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부창부수 (下)
“저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피를 토해내는 듯한 심환지의 목소리가 존현각을 가득 메웠다.
“그래서? 대체 어찌하잔 말이오?”
형운은 매서운 눈길로 그를 굽어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홍문관(三司)의 관원들과 함께 존현각을 찾은 심환지는 밤이 늦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작심한 듯 그는 삼사합계(三司合啟)를 올렸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삼사라 하고, 그 삼사에서 함께 올린 상소를 삼사합계라 하였다.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올린 상소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생활이 곤궁해진 백성 중, 화적(火賊)이 되어 밤낮으로 약탈과 납치를 일삼는 자들이 있사옵니다.
민심은 날로 흉흉하여 여인과 어린아이들은 집 밖으로 나가길 꺼리고, 사내라도 떼 지어 다니는 화적에게 봉변당하는 일이 종종 생기니. 서둘러 군사를 풀어 도성 주변의 화적들을 잡아 일벌백계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심환지는 형운의 사나운 눈빛에도 굴하지 않았다.
“일전에 저하께서 말씀하시었사옵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당장 죽어가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군주의 무사공평함이란 원칙에 예외를 둘 수 있다 하셨사옵니다.”
“그것이 이 상소와 무슨 상관인가?”
“처벌이 약해진 틈을 타고 도적 떼가 사방에 출몰하고 있사옵니다. 근자에 들어 그들의 악행이 극에 이르니. 봉변을 당한 백성이 한둘이 아니옵니다.”
“내 뜻은 굶주리고 어려운 처지의 백성들을 돌봐야 한다는 의미였지, 악행을 일삼는 도적을 감싸자는 말이 아니었소.”
“저하의 선의가 빌미가 된 것이옵니다.”
심환지의 지적에 형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어라? 그대는 지금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책망하는 것인가?”
형운의 고함에 주위에 있던 노론의 관원들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도적을 빌미로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자는 것은 그들 또한 바라마지 않은 바였다. 하지만 도적을 빈궁과 직접 연관 짓는 심환지의 논리는 지나치게 과한 면이 있었다.
온종일 통촉을 외쳐대며 형운과 팽팽하게 맞서던 관원들이 심환지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심 교리, 오늘은 이쯤 하는 것이…….”
“이거 놓으시게. 이 문제가 어디 가볍게 넘어갈 사안인가?”
말리는 손길을 뿌리친 심환지가 목이 터지라 외쳤다.
“책망이 아니라 사실을 아뢰는 것이옵니다. 의도가 어떠하든 저하께서 허락하신 그 예외로 인하여 화적떼가 활보하기 시작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럼에도 저하께선 여전히 예외를 내세우실 것이옵니까?”
심환지의 거센 반발에 형운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치세의 근본은 덕이라 하였다.”
“은덕은 위엄과 함께 있을 때에만 그 본연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옵니다. 위엄에는 권위가 필요하고, 권위는 강력한 처벌 위에 세워지는 것이옵니다.”
“그대는 나의 치세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인가?”
“네, 그러하옵니다!”
직설적인 심환지의 간언(諫言)에 주변에 있던 관원들의 입에 떡 벌어졌다.
“이보게, 심 교리.”
“말씀이 좀 과하네.”
“그쯤 하시게나. 저하께 그 어인 망언인가.”
더러는 말리고, 더러는 달래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심환지는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저하의 치세에는 덕은 있을지 모르나, 잘못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없나이다.”
“누구든 악행을 저지른다면 처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오.”
“단순한 처벌만으로는 부족하옵니다. 화적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그들을 옹호하고 뒤를 돌보는 세력마저 발생하였습니다. 일벌백계의 의미로 그들 또한 색출하여 징벌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형운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무리 화적떼라고 하지만, 그들이 금수가 아닌 이상 당연히 혈육이 있을 터. 화적의 가족이나 오랜 정을 보아 돌봐준 자들마저 처벌하는 것은 과한 처사가 아닌가?”
