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71화 (171/215)

#171. 부창부수 (上)

여문 살굿빛 노을이 입전 ‘수월’의 내실 문풍지를 물들였다.

내실의 한쪽 벽은 귀한 비단과 화려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공방 거리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비단을 취급하는 입전은 시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공방이 즐비한 골목 끝에 이리 화려한 입전이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여인이라면 별천지라며 놀라고 감탄하였을 수월의 면모.

하지만 심환지는 무심하였다.

아니, 오히려 탐탁지 않은 눈빛이다.

평소 검소함을 가까이하고 사치를 멀리하던 까닭이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이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 물정일랑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고아하고 유순한 빈궁마마라 믿어 의심치 않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심환지와 마주 앉은 그녀는 평소 그가 알던 빈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담하고 당찬 표정.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빛.

기세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건만.

심환지는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팽례를 통해 이레가 보낸 소식을 접하였을 때만 하여도 설마 이런 장소에서 이런 모습의 빈궁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평소 접하지 못한 것들이라, 불편하기보단 어색하단 말이 어울리겠군요.”

이레는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환지는 차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소신을 만나자 한 용무가 무엇인지요?”

“십학사와 관련한 대화가 필요할 듯하여 심 교리를 이곳으로 청하였습니다.”

이레의 말에 심환지는 귀가 솔깃해졌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궁금하던 차였다.

십학사는 대체 무얼 하는 자들일까.

뜬소문으로는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의 모임이라 하였다.

그들의 힘과 능력은 실로 대단하여 심지어 정치의 향방마저 가를 지경이라는 믿지 못할 소문이 횡행했다.

또 어떤 이는 왕마저도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황당한 말을 늘어놓을 지경이었다.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헛소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실체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완전 뜬소문이라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십학사, 그들은 열 명의 학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 조직을 만들고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진 모릅니다.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며, 그 영향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다는 겁니까?”

“조정의 신료 중 십학사와 직접, 또는 간접적인 연관을 가진 자가 적어도 3할은 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심환지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3할이나!”

조정의 신료 세 사람 중의 한 명이 십학사란 조직의 하수인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들 중 십학사의 실체를 아는 자의 수는 극소수이겠지요.”

“믿을 수 없군요.”

“저도 처음엔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조정뿐만이 아니라 조선 팔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관아의 사또가 십학사와 관련이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행상인이 십학사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의 훈장이 십학사의 학사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과 돈이 있는 곳.

길이 존재하고 소문이 미치는 장소라면 어디에도 십학사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놀람과 경악으로 심환지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성난 분노가 그의 심장을 가득 채웠다.

“대체 놈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완벽한 권력.”

“……!”

심환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레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왕조차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생각하고 있지요.”

“그런 무엄한 자들을 보았나. 감히…… 감히……!”

찻잔을 쥔 심환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이레를 응시했다.

“마마께선 어찌하실 겁니까? 십학사, 이 무도한 자들에 맞서 무얼 계획하고 계십니까?”

심환지는 이레가 십학사의 일원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십학사의 목표는 같지 않았다.

오히려 빈궁은 십학사를 막기 위해, 그들의 탐욕을 잘라내려 목숨을 걸고 십학사가 되었다.

“십학사를 가지려 합니다.”

심환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이분께선…….

이레의 말이 이어졌다.

“십학사는 조선 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들의 야망을 꺾는다 해도 일시적인 일일 뿐.”

“그래서 차라리 십학사를 차지하겠다 마음먹으신 것입니까? 발본색원하여 깨끗하게 제거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근원적인 부분부터 바꾸려는 겁니까?”

이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현명한 사람이다.

“그럴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마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십학사의 영향력이 그리 막대하다면. 저들의 막강한 힘에 짓눌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빈궁께서 십학사의 일원으로 무사히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어쩌면…… 어쩌면 그들은 이미 빈궁마마의 정체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알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이레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제가 저희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겁니다.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자신들인 것을요.”

이레의 확신 어린 말에 심환지는 탄성을 삼켰다.

그녀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냥 허황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인임에도 그 누구보다도 크고 웅대한 뜻을 품은 사람.

이레의 넓고 깊은 포부에 심환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뜻이 이루어지길 염원하게 되었다.

또한, 그 확고한 믿음을 따르고 싶어졌다.

심환지가 이레에게 물었다.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이레가 대답했다.

“우선…… 완벽한 구름이 되십시오.”

***

“하하하.”

늦은 밤.

은밀하디 은밀한 십학사의 회합 자리에 난데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십학사의 모임에 나타난 이가 터트린 웃음이었다.

그보다 앞서 자리를 차지고 하고 앉은 해와 사슴, 학과 물, 거북과 바위(巖)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사내는 구름문양이 수자 놓인 면사를 쓰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오. 처음인지라 장소를 찾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소.”

