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가늘고 뾰족한 징표
-처음엔 십학사나 아이를 노린 괴한의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레는 자신의 생각을 서탁 위에 펼쳐 놓았다.
처음에는 십학사가 저지른 범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라버니의 개입으로 그 일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렇다고 기대 오라버니가 아이를 어딘가로 데려간 것도 아니었다.
십학사도, 기대의 짓도 아니라면…….
이레는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인물들을 떠올렸다.
형운과 장무열.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장무열은 절대 아니었다.
제아무리 변심하여 십학사가 된 장무열이라 해도 그는 어린아이를 납치할 사람이 아니다.
결국, 남은 사람은 하나.
사건 현장에 나타난 전혀 엉뚱한 인물.
예상 밖의 일을 저질러 모두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형운뿐이다.
-십학사도 오라버니도 아니라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이유가 있는 단 한 사람.
-나였군.
-맞습니까? 진정 은백께서 하신 일입니까?
-그렇다. 내가 했다.
감탄하는 형운의 글씨가 이어졌다.
-귀신은 속여도 은랑, 널 속일 순 없구나.
-어찌 된 일입니까?
궁금했다.
어쩌다 형운이 심 교리의 아이를 납치하게 된 걸까?
신중한 그의 성격을 아는 이레이기에 더더욱 이번 일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내겐 반드시 물리쳐야 할 숙적과도 같은 존재가 있었다.
-십학사입니까?
-그렇다, 십학사.
그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조직, 십학사.
동궁이 된 이후로 형운은 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그들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
고심 끝에 형운은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십학사라 함은 열 명의 학사를 뜻하는 말일 터.
형운의 짐작처럼 십학사는 열 명의 학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러 사건을 거치며, 십학사임이 분명한 몇몇 사람이 죽거나 유배지로 향하였지. 십학사가 열 명의 학사로 유지된다면 틀림없이 결원을 보충할 거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심 교리에게 주목하신 거로군요.
홍인한처럼 노론 내에서 깊은 영향력과 수완을 가진 자.
십학사가 탐을 낼 법한 인물. 그럼에도 아직 십학사가 아닌 것이 분명한 사람.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반복하는 작금의 노론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가 바로 심 교리였다. 내가 십학사라면 틀림없이 그를 포섭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심 교리가 십학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아이를 납치하는 강수를 두신 겁니까?
-내 아무리 사정이 급하기로서니, 설마 아이로 상대를 겁박하는 치졸한 방도를 썼겠느냐.
-그럼, 어찌 된 것입니까?
-그건…….
서탁 너머에서 형운의 한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좌익위가 벌인 일이다.
좌익위 최치성.
뛰어난 무위를 지닌 순진한 인상의 사내.
다만,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우직한 구석이 있어 단순한 일도 크게 벌이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하였다.
-잘만 하면 십학사의 꼬리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좌익위에게 심 교리의 주변을 살피고 그를 신변을 보호하라 명하였다.
좌익위는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문제는 그가 과할 정도로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점이었다.
-내 명을 완벽하게 수행할 방도를 고심하던 좌익위는 마침내 심 교리의 유일한 약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심 교리의 유일한 약점.
-늦둥이 딸이었군요.
-그래. 그런 모양이다.
-설마 심 교리의 여식을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 그녀를 납치한 겁니까?
-납치가 아니라, 완벽한 보호……라고 하더구나.
“맙소사!”
최치성의 황당하고 어이없는 소행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이를 납치하여 안전한 곳에 보호하면, 십학사건 누구에게건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납치라니.”
어이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최치성의 말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여럿 있었다.
형운이 이레에게 사소한 선물을 하라 하였을 때는 세손의 위엄에 누가 되지 않는 으리으리한 선물을 하였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은밀히 하라 하였을 적엔 정말로 누가 선물했는지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세손빈 간택 중, 이레를 지키라 하였을 땐 수염을 깎고 스스로 환관 행세까지 하였더랬다.
-아이에게 허락은 얻었습니까?
아니, 애초에 아이의 부모에게 먼저 사정을 설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일단 아이부터 안전하게 보호한 후에 허락을 얻을 생각이었다 하더군.
혹시나 모를 납치에 대비하라 했더니,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아이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언제 그랬습니까?
-그날 밤. 괴한들이 들이닥치기 한 시진 전에 조용히 일을 마친 모양이다. 나도 뒤늦게 자세한 사정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심지어 일을 지시한 사람조차 모르게 하다니.
과연 최치성다운 일 처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는 무사합니까?
-처음엔 많이 놀랐지만, 이젠 안정을 찾은 모양이다.
-아이의 부모에겐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조차 어려웠다.
얼마나 애간장이 끓을까.
