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어찌 알았느냐?
먹장구름 가득한 밤하늘.
화의 차분한 글이 서탁 위로 번져 갔다.
-참으로 묘한 일이로구나.
악이 화의 글에 동감을 표했다.
-아이가 사라졌는데, 정작 그 아이를 납치한 범인은 없다니.
예가 물었다.
-네 오라비가 잡았다는 괴한들이 아이를 납치하려 한 것은 분명한 것이냐?
이레가 답했다.
-괴한들이 아이에 관해 대화하는 것을 오라버니께서 똑똑히 들었다 합니다.
-하긴, 아이 대신 잡혀갔었다 하니 잘못 들었을 리 없겠지.
상이 투덜거렸다.
-대체 얼마나 아둔하기에 다 큰 사내를 아이로 착각하고 대신 잡아간단 말이냐?
악이 대꾸했다.
-캄캄한 밤에 은밀하고 신속하게 일을 벌였어야 하니, 실수할 수도 있었겠지.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하여간 백귀들의 이야기는 엉뚱한 일 천지로구나. 네 오라비의 일도 그래. 그 녀석, 또 잡혀갔다면서?
상의 물음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적었다.
-네. 사헌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는 공연히 실종되어 아이의 애간장을 태우더니, 다음엔 느닷없이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었지. 그런데 이젠 어사들에게 잡혀가? 내 살다 살다 그렇게 해괴한 인생은 처음 본다. 그런데 그리 도망만 다니는 녀석이 하는 말을 믿을 수는 있는 거냐?
이레의 차분한 글이 이어졌다.
-오라버니께서 불운한 사건에 자주 연루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없고 진지하지 못하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허술한 것은 겉모습일 뿐. 일할 때는 그 누구보다 진지합니다.
-그런 녀석이 또 잡혀가서 널 속상하게 만들어?
겉으로는 기대를 탓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이레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악이 물었다.
-네 오라비가 잡혀간 정황이 몹시 이상하구나.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저와 오라버니만 알고 있습니다.
-하면, 어사들이 어찌 알고 네 오라버니를 잡아갔을꼬?
예가 말했다.
-벽에도 귀가 있다 하였지(壁有耳).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으니, 제아무리 꼼꼼하게 일을 하였어도 사소한 실수는 할 수 있을 터.
악과 예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정말 실수했을까?’
오라버니는 왕의 팽례다.
왕의 서신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빠른 발과 은밀함은 팽례가 지녀야 할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런 오라버니가 확신했다.
남에게 절대 들키지 않았다고.
호언장담하였으니, 실수하였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봐야 한다.
그럼 어사들은 대체 어떻게 오라버니를 찾은 걸까?
예의 신중한 글이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단순한 사건이 아니오. 조짐이 좋지 않으니…….
상이 버럭 했다.
-또 뭐가 복잡하다는 거야? 누가 봐도 간단한 이야기잖아. 십학사란 몹쓸 놈들이 심 머시기란 작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 여식을 납치했으니, 아이만 찾아내면 그만 아니냐?
악이 상을 타박했다.
-귓가에 말뚝이라도 박아 놓았느냐? 어찌 그리 말귀가 어두워?
-뭘 어디에 박아?
-납치하려던 놈들은 아이의 오라버니가 기지를 발휘하여 일망타진하였다 하지 않았느냐?
화가 그의 말을 받았다.
-납치범들을 잡았으니 당연히 심가의 여식은 무사해야 할 터인데…….
예가 다시 화의 말을 이었다.
-정작 아이는 실종되었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심 아무개의 여식은 어디에 있는 거야?
상의 말에 악이 푸념했다.
-그걸 모르니 고민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이레는 한숨을 쉬었다.
십학사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오라버니는 잡혀가고, 실종된 아이는 작은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다.
이것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상의 글이 불쑥 떠올랐다.
-이 와중에 불손 그놈까지 조강지처를 버리고 바람이 났단 말이지?
-어험. 바람이라니.
-바람이 아니면, 그게 뭐란 말이냐?
-그냥…… 어쩌다 보니 다른 여인과 사소한 인연이 생긴 모양이지.
악이 말했지만, 상은 쉬이 열기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사내가 외간 여인을 왜 만나? 그것도 밤에, 단둘이. 은혜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대체 어느 빌어먹을 집안의 씨앗이야?