대뜸 사과한 그는 구름이 조각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마치 제자리인 것처럼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해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필 구름의 자리는 해의 맞은 편인지라.

면사 위로 드러난 해의 눈빛이 또렷하게 보였다.

해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심환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갑소이다. 이번에 새로 구름이 된 사람이오. 지난번에 보았으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테고. 그나저나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소? 뭐가 어찌 돌아가는 사정인지 알아야, 나도 한마디 거들 것이 아니오.”

넉살 좋은 구름의 태도에 자리에 모인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아! 그러고 보니 십학사가 되기 위해 나름의 시험을 치러야 한다 들었소. 난 어떤 시험을 치르면 되는 것이오?”

적극적이고 당당한 그의 태도에 해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유?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유.”

거북의 말이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심환지는 팔짱을 낀 채 다른 학사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이레에게 눈길을 멈췄다.

‘이리하면 되는 것입니까?’

심환지가 눈으로 물었다.

새치름하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있던 이레가 잠시 잠깐 고개를 들었다.

검은 너울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습니다.’

***

십학사의 회합이 있고 며칠 후.

수월의 내실로 심환지가 찾아왔다.

내실의 탁자엔 따뜻한 찻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홀로 차를 음미하고 있노라니, 이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뒤를 쫓는 자들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이레의 물음에 심환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생을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였던 사람인지라. 몰래라고 하지만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감시당한다 생각하니. 여간 거북한 게 아닙니다.”

수월까지 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십학사에서 보낸 감시자들이 몰래 심환지의 뒤를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공방거리의 복잡한 뒷골목과 장인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결코 그들을 따돌릴 수 없었으리라.

“십학사는 단 한 톨의 의심조차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지치지 않고 심 교리를 시험하고 또 시험할 겁니다.”

“심려 놓으십시오. 인내심으로 말하자면, 그들보다 제가 한 수 위일 겁니다. 시험 또한 제가 잘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딱히 내세울 법한 비법은 없습니다. 그저 유난히 시험운이 좋은 편이지요.”

심환지는 유쾌한 농을 흘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레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미소를 지운 이레가 입을 열었다.

“이제 다음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음 일이라면……?”

“십학사에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있습니다.”

“지난 회합에서 보니 대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영지의 자리가 비어있더군요.”

“잘 보셨습니다. 곧 다른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겁니다.”

심환지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빈궁마마께선 그 빈자리에 우리 사람을 넣으실 계획이시고요.”

“그렇습니다.”

“잘만 되면 열 명의 학사 중 저와 빈궁마마를 포함하여 적어도 다섯은 우리 사람으로 채워지겠군요.”

“빈자리 모두를 우리 쪽 사람으로 채우기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노력해야겠지요.”

“결국은 자리싸움이라는 소린데……. ‘해’가 어떤 자들을 원하는지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일을 좀 더 수월하게 처리할 수도 있을 텐데요.”

열 명의 학사들로 이뤄진 십학사.

모든 사안의 결정은 열 명의 학사들의 찬반에 따라 결정되곤 하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

실제로는 ‘해’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걸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이레가 서책 하나를 건넸다.

심환지는 무심결에 서책을 펼쳐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해가 탐낼 만한 인재들의 명단입니다.”

“이런…….”

놀란 심환지는 서둘러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서책엔 사람의 이름과 신상 명세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대략 스무 명의 명단이 적힌 명부(名簿).

“지금부터 심 교리께선 이들의 마음을 돌리셔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제게 있는 자금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건 진심입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심 교리를 믿고 따르게 하셔야 합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하셔야 합니다. 아니, 하실 수 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이레의 신뢰에 심환지의 어깨가 묵직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듯 그가 물었다.

“그런데 빈궁마마, 하나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물어보십시오.”

심환지는 이레가 건넨 서책을 내밀었다.

“이런 자료는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이레의 눈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다 아는 수가 있답니다.”

그녀는 전향사 소속의 허름한 전각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현판조차 없는 은자원.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낡은 전각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가 전해졌다.

그 어떤 거름망도 거치지 않은 생 날것의 소식.

그러기에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명확한 자료들.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그 자료들은 누가 그곳에 갖다 놓는 것일까?

***

길의 좌우에 육조의 관아가 자리하고 있는 육조거리.

퇴청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각 관청에서 관복 차림의 관인들이 쏟아져나왔다.

힘든 일과가 끝나는 시각인지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가마에 오르는 당상관과 상관의 눈치를 살피며 종종걸음치는 하급 관원의 모습이 거리를 메웠다.

조용하던 거리가 한동안 왁자하였다.

그러나 번잡한 공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거리로 차가운 바람이 내려앉았다.

관청 앞을 지키던 군사들은 시린 기운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특히나 사헌부를 지키는 군졸들은 원망 가득 한 시선으로 불 켜진 관아를 돌아보았다.