사라진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잘 수도, 음식을 입안으로 삼키지도 못하리라.
-당연히 그래야겠지. 십학사의 관심이 가라앉으면 은밀히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는지 모릅니다.
-나도 알리고 싶었다. 다만, 좀처럼 기회가 없었구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어제 아침 그를 찾아갔을 때에도 화완옹주의 방해로 제대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밤에도 내내 날이 궂어 서탁을 통한 만남조차 불가능했다.
이제나마 오해를 풀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아니, 아니다.
아직 모든 오해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사슴의 말이 여전히 이레의 귓가를 떠돌고 있었다.
이레는 굳은 표정으로 붓을 들었다.
-이번 사건의 혐의로 제 오라버니가 사헌부에 잡혀갔다 들었습니다. 혹, 은백께서 손을 쓰신 것입니까?
사슴이 말하지 않았던가.
형운에게 기대에 관해 말했다고.
그리고 곧바로 사헌부의 어사들이 기대를 잡아갔다.
설마, 은백께서 제 오라버니를 밀고하셨습니까?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형운의 답이 돌아왔다.
-그건 또 어찌 알았느냐?
쿵!
이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번만은 아니라고 대답하길 바랐건만.
-어찌하여…… 그리하셨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그대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구나. 은랑의 재주가 제아무리 비상하다 해도 그것만큼은 절대 알 수 없었을…….
차분히 대답을 이어 가던 형운의 글이 갑자기 뚝 끊겼다.
그리고 뒤이어 그가 쓴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급하게 쓴 필체가 이어졌다.
-설마…….
-왜 그러십니까?
형운의 크고 굵은 외침이 서탁을 메웠다.
-은마가 위험하다.
-갑자기 그 어인 말씀입니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사람을 사헌부로 보내야겠다.
다급한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형운의 글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은백, 무슨 일이십니까? 대체 제 오라버니가 왜 위험하다 하시는 겁니까?
이레의 물음이 서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형운의 대답은 더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오라버니를 사헌부에 밀고한 연유도 알아야 하고, 사슴과의 관계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서탁 위에 펼쳐진 흰 종이는 답이 없었다.
“제 오라버니가 위험하다니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 * *
사헌부.
추운 날씨에도 옥문 앞을 지키고 있는 군졸들의 눈빛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갇혀 있는 죄인을 특별히 잘 감시하라는 엄명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둥둥!
먼 곳에서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뇌옥 안에서 느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함, 저 요망한 북소리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군.”
옥문을 지키던 두 군졸은 인상을 찌푸렸다.
잠을 잘 수가 없다고?
그럼 이곳을 지키는 내내 코를 우렁차게 골던 작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깜깜하네. 지금이 낮이오, 밤이오?”
옥문 왼쪽에 서 있던 군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축(丑)시다.”
“고작 네 시진밖에 못 잔 것인가?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지 숙면이 어렵군.”
죄인의 중얼거림에 옥졸들은 어이가 없어 헛바람을 뱉었다.
그의 태평함에 질린 옥졸 하나가 물었다.
“대체 무얼 하다 잡혀 온 게냐?”
군졸의 물음에 기대가 당연한 말투로 되물었다.
“척 보면 모르겠소?”
“모르니 묻지.”
“당연히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잡혀 온 거라오.”
“아이를 납치했다던데?”
“내 관상을 보시오. 나처럼 선하게 생긴 사람이 어디 어린아이나 납치할 놈으로 보이오?”
“사람도 여럿 죽였고.”
“그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이 사람은 남을 죽이긴커녕, 누가 고함이라도 지르면 기절할 것처럼 놀라는 새가슴이라오.”
“그럼 얼굴에 난 칼자국은 뭔가?”
“안 그래도 이 칼자국 때문에 온갖 오해를 다 받고 있소이다.”
“이곳에 갇힌 사람은 다들 그리 말하지. 억울하다고. 나는 결백하다고. 다 부질없는 짓이야. 어사들의 문초를 받으면 하루도 못 견디고 죄상을 술술 불게 될걸.”
“이곳의 고문이 그리 대단하오?”
“두말하면 입 아프지.”
“이거, 큰일이군. 난 아픈 건 딱 질색인데.”
“몸 성히 죽고 싶으면 차라리 그냥 다 불어 버리는 게 좋을걸.”
“잘못한 게 없는데, 무얼 분단 말이오? 아니, 그보다 몸 성히 죽는다니. 설마, 죽는 경우도 있단 말이오?”
“간혹, 그런 경우도 있고. 하여간 사지 멀쩡하게 이곳을 나가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어.”
“거참, 곤란하게 되었구려.”
심각한 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평했다.
포기한 걸까?