“한 명의 사정을 봐주면 두 번의 예외가 생길 것이고, 두 번의 예외가 생기면 백 명이 법도를 어길 것이옵니다. 부디 백성들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
“저하, 더는 미뤄선 아니 될 일이옵니다!”
“…….”
“저하의 측은지심으로 인하여 더 많은 백성이 고통받을 것이옵니다.”
“…….”
“그러니 이젠 결단을 내려주옵소서, 저하.”
“…….”
“부디 통촉하여 주옵소서.”
심환지가 주위에 있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짓을 받은 신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목소리를 내었다.
“저하, 통촉하옵소서.”
“부디 저하의 백성들이 더는 고통받지 않도록 화적들을 일벌백계하옵소서.”
자신들의 뜻을 동궁에게 관철하려는 의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확고해졌다.
그 중심엔 심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팽팽한 기세 싸움이 온종일 이어졌다.
결국, 패배를 시인한 쪽은 형운이었다.
마침내 그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대들의 뜻이 정히 그렇다면…… 내 따르겠다.”
순간, 심환지를 비롯한 신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 고집 센 동궁에게서 항복을 받아냈다는 승자의 기쁨.
이번의 승리는 단순히 정쟁에서 이겼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화적떼와 그에 동조한 자 모두를 처벌할 수 있다는 말.
그건 누구든 화적떼에게 동조하였다는 의심만으로 징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내 이득에 방해되는 자.
지금까지 지켜왔던 자신의 권세를 지키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자.
상대가 누구든 화적과 결부시켜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아무리 동궁이 영민하다 하나 연륜이 부족하니, 이번 화적떼의 일을 단순히 치안 정도의 일로 여길 수밖에.’
신료들이 동궁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며 머릿속으로 셈속을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한데, 화적떼와 무고한 백성을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겠소?”
형운의 물음에 신료들은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동궁께선 심지어 화적떼가 무언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화적떼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흉험한 병장기로 무장하여 백성들을 수시로 겁박하는 무리입니다.”
대제학이 나서서 차분한 음조로 설명하였다.
“그 말인즉, 화적떼란 무장한 무리를 말하는 것이구려.”
“그렇사옵니다.”
“잘 알겠소.”
고개를 주억거린 형운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관병 이외에 흉기로 무장한 무리는 모두 화적으로 봐도 무방하겠군.”
동궁의 논리에 이번에도 심환지가 나서서 반발하였다.
“비록 화적 무리가 흉기로 무장하였다 하나, 무기를 지닌 자 모두가 화적떼는 아니옵니다. 때로 양반가에서는 불온한 의도를 지닌 자들을 막기 위해 사사로이 호위무사를 고용하기도 하니. 단순히 흉기로만 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사옵니다.”
심환지의 논리 정연한 반박에 동궁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심 교리의 말이 옳소.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소? 관에서 허락한 자들에 한하여 무장을 허락하는 것이오.”
“그것 역시 부당하옵니다. 쇠붙이를 쓰는 무인 중엔 어느 한 곳에 소속된 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사옵니다. 그들 모두를 관에서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그렇다면 그들을 고용한 사람들이 관아에 자신의 이름과 신분, 그들을 고용한 연유를 올리면 되겠구려. 각자 집 안에 있는 무사와 병장기의 종류, 그리고 수를 세세히 등록하게 하시오.”
“그건…….”
갑자기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의 신료들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형운이 쐐기를 박았다.
“진실로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무사를 고용한 것이라면 굳이 등록을 거부할 이유가 없질 않소. 그러니 등록을 거부하는 자라면 틀림없이 뒤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신료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그럼 오늘은 이만 파하겠소.”
형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예상 밖의 일격에 어리둥절한 신료들을 남겨둔 채 형운은 존현각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심환지와 눈이 마주쳤다.
일순.
형운과 심환지.
좀 전까지 치열한 논쟁을 주고받던 두 앙숙의 입가에 은밀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
“어험.”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심환지는 연신 밭은기침을 뱉었다.
