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75화 (175/215)

#175. 하지 마!

화완은 낯빛이 썩 밝지 않았다.

십학사는 물론 조정의 일도…….

모든 것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십학사의 빈자리도 대부분 채워졌으며, 조정 대신들 또한 동궁의 모든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를 외치며 그의 뜻을 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모든 흐름은 화완,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이 불안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서얼의 과거시험을 허락했단 말이냐?”

“네.”

소식을 물고 온 내관이 한껏 고개를 조아렸다.

“신료들의 반대가 만만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다툼이 치열하고 살벌하여 보는 이가 다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하옵니다.”

화완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신료들은 승리하였다고 자축하는데, 정작 정국(政局)은 동궁의 뜻대로 흐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정 대감이 요 며칠 안 보이는구나.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내관은 대답을 망설였다.

“또 취한 모양이구나.”

뜻밖의 실패를 겪어서일까.

형운이 동궁에 오른 이후, 정후겸은 자주 술독에 빠졌다.

주상 전하께서 금주령을 시행하고 엄격히 술을 금하였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은 좌절 정도로 무너질 아이가 아닌데, 이번은 유독 방황이 길구나.”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탕해진 정후겸을 떠올리며 화완은 혀를 찼다.

그녀는 이내 다른 이의 소식도 물었다.

“장 집의는 무얼 하고 있다 하더냐?”

“전날과 다름없이 사헌부에 계시옵니다.”

“쉬엄쉬엄해도 될 것을. 융통성 없는 사람 같으니. 일간 찾아가 산책이나 하자 해야겠구나.”

정후겸의 근황을 물을 때와 달리 장무열을 언급하는 그녀의 얼굴엔 도홧빛 미소가 어려있었다.

화완은 그 누구보다 총명한 여인이었다.

정국을 읽는 일은 노련한 정치가 못지않았으며, 이득을 취하는 셈은 경험 많은 장사치조차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명민한 그녀도 정작 사람의 마음만은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양아들이 술독에 빠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장무열을 떠올리며 미소 짓던 화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며칠 주상 전하를 뵙지 못하였구나.”

화완은 그림자처럼 긴 행렬을 이끌고 왕의 침소로 향했다.

***

시간은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완이 왔느냐.”

보료에 기대앉은 왕이 화완을 반겼다.

평소라면 왕의 마른기침만이 홀로 허공을 떠돌고 있어야 할 시각.

어쩐 일인지 왕의 음성엔 예전과는 다른 활기가 깃들어 있었다.

화완의 곁으로 다가온 대전의 지밀상궁이 작은 목소리로 귀띔했다.

“요즘은 밤에 잠도 잘 주무시고, 기침도 부쩍 줄어들었사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일세.”

하는 말과 달리 화완의 표정은 그리 편치 않았다.

홀로 계시리라 생각했던 왕의 곁을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던 까닭이다.

“빈궁이 아니십니까?”

예상치 못한 존재에 화완의 미간이 슬며시 날을 세웠다.

“빈궁이 이 시각에 어인 일로…….”

대답은 이레가 아닌 왕에게서 들려왔다.

“적적하여 내가 불렀구나.”

“그러셨습니까?”

화완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여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낯설다 멀리하던 빈궁을 아바마마께서 부르시다니.

꺼져가던 왕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적적하셨으면 절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괜한 일로 빈궁이…….”

화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왕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끝을 잘랐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네?”

느닷없는 질문에 화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녀는 왕의 물음이 자신이 아닌 이레에게 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레는 시선을 깔며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옹주마마께서도 오시었으니 그 이야기는 차후에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 무슨 소리냐? 한창 궁금증이 돋는 참이었는데. 갑자기 이리 뚝 이야기를 끊으면 어쩌란 것이냐.”

손에 든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곁에서 귀를 기울이던 화완이 끼어들었다.

“아바마마. 무슨 이야길 그리 재밌게 하시어요?”

“그런 것이 있느니.”

왕은 마른 입맛을 다시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무언데요?”

이번엔 이레를 돌아보며 화완이 물었다.

“그것이…… 전하께서 적적해하시어 제가 아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있었나이다.”

“빈궁께 그런 재주도 있었습니까?”

“재주랄 것도 없는 수준입니다.”

그때 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그 불손인가 뭔가는 약조한 장소에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어찌 보면 나온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안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허어, 나오면 나온 것이지, 그 어중간한 대답은 또 무어냐?”

왕이 이레를 채근했다.

이레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화완이 왕의 앞자리에 바투 앉았다.

우연일까.

화완으로 인해 이레를 향하던 왕의 시선이 가로막혔다.

“아바마마, 이것 좀 드셔 보시어요.”

화완이 가지고 온 비단보를 풀었다.

“전라도에서 가져온 배즙과 도라지즙을 달인 거랍니다. 기침병엔 이만한 것이 없다 하니…….”