아니면 유달리 강심장인 걸까.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물어보는 대로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게야. 다 그쪽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난 결백하오. 설마, 어사들이 생사람 잡겠소? 그보다 이제 슬슬 교대하는 분들이 올 때 되지 않았소?”
“그렇지. 오늘따라 늦는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군졸이 놀란 눈으로 옥사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우리 교대 시간을 그쪽이 어찌 아는 게야?”
“다 아는 수가 있다오. 아! 이제 오는 모양이오.”
“온다고?”
군졸이 눈을 가늘게 모으며 먼 곳을 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끼, 오긴 누가 와? 사람 놀리기는.”
“정말 오고 있소. 곧 보일 게요.”
죄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유, 춥다.”
잠시 후.
찬 바람에 한껏 몸을 움츠린 두 사람이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허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찌 알았지?”
옥사에 갇힌 사내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발소리가 워낙 커서 모를 수가 없었다오.”
“저 멀리 있는 사람의 발소리를 어찌 듣는단 말인가? 실없는 소린, 그만하게.”
피식 웃은 군졸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늦었네.”
상대가 대답했다.
“미안하이. 어찌나 바람이 매섭던지. 예까지 오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네.”
“힘들기로 치면, 밤새 이곳에서 떨어야 했던 우리가 더 힘들었지.”
“오늘은 몸이 불편해서 그런 것이니 봐주게. 대신 다음부터는 일찍 나오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몸이 안 좋은 모양일세. 목소리가 꺼슬꺼슬한 것이.”
“말 말게. 간밤에 기침을 얼마나 해 댔는지. 목구멍이 부어 마누라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네.”
고개를 숙인 교대자가 횃불이 일렁이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였다.
옥사 안에서 죄인의 충고가 들려왔다.
“조심하시오. 저들의 발소리가 수상하오.”
“발소리?”
그제야 군졸들은 다가오는 사내들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목소리가 달라진 것이야 목이 부어 그렇다지만, 오늘 교대하러 오기로 되어 있던 군졸과는 몸집이 전혀 달랐다.
밤인 데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깨달음이 늦었다.
옥사에 갇힌 사내는 발소리만으로 알아챈 것을 군졸들은 상대가 횃불이 비치는 곳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놈, 방가가 아니구나.”
“누구냐?”
군졸들은 다급히 낯선 자들을 향해 창을 겨눴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이 한 발 더 빨랐다.
“늦었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들이 옥졸들에게 달려들었다.
짧고 둔탁한 소음과 답답한 신음이 한데 뒤섞였다.
잠시 후.
옥사를 지키던 군졸들이 차가운 바닥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뇌옥 안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조심하라 했건만.”
단숨에 옥졸들을 쓰러트린 두 사내가 뇌옥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안부는 나보다 거기 쓰러진 사람들에게 물어야 할 것 같네만.”
“전향사 소속의 관원, 김기대가 맞습니까?”
“이런, 지금 보니 날 찾아온 손님들이로군. 어디서 보낸 분들이신가?”
“동궁께서 보내셨습니다.”
“동궁께서?”
동궁이 사람을 보냈다고?
기대는 잠시 어리둥절한 채 닫힌 옥문을 바라보았다.
이내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적에게 노출되었다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자리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철커덩.
두 사내 중 하나가 옥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무복에 복면을 쓴 사내였다.
“소인은 박이라 합니다.”
“박? 강남 간 제비가 물어다 주었다는 그 박 말인가?”
“쓸데없는 이야기로 허비할 시간 없습니다.”
박은 기대의 팔과 다리를 묶은 결박을 풀어 주었다.
“언제 적들이 몰려들지 알 수 없습니다. 상황이 다급하니 어서 나가시지요.”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사정이 급한 모양이군.”
“가시지요.”
기대는 박의 안내를 받으며 옥사 밖으로 나갔다.
좀 전까지 그와 농담을 주고받던 군졸들이 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기대는 군졸들의 숨을 확인했다.
“다행히 죽이지는 않았군.”
“잠시 기절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이 추운 날씨에 한데서 자면 큰일 날 수도 있는데. 뇌옥 안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는가?”
“시간이 없습니다. 뒷일은 다른 자들이 알아서 할 터이니,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잠시나마 내 농을 들어 주던 사람들인데. 어찌 박하게 대할 수 있겠나.”
박의 독촉에도 기대는 기절한 군졸들을 한 명씩 끌어다 뇌옥 안으로 옮겼다.
“여기도 바닥이 차네. 어디서 마른 짚이라도 구해 와야겠구먼.”
다급한 와중에도 기대는 오지랖을 부렸다.
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사정이 촉급하단 말입니다.”
그의 독촉에도 기대는 여전히 느긋했다.
“어허, 잠시만 기다리래도. 오래 안 걸릴 걸세.”
