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70화 (170/215)

#170. 귀 밝고 겁 많은 사슴

까마귀 가악가악 울더니,

옆집 아이가 죽었단다.

보송보송 하얀 발

아장아장 어린 걸음

고운 꽃신 신겨 걸리려 하였더니,

꽃상여 타고 떠나 버렸단다.

아침부터 까마귀 가악가악 울어 대니,

어미는 참말 무섭단다.

아가, 나비잠 들지 마라.

아가, 사나운 갈까마귀 울음 듣지 마라.

아가, 어미 곁 떠나지 마라.

*

떼 지어 몰려온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덩굴처럼 기루 담벼락을 타고 올랐다.

기루의 이 층 누각.

사슴은 연꽃 문양이 조각된 누각 난관에 팔을 괴곤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싸리비처럼 골목을 쓸었다.

무채색의 계절.

홍등가의 아침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오색 찬연한 빛으로 취객을 유혹하던 등잔은 낡고 바랜 민낯을 드러낸 채 바람에 나풀거렸다.

달콤한 속삭임과 웃음을 흘리던 기녀의 분내 역시 은밀히 빚은 밀주(密酒)와 뒤엉켜 음습한 방 안에 갇혀 있었다.

저들이 깨어나 다시 분첩 두드리고 불빛을 밝히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기에 서러운 곡조일망정, 구걸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녹아는 반가웠다.

그녀는 까만 눈동자를 반들거리는 어린것들을 보며 자신의 어린 날을 떠올렸다.

바래고 바래 이제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어떤 날의 기억…….

노란 민들레.

하얗게 부서지던 봄볕.

발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비단 자락 소리.

아침 빛살과 함께 동창으로 불쑥 들어오던 하얀 손.

그 무람없는 손이 놓고 간 한 알의 청귤.

잠결에도 새초롬 군침을 돌게 하던 그 향기에 소녀는 미소 지었다.

무심히 선물을 던지고 간 마음을 아는 까닭이다.

이불 속, 어린 소녀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소년의 뺨에도 자신의 것과 같은 홍조가 깃들어 있으리라.

봄볕 탓이려나.

소년이 열어 놓은 동창 너머의 바람 탓일까.

간질간질, 심장이 그네를 뛰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입술을 말아 문 소녀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린다.

진달래 꽃잎 수놓인 이부자리로 봄 햇살이 파고들었다.

그 봄날.

새콤한 바람이 불던 그 아침.

유난히 햇살이 붉었고, 소녀와 소년의 얼굴은 그보다 더 붉었더랬다.

“보송보송 하얀 발, 아장아장 어린 걸음, 고운 꽃신…… 꽃상여…….”

사슴은 시린 아침볕을 어루만지며 아이들의 노랫말을 따라 불렀다.

찻잔에서 피어오른 뽀얀 김이 찬 바람과 어우러지며 유백색 긴 꼬리를 흘렸다.

오늘처럼 이 층 누각에 앉아 갓 우려낸 차를 마시는 일은 사슴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즐기는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유희는 곧이어 들려온 요란한 발소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누구신가 하였더니.”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후겸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새벽부터 납시었습니까?”

곱게 눈을 흘긴 사슴은 다시 붉은 입술을 찻잔에 담았다.

정후겸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무거운 분노가 그득한 발걸음.

그답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사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정후겸은 그녀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또 너였느냐?”

그의 성난 눈빛이 맹수의 울부짖음처럼 사슴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자의 정보, 네가 흘린 것이냐?”

사슴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되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자는 누구이고, 정보는 또 무어란 말입니까?”

“모르는 척 시치미 떼지 마라.”

“소녀는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사헌부가 김기대를 잡아갔다.”

“김기대라면 새로운 구름과 관련한 계획을 망친 작자가 아닙니까? 그가 어찌 되었단 말입니까?”

“사헌부에서 살인과 교리 심환지의 여식을 유괴한 범행의 유력한 용의자로 그를 추포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가 정보를 흘린 것이 아니라면, 사헌부가 어찌 김기대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단 말이냐?”

정후겸이 김기대를 아는 것은 지금 벌어진 모든 일의 배후가 자신이었던 까닭이다.

심환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의 여식을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수하들에게 범행을 실행하라 명하였다.