“알았다. 내 나중에 마시마.”

“이 화완이 아바마마 드리려 따뜻하게 달여왔답니다. 식기 전에 드셔 보옵소서.”

“오냐오냐.”

왕은 화완이 따라주는 것을 후루룩 삼켰다.

“되었느냐?”

“네, 아바마마. 지밀상궁에게 일러 시간 맞춰 올리라 할 것이오니. 귀찮아도 드셔야 하옵니다.”

“그래그래, 이 아비를 생각하는 건 우리 완이 밖에 없구나.”

왕이 대답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 대답이 건성으로 느껴졌다.

왕의 눈길이 내내 빈궁에게 고정된 까닭이었다.

***

“오늘은 어쩐 일로 이리 빨리 나오십니까?”

침전 대문 밖을 나서자 화완을 기다리던 사슴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평소라면 적어도 한 시진은 더 기다려야 했으리라.

심지어 표정마저 덜 익은 감은 씹은 듯 쓰고 떨떠름하니.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화완은 달리 급한 볼일이 있었다.

“지밀상궁.”

화완은 그림자처럼 뒤따라 나온 지밀상궁을 돌아보았다.

“하문하시옵소서.”

“주상 전하께서 언제부터 빈궁을 찾으셨는가?”

“오늘로 사흘째이옵니다.”

사흘이나 되었다는 대답에 화완은 가볍게 이를 갈았다.

“어떤 일로 부르셨는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 같사옵니다.”

“고작 그런 하찮은 소리나 듣자고 빈궁을 부른단 말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치만 살피던 사슴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옹주마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이까?”

“주상 전하께서 빈궁과 이야길 하고 있구나.”

“이 늦은 시각에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화완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슴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이야기인데 주상 전하께서 빈궁마마까지 부르신단 말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백귀가 어떻고 할아버지가 어떻고 하는 이야긴데…….”

“평소 전하께서 그런 이야길 즐기셨습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느냐. 헌데…… 아이처럼 웃고 계시더구나.”

화완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새겨졌다.

“아바마마께서……, 그분이 웃으셨다.”

***

-그래서 세 시진이나 이야길 하였단 말이냐?

-처음에는 남에게 말하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였지만, 어느새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세 시진이나 떠들게 해?

오후 무렵, 왕의 부름으로 침전으로 향한 이레는 술시(戌時)가 되어서야 겨우 자신의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워낙에 기력이 쇠하신지라.

이레도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갈무리하려 하였다.

하지만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갈증에 허덕이던 자가 샘물을 발견한 것처럼.

마치 꿈인 듯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이레의 이야기에 한껏 몰입하였다.

찾아 뵈올 때마다 번번이 조금만 더 해달라 조르시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할아버지들은 이레를 귀찮게 하는 왕을 탐탁잖게 생각했다.

오후뿐만이 아니라 아침 문안갔을 때도 잡혀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할아버지들께서 무어라 하실까.

분명 앞다퉈 할바마마 험담을 하실 것이다.

-허, 그깟 백귀들의 이야기가 뭐가 좋다고.

상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악이 그를 핀잔했다.

-그러는 상, 너는 이놈의 서탁질을 끊어야겠다, 소리치면서도 매번 찾아오질 않느냐?

-내가 좋아서 이곳을 찾는 줄 아느냐?

-좋아서 찾는 게 아니면?

-감시하기 위해서다. 너희 같은 해괴한 종자들이 무슨 못된 꿍꿍이를 꾸미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다.

-웃기시네.

-웃기다니. 이노옴! 내가 뉘인 줄 알고 감히 그런 망발이냐.

-그러는 네놈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악과 상의 다툼이 심해졌다.

이레는 욕설로 검게 물든 종이를 치우고 서탁 위에 새 종이를 펼쳤다.

흰 종이 위에 예의 단정한 글이 떠올랐다.

-서탁 이야기를 전하였다니, 근심이 드는구나. 혹,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간혹, 궁의 궁녀 중에 미신에 심취하여 괴이한 소동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폐해가 워낙 심각하여 궁의 법도로 엄히 금하고 있었다.

혹여 임금이 이레의 이야기를 미신쯤으로 치부한다면 어찌할까,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리라.

-다행히 철없는 어린 시절의 공상 정도로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 이후로도 이레는 서탁의 할아버지들과 근황을 주고받았다.

문득, 상이 물었다.

-오늘따라 화가 조용하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괘씸한 놈!

-뭐? 나 말이냐?

상의 대거리에 화의 대답이 이어졌다.

-이번엔 네놈한테 하는 말 아니니, 나서지 마라. 그러잖아도 분한 걸 삭이느라 죽을 참이니까.

-왜?

상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화는 이레를 불렀다.

-아이야.

-네.

-널 ‘아이야’라고 처음 부른 사람은 나다. 그 사실을 잊어선 아니 될 것이야.

이레는 미소를 지었다.