오늘 존현각에서 소리를 너무 질렀나.
따뜻한 물을 마셨으나, 목 안의 까슬한 통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연신 목을 어루만지고 있자니, 동창 밖에서 톡톡톡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군가?”
잔뜩 쉰 목소리로 물으며 심환지는 동창을 열었다.
이내 대답이 들려왔다.
“접니다.”
김기대.
왕의 팽례…… 아니, 동궁의 팽례였다.
심환지의 인상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또 왔는가?”
“저라고 오고 싶어서 왔겠습니까. 우선 받으시지요.”
기대는 심환지에게 형운의 서찰을 건넸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해도, 오늘은 조금 심한 것 같더군. 그래도 원하는 바는 이끌어냈으니. 애썼다. 아참, 그리고 아까 그대 곁에서 연신 통촉통촉하던 자, 누구인가? 그 얄미운 자의 이름 석 자를 알려주길 바라네.>
“또 살생부에 올라갈 사람이 늘었군. 그나저나 저하께서 보내신 서찰이 오늘만 다섯 번째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푹 한숨을 쉬며 기대가 말을 이었다.
“사헌부로 오셔서 절 구해주실 땐 감격하였지요. 이런 꿍꿍이가 있는 줄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없는 죄라도 자백하여 사헌부에 갇혀 있을 걸 그랬습니다.”
기대의 투덜거림에 심환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병상련은 이럴 때 쓰이는 말인 모양이다.
형운의 눈에 든 심환지와 김기대의 신세가 바로 그러했다.
“동궁께서 이리 사람을 부려 먹으실 줄은 나도 몰랐네. 나도 안 된 인생이지만, 자네도 퍽 안 됐군.”
답신을 쓰던 심환지가 불현듯 기대에게 물었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이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묻는 심환지에게 기대가 찬물을 끼얹었다.
“아무래도 한두 번은 더 뵐 것 같습니다. 아까 나오는 길에 슬쩍 보니, 뭔가 생각나신 듯 서신을 또 쓰시고 계셨습니다.”
“이런…….”
“하아…….”
두 사내의 한숨이 동시에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건 마치 사냥꾼이 놓은 덫에 걸린 기분일세.”
심환지의 말에 기대 역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두 부부께 된통 걸린 것 같습니다.”
심환지와 기대는 약조라도 한 듯 동시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라도 흩뿌릴 듯 하늘엔 먹장구름이 가득했다.
***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은 잘되어가는 모양이구나.
화의 물음에 이레는 미소를 지었다.
-작은 고개 하나는 넘은 듯합니다.
-앞으로도 잘 될 것이니. 너무 근심 마라.
-할아버지들께서 이리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고 계시니. 안 될 일이 무어가 있겠습니까.
이레의 글이 서탁의 나뭇결 사이로 스며들었다.
화와 예, 악의 자상한 대답이 앞다퉈 떠올랐다.
-아이야, 네 뒤에 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게야.
-서로 머리를 맞대어 의논하면 못 풀 문제가 없느니.
-당연하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천재라고 하더구나, 허허허.
서탁 위에 훈훈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상의 글씨가 불쑥 떠올랐다.
-천재 다 얼어 죽었는가 보군. 그보다 불손 그놈한테선 확답은 받아냈느냐?
-확답이라뇨?
-불손, 그놈이 다른 여인을 만나질 않았느냐. 유야무야 그냥 넘어간 건 아니지?
-그땐 무슨 사정이 있었나 봅니다.
-사정은 무슨 얼어 죽을 사정. 다음부턴 절대 그런 짓 하지 않겠노라 확답을 받아야지.
상의 말이 이어졌다.
-안 되겠다. 아이가 못 한다면 나라도 나설 수밖에.
어이없다는 듯 악의 비웃음이 뒤따랐다.
-나서긴 네놈이 어찌 나선다는 게냐?
-불손, 그놈한테서 각서라도 받아둬야지.
-각서든 각오든,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할 게 아니냐?