예정대로라면 심환지의 딸은 진즉 정후겸의 손에 들어왔어야 했다.

그러나 심환지의 사가로 보낸 수하들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느낀 거북이 직접 나섰고, 그곳에서 김기대에게 잡힌 수하들을 발견하였다.

범인의 정체를 확인한 거북은 입막음을 위해 수하들을 깨끗하게 처리하였다.

“이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은 나와 거북, 그리고 너뿐이다.”

“그래서 저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박진봉, 그 미련하고 잔인한 작자를 소녀보다 더 신임하시는 것이어요?”

정후겸은 하얗게 질린 사슴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너…… 대체 누구의 사람이냐?”

“전 십학사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사슴의 대답에도 정후겸의 사나운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

“괜찮으시다면 이 목을 좀 풀어 주시겠습니까……? 이러다 정말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습니다.”

정후겸은 사슴의 목을 풀어 주었다.

“콜록, 콜록.”

풀려난 사슴은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밭은기침을 뱉었다.

정후겸은 그런 그녀를 잠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경고다.”

“…….”

“네 본분을 잊지 마라.”

돌아서는 그의 등에 사슴의 물음이 따라붙었다.

“제 본분이 무엇인지요?”

“귀 밝고 겁 많은 사슴.”

정후겸은 그녀를 돌아보며 무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이 네가 지켜야 할 본분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정후겸은 이 층 누각을 내려갔다.

“귀는 밝으나 겁 많은 사슴이라…….”

혼자가 된 사슴은 정후겸이 남긴 말을 되새겼다.

“그렇지요. 소녀는 귀만 밝은 겁 많은 사슴에 불과하지요. 언제나 남의 말을 훔쳐 듣고 전하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죽기 전까진 도망만 다녀야 하는, 그런 불쌍한 신세였지요.”

사슴은 정후겸의 기세에 치여 바닥에 나동그라진 찻잔을 집어 들었다.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어느새 차갑게 식어 버린 차가 찻잔에 가득 담겼다.

* * *

“워쩐대유?”

이 층 누각의 계단 끝에 다다를 때였다.

거북의 느릿한 목소리가 정후겸을 맞이했다.

“사슴은 모른다 하네유. 그럼, 누가 흘렸을까유?”

정후겸은 단호히 대답했다.

“거짓이다.”

그는 확신했다.

김기대의 존재를 알린 사람, 사슴이 확실하다.

이유도 짐작되었다.

‘그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겠지.’

그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 속에 파묻혀 살던 소심한 눈빛의 작은 소년.

서책과 법도밖에 모르던 소년이 어느새 훌쩍 자라 대장부가 되었다.

“뭔가 복잡하게 얘기가 돌아가고 있네유. 그나저나 워쩐대유? 사헌부에 잡힌 작자를 처리하려던 애들도 여즉 돌아오지 않네유. 암만해도 또 당한 것 같쥬?”

어리숙한 표정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거북이 정후겸을 향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봐유. 내가 뭐랬슈. 그놈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고 했잖아유.”

거북은 김기대와의 악연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그가 죽이지 못한 유일한 인물.

그러기에 더더욱 손이 근질거리는 듯했다.

정후겸은 고개를 저었다.

거북은 기대를 죽이길 원했다.

그러나 정후겸이 원하는 건 살아 있는 김기대였다.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캐물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해졌다.

지난밤에 보낸 자들로 인해 사헌부는 잔뜩 몸을 도사릴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포기한다.”

“그럼, 구름은 워쩌구유?”

“아쉽지만 새로운 인물을 물색할 수밖에.”

“심 머시기란 양반은 워찌 되는 거래유?”

“십학사도 아닌 자가 십학사에 관해 알게 되면 어찌해야 할까?”

정후겸의 물음에 박진봉이 눈빛을 번들거렸다.

“처리하면 되는 거쥬?”

십학사에서 말하는 ‘처리’의 의미.

그건 죽음을 뜻했다.

“모처럼 듣기 좋은 말이네유.”

박진봉의 얼굴에 순박한 웃음이 걸렸다.

그러나 그의 두 눈.

살모사의 그것을 닮은 눈동자엔 푸른 살기가 그득 담겼다.

“그 양반, 지금 워디서 뭘 하고 있대유?”

