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76화 (176/215)

#176. 더는 참지 못하겠소

계절이 깊어질수록 바람은 드세어졌다.

틈새로 스며드는 웃풍에 코끝이 썰렁했다.

이레는 잠결에도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날이 추우니, 온기 가득한 이불을 떨치고 선뜻 밖으로 나오기 어려웠다.

모처럼 이불 속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자니, 소곤거리는 궁녀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빈궁마마, 기침 아니 하셨더냐?”

큰 상궁의 물음에 마른 걸레질을 하던 어린 궁녀가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그래? 그럼 너도 잠시간 일손 놓고 손 좀 녹이려무나.”

“네, 마마님.”

큰 상궁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청마루를 쪼르르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대청마루 끝에 놓인 화로로 달려가는 것이리라.

이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린 궁녀를 위해 조금 더 자는 척을 할까.

고민하는 이레의 귓가로 궁녀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왔다.

“너 들었니?”

저 아이 이름이 연두라 하였던가.

올해 열 살이라 했지, 아마.

“무얼?”

대답하는 아이는 금정의 먼 외가 친척 아이인 묘옥이었다.

저 나이의 소녀들은 동무들과 무슨 이야길 나눌까?

어린 시절, 늘 별채에 홀로 지냈던 터라.

궁금증이 인 이레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이내 입안으로 옴 친 연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궁전에 백여우 한 마리가 나타났다던데. 그 소문 들었니?”

동궁전에 나타난 백여우.

사슴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레는 며칠 전 화완의 심부름이라며 빈궁전을 찾아왔던 사슴을 떠올렸다.

화완옹주의 부름이라며 동궁과 함께 이레의 전각을 나가던 사슴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쉿, 조용히 해라. 행여 빈궁마마 들으시면 어쩌려고?”

“아까 걸레질하면서 살짝 들여다보았는데, 아직 주무시고 계시던걸.”

“그래?”

묘옥이 안심하며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란히 앉는 연두의 인기척도 들려왔다.

본격적으로 수다를 나눌 셈인가 보다.

묘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상의원에서 일하던 내 동무가 그러는데, 화완옹주께서 갑자기 동궁전에 올릴 솜옷을 지으라 했다더구나.”

“날이 추워졌으니. 솜옷 지어 올리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요런 맹추. 그런 당연한 알이 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겠느냐?”

“왜? 뭔 일 있었다니?”

“글쎄, 동궁 저하 옷 치수 재는 걸 상의원 궁녀가 아니라 그 여우가 했다질 뭐냐.”

“어머낫! 그럴 수도 있어?”

“궐의 법도를 따르자면 천부당만부당할 일이지.”

“그런데도 그냥 뒀단 말이야?”

“화완옹주께서 워낙 아끼는 여인이라더라.”

“대체 뭘 하다 궁으로 들어왔다니?”

“몰라.”

“그럼 궁엔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그것도 모르지.”

“그런 여인이 동궁 저하의 옥체에 손을 대게 했단 말이야?”

“내 말이. 상의원 상궁들과 궁녀들이 다 있는데도 굳이 옹주께서 그리하라 명하시니. 이 궁에서 그분의 명을 어길 궁인이 어딨겠니. 결국, 그 여우가 직접, 일일이 동궁 저하의 치수를 재었다지.”

“세상에, 그래서…… 별일은 없었대?”

“별일이 없긴…….”

“왜? 또 무슨 일인데?”

“어깨너비를 재겠다며 은근슬쩍 가슴을 슬쩍슬쩍 가져다 대고. 팔 길이를 재겠다며 이렇게, 이렇게 손끝으로 간질간질 만지니.”

“아하하하, 간지러워. 하지 마.”

“어디 그뿐인 줄 알아? 앞섶 길이를 재겠다며 이리, 이리 동궁 저하 가슴팍에 바싹 다가가서는…….”

“정말? 진짜 그렇게 했대?”

“거기까지면 다행이게?

“또? 뭐가 또 있어?”

“어젯밤엔 야식으로 약과를 가져와서는…….”

“아니, 소주방 궁인도 아닌 것이 왜 동궁 저하의 야식을 제가 챙겨?”