화가 답답한 듯 악의 의견에 한마디 보탰다.
그제야 현실을 인지한 상이 물었다.
-불손, 그놈. 요즘은 어째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이야?
-한동안 날이 흐립니다. 날이 흐린 날엔 그분과는 통하지 않나 봅니다.
이레의 변명에 상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날이 흐려서 그렇겠냐.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안 보이는 게지. 아이야, 사내놈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
-…….
-불손, 그놈한테 각서 한 장 받아라. 너는 내 사내다, 그러니 딴 여인에겐 눈도 돌리지 마라, 하는 각서…… 꼭 받아라. 알겠느냐?
-…….
-왜 대답을 못 해? 알겠노라, 대답해야지.
상이 답을 재촉했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이 시끄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그저 알겠노라,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상 할아버지가 확인할 길도 없으니.
그러나 어쩐지 할아버지께 거짓을 말하는 것 같아 싫었다.
그렇다고 진짜 형운에게 가서 그런 각서를 써 달라 하는 것도 썩 마음 내키지 않았다.
묵을 듬뿍 머금은 붓을 들고 이레는 고민에 빠졌다.
찰나.
“각서, 꼭 받으시오.”
누군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툭.
느닷없는 상황에 너무 놀란 나머지 이레는 들고 있던 붓을 서탁 위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먹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와 동시에 이레의 심장도 정신없이 날뛰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어깨너머로 서탁을 바라보던 형운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깊고 검은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이레를 사로잡았다.
올가미에 갇힌 초식동물처럼 그녀는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의 눈빛 속에 갇히고 말았다.
***
“언제 오셨습니까?”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이레는 서탁 위의 종이를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렸다.
“무엇에 정신이 팔려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나 궁금하였는데.”
형운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종이로 시선을 던졌다.
“스승님들을 뵙고 있었구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안부 여쭈었습니다.”
“보아하니 불손에 관한 험담이 있는 것 같던데.”
“그럴 리가요.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정말이오?”
“…….”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 이레가 커다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릴 때였다.
풋, 형운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거 아오?”
“무얼 말입니까?”
“빈궁, 거짓말할 때 꽤 귀엽소.”
“그럴 리가요.”
“그러니 다른 이들 앞에선 절대 거짓말은 하지 마시오. 그대의 지금 모습을 나 혼자만 알고 싶으니 말이오.”
담담히 말한 형운이 쓰윽, 이레의 코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그나저나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무엇이 궁금하시옵니까?”
“왜 묻지 않는 것이오?”
“무얼 말입니까?”
“그 손수건.”
“…….”
“손수건의 여인에 관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때 이후론 묻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오?”
“이미 답을 알려주신 것 아닙니까?”
“정확히 설명한 적은 없는 것 같소만.”
“제겐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나를 그만큼 믿는 것이오? 그게 아니라면…… 내게 관심이 없는 것이오?”
어쩐 일인지, 형운은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어찌 그러십니까? 믿는다고 하면 보통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기쁘오. 허나, 아쉬운 마음도 없잖아 있구려.”
“아쉬운 마음이라니요?”
“빈궁의 질투하는 표정,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니. 아쉬워 그렇소.”
“제가 언제 질투를 하였다고 그러십니까?”
“지난번, 존현각으로 나를 찾아와 손수건을 내밀었을 때, 이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쏘아보질 않았소?”
“저는 원래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평소보다 더 동그랬소.”
“아닙니다.”
“그랬소.”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말 아니오?”
“네, 아닙니다.”
“그리 부정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내가 잘못 본 모양이구려. 미안하게 되었소.”
형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빈궁의 마음을 잘못 헤아려 큰 착각으로 하였으니, 처소로 돌아가 옛 성현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반성하려 하오.”
성큼 처소의 문을 향해 걷는 형운의 발걸음을 이레가 붙잡았다.
“오늘은…….”
형운이 걸음을 세우고 이레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움찔거렸다.
그런 줄은 모른 채 새치름 시선을 아래로 내린 이레가 뒷말을 이었다.
