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74화 (174/215)

#174. 아이야……

겨울의 아침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밖은 이미 환하게 날이 밝았건만.

왕의 침전은 지난밤의 탁한 공기를 털어내지 못한 채 어둡게 침잠되어 있었다.

“쿨럭, 쿨럭.”

시원스레 터져 나오지 않는 기침이 밤새 왕을 괴롭혔다.

목구멍을 무에 진득한 것이 가득 메운 듯.

쌔액, 쌔액, 밭은 숨을 내쉬는 왕의 숨 자락은 곁에서 듣고 있는 것조차도 무겁고 갑갑하였다.

“어찌 이리 차도를 아니 보이시는가.”

오늘따라 힘겨운 듯 보이는 아비의 모습에 화완의 음성이 높아졌다.

그녀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시선으로 어의를 비롯한 내의원들을 한 사람씩 짚었다.

“이 나라 최고의 의원들이라 자부하던 사람들이 이깟 기침병 하나를 못 잡는단 말인가.”

원망 섞인 음성이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화완의 눈가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송구하옵니다, 옹주마마.”

어의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소리나 듣자고 하는 말이 아니질 않은가. 아바마마께서…… 이러다 아바마마께 정녕 무슨 일이라도…….”

불경한 말일랑 입에 올리기조차 싫다는 듯 화완은 뒷말을 삼켰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슴벅슴벅한 눈물샘을 비우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한번 터진 샘물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신 턱 끝으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옹주마마, 진정하옵소서.”

보다 못한 상선이 나서 옹주를 다독였다.

“이러다 행여 마마께서도 몸져누우실까 저어되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이리 누워 계시거늘. 자식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차라리 내가 병이 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바마마께서 강건하시고 대신 내가 아프면…….”

화완의 말이 채 끝나기 전.

“그런 말…… 마라.”

히이익, 밭은 숨소리와 함께 왕의 목소리가 화완을 붙잡았다.

화완은 서둘러 왕을 돌아보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뜬 왕과 시선이 마주 닿자 옹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바마마!”

화완은 상체를 일으키는 왕에게 반갑게 달려들었다.

워낙에 약해진 탓일까.

보료에 기대앉은 왕의 턱밑으로 거친 숨이 차올랐다.

“아바마마, 괜찮사옵니까?”

“괜찮다, 괜찮아.”

“그런데 어찌 이리 누워만 계시옵니까.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시어요.”

“오냐오냐. 내 너를 생각해서라도 어서 나으마.”

“아바마마, 아시지요? 이 화완은 아바마마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 그걸 어찌 모를까.”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왕이 사람 좋은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그런 왕의 모습이 속상한 듯 화완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어찌 또 눈물을 보이는 것이야?”

“마음이 아파 그렇습니다. 아바마마 대신 제가 아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구나!”

“아바마마.”

“이 아비를 생각하는 네 지극한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나는 이미 살 만큼 살았다. 이런 늙은이의 병치레를 여리디여린 네가 어찌 대신하겠다고 자처하느냐.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다. 행여나 그런 말, 입에 담지 마라. 알겠느냐.”

“하오나…….”

“아비에게 약조해라.”

왕의 다정한 재촉에 화완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소린, 안 할 것이옵니다. 대신 아바마마도 약조해 주시어요. 백 년, 이백 년…… 이 화완과 함께 살아주시어요.”

화완옹주는 검은 꽃이 핀 왕의 손을 잡았다.

“허허허, 백 년은 몰라도 이백 년은 과하구나. 그래도 우리 완이의 소원이라면, 내 못 할 것도 없지.”

바싹 마른 고목 같은 왕의 손가락이 옹주의 손등을 토닥토닥 다정하게 다독일 때였다.

침전 앞을 지키는 문전비의 고하는 소리가 두 모녀의 대화를 방해하였다.

“전하, 세손빈 입시옵니다.”

***

스르륵.

굳게 닫혀 있던 침소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이내 단아한 입성의 이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왕의 손을 잡은 채 화완은 힐끗, 이레를 돌아보았다.

“빈궁께서 오셨군요.”

“왔느냐?”

화완을 대할 때와는 다른 온도의 목소리.

이레의 어깨너머를 응시하던 왕이 무심히 묻는다.

“동궁은 오늘도 아니 온 것이냐?”

“아침 강연이 길어지는 모양이옵니다.”

이레의 대답에도 왕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침전을 가득 메웠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왕과 이레를 번갈아 보던 화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궁께서 오셨으니, 저는 그만 가보겠나이다.”

“오냐.”

“아바마마, 저녁에 다시 찾아뵙겠나이다.”

“되었다. 날이 춥다.”

“싫습니다. 행여 북풍한설에 온몸이 꽁꽁 얼어버린다 하여도 아바마마 뵈러 올 것이옵니다.”

“이 고집불통을 보았나.”

“아바마마 닮아 그런 것을 어찌합니까.”