“그러니 여우라 그러는 거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단다.”

“또?”

“그 여우가 글쎄, 옹주마마께서 드시는 모습까지 지켜보라 하였다면서 동궁 저하 드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지 뭐냐.”

“꼬리가 하나가 아니라 백 개는 달렸는가 보다.”

“흥, 백 개가 뭐냐. 못해도 천 개는…….”

어린 궁녀들의 잡담이 길어지는 찰나.

“빈궁마마 아직 침소 계시거늘. 어인 수다야?”

금정이 궁녀들을 야단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소릴 수군대는 것이야?”

“잘못했습니다.”

“손 다 녹았으면 하던 일이나 마저 해.”

쪼르르, 날다람쥐처럼 달아나는 궁녀들의 발소리가 이레의 귓전에서 멀어졌다.

“그 백여우, 내 눈에 보이기만 해 봐. 생사의 갈림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똑똑히 알려줄 것이니. 대체 옹주마마께선 그런 여우를 어디서 데려온 거야?”

분기 서린 혼잣말을 중얼거린 금정은 처소 문을 살며시 열었다.

딴에는 이레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 고양이 걸음을 옮겼다.

이레는 부러 부스럭 인기척을 냈다.

“마마, 기침하시었나이까?”

“그래, 간밤에 별일 없었느냐?”

“평온하였사옵니다.”

금정은 이레의 안색을 살폈다.

이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히 말했다.

“주상 전하께 아침문안드려야 하니. 준비하거라.”

“저기, 빈궁마마.”

“왜 그러느냐?”

“오늘은 동궁전에 기별을 넣어보심이 어떠신지요.”

“동궁전에 기별은 왜?”

“그게…….”

궁 안에 동궁과 관련한 뜬소문이 횡행했다.

옹주전의 궁인 하나가 동궁을 자주 찾아간 일부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소문이 하루에도 수십 개가 만들어졌다.

가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금정은 슬그머니 곁눈질로 이레를 바라보았다.

행여 바람결에라도 그런 말씀 들으시면 마음 상하셨을 터인데.

이레를 걱정하는 마음에 금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런 금정에게 이레는 마른 미소를 보였다.

“괜찮다.”

***

이른 아침.

왕의 침소를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이레였다.

“어서 오너라. 내, 네가 오길 얼마나 고대하였는지 모른다.”

왕은 주름진 미소로 이레를 반겼다.

“단양,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여 간밤엔 잠을 다 설쳤지 뭐냐. 네 오라비가 박진봉 그 못된 자에게 당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하였었지?”

“제 오라비가 아니라, 이야기 속의 사람입니다.”

왕은 이야기 속의 은랑을 자꾸만 이레와 착각했다.

“맞다. 그랬지. 빈궁의 이야기가 아니라 은랑이라는 꾸며낸 사람의 이야기라 하였지. 하여간 그 은랑이 실종한 오라비의 흔적을 쫓다 같은 신세가 될 위기였었지.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은랑에겐 그녀를 지켜주는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설마 그 과묵하고 엉뚱한 행동만 하는 그 형편없는 사내는 아니렷다? 이름이 은…… 뭐시기라 하는.”

“은백이옵니다.”

“그래, 은백. 널 지켜주었다는 사내가 그 은백이란 애송이는 아니겠지?”

“제가 아니라 은랑이옵니다.”

“허허, 아무래도 정말 갈 때가 된 모양이로구나. 자꾸 너와 은랑이라는 아이가 헷갈리는 걸 보니 말이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왕에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시어요. 주상 전하께선 만수무강하실 것이옵니다.”

“그래그래. 내, 빈궁이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면 아무래도 그래야겠구나. 아무튼, 그 후에 어찌 되었느냐?”

왕이 인자한 웃음으로 재촉했다.

“그 후에…….”

이레의 조곤조곤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 턱을 넘지 못했던 빛살이 어느덧 침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왕의 침소를 나온 이레는 마지막 돌계단을 내려서며 한숨 돌렸다.

그때였다.

“빈궁마마.”

침소 마당에서 이레를 기다리던 금정의 목소리가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사가에서 보내온 서찰이옵니다.”

“사가에서 보낸 서찰이라고?”