잔뜩 들뜬 박진봉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낫을 내려다볼 때였다.

“날 찾는 겐가?”

놀랍게도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후겸과 박진봉이 있는 누각으로 강퍅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홍문관 교리, 심환지였다.

“이곳에 있었군.”

전혀 뜻밖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정후겸과 박진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들이 십학사인 모양이군.”

심환지는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 사람을 쓸어 보았다.

“어깨가 굽고 낫을 가진 걸 보니, 그쪽은 거북인 것 같고…….”

박진봉을 향했던 심환지의 시선이 정후겸에게 머물렀다.

나른한 눈빛.

분명 해의 자리에 앉은 사내의 눈빛이 그러했다.

심환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옹주의 양자가 십학사라는 집단의 수장이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심환지는 잠깐 본 것만으로도 상대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정후겸의 눈썹이 꿈틀 휘어졌다.

“심 교리가 아니시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소. 그보다 십학사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허허, 그리 발뺌할 필요 없네. 이미 다 알고 왔으니.”

심환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 담겨 있는 건 상대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움이었다.

정후겸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표정이 사라졌다.

“……이곳은 어떻게 알고 왔소?”

“사람 우습게 보지 마시게. 이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 그러니 그대들도 날 끌어들이려 한 게 아닌가?”

“…….”

“그렇게 날 세울 필요도 없으이. 오늘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럼, 귀한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용무로 오신 것이오?”

“십학사.”

심환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구름이 되고 싶어 왔네.”

“……!”

천만뜻밖의 말에 정후겸과 박진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 * *

그렇게도 완고했던 사람이 한순간 십학사가 되겠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정후겸은 도통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심환지를 바라보았다.

상관없다는 듯 말을 마친 심환지는 미련 없이 기루를 떠났다.

을씨년스러운 홍등가를 벗어나자 이내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전 거리가 나타났다.

시전을 가로질러 대광통교를 지난 그는 좁은 공방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골목 끝자락.

항아리 공방의 장한들이 커다란 항아리를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골목을 막은 항아리를 가리키며 심환지가 말했다.

“이보시게. 사람 좀 지나가게 해 주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장한들이 항아리를 옆으로 치워 길을 터 주었다.

“고생들 많네.”

“살펴 가십시오.”

심환지는 장한들이 만들어 준 좁은 통로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장한들은 다시 항아리로 길을 막았다.

잠시 후, 음침한 눈빛의 사내들이 골목에 나타났다.

정후겸의 명을 받고 몰래 심환지의 뒤를 밟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산처럼 쌓인 항아리를 보고 당황했다.

“이봐, 항아리를 여기다 쌓아 놓으면 사람이 지나갈 수 없잖아! 빨리 치워.”

“미안하게 됐수다. 곧 치워 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금세 치워 준다는 말과 달리 장한들의 행동은 한없이 굼떴다.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길을 막은 항아리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제기랄! 이러다 놓치겠다. 다른 길을 찾아라.”

사내들은 다른 길을 찾아 흩어졌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사내들을 보며 장한들은 씩 웃음을 주고받았다.

같은 시각.

공방 장인들의 도움으로 감시자를 떼어 낸 심환지는 인근의 주막으로 들어섰다.

정오라.

허기진 배를 채우러 온 손님으로 주막 안마당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심환지는 익숙한 걸음으로 안마당을 지나 주막의 뒷방으로 향했다.

“험험.”

헛기침을 흘린 그는 방문을 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제법 커다란 방 안쪽엔 검은 너울을 쓴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환지는 안으로 들어가 여인의 앞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다녀왔습니다…….”

그의 말끝에 예상 밖의 호칭이 따라붙었다.

“……빈궁마마.”

“어서 오십시오.”

그의 인사를 받은 이레가 물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늘 굳어 있던 심환지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잘 처리된 것 같습니다.”

“혹여 봉변을 당하진 않았습니까?”

“그들도 명분을 중시하는 모양이니. 지금 당장은 이상하게 생각해도 대놓고 해코지는 못 할 겁니다.”

“많이 당황했겠군요.”

심환지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절대 협력하지 못하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 손을 잡겠다 하니.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놀란 그들의 표정이 꼭…….”

심환지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눈으로 이레를 보았다.

“오늘 아침 빈궁마마를 뵌 제 표정 같더군요.”