“가지 마시지요.”
입안에서 웅얼대는 목소리에 형운이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무어라 하였소?”
“가지 마십시오.”
“다시 말해 보겠소?”
이레는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조금 더 머물다 가시라 말하였습니다.”
이레의 입에서 기어이 원하는 답이 흘러나왔다.
형운은 얼굴 가득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빈궁이 그리 원한다면, 내 그리하리다.”
털썩.
다시 이레의 곁자리에 앉는 그를 얼굴에 짓궂음이 가득했다.
곁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레가 형운에게 물었다.
“……제가 궁금해하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이레의 물음에 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앞에서만은 그리 감정을 훤히 드러내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소?”
“그러면서도 모른 척하셨단 말이군요?”
“모처럼의 기회를 그냥 넘기기 아까웠으니까.”
순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 형운의 눈에 이레의 굳은 표정이 들어왔다.
아차.
뒤늦게 제 실수를 알아챈 형운이 당황했다.
“마음…… 상했소?”
“저하라면 이 상황을 허허, 웃어넘기겠습니까?”
“나는 그저 질투하는 빈궁의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기분 좋았던지라. 조금만 더 본다는 게 그만…….”
전세가 금세 역전되었다.
좀 전까지 여유 넘치던 형운의 행동이 단박에 뒤바뀌었다.
“화났다면 용서하오.”
“말 한마디로 용서하기엔 그간의 제 마음이 억울합니다.”
“어찌하면 그 마음 풀리겠소?”
“글쎄요.”
이레는 돌아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형운이 문득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와 갈 곳이 있소.”
“이 밤에 어딜 간단 말이옵니까?”
대답 대신 형운은 담비 털로 속단을 댄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걸치고 따뜻한 조바위로 무장시킨 뒤 밖으로 향했다.
늦은 밤.
동궁과 빈궁의 외출에 전각의 궁인들이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형운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궁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아무도 뒤따르지 마라.”
“하오나…….”
최 내관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걱정 마라. 내 여인 하나 지킬 능력은 내게도 있으니.”
여유로운 웃음으로 최 내관을 안심시킨 형운이 이레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
이레와 형운은 후원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후원을 지키는 군사들은 동궁과 빈궁의 행차에 조용히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어두운 숲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평소 사도세자가 좋아하던 후원의 전각이었다.
능허정.
사방 조용한 밤이 정자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어릴 적엔 아바마마께서 어찌하여 이곳을 좋아했는지 알지 못했소.”
“…….”
“그런데 뒤늦게 알게 되었소. 이곳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궁이 훤히 보인다는 것을.”
형운은 누각의 높은 곳에 올라섰다.
제 곁에 이레를 나란히 세운 형운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곳에서 아바마마는 변화될 조선을 꿈꿨던 것이오.”
“그분이 그리우십니까?”
형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이 원망스럽소.”
예상 밖의 대답.
이레는 차분한 시선으로 형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분의 마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분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그분이 원망스럽소.”
“…….”
“또한, 후회하오.”
“무엇이 후회되십니까?”
“살아생전, 그분께 했던 모든 원망이 후회스럽소. 그래서 결심하였소.”
“무얼 말입니까?”
“다시는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형운은 이레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서 이젠 내 마음을 숨기지 않을 것이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형운의 입술이 이레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저하…….”
놀라고 당황한 이레의 탄식은 그대로 형운의 입안으로 봉인되었다.
그녀의 숨결이…….
그녀의 마음이…….
민낯을 드러낸 채 형운의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놀라 바스락대는 이레의 몸짓은 형운의 열망을 더더욱 부추겼다.
놓아줄 수 없다.
이 여인을 놓는 순간, 자신은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그러기에 형운은 더더욱 집요하게 이레를 옭아매었다.
그를 이 삭막한 삶에서 구원해 줄 유일한 동아줄.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마음이었다.
어쩌면 은근한 반발심의 발로였으리라.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있기에 그가 존재했다.