서탁 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에 상의 글이 슬며시 떠올랐다.
-망할 놈.
상이 망쳐 놓은 분위기를 화와 예가 애써 무마했다.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구나. 오래 보지 않았으나, 그리 가벼운 아이는 아니었다. 달리 사정이 있을 것이다.
-아이야, 마음 두지 마라. 필시…….
할아버지들이 이레의 심란한 마음을 달래 주고 있을 때였다.
“마마.”
처소 밖에서 금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사가에서 선물을 보내셨다 하옵니다.”
“사가에서?”
이레는 어리둥절했다.
이런 늦은 시각에 집에서 물건을 보내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을 보냈다 하더냐?”
“보약이라 하옵니다. 다만…….”
“다만?”
“직접 뵙고 전해야 할 사정이 있다 하옵니다.”
“날 만나야 한다 했다고?”
“그냥 돌려보낼까요?”
“아니다. 들여보내거라.”
곧이어 문이 열리며 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챙겨 온 여인이 들어섰다.
곱게 절을 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여인을 본 이레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사가에서 보낸 선물을 가져온 고운 미소의 여인.
그녀는 사슴이었다.
* * *
“잠시 이 사람과 할 말이 있으니, 너는 나가 있어라.”
금정을 물린 이레가 사슴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구신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듯 이레가 물었다.
십학사에서는 곁자리에 앉은 관계로 자주 대화하였지만, 빈궁의 자리에서 사슴을 만난 건 처음이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였다.
사슴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가에서 보낸 사람이옵니다.”
“사가에서 내게 볼일이 있으면 행랑 할멈을 보냈겠지. 그대는 누군가? 무슨 일로 날 찾은 것인가?”
이레의 다그침에 사슴은 큰 눈을 가늘게 여미며 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은 제가 잘 아는 어느 분을 뵙고 싶어서 말입니다. 간절히 뵙고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이곳으로 가면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체 자네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가?”
“빈궁마마께서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사슴의 미소가 짙어졌다.
“만사여의.”
이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알고 있다.
내 정체를.
모르는 일이라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으리라.
사슴의 두 눈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해도 알고 있고, 거북도 알고 있으니.
그들과 항상 함께 있는 사슴이 자신의 정체를 모르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이레는 가볍게 한숨을 풀어내었다.
“만사여의를 찾는다면 잘못 찾아온 건 아니로군.”
“어릴 적부터 유독 길눈이 밝았답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인가?”
사슴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빈궁마마의 오라버니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날 위로하기 위해 굳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인가?”
사슴은 고개를 저었다.
“위로가 아니라 용서를 구하기 위해 왔답니다.”
“용서라니?”
“빈궁마마의 오라비를 그리 만든 사람, 바로 저입니다.”
이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사헌부에 오라버니를 고변한 자가 그대란 말인가?”
“제가 직접 고변한 건 아니지만…… 제가 고변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사슴은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말을 이었다.
“실은 그 일이 있던 날 밤, 한 사내를 만났답니다.”
그 사건이 있었던 날, 사슴이 만난 사내라면…….
“지난번 기루에서 뵈었던 분. 기억나십니까?”
형운.
이레는 숨이 턱 막혔다.
사슴은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날 밤, 그분을 만났답니다. 아아, 밤의 정취 때문이려나. 아니면 그분에게서 실려 오는 한 가닥 따스한 온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지요.”
“…….”
“그전에도 그분을 여러 번 만났지만, 맹세코 그날처럼 흔들린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분의 그윽한 눈빛과 귓가를 적시는 나직한 숨결까지. 차갑게 얼어붙은 제 가슴이 그렇게 들뜬 적은 난생처음이었지요.”
연모에 빠진 여인은 제 수줍은 고백에 연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정작 사슴의 고백을 듣는 이레의 안색은 갈수록 창백하게 변했다.
“사실, 전 그 선비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다만, 그분께서 십학사를 쫓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였지요.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감히 품어서도 안 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연모라는 것을요. 하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점점 그분께 빠져들었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매혹되니. 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던 게지요.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십학사만의 비밀 일부를 그분께 전하고 말았습니다.”
“……!”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레와 기대.