*

이른 새벽.

심환지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화려한 복색에 검은 너울로 얼굴을 숨긴 여인.

만사여의로 변복한 이레였다.

“그대는…….”

이레를 본 심환지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거졌다.

“십학사인지 뭔지 하는 오만무도한 집단의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은 절 만사여의라 부릅니다.”

“만사여의?”

“만사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 하여 만사여의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이나 말하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의논?”

심환지는 코웃음을 쳤다.

“의논을 빙자한 협박이겠지.”

이레를 보는 그의 시선엔 불쾌함이 가득했다.

십학사 모임에 끌려간 이후, 여식이 실종되었다.

십학사를 보는 그의 눈길이 고울 리 없었다.

“돌아가라. 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자와는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으니.”

단호한 축객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레는 물러가는 대신, 머리에 쓰고 있던 너울을 벗었다.

이내 그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그대는…….”

심환지의 눈동자에 경악이 들어찼다.

“빈궁마마……?”

“앉으시지요.”

“빈궁마마께서 도적 무리와 한통속일 줄은 몰랐습니다.”

“한통속이 아닙니다.”

“그럼, 어이하여 십학사란 도적 무리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는 비감(悲感)마저 서려 있었다.

“벗은 가까운 곳에 두고, 적은 더 가까운 곳에 두라 하지 않습니까.”

“…….”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이레의 말을 곱씹던 심환지가 다시 물었다.

“오늘 절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나라를 위해…….”

이레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십학사가 되어 주십시오.”

*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는 듯 심환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결국 응해 주었지 않습니까?”

“이 나라를 위한다는 빈궁마마의 말씀에서 진심이 느껴졌으니까요.”

“진심으로 한 이야기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그리고 심환지 자신을 위해서도.

그는 십학사가 되어야 한다.

“저로 인해 엉뚱한 소란에 휘말리게 되었군요.”

“처음부터 저를 끌어들인 자는 빈궁마마가 아닌 저들이니, 어찌 이 소란이 빈궁마마 탓이겠습니까. 오히려 빈궁마마 덕분에 무료한 일상에 작은 흥밋거리를 얻었습니다.”

“저들은 치밀하고 잔인한 자들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심 교리께서도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빈궁마마께서도 목숨을 걸고 계시니, 이 정도의 번거로움은 감내해야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그 말은 오히려 제가 올릴 말씀인 듯합니다. 이리 마음 써 주시어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환지는 주막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복색.

얼굴을 가린 검은 너울.

지금의 그녀는 시전의 여장부, 만사여의였다.

궁으로 돌아가면 지고한 빈궁의 모습이 되실 터.

저분에겐 몇 개의 얼굴이 있는 걸까.

어떤 사연으로 저리 다른 삶을 살게 되신 걸까.

이레의 작은 어깨에 매달린 인생의 무게.

그 묵직한 삶의 질곡을 심환지는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여인이지 않으냐?”

언제부터였을까?

등 뒤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심환지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흑립에 검푸른 도포 차림의 형운이었다.

심환지는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이젠 놀라지도 않는군.”

“아침저녁으로 불쑥불쑥 찾아오시는 분을 보고 매번 놀라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더 놀라운 일을 겪은 터라…….”

흘끔 형운을 본 심환지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전 노론의 사람입니다.”

“알고 있다. 사사건건 내가 하려는 일을 반박하며 훼방 놓는 사람이지.”

“그걸 뻔히 아시면서 왜 이렇게 찾아오시는 겁니까?”

“이 나라를 위해서다.”

“요즘 유행하는 말입니까? 오늘 그 이야기, 여러 번 듣습니다.”

“그래. 저 사람이 그대에게 한 말이지.”

“대체 언제부터 듣고 계셨던 겁니까?”

“처음부터.”

“그럼, 저분께서 얼마나 위험한 일에 몸을 담고 계신지도 알고 계십니까?”

형운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

정확히 절반만 알고 있었다.

만사여의 노릇을 하는 줄은 알았다.

그 일이 십학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토록 위험한 상황인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기필코 막았으리라.

그를 향해 심환지가 물었다.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대는 어찌할 셈인가?”

“어찌하면 좋을까요?”

심환지는 넉넉한 웃음을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형운의 눈가에도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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