재촉하던 박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옆에 선 동료와 시선을 주고받던 박이 기대의 등 뒤로 접근했다.
“자꾸 이렇게 고집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내 사정이 아무리 급해도 사람의 도리마저 저버려서야 쓰겠는가. 잠시만 기다리게. 마른 짚단만 구하면 당장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날 걸세.”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박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일렁이는 횃불에 날붙이가 시퍼런 귀기를 흩뿌렸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니까. 성질도 급하군. 아! 그런데 말일세. 동궁께서 그대들을 보냈다 했는가?”
“그렇습니다.”
“그럼, 뭔가 징표 같은 걸 주진 않으셨나?”
“징표라니요?”
“별건 아니고. 작고 하찮은 물건이라네.”
“…….”
“가늘고 뾰족하게 생긴 물건인데. 안 주시던가?”
“상황이 워낙 급했던지라.”
“거참, 곤란하군. 징표가 없으면 그대들이 정말 동궁께서 보낸 사람인지 어찌 알 수 있겠나?”
“믿으셔도 됩니다.”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네. 가령…….”
불현듯 기대가 고개를 돌렸다.
막 그의 등을 찌르려던 박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그대들처럼 동궁께서 보내셨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기꾼일 수도 있지 않겠나?”
흉기를 보고도 히죽 웃던 기대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십학사냐?”
기대의 물음에 복면을 쓴 무사들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군. 쳐라!”
박을 비롯한 검은 무복의 괴한이 동시에 기대에게 달려들었다.
기대는 몸을 날려 두 사람의 공격을 피하며, 바닥을 뒹구는 밧줄을 손에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손발을 결박했던 바로 그 밧줄이었다.
“칼 든 자들을 어찌 상대하나 고심하였는데, 마침 이곳에 좋은 물건이 있었군.”
“죽어라!”
“어허, 이 사람들이 위험하게…….”
기대는 살기로 가득한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내가 예전에 실없는 어떤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네. 그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대개가 쓸모없는 짓들이었지. 하지만 단 하나, 이것만큼은 그럭저럭 사는 데 도움이 되더군.”
그는 실뜨기하듯 밧줄을 펼쳐 괴한들의 두 손을 순식간에 포박하였다.
그 수법이 얼마나 빠른지, 괴한들은 미약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포박술이라고 하는 걸세. 어사 중에서도 특별한 어사만이 익히는 것이라 하더군. 사흘 밤낮을 술을 사 먹이며 졸라 간신히 배운 것이지.”
“이, 이놈!”
괴한들이 고함을 질렀다.
기대는 다리를 뻗어 두 괴한을 걷어찼다.
“쉿! 다들 자는 시간에 이 무슨 소란인가. 조용히 하시게.”
두 괴한은 떠들고 싶어도 떠들 수 없었다.
기대의 발길질에 기절해 버린 탓이다.
“세상 참 흉흉하군. 어사들이 득시글거리는 사헌부까지 도둑놈들이 쳐들어오다니 말이야.”
손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낸 기대가 어둠 속을 응시했다.
“사헌부의 경비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어찌 안심하고 뇌옥에서 쉴 수 있겠는가?”
기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두운 구석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 * *
훤칠한 키에 서늘한 눈동자.
무채색의 계절을 닮은 사내, 장무열이었다.
장무열의 얼굴을 본 기대는 피식 웃었다.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 하니 좋던가? 기왕이면 좀 일찍 나타나면 얼마나 좋아. 그랬으면 이렇게 땀나도록 새벽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침묵으로 일관하던 장무열이 기대에게 물었다.
“나갈 것이냐?”
기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나가긴 어딜 나간단 말인가. 여기보다 좋은 곳이 어딨다고. 때 되면 밥 주고, 재워 주고…….”
말끝을 흐리던 기대가 장무열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밤잠까지 설쳐 가며 날 지켜 주는 벗까지 있는데.”
“…….”
기대는 장무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다음부터는 이런 귀찮은 물건 말고, 그냥 말로 하게나.”
장무열은 기대가 자신의 손 위에 올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뾰족한 징표.
작은 침이었다.
지난번 김기대를 문초할 때, 그의 어깨에 슬며시 꽂아 놓은 단침이었다.
장무열은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 기대는 다시 뇌옥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이불을 덮듯 기절한 군졸들 틈을 파고들었다.
“따뜻하니 좋구나.”
그의 태평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장무열은 다시 으슥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기대가 돌려준 단침을 소매 속 침통 안으로 수습한 후였다.
휘이잉.
시린 바람이 장무열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뇌옥 안에선 어느새 기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편한 모습으로 잠든 모습.
“망할 놈.”
장무열은 낮게 혼잣말을 읊조리며 뇌옥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는 뇌옥 앞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