알까.
저곳에 불량스럽게 누워 잠만 자던 사내의 웃음을.
오라버니를 기다리던 여인의 어색한 미소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불퉁한 질문이나 툭 던지던 키 큰 사내의 존재를.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의뭉스럽게 웃던 사내의 그리운 얼굴을.
이 낯선 불청객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단란하니 좋지 않으냐?”
“이젠 그 단란함도 끝이군요. 제가 이곳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네 스스로 십학사임을 증명한 꼴이나 마찬가지이니.”
정후겸이 형운의 비밀을 알게 되었듯, 형운 또한 정후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의 말이었다.
하지만 정후겸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금시초문입니다.”
“아직도 발뺌할 셈이냐?”
“당연히 해야지요. 의심은 할 수 있어도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증좌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십학사의 회합은 지극히 은밀하여 외부로 절대 드러나지 않으며, 그와 관련한 증좌 역시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후겸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가 다시 바닥을 가리켰다.
“위에서 아래까지. 그 모든 곳에 십학사의 영향력이 끼치고 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형운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그냥 이 자리에서 널 죽이는 수도 있다.”
“신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아비에 그들의 자식들까지…… 모두 들불처럼 일어나겠지요.”
“자객인 줄 착각하여 실수하였다 변명하면 그뿐이다.”
“과연 그 말을 몇이나 믿을까요?”
“…….”
“아니, 설사 믿는다고 하여도 저하께서 바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바라는 일?”
“십학사의 소멸.”
“저 하나 없어진다고 십학사가 사라질 거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정후겸이 죽는다 하여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십학사 중 한 자리가 공석으로 변할 뿐이다.
세상엔 사람의 수만큼 무수한 욕망이 존재하니, 곧 누군가 그의 빈자리를 차지할 테지.
“……!”
이레의 말이 옳았다.
무력으로 십학사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힘들게 그들을 없앤다 해도 또 다른 이름의 십학사가 다시 나타나리라.
“그러고 보니 궁 안팎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군요. 서자들의 과거시험을 허락한 일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모양입니다.”
“언제는 안 불편해하였더냐?”
“이번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전처럼 맞불을 놓는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쓸데없는 관심은 접어두거라.”
“보아하니 이미 대책을 세워둔 모양이군요.”
형운에게 감탄하며 정후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취기가 오르는군요.”
“술친구가 필요하다 하여 제법 주향을 즐기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제가 약한 것이 아니라, 동궁 저하께서 강하신 겁니다.”
형운이 강한 것은 무력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평안히 지내십시오.”
정후겸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빈궁마마께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요즘 여러 일을 하시느라 힘드…….”
정후겸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새 달려온 형운이 그의 멱살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더러운 입에 함부로 빈궁을 담지 마라.”
형운은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혹여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장담하건대 넌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의 위협에 정후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밤, 그는 여러 가지로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형운이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역린.
빈궁은 형운의 역린이었다.
정후겸은 미소 지었다.
형운의 반응이.
전에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감정의 풍랑이.
가감 없이 표출하는 동궁의 분노가 참으로 신선하고 즐거웠다.
“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