화는 왕이 이레를 ‘아이야’라고 불렀다는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었다.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할아버지들께서 해주신 말씀들.

그 따뜻한 글귀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다.

생이 끝날 때까지.

내내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레가 할아버지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내 이럴 줄 알았소.”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이레는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형운이 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당분간 서탁을 금한다 하였거늘.”

“언제 오셨습니까?”

“보시오. 지금도 서탁에 빠져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지 않소?”

형운은 이레의 손에서 붓을 빼앗았다.

“스승님들껜 죄송하지만, 지금부터 그대는 내가 차지하여야겠소.”

“잠시만요. 작별 인사만이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싫소. 잠시도 그대를 서탁에 빼앗기고 싶지 않소.”

토라진 형운과 이레 사이에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레는 형운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숨에 이레의 두 손을 잡아챈 형운이 끝내 서탁마저 저만치로 밀어버렸다.

“이제 좀 마음에 드는군.”

“짓궂으십니다.”

“그 표정, 마음에 드오.”

형운이 고개를 이레 앞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문이 막힌 이레는 마른침만 삼켰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형운이 무릎을 굽혔다.

“오늘은 무얼 하였소? 별일은 없었소?”

“……없었습니다.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일은 끝나신 겁니까?”

“아직 살펴야 할 상소가 태산이오.”

“그럼 좀 쉬시질 않고서요.”

“쉬려고 왔소.”

“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날이 이어지니. 매일 같은 얼굴들이 한결같이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주옵소서.’ 한목소리를 내고 있소. 처음에는 제법 견딜 만하였는데, 같은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보통 고단한 게 아니오.”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렵니까?”

이레가 묻자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싫소.”

“그럼 뭐라도 젓수옵소서.”

이레가 일어서려 하자 형운이 그녀를 도로 자리에 끌어 앉혔다.

“그것도 싫소.”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시면.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레의 물음에 형운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형운이.

형운의 눈동자엔 그녀가.

두 사람이 오롯이 맺히는 평온한 시간의 끝자락.

돌연 형운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중대한 말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이레도 바짝 긴장했다.

형운이 이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붓.”

“네?”

“내게 빼앗긴 것이 분하지 않소?”

“네?”

진지한 표정으로 긴장케 하더니.

고작 붓을 뺏겨 분하지 않느냐니.

형운의 엉뚱한 물음에 이레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맞소. 바로 그 표정.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군.”

“그게 그리 좋습니까?”

“좋소. 무척 좋다오.”

형운은 시원하게 웃었다.

“저하, 변하셨습니다.”

“내가 말이오?”

“예전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분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할지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지금은 다르오?”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저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형운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짐작을 못 하겠다니.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구려.”

“붓을 감추시려는 게 아닙니까?”

“틀렸소.”

형운이 이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강한 힘에 이끌려 그의 너른 가슴에 그녀가 안겼다.

“이번엔 붓이 아니라 그대를 훔칠 생각이라오.”

두 사람만의 은밀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서탁의 대화는 끊임없는 이어지고 있었다.

-어째 아이가 조용하군.

화와 상의 글씨가 번갈아 떠올랐다.

-무언가 다른 볼일이 생긴 모양이지.

-그나저나 두 아이 모두 이제 제법 자리를 잡은 것 같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구나.

상이 크게 웃었다.

-하하, 누가 가르쳤는데 당연하지.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구려.

-예. 너는 또 뭐가 불길하다는 거야?

-아이에게서 전해 들은 옹주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구려. 이대로 잠자코 당하고만 있을 것 같지 않으니.

-하지 마!

거칠게 쓴 상의 글이 서탁 위를 가득 채웠다.

-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네가 불길한 소리를 하면 이상하게 꼭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단 말이다.

-그렇지만…….

-잡소리 끄적대려거든, 잠이나 자라!

예를 막는 상의 필사적인 글씨가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찰나.

“빈궁마마…….”

이레와 형운, 두 사람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황급히 형운에게서 몸을 뗀 이레는 입성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냐?”

“화완옹주전에서 사람이 왔사옵니다.”

“화완옹주께서……?”

뜻밖의 방문객에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안으로 뫼셔라.”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대가 여긴 어찌…….”

치맛자락을 든 채 사뿐사뿐 걷는 자태가 낯설지 않았다.

“늦은 시각 결례하였습니다.”

사슴은 이레를 향해 깊게 절했다.

“옹주께서 보내셨다 들었네. 무슨 볼일인가?”

“오늘은 빈궁마마가 아니라…….”

사슴은 이레의 뒤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길게 늘였다.

내내 작던 사슴의 음성이 높아졌다.

“옹주마마의 분부로 동궁 저하를 뫼시러 왔사옵니다.”

사슴의 눈길 끝에 형운이 맺혀 있었다.

“…….”

옹주마마께서 동궁 저하를 왜……?

이레의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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