좀처럼 없던 일이기에.

이레는 갸우뚱하며 금정이 건넨 서찰을 펼쳤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뵙길 청하옵니다. 부디 걸음 하여 주옵소서. 사슴(鹿).>

사가에서 보냈다는 서찰은 사실 사슴이 보낸 것이었다.

***

얼마 후.

만사여의로 완벽하게 변장한 이레는 사슴이 주인으로 있는 기루에 발을 들였다.

정교한 모양의 연꽃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이 층 누각.

사슴은 누각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밖을 보고 있었다.

무얼 보는데 저리 넋을 놓고 있을까.

이레는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섰다.

사슴의 시선이 향한 누각 아래.

포승줄에 굴비처럼 묶인 죄인들이 끌려가고 있었다.

엄동설한이었건만 죄인들은 모두 맨발이었다.

본디 권세 있는 양반이었던 듯.

걸치고 입은 입성의 바탕은 제법 귀해 보였다.

그러나 고초가 컸던 까닭인지.

옷은 사방이 찢겨 칼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본디 모양새를 알 수 없을 만큼 난발이었다.

먼 데서 보아도 비릿한 혈향이 느껴질 만큼 처참한 몰골의 죄인을 사슴은 뚫어지라 굽어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이레에게 물었다.

“저 맨 앞의 사내, 보이십니까?”

여전히 죄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이레 역시 사슴을 따라 죄인을 응시했다.

“아는 사람입니까?”

“한때는…….”

사슴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때는 잘 안다고 생각하였던 적도 있었지요.”

이레는 관아로 끌려가는 사내와 사슴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그녀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음이 분명했다.

이내 그녀의 추측을 증명하듯 사슴이 말했다.

“실은 저 사내, 제 정혼자였답니다.”

“……!”

*

“녹아야, 녹아야.”

소년이 이름을 부를 때면, 녹아는 늘 하늘에 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녹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녀의 정혼자로 정해진 소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녀는 소년의 여인이었고, 소년은 그녀의 사내였다.

녹아는 소년이 좋았다.

특히 그의 목소리.

여름 더위를 씻어주는 청아한 바람처럼,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의 구름처럼.

녹아를 부르는 소년의 음성은 싱그럽고 보송보송하였다.

그래서 종종 그녀는 장독대 뒤로, 때때로 후원의 대나무 숲으로……

가끔은 마루 밑에 숨어 소년이 자신을 부르며 찾아주길 기다렸다.

그때마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곤 하였다.

가끔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은 늘 소년의 품 안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소년이 자신의 지아비가 되고, 그녀가 소년의 지어미가 될 운명을.

그러나…….

꿈결처럼 따스하고 다정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녀가 열 살이었던 무렵.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두 사람을 혼인시켜야겠다는 말들이 양가에 오고 가던 그때.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드리워졌다.

작은 숙부께서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역모가 무엇인지, 그것이 역병보다 무섭고 때때로 찾아오는 악몽보다 두려운 것임을 미처 알기도 전에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아버지가 관아로 끌려갔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다.

어느 날인가.

집안의 청지기가 그녀를 찾아와 이제 더는 이곳에 살 수 없다 하였다.

가구며 비단옷, 패물 하나, 매일 신고 벗던 당혜조차도 그녀의 것은 없다고 하였다.

역모의 죄는 그녀의 생각보다 깊은 것이라.

작은 몸 하나 챙겨주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찾아간 곳은 정혼자의 집이었다.

어릴 적부터 살붙이처럼 귀애하던 정혼자의 부모와 소년을 떠올렸다.

그분들이라면…….

아버지와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벗임을 자처하던 분이시니.

어디 그뿐일까.

언제나 그녀에게 다정했던 소년이 아니던가.

소년이라면 그녀를 지켜주리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녹아에게 등을 돌려도 소년이라면 절대 등 돌리지 않으리라.

언제까지고 곁에 있겠다는 약조, 그 굳은 맹세를 지키리라.

믿고 또 믿었다.

하지만…….

결국, 솟을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며칠을 소리치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손톱이 뽑히도록 나무문을 긁고, 애원해도 그녀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훗날, 작은 숙부께서 누명을 썼다는 게 밝혀졌답니다.”

