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부창부수 (中)
겨울이 깊어질수록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신시말(申時末).
다른 계절이었다면 여전히 환했을 시각이었건만.
어둠이 세상을 삼키고 있었다.
일찌감치 저녁장사를 마친 상인들이 하나둘 점포 문을 닫았다.
몇몇 불 켜진 점포에도 지키는 주인만 보일 뿐, 손님은 없었다.
심환지는 한산한 시전 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
입전, 수월에서 이레와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캄캄한 어둠 탓일까.
좀 전의 일조차도 아득한 꿈인 듯 느껴졌다.
아니, 비단 조금 전 이레와 나눴던 대화뿐만이 아니었다.
요 며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십학사.
여식의 실종.
그리고 이 나라 빈궁께서 십학사의 학사였다는 사실과 그녀의 권유로 자신 또한 십학사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은 삶의 방식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아니면 생시 같은 꿈을 꾼 것이려나?
깊은 생각에 빠진 심환지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안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향하던 그는 걸음을 멈췄다.
주인 없는 사랑채에 객이 등잔을 밝히고 있었다.
문풍지 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며 심환지는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어떤 자가 감히 주인 없는 방 안에 있는 것인가?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순간.
사랑채의 문이 안에서 벌컥 열리며 한 사내가 빙긋 미소를 보였다.
“이제 오는가?”
전혀 예상 밖의 손님인지라.
심환지의 얼굴에 그려진 주름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다.
***
“이 누추한 곳까진 어인 일이시옵니까?”
심환지는 상석에 자리하고 있던 사내, 형운을 향해 예를 올렸다.
좀 전에 빈궁을 뵈었거늘.
이번엔 동궁께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다 주상전하께서 찾아오시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노라니, 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와 의논할 일이 있다.”
“그런 것이라면 소신을 궁으로 부르시면 되시거늘…….”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 명분을 만들려는 자들이 궁에 가득한데. 그들에게 빌미를 주어 좋을 게 무언가.”
“하온데 무슨 일로……?”
묻는 심환지를 향해 형운이 상체를 숙였다.
“내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지금 조정의 신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문과 몸을 담은 당파의 이익을 위해 사사건건 내가 하는 일을 반대만 하고 있다.”
심환지가 고개를 들어 형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어찌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가?”
“동궁 저하께선 잠시 망각하신 듯하옵니다.”
“무얼?”
“소신, 저하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 그걸 어찌 잊을까.”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하시니…….”
“그만큼 내가 그대를 믿는 까닭이다.”
심환지를 바라보는 형운의 얼굴엔 깊은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심환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느닷없이 고백을 받은 사람처럼.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망극하옵니다, 저하.”
“나름의 신념으로 나를 반대하는 그대와 단지 제 사리사욕을 위해 무작정 반대만 일삼는 자들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
“비록 사사건건 내 의견에 반대하곤 있지만,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목표는 같으니. 그대가 나의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저하…….”
“이 나라를 위해 나와 함께하였으면 좋겠구나.”
“하오나 저하…….”
형운은 손을 들어 심환지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내 잘 알고 있다. 허나, 지금은 나라의 위기이니. 그대가 협조하라.”
“그렇다고 하여도…….”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는 심환지에게 형운의 나직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대의 여식.”
이내 심환지의 얼굴에 수심이 들어찼다.
“그 아이,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까? 내자(內子)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심환지의 걱정에 형운이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마라.”
“언제쯤 집으로 돌려보내실 작정이십니까?”
“그 아이의 안전이 확보되면 그땐 보내지 말라고 해도 보낼 것이다.”
“그때가 언제란 겁니까?”
“그들이 정말 그대를 믿고 안심할 때.”
형운의 말에 심환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여식을 납치한 자들이 십학사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그를 설득할 십학사의 치졸한 방안.
그의 생각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빗나갔다.
십학사는 분명 심환지의 여식을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더랬다.
그러나 그들에 앞서 그 아이를 데려간 이가 있었다.
형운이었다.
십학사들의 수작을 미리 예견한 그는 십학사가 보낸 괴한들보다 한발 앞서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뒤늦게 형운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심환지는 당장 아이를 만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겐 십학사의 감시자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진정한 십학사의 일원이 될 때까지 그 감시의 눈길은 언제까지고 심환지의 뒤를 쫓으리라.