두 사람 말고도 그날의 비밀을 아는 또 다른 사람이.
바로 심환지의 여식을 납치하려다 기대에게 도리어 당한 괴한들.
그들은 기대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기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괴한들을 부린 자가 그들을 찾아갔을 것이다.
괴한들은 그에게 기대를 비롯한 모든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고, 끝내는 비밀을 위해 입막음당한 것이리라.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설마, 그분께서 제 말을 듣자마자 사헌부에 연통을 넣을 줄은. 그 일로 빈궁마마의 오라버니께서 사헌부에 잡혀갈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이레는 갑자기 어지럼증이 일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 와중에도 사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레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제가 죽일 년입니다. 저로 인해 빈궁마마의 집안에 우환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답니다.”
“…….”
“만사여의, 아니…… 빈궁마마,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사슴은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향한 사슴의 눈가엔 일순 팽그르르 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금세 웃음기를 거둔 사슴이 얼굴을 들어 이레를 바라보았다.
믿었던 정인에게 배신당한 것으로 모자라 제 혈육이 사헌부로 잡혀간 충격 때문일까.
이레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말간 시선으로 응시하던 사슴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저는 그만 물러가겠나이다.”
* * *
빈궁전을 나선 사슴이 향한 곳은 화완의 전각이었다.
화완은 수를 놓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둥근 수틀에 해와 고고한 학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사슴은 그녀가 십장생을 수놓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곧 저곳에 사슴을 비롯한 다른 십장생들이 새겨지리라.
십학사가 다스리는 천하도(天下圖).
다른 십장생들과 나란히 어울릴 사슴의 가녀리고 고고한 자태를 떠올리니 절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늦었구나. 어딜 다녀오느냐?”
화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수틀에 시선이 매여 있었다.
“빈궁전을 다녀오는 길이옵니다.”
“빈궁전을?”
화완의 손짓이 잠시 멈추었다.
“무에, 특별한 용무라도 있었느냐?”
“단순히 안부를 전하러 간 것인데, 그만 그분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말았습니다.”
“실수로 빈궁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저와 그분의 관계를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동궁과의 일 말이로구나.”
비로소 흥미가 생긴 모양이다.
화완은 수틀을 놓고 사슴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래, 빈궁이 무어라 하더냐?”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화완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제 사내를 빼앗으려는 사람을 보고도 잠자코 있다니. 소문대로 참을성이 대단하구나.”
“그래서 오라비 일도 전하였습니다.”
“빈궁의 오라비 말이냐? 어사들에게 잡혀갔다지?”
“그 일로 수심이 깊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사소한 일도 귀띔해 드렸습니다.”
“네 표정을 보아하니, 그 사소한 일이 빈궁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한 모양이구나.”
화완은 두 여인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직접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예측했다.
“당분간 신료들에게 동궁을 더욱 흔들어 놓으라 해야겠구나.”
화완의 말 속에 숨은 저의를 단박에 알아차린 사슴이 말을 받았다.
“빈궁마마와 마주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게 할 심산이시군요.”
“시간은 때로 사람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오해는 서운함을 낳고, 질투는 원한이 되며, 분노는 복수로 변하는 법이지.”
“오해를 풀 길 없는 두 분의 관계는 날로 소원해지겠군요.”
“본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게지.”
“옹주마마께서 원하신 대로 빈궁은 손발을 잃듯, 소중한 것들과 결별하며 슬픔과 외로움 속에 천천히 절망하며 무너져 내릴 것이옵니다.”
화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감히 내 것을 훔쳐 갔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그녀는 장무열과 그가 지니고 있던 침통을 떠올렸다.
그 하찮은 것을 무에 보물이라도 되는 듯 소중히 다루던 모습.
그에게 소중한 건 오직 자신과 관련된 것이어야 했다.
그러니 방해되는 것은 모두 쳐 내리라.
그것이 설령 빈궁이라 하더라도.
사슴의 수작은 화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이번 일은 다소 과한 것 같구나.”
“동궁께 빈궁의 오라비 되는 사람의 이야기까지 전한 것 말씀이십니까?”
“해, 그 아이가 달리 도모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송구하오나,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동궁의 환심을 사기 위해선 그 방도밖에 없었답니다.”