사슴은 쓸쓸한 미소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하지만 모든 걸 되돌리기엔 늦었지요. 전 돌아갈 집도, 부모님도, 연모했던 정인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복수를 다짐하였답니다.”

“누구에게……?”

“우리 집안에 억울한 누명을 씌운 자, 죄 없는 내 아버지를 문초하여 죽게 한 자, 집안의 재산을 모두 들고 도망간 자, 나와 내 집안을 손가락질하고 침 뱉은 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낮은 읊조림이 들려왔다.

“나를 외면했던 정혼자.”

사슴의 눈동자에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담겼다.

“권력과 재물, 제 이득과 욕심을 채우려 안달하던 저들의 마지막은 저런 것이랍니다. 허망하고, 또 허망한 것이지요.”

“저들은 무슨 죄목으로 저리 끌려가게 된 겁니까?”

“과욕을 부렸지요. 재산도 넉넉하고 적당한 관직까지 얻었으면 만족했어야 할 텐데, 더 높은 곳을 꿈꾸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뇌물을 뿌렸답니다. 그러다 그의 죄상을 낱낱이 아는 어느 기녀의 밀고로 저 모양이 되었다는군요.”

밀고한 기녀, 사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레가 사슴에게 물었다.

“오늘 나를 이곳으로 부른 연유가 무엇입니까?”

“감히 조언 한마디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조언?”

“사내를 믿지 마세요.”

사슴은 죄인들의 행렬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의 굳은 언약도 맹세도. 무정한 세상에선 그 어떤 약조도 소용없답니다. 흐르는 세월 속에 퇴색하지 않는 건 없지요. 굳은 언약은 흐릿하게 바라고 연모의 맹세도 무뎌지기 마련이랍니다.”

“…….”

“아십니까? 전 요즘 매일 그분을 뵙는답니다.”

형운을 매일 만난다는 뜻이었다.

“옷을 지어드리고, 손수 만든 음식도 대접하였지요.”

사슴이 짤랑짤랑 방울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 손길 닿을 때마다 그분께서 어찌나 부끄러워하시던지.”

“…….”

어린 궁녀들이 들은 소문이 마냥 허튼 소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동궁 저하께선 여인을 대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더이다. 처음 한동안은 그분께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웠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슴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분, 곧 제게 넘어오실 것입니다.”

도발.

과감한 말로 도발한 사슴은 이레의 반응을 살폈다.

분명 분하겠지.

아니, 우선은 낙심부터 하려나.

그게 아니면…….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낸 건 결국 사슴이었다.

“화…… 나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그 흔한 질투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온한 목소리.

사슴을 향한 존대도 여전했다.

서로의 정체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이레는 철저히 만사여의의 신분으로 사슴을 대할 뿐이다.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그분께서 변하실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보고 설레고 흔들리지 않을까.

자신을 버리고 가버리지 않을까.

한낱 약조만을 믿기 살아가기엔 궁은 너무 넓고 외로울 것이며, 홀로 견딜 시간은 길고 지루하리라.

이번에도 이레는 사슴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무엇이, 어떤 이유로 그 사람, 그 사내를 그리 믿는 겁니까?

“그분과 했던 시간을 믿습니다. 함께 보냈던 많은 밤을 믿고 있습니다.”

“네?”

사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많은 밤을 함께하였다니.

험난한 간택을 거쳐 세손빈이 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사가로 쫓겨났던 시간을 제외하고 환궁한 이후론 동궁을 만날 시간이 도통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많은 밤을 함께 하였다는 빈궁의 말은 잘못되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는 사슴을 향해 이레는 문득 미소를 지었다.

사슴은 모르리라.

철없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보낸 두 사람의 수많은 밤을.

서탁으로 맺어진 인연을.

낮이 되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글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달과 함께 쌓아온 그 많은 세월을.

“조언 잘 들었습니다.”

“…….”

“다른 볼일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이레는 사슴에게 등을 돌렸다.

“아십니까?”

멍하니 이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슴이 혼잣말이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싫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당신이 싫지 않아요.”

걸음을 떼던 이레 역시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나도 왜인지 그대가 싫지 않습니다.”