오늘 번을 서는 이가 다름 아닌 감찰방 방주 허상익인 까닭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렇게 바람 시린 날에 번을 설 때면, 다른 상관들은 숙직실로 불러 술이나 한잔 하자거나,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건네곤 하였건만.

깐깐한 허상익은 그런 선심을 베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심은커녕, 행여 허튼짓이라도 하다 걸리는 날엔 그야말로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에잇, 재수 옴 붙어도 제대로 붙었네, 퉤.”

가래침을 끌어모아 바닥에 뱉은 군졸은 옷깃을 여몄다.

오늘 밤은 영락없이 이곳에서 꼼짝 못 하겠구나.

투덜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만의 원인인 허상익은 사헌부의 서고를 살피며 연신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지난 열흘간, 사헌부로 올라온 각종 자료와 문서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이 문서는 분명 지난번에 없었던 것이고. 이 서책 역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사흘 전 안성에서 올라온 문서는 어디로 간 것인가?”

생각에 잠겼던 허상익은 사헌부 서고의 출납부를 확인했다.

출납부에는 서고를 드나든 사람의 이름과 일시, 시간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열흘 전의 기록부터 살피기 위해 출납부를 살피는 찰나.

“예서 무얼 하는가?”

날 선 음성과 함께 허상익의 등 뒤로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입가에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권문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쓱쓱 닦으며 권문은 허상익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허상익이 살피던 출납부와 그 주변에 놓인 문서들을 차례로 보았다.

“자네, 설마…….”

권문이 허상익을 향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윽고 못마땅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도 내부문서 유출이니, 뭐니 하는 그 일을 수사하는 건가?”

“이걸 좀 보십시오.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여기 보이는 이 표식, 보이십니까?”

허상익은 돌돌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권문의 눈앞에 가져갔다.

“이게 뭔가?”

두루마리 한 귀퉁이에 작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허상익이 동그라미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권문에게 일일이 보여주었다.

“열흘 전부터 사헌부로 들어온 문서에 제가 그려 넣은 표식입니다.”

“별짓을 다 했군.”

권문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허상익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문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여기, 그 표식이 없는 문서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자네가 못 본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문서를 관리하는 관원에게 사헌부로 들어온 건 작은 쪽지 하나조차도 제 손을 거쳐 들이라 당부하였습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들한테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시키는가?”

“이상하니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걸 보십시오. 표식 없는 문서가 갑자기 나타난 겁니다. 게다가 제가 여기 뒀던 자료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

“이건 분명…….”

“그만!”

권문이 버럭 소리를 질러 허상익의 말끝을 잘랐다.

그는 불길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허상익을 노려보았다.

“분명 경고하지 않았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텐가?”

“하지만…….”

“닥치게.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그 알량한 방주 자리라도 지키고 싶으면 얌전히 물러가게. 다시 말하지만, 그 자료를 관리하는 사람, 다름 아닌 나일세.”

권문이 허상익의 어깨를 툭툭 손등으로 쳤다.

“내가 하는 일에 실수란 절대 없어. 내 자리가 걸린 일인데, 내가 그리 호락호락 일을 처리하겠는가.”

“…….”

“어찌 대답하지 않는 겐가? 자넨, 내가 만만한가 보군.”

“아닙니다.”

“한 번만 더 이런 모습 보는 날엔, 나도 더는 참지 않을 것이야. 상부에 보고를 올려 절차대로 일을 처리할 거란 말이야.”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권문은 쾅, 서고의 책장을 발로 걷어찼다.

“사헌부의 기강이 이리 물렁물렁해서야, 원. 한낱 방주 따위가 사헌부의 문서를 자기 손을 거쳐 드나들게 해? 이것들이 내가 가만히 있으니 정말 허깨비로 보이는가.”

저 들으라는 듯한 권문의 혼잣말에 허상익은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다시는 이런 짓 말게.”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는 허상익의 발치로 권문이 무언가를 툭 던졌다.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말고…….”

권문은 바닥에 떨어진 비단 주머니를 턱짓했다.

“수하들하고 술이나 한잔하던가.”

“되었습니다.”

“거참, 사람, 융통성 없긴. 감찰들이 자넬 뭐라고 하는 줄 아나?”

“…….”

“허상익이 아니라 허창호라고 한다네, 허창호. 사방 꽉 막힌 벽창호란 뜻이더군.”

“…….”

“쯧쯧, 오죽했으면 그럴까.”

“그렇군요.”

“그러니 이참에 수하들 마음도 달래주고, 오해가 있으면 풀고.”

권문은 바닥의 돈주머니를 집어 허상익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나 허상익은 이번에도 단호히 거절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문은 혀를 찼다.

“제대로 사회생활하긴 글렀군.”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며 권문은 허상익이 살피던 자료로 슬쩍 눈길을 돌렸다.

이윽고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어떤 자료를 보내야 하나…….”

두루마리를 살피는 권문의 눈가에 의미심장한 이채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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