“그렇게 해서 동궁을 손에 넣을 수 있겠느냐?”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쌓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참으로 쉬운 법이지요.”
“동궁이 워낙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 걱정이 드는구나.”
“심려 마시옵소서. 사내라면 누구도 소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화완은 자신감을 보이는 사슴을 보았다.
사슴의 순진한 눈망울과 하얗고 가느다란 목.
사내라면 누구라도 그녀를 만지고 보듬어 주고 싶어 하였다.
누군가는 그녀의 순수한 미모에 현혹되었고, 때론 연민의 마음으로 그녀와의 만남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인연의 시작은 각기 달랐으나, 그 끝은 늘 하나였다.
사내들은 사슴의 온기와 숨소리에 중독되어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니 동궁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물론 그는 범상한 사내와는 결이 달랐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내는 사내.
그의 마지막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으리라.
사슴에게 매달려 애정을 구걸하게 되리라.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듯 화완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다음은 또 무슨 일로 동궁과 빈궁을 흔들 생각이냐?”
“당분간은 지켜보기만 할 생각입니다.”
“어째서?”
“곧 빈궁마마께 크나큰 불행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해, 그 아이가 무슨 일을 벌일 모양이구나.”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알 만한 자가 빈궁의 오라비뿐이니까요.”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아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루려 할 테지.”
“부디 과격한 수단만은 동원하지 않아야 할 텐데요.”
“방법이 어찌 되었건, 무사하기는 어렵겠지.”
화완은 다시 수틀을 잡았다.
“사내도 잃고 오라비마저 잃게 될 터이니. 빈궁의 슬픔이 크겠구나.”
“모든 게 밉고 원망스러울 겁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동궁에 관한 오해도 더 깊어질 터이고.”
사슴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참으로 다정다감하신 분이었는데. 어쩌면 지금쯤 슬픔과 서러움을 못 이겨 오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늘을 손에 쥔 화완이 사슴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느냐? 넌 내가 본 아이 중에서 가장 못된 아이다.”
사슴은 두 눈을 가늘게 여몄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화완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으며 수틀에 바늘을 꽂았다.
“빈궁이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 * *
화완과 사슴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레는 무너지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고, 오열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는 창을 열었다.
먹구름 가득한 밤하늘에 희끗희끗 달이 얼굴을 내비쳤다.
방 안으로 푸른 달빛이 스며들었다.
이레는 다시 서탁 앞에 앉았다.
먹물을 붓끝에 묻혔다.
이윽고…….
-계십니까?
흰 종이 위로 먹물이 번져 갔다.
연못에 인 파문처럼 둥글게 퍼져 나간 먹이 흐려지고 옅어져 종내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하얗게 변한 종이 위로 몽글몽글 검은빛이 떠오른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은랑.
반듯하고 정갈한 서체.
형운이었다.
반가움에 이레의 눈동자는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렸다.
화완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정쟁(廷爭)으로 형운을 묶어 두면 동궁과 빈궁이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형운과 이레, 두 사람에겐 거리와 시간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했다.
별채에서는 흐린 날에.
그리고 궁에서는 휘영청 밝은 달밤에.
신비한 서탁이 모든 제약을 넘어 두 사람을 끈끈하게 이어 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서탁에서 만나는 것 같구나.
-근래 날이 궂었습니다.
-마침 잠시나마 달이 모습을 드러내어 다행이다. 그나저나 밤이 늦었거늘. 어찌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느냐?
걱정 섞인 형운의 글 끝에 이레의 글이 붙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여쭈어도 될는지요.
-무엇이냐?
이레는 그간의 의문과 망설임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써 내려갔다.
-은백이십니까?
-그사이 날 잊기라도 한 것이냐? 내가 누군지 묻는 건 아닐 터…….
-그 아이.
-…….
-사라진 그 아이, 은백께서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까?
모두가 찾는 실종된 아이.
십학사도 오라버니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의 소식을 이레는 은백에게서 찾고 있었다.
스르르.
이레의 물음이 사라졌다.
서탁 위로 침묵이 흘렀다.
어찌하여 답하지 않으시는 걸까.
궁금한 찰나.
검은 먹물이 방울방울 모였다 흩어졌다.
이윽고 형운의 대답이 나타났다.
-그걸…… 어찌 알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