“허허허, 그런 것이냐.”

세상에 다시 없을 따뜻한 아비와 살가운 여식이었다.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레는 방문 앞에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왕의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릴 수도, 그렇다고 올리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화완은 애써 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의 손을 놓고 침전을 나서던 화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레에게 말했다.

“너무 오래 있지 마세요.”

어차피 달가워하지 않으시니.

“네?”

뜻밖의 말에 놀란 듯 이레가 옹주를 바라보았다.

“주상전하께서 많이 곤하신 듯합니다. 그러니 오래 머물지 마세요.”

정작 하고픈 말은 입안으로 삼킨 화완은 순진한 눈망울의 빈궁에게 재차 쐐기를 박았다.

***

침전의 붉은 대문을 나설 때까지 왕을 향한 화완의 걱정은 멈추지 않았다.

대전 소속의 궁인들에게 여러 차례 당부를 한 뒤에야 겨우 그녀는 침전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대문의 문턱을 나서는 순간.

내내 창백했던 화완의 낯빛이 달라졌다.

아비를 걱정하던 여린 옹주의 모습일랑 거짓말처럼 지워버린 그녀는 말끔한 얼굴로 처소로 향했다.

전각에 다다르자, 정후겸과 사슴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워낙에 눈치 빠른 사슴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옹주에게 물었다.

“그리 보이느냐?”

“네, 무에 재미난 것이라도 보신 듯한 표정입니다.”

사슴의 말에 화완은 입가에 긴 웃음을 머금었다.

빈궁을 맞은 왕의 무정한 눈길.

그 건조한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레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옵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속과 다른 말을 뱉으며 화완은 정후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근래 존현각이 유난히 소란스럽더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존현각.

동궁의 처소이자 신료들과의 정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곳.

정후겸이 특유의 나른한 음성으로 어미의 물음에 대답했다.

“동궁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마다 신료들의 반대가 심하여 그런 것이옵니다.”

“이번엔 무슨 일로 그러는 것이냐?”

“이번엔 내년 봄에 치르는 과거를 거론하시었나이다.”

“봄에 치르는 과거야 이미 아바마마께서 명하신 것이거늘. 그것이 무에 문제더냐?”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과거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이 문제가 되었사옵니다.”

“자격이라니?”

“동궁께서 인재의 고른 등용이 필요하다 하시며 서얼에게도 과거 시험을 치를 자격을 주시겠다 하셨사옵니다.”

“무어라? 서얼에게 과거를 치를 자격을 주겠다고 하였다?”

“네, 어마마마.”

“혈통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이 그것을 어찌 찬성할까. 이는 노론뿐만 아니라 다른 당파의 신료들조차도 반대할 일이다. 뉘라서 권력을 남과 나누려 하겠느냐?”

화완은 쯧쯧 혀를 찼다.

“신료들의 반대가 그처럼 극심하다니. 동궁의 처지가 참으로 어렵겠구나.”

***

“아니 되옵니다!”

강퍅한 인상의 신료는 목이 터져라, 반대를 외쳤다.

동궁의 음성 역시 작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그리 반대만 할 것인가! 반대할 것이라면 그럴듯한 명분이라도 한번 말해 보라.”

“딱히 명분을 댈 필요도 없사옵니다. 이 나라 조정을 지키고 받들기 위해 조선 전역에서 유학에 심혈을 기울이는 유생이 얼마이며, 학사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찌 세상의 학문이 유학뿐이겠느냐. 이 조선을 위해 일할 일꾼이 어찌 유생들뿐이겠느냔 말이다.”

형운의 말에 심환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학은 천하의 근본이며 기본이니. 유학을 천시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 것이옵니다.”

그의 서슬 퍼런 태도에 주위에서 호응하던 신료들조차 기가 눌릴 지경이었다.

동궁 역시 지지 않고 소리쳤다.

“누가 유학을 천시한다 하였느냐? 다른 학문 또한 필요하다 하였느니. 설마, 유학을 핑계로 그들의 출신을 문제 삼는 것이냐?”

“나라를 위하는 자들이 어찌 그런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겠나이까.”

목소리를 높이던 심환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예 동궁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곁에 있던 신료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보게, 심 교리. 과하네. 이쯤 하였으면 충분하니.”

“이거 놓으시게. 이게 어찌 참을 일인가.”

제 팔이며 소맷자락에 엉겨붙는 신료들을 대차게 밀어낸 심환지가 다시금 소리쳤다.

“소신은 그들의 출신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꿰뚫어본 것이옵니다. 서얼이 뉘옵니까. 비록 양반의 피가 흐른다고 하지만, 그 절반은 천한 핏줄이옵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이까.”

“…….”

“구태여 부족한 자들을 시간과 공을 들여 교육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준비된 유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백번 천 번 나은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그렇다면 좋다. 그대의 뜻이 정히 그렇다면 나와 내기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내가 그들 중 몇몇을 선별하여 교육하겠다. 차후에 유생들과 함께 어느 쪽이 뛰어난지 가려보도록 하지.”