그러기에 애끓는 아비의 마음은 묵묵히 삭일 수밖에 없었다.
행여 자신의 어설픈 행동으로 인해 여식을 다시 위험에 빠트릴 순 없었다.
그저 팽례가 전하는 아이의 서찰을 위안 삼을 수밖에.
그럼에도 매일, 매 순간, 아이가 그리웠다.
하얗게 웃는 얼굴 한 번 보면, 여한이 없을 듯하였다.
“한 번이라도 그 아이를 만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다 뒤라도 밟히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
“그리된다면 이번엔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다시 말하지만, 그대의 여식은 정말 잘 지내고 있다. 사실, 지나치게 잘 지내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어쩐 일인지 형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뭔가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듯.
***
“또, 졸고 계십니까?”
아직 어린 태를 벗지 못한 소녀의 목소리에 최치성은 화들짝 눈을 떴다.
마른세수로 잠을 쫓는 그의 코앞으로 까만 눈동자가 불쑥 다가왔다.
느닷없는 침공.
놀란 최치성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이내 소녀에게 붙잡혀 서탁 앞에 정자세로 앉아야 했다.
“아까 제가 내 준 문제는 다 푸신 겁니까?”
심환지의 금지옥엽, 희명의 또랑또랑한 물음에 최치성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자신으로 벌어진 사태라는 것을 알기에.
어디다 하소연도 못 했다.
처음 형운에게서 홍문관 교리 심환지의 여식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
아니, 십학사의 눈을 피해 완벽하게 소녀를 보호할 방법.
아무도 모르는 안가로 소녀를 데려와 살핀다는 묘안을 떠올렸을 땐, 어쩌면 자신이 천재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올 생각을 한 과거의 자신을 두고두고 원망했다.
심희명.
홍문관 교리, 심환지의 금지옥엽.
열 살짜리 반가의 여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전, 최치성은 꼼꼼하게 조사하고 그에 맞춰 완벽한 준비를 했다.
수월의 진짜 주인인 한서로가 마련해준 안가(安家)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했다.
곳곳에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종이꽃으로 치장하고, 희명이 지낼 방은 연분홍빛 나비장과 붉게 옻칠한 침상까지 들여놓았다.
보드라운 이부자리.
눈부시게 아름다운 병풍.
온종일 향긋한 내를 풍기는 향로.
어디 그뿐일까.
행여 무료할까 싶어 매일매일 가지고 놀 패물과 노리개를 준비했고, 남들은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사계노인의 치마와 저고리, 당혜까지…….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희명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은밀히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처음 이틀.
희명은 두려움으로 끼니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부터 그녀는 변했다.
경계심을 늦추고 조금씩 조금씩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더니 최치성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내린 후로는 거침없이 행동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희명은 최치성이 준비한 그 많은 것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정작 그녀가 관심 보인 건 방 한구석에 놓인 서책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숫자와 관련한 것들이다.
희명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수치화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최치성에게 문제를 내며 시간을 보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가 되고,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되며…….
그렇게 쉬운 문제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온종일 머리를 싸매고 있어도 풀지 못할 난이도의 문제로 발전했다.
“제곱해서 넓이가 225평방자일 때 한 변의 길이는 얼마일까요?”
“…….”
“여기 공 모양의 옥석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접한 정육면체의 옥을 뺀 껍질의 부피는 265근 15냥 5전. 껍질에서 가장 두꺼운 곳은 4치 5푼입니다. 옥석의 지름과 내접하는 정육면체의 한 모서리의 길이는 각각 얼마입니까?”
“…….”
희명이 문제를 낼 때마다 최치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련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는 것이었다.
“너는 왜 그런 것이 궁금한 것이냐?”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런 게 재미있어?”
“당연히 재미있지요.”
한껏 즐거운 표정을 짓는 희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최치성이 다시 질문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느냐?”
희명이 그런 건 왜 묻느냐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푹 한숨을 쉬며 최치성이 중얼거렸다.
“하긴, 아버지가 홍문관 교리이시니. 그분께서 알려주신 것이겠구나. 그런데 어쩌자고 여인에게 이런 걸…….”