***

이레를 태운 가마가 멀어졌다.

사슴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텅 빈 눈으로 보았다.

“부창부수라더니.”

그녀의 입가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이번엔 내가 진 건가?”

사슴은 이레가 찾아오기 직전.

자신을 찾아왔던 한 사내를 떠올렸다.

*

반 시진 전.

한 사내가 그녀를 찾아왔다.

형운.

사슴은 기뻤다.

그동안 온갖 정성을 쏟았음에도 꿈쩍도 않던 목석 같던 사내.

그 무심하던 사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만나러 나온 것이었다.

그간 서운하였던 마음이 봄 눈 녹듯 녹아내렸다.

급히 다담상을 차리라 명하고 환한 기쁨으로 그의 앞에 앉았다.

하지만 형운은 그녀의 기대와 다른 뜻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이제 그만두시오.”

쇠붙이처럼 차고 무심한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무얼 말입니까?”

“날 흔들려는 의도 말이오.”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하옵니다.

당신의 그 무정한 눈빛이.

냉정한 한마디가.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는 듯합니다.

입술이 떨렸다.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당신은 어찌 그리 내 마음 몰라주고 그리 가혹할 수 있습니까?

버림받은 가련한 여인.

쓰리고 아픈 내 사랑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안타깝게도 형운은 심금을 울리는 사슴의 호소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예전에 말이오…….”

그가 긴 숨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오.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마음과 달리 매정한 말만 뱉는 그런 못난 사람이었다오.”

“익숙하지 않아서겠지요.”

“천하에 다시 없을 부끄럼쟁이, 소심한 겁쟁이, 그게 바로 나였소.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세상에서 단 한 여인에게만은 그러지 않더군.”

사슴의 미소가 굳었다.

“뒤늦게 알았소. 어찌하여 그 사람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는지.”

“무슨 이유였습니까?”

“그 여인은 언제나 같은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소. 모두가 세손으로, 동궁으로 보았을 때. 내가 입은 용포와 내가 쓴 익선관을 보고 있을 때. 그 사람만은 오롯이 나를 나로 보았소.”

서탁으로 만나, 글로 시작된 인연.

고난이 엮은 운명.

“그 사람은 내가 지닌 그 무엇이 아닌, 나만을 보고 있었소.”

형운이 담담히 고백했다.

사슴의 낯빛이 점점 창백해졌다.

설마…….

“그러니 더는 허튼짓 마시오.”

“…….”

기어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이 공기를 가르며 사슴을 귓전을 두드렸다.

형운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등을 보이자 사슴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저 사람을 지금 보내면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었다.

“전 십학사입니다!”

우뚝.

형운이 걸음을 멈췄다.

역시, 저 무정한 사내를 움직일 방도는 이것뿐이구나.

내친걸음이라.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그에게 사슴은 다시 한 번 재차 말했다.

“십학사의 말을 몰래 엿들었단 말은 거짓입니다. 제가 십학사입니다. 십학사 중 사슴이 바로 접니다.”

열 명의 학사.

사슴은 그중 하나임을 스스로 밝혔다.

그만큼 그녀는 절실했다.

“절 곁에 두십시오. 그리하면, 그리하기만 하면 저하의 고단한 삶이 더는 고되지 않게 될 겁니다.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곁자리, 당신의 곁에 앉을 수 있는 빈자리 하나만 내어주십시오.”

이 나라의 왕세자마저 떨어트렸던 십학사였다.

그들의 힘을 얻으면 형운을 괴롭히는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기꺼이 당신의 도구가 되겠습니다. 그저 제가 내민 손만 잡아주세요.”

사슴은 등을 보이고 있는 형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는 돌아서리라.

누구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니.

기꺼이 그녀의 손을 잡으리라…….

“싫소.”

하지만 사슴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짧은 거절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게 될지 모른단 말입니까? 참으로 힘든 겨울이 될 것입니다. 춥고 고되고 지난한 이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어요. 그래도, 그리하여도…….”

저를 내치실 겁니까?

“어쩌면 그대 말처럼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지.”

정녕…….

그걸 알면서.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상관없소.”

어찌하여 그리 환하게 웃으십니까.