그녀가 숨을 쉬기에 그 역시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이레가 없는……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인생은 이제 그에겐 없었다.
그녀는 그의 전부였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할 수 있다면 그녀의 숨결 한 조각, 버둥대는 작은 몸짓조차도 자신의 몸 안에 가두고, 새겨두고 싶었다.
누군가 말했다.
연모의 다른 이름은 중독이며 열망이라고.
또한, 영원한 종속이라고.
그는 그녀를 열망하였다.
그녀에게 중독된 채 일평생 종속되길 염원하였다.
열렬한 소망이 담긴 형운의 입술이 이레의 입술을 더듬었다.
“이제 마음 풀렸소?”
짜릿한 미몽의 끝자락. 반쯤 잠긴 목소리로 형운이 물었다.
“어림없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이레가 말을 이었다.
“이리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사내의 습성이라지요.”
“그런 말은 또 누가 한 것이오?”
“상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상옹께선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것까지 알려주시는군.”
형운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그에게 이레가 속삭였다.
“그것만 알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레는 형운의 앞섶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레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기울어졌다.
“받은 만큼 갚아주라 하셨습니다.”
이내 여리고 보드라운 감촉.
아릿한 숨결.
천상의 과즙인 듯 달콤한 향내.
아득한 열기에 잠시 사그라졌던 형운의 염원이 점점 뜨거운 욕망으로 변해갔다.
하나를 갖게 되면 둘을 갖고 싶고, 그렇게 셋, 넷……마침내 모든 걸 갖길 원하듯.
이레를 향한 형운의 탐닉은 끝이 없었다.
온몸의 신경이 이레와의 입맞춤에 집중되었다.
뾰족하게 날을 세운 그의 분홍빛 불꽃이 이레의 이촉을 두드렸다.
그의 무람없는 공격에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맞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성문이 그의 간절한 열망에 결국 너그러이 승복을 선언했다.
자유를 얻은 그의 불꽃은 마음껏 그녀의 입안에서 활개 쳤다.
두드리고, 간질이고, 보듬고, 당기며 밀어내는 저릿한 촉감.
입안을 휘젓는 불꽃 끝으로 아득한 감각이 전해졌다.
정수리에서 시작된 전율이 그의 손끝과 발끝을 관통했다.
형운은 이레의 가녀린 허리를 한껏 끌어안았다.
사각거리는 비단의 감촉과 함께 온몸에 와 닿는 제 여인의 감촉.
와스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왼손은 그녀의 뒷덜미를 더욱더 강하게 자신에게로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몸은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아찔한 환의 세상에선 바람마저도 숨을 멈췄다.
그곳엔 그저 태고의 본능만이 존재했다.
서로를 어루만지고, 보듬는 뜨거운 몸짓.
너와 나의 경계마저도 흐릿해질 만큼 입맞춤의 시간은 길었다.
그렇게 길고 긴 입맞춤의 끝.
“이젠 화 풀렸소?”
“상 할아버지께서 다른 것도 알려주셨습니다.”
“다른 것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무어라?”
이레가 성큼 뒤로 물러섰다.
문득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맑게 웃는 모습이 얼핏 어린 소녀 같으면서도 또한,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품 안의 온기를 빼앗긴 형운이 아이처럼 이레에게 매달렸다.
“뭘 어찌할 건지, 살짝 귀띔해주면 아니 되오?”
형운의 은근한 물음에 이레의 단호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 됩니다.”
“어째서?”
“미리 알려주면 흥이 식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귓가에 이레의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천천히, 한 가지씩 전해드릴 겁니다.”
“이것도 상옹에게 배운 것이오?”
“이건 악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허어!”
형운은 눈꼬리를 매섭게 곤두세웠다.
“당분간 서탁 금지요!”
형운의 어리광에 이레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짤랑짤랑, 천상의 방울 소리 같은 웃음의 끝자락.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콧등으로, 그리고 서로를 끌어안은 어깨 위로 떨어지는 하얀 눈꽃이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