“아버지가 아닙니다.”
“응, 아버지가 아니구…….”
희명의 말을 되새김질하던 최치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께 배운 것이 아니면. 설마 이걸 혼자 서책을 보고 독학했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제 스승은…….”
비밀이야기라는 듯 희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제 스승은…… 바로 우리 어머니셔요.”
“아, 어머니…….”
최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놀란 표정으로 희명을 응시했다.
희명이 풀썩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께선 이런 거 아는 척 절대 해선 안 된다고 하셨어요. 글도 모른 척해야 한다고. 여인이 너무 많이 아는 건 흉거리가 되니. 남들 앞에선 알아도 모르는 척하라고 당부, 또 당부하셨어요.”
“…….”
“그래서…… 전 여기가 정말 좋아요.”
“여기가 좋아?”
“여기선 이런 문제, 마음껏 풀어도 아무도 흉보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아저씨랑 계속 지내고 싶습니다.”
“휴우…….”
최치성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듯.
희명은 즐거운 마음으로 최치성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아저씨 수준을 고려해서 낸 문제입니다. 반 시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이 문제를 푸셔야 합니다.”
최치성의 입에서 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달리 희명에게선 작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
“잘 있다니 다행입니다.”
심환지는 여식이 안전하다는 형운의 말을 믿고 안심했다.
적어도 동궁이 없는 말을 꾸며낼 사람은 아니다 판단하였던 까닭이다.
“그나저나 빈궁마마의 일이 걱정이옵니다.”
심환지의 음성이 돌연 무거워졌다.
“백척간두(百尺竿頭)라는 말이 있지요.”
높은 장대 위에 불안하게 선 모습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버거운 운명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게서 전해지는 운명은 심환지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한 여인.
형운도 잘 아는…….
아니, 세상에서 그와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어느 여인의 운명이었다.
“내명부와 십학사를 오가는 빈궁마마의 상황은 실로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안다.
알고 있다.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그녀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막아야 합니다. 그만두게 하여야 합니다.”
당연히, 마땅히 그리하여야지.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다.
오히려 지금 말렸다간 그녀의 상황을 더 위태롭게 만들기만 할 뿐이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고집스럽고 집요한 사람이니.
한번 시작한 일은 기어코 끝을 보려 할 것이다.
“……과연 은자답구나.”
은자원의 은자들은 모두 그러했다.
성격, 성별, 취향.
모두 제각각이지만, 한번 시작한 일은 기필코 끝장을 보려 하는 집요함만은 한결같았다.
이레도 은자원의 은자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은자원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저하.”
심환지의 부름에 형운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말릴 수는 없을 걸세.”
심환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빈궁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형운의 말이 이해되었다.
십학사가 되어달라 말하던 빈궁의 눈.
간절함이 가득했던 그 눈빛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녀의 눈엔 신념과 지혜가 가득하였다.
그것은 먼 앞날을 내다보는 선지자의 눈빛이었다.
‘아직 어린 빈궁께서 어찌 그런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일까?’
단순히 배워서 아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그녀의 눈에는 오랜 세월, 지난한 풍파를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연륜이 녹아있었다.
심환지가 물었다.
“그럼, 어찌하여야 할까요?”
“말릴 수 없다면 차라리 그녀의 목표를 서둘러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지.”
형운은 서탁 위에 두루마리를 펼쳤다.
“우선 이곳부터 거머쥘 생각일세.”
두루마리에 그려진 것은 도성 안팎의 지도였다.
특히, 성안의 내부 구조와 각 조직의 위치, 그리고 소속된 자들의 이름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심환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지금의 조정은 노론의 장기간 득세로 위에서 아래까지 크고 작은 권력 모두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상태.
개혁을 위한 형운의 작은 움직임에도 권력을 가진 모두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저지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저는 노론의 사람입니다. 저하의 뜻을 무작정 받아들일 수는 없사옵니다.”
답답한 이야기였건만.
형운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있었다.
“답답하군. 누가 대놓고 찬성하라 하였느냐.”
“하오면…….”
“심 교리, 억지를 부리는 아이를 어찌 설득하는지 아느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