“어찌 제가 동궁 저하와 내기를 할 수 있겠나이까?”

“그대가 그들의 신분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면, 나와의 내기를 피할 필요가 있겠느냐?”

동궁의 추궁을 심환지는 냉소 섞인 대답으로 되받아쳤다.

“신하 된 도리로 감히 동궁 저하와 내기를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나, 유생들이 뛰어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옵니다.”

“좋다. 그럼, 한 번 시험하도록 하자.”

“좋습니다! 저하께서 그토록 자신하신다면, 저 역시 제가 옳음을 증명해 보일 것이옵니다.”

“그럼 내년 봄에 치를 과거 시험엔 서얼 역시 참여할 수 있음이렷다?”

“저하께선 분명 후회하실 것이옵니다.”

“누가 후회할 것인지는 과거시험을 치른 후에 알게 되겠지.”

첨예하게 맞서던 과거 시험의 자격에 결론이 내려졌다.

비로소 심환지는 화를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고, 그와 대립하던 동궁 또한 다음 논의를 진행하였다.

당장 칼부림이라도 날 듯한 분위기가 진정되자 신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심 교리가 무척 애썼구나.’

언제나 동궁과 맞서는 데 주저하지 않는 심환지에게 신료들은 신뢰의 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살벌하게 맞서던 동궁과 심 교리가 은근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음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노라 천명한 서얼의 출사(出仕)가 내기라는 이름으로 시험대 위에 올려졌음을.

***

“동궁이 괜한 일에 힘을 쓰는구나.”

정후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던 화완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뇌리엔 왕의 앞에서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이레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어찌 안팎으로 안될 일에 그리 공을 들이는 것인지.”

낮게 혼잣말을 곱씹던 화완이 사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하는 일은 진척이 있느냐?”

사슴의 얼굴에 자신만만함이 떠올랐다.

“곧 성과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잘되었구나.”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던 화완은 곧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를 어쩌누.”

“어찌 그러십니까?”

돌변한 옹주의 안색을 살피며 사슴이 물었다.

“구중궁궐 속, 어느 한 곳 기댈 곳 없는 가엾은 여인이 또 한 명 생기겠구나.”

“가엾은 여인이라면…….”

“빈궁 말이다. 정사에 바쁜 동궁과는 멀어지고, 왕께서는 무심하시니.”

결국, 고립되어 말라죽겠지.

그것이 이레의 정해진 숙명인 것을 화완옹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같은 시각.

화완옹주의 예상대로 왕의 침소엔 어색한 침묵이 가득하였다.

정적을 깬 것은 이레였다.

“간밤에 기침이 심하셨다 들었사옵니다.”

걱정하는 이레에게 왕은 무심히 대답하였다.

“갈 때가 되어 그런 것이겠지.”

“…….”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슬쩍, 이레를 바라보던 왕이 헛기침을 흘렸다.

단칼에 빈궁의 입을 다물게 한 자신의 행동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생겼던 까닭이다.

“아이야. 네겐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로구나.”

“…….”

“돌이켜보면 참으로 몹쓸 짓을 많이 하였다.”

“그런 말씀 마옵소서, 전하.”

“아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언제나 후회뿐이로구나.”

워낙에 감정의 기복이 심한 왕인지라.

울컥해진 듯 왕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레의 가슴에도 뭉클한 감정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코끝이 알싸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기어이 눈물을 보이자 왕이 놀라 물었다.

“왜 그리 우느냐?”

“송구하옵니다.”

“아이냐, 내 너를 쓸데없이 우울하게 만들었구나.”

이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다만…… 저를 아이야…… 라고 부르시는 전하의 부름을 들으니 불현듯 그분이 떠올라 그만…….”

“허허, 너를 또 그리 부른 이가 있더냐? 어떤 사람이냐? 돌아가신 내 조부더냐?”

이레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던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단지 그분들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민되어…….”

“그분들?”

“네. 제겐 친할아버지들과 다름없는 분들입니다. 때론 동무가 되어 주시기도 하고 또 때론 엄한 스승님 같은 분들이 계십니다.”

때론 아비처럼.

때로는 오라비처럼.

그녀를 위로하고, 다독여주며, 엄히 꾸짖을 때도 있지만, 한없이 자상하신 분들.

“쿨럭, 어떤 분들이신지 궁금하구나.”

갑자기 터져 나온 기침에 가쁜 숨을 뱉으며 왕이 물었다.

“내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잠시 머뭇거리던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을 처음 만난 건 일곱 살 무렵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이레의 이야기.

이때만 해도 그녀도, 그리고 왕도 알지 못했다.

어린 소녀의 꿈인 듯, 몽상인 듯한 이야기가 그토록 길게 이어질 줄은……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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