“내겐 그 험한 길 함께 걸어줄 사람 있소. 그 사람만 있으면, 상관없소.”

어찌 그리 하찮은 미련, 아쉬움 한 조각 남기지 않으십니까.

*

“박복한 인생이구나.”

하루에 두 번이나 실연(失緣)이라니.

녹아, 녹아.

너의 팔자는 어찌 이리도 기구하더냐.

마음 준 사람은 언제나 널 버리고 떠나는구나.

박복하구나.

참으로 가엾은 인생이로구나.

사슴은 멀어지는 이레의 가마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

“잠시 멈추게.”

가마 밖으로 흘러나온 이레의 말에 가마가 멈췄다.

골목 안 세책방 앞을 지나던 길이었다.

마음이 번잡하여서일까.

시전 한구석에 자리한 세책방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잠시 기다려주시게.”

가마에서 내린 이레는 세책방으로 걸음 했다.

낮은 지붕.

먹먹한 공기.

서책으로 꽉 찬 세책방의 묵 향기와 오래된 먼지 냄새가 좋았다.

세책방 안은 한산하였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선비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책장을 눈으로 훑던 이레는 손 가는 대로 서책 한 권을 꺼냈다.

흔하디흔한 이야기책이었다.

그럼에도 이레는 묘하게 글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선비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글을 좋아하시오?”

어깨너머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이레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서글서글한 검은 눈동자.

높고 날카로운 콧날.

그린 듯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촘촘한 너울 밖으로 보이는 얼굴은 분명 형운이었다.

어느샌가 그가 그녀의 등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 사람이 이곳엔 어쩐 일일까?

“여기서 그대를 몇 번이나 만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이오.”

형운의 얼굴에 친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도 익숙한 미소.

하지만 지금 그가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만사여의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비록 감춰놓은 속은 같으나 겉으로 보이는 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욱신.

문득 가슴이 아팠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였다.

언제나 그녀를 기쁘게 하였던 그 웃음이 분명한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날카로운 칼날처럼 아프고 시렸다.

그런 까닭일까.

이레는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가시 돋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

“여인을 보면 언제나 그리 웃으십니까?”

말을 뱉고 나서, 그녀는 바로 후회했다.

의외의 반응에 형운 역시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기분 나쁘셨소? 미안하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무례를 저질렀소.”

“남녀가 유별하듯 웃음에도 사람을 구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명심하리다.”

아닙니다.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왜 이런 못된 말을 입에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귓전을 떠나지 않는 사슴의 말 때문이리라.

‘그분, 곧 제게 넘어오실 것입니다.’

아무렇지 않다 생각하였는데, 그녀의 말이 가슴에 앙금처럼 남은 모양이다.

후회되었다.

부끄럽고 미안하였다.

이레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세책방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형운이 달아나려는 그녀의 옷소매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어이하여…….”

이레는 의문 담긴 눈으로 형운을 보았다.

어느새 그는 그녀가 벌린 간격만큼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닳을 만큼 가까운 거리.

조금 전과 같은 상황.

하지만 한 가지는 달랐다.

“사람을 구별하여야 한다 하였소?”

이레를 보는 그의 표정에…….

담담하였던 그의 눈빛에…….

균열이 일었다.

거센 격랑이 몰아쳤다.

“그럼 구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겐 어찌하면 되오?”

“무슨……말씀입니까?”

대답하는 대신 형운은 천천히 이레에게로 손을 뻗었다.

왜?

놀라 상체를 뒤로 물렸지만, 형운의 손이 훨씬 빨랐다.

그는 이레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 너울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이레의 눈두덩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심장이 바스스 부서질 듯했다.

절대로 보여선 안 될 얼굴이…….

들켜선 안 될 정체가…….

이대로 드러나게 되는 걸까.

이레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들켜버려서인지, 아니면 그의 뜨거운 눈빛이 전하는 전율 때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머리가 굳고, 생각도 멈춰버렸다.

얼어버린 이레의 귓가로 형운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비밀. 오래도록 모른 척,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는데. 더는…… 더는 참지 못하겠소.”

형운의 뜨거운 입술이 이레의 연분홍빛 숨결을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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