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행행행(行悻幸)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화완옹주전의 불빛은 여전하였다.
여덟 폭, 모란 병풍의 마지막 꽃봉오리를 수자 놓는 중인지라.
옹주의 손은 수틀 위아래로 분주히 오갔다.
“이대로 밤을 새우려는 것은 아니시지요?”
차가운 바람이 들이친다 싶더니, 어느 사이 방 안에 낯선 그림자가 들어섰다.
달큼한 술내가 방 안을 안개처럼 휘감았다.
여전히 수틀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화완은 붉은 입술을 열었다.
“겸이로구나.”
“네, 어머니.”
정후겸은 수틀을 맞잡은 화완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윽고 화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후겸에게 들려왔다.
“부른 것이 언제인데, 이제야 오느냐.”
“송구하옵니다.”
화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품 안의 자식이라더니. 어미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했던 네가, 이제는 어미를 기다리게 할 줄도 아는구나.”
웃고 있지만, 화완의 말에 돋아난 가시가 제법 사나웠다.
정후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것저것 갈무리 지어야 할 것이 많다 보니, 이리 늦었습니다.”
“그랬겠지. 네가 고작 주향에 넋을 빼앗겨 어미의 부름에 늦을 리 없겠지.”
작게 중얼거리던 화완이 수틀을 한옆으로 밀었다.
양아들과 뒤늦게 시선을 마주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아이는 어찌 된 것이냐? 네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있단 것이야?”
심환지의 사라진 여식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다.
정후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소문하고 있사옵니다.”
“정말 실종된 것은 확실하더냐? 심 교리의 모습이 평상시와 다름없으니. 아이를 잃어버린 아비라 보기엔 너무 태연하더구나.”
“처음엔 저도 그리 생각하였습니다. 하오나 뒤에 사람을 붙여 알아본바, 일과를 끝낸 이후엔 아이를 찾기 위해 도성 골목골목을 수소문하며 다니더이다.”
“그래? 그럼 대체 누가, 어디로 데려갔단 것이냐?”
“곧 알아볼 것이니, 어머니께선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정후겸의 말에 화완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겸아. 어미는 너만 믿을 것이야. 누누이 말했지만, 그를 새로운 구름의 자리에 앉히는 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네, 어머니.”
“지금까지 홍인한은 자신이 가진 배경과 핏줄, 거기에 재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팔았지. 그러기에 결국 꼭 필요한 시기엔 배신을 당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홍문관 교리, 심환지.”
화완은 먹잇감을 앞에 둔 야생의 짐승처럼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는 따분하리만큼 정도(正道)를 걷는 자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설혹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신념을 저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 답답한 인사다. 그러나 그만큼 맹목적인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러기에 적이라면 결코 만나고 싶지 않고, 아군으로 만난다면 더없이 든든한 사람이지.”
“…….”
“그는 지난날 우리가 결코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낼 것이야.”
화완의 확신에 정후겸이 반박했다.
“어마마마, 지난날 우리 십학사가 하지 못했던 일은 없사옵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지. 하지만…… 정작 우리는 꼭 필요한 것을 쥘 수 없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인망(人望). 덕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
“…….”
“이해와 득실로 맺어진 관계는 저울의 추가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협박으로 손을 잡은 자는 언젠가 배신을 꿈꿀 것이고, 욕망을 탐한 자는 더 큰 욕망을 위해 상대의 등에 비수를 꽂겠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그 어떤 재물이나 권력, 협박이나 술수로는 할 수 없으니.”
화완은 다정하게 정후겸을 바라보았다.
“겸아.”
“네, 어마마마.”
“어떻게든 심환지의 마음을 돌려라. 그자라면 분열되고 제각각으로 찢어지는 노론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을 것이야. 그자만 우리 편으로 만든다면…… 동궁은 허수아비에 불과해질 것이야. 네가 원하는 동궁전의 진짜 주인은 다른 사람이 될 게야.”
“…….”
정후겸은 침묵한 채 화완의 표정을 살폈다.
동궁전의 진짜 주인…….
그것이 정후겸, 자신이 되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니, 장무열이 나타나기 이전까진 단 한 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동궁전의 주인은 네가 될 것이야……라는 말 대신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정후겸이 아닌 다른 사람…….
술기운에 희뿌옇던 뇌리로 장무열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속마음을 감춘 정후겸은 순순히 고개를 조아렸다.
“명심하겠나이다.”
정후겸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난 모습을 보였나이다.”
“…….”
“오랜만에 어마마마께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었나 봅니다.”
“나는 네 어미이고, 너는 내 하나뿐인 아들이니. 응석을 부리면 어떻고,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란다. 다만…….”
화완옹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 차가운 얼음이 얕게 깔렸다.
“너무 긴 응석은 이 어미를 지치게 한다는 걸 잊지 마라.”
“네, 어마마마.”
“다음 회합은 언제더냐?”
“곧 일정을 잡을 것이옵니다.”
“아참, 겸아.”
다시 수틀을 앞으로 끌어당긴 화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십학사의 물이 만사여의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 그러하옵니다.”
“혹여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없느냐?”
모란의 마지막 꽃잎을 수자 놓으며 화완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까보다는 또렷해진 눈으로 어미의 모습을 곁눈질하던 정후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만사여의가 사실은 이레라는 것을, 그녀가 이 나라의 빈궁이라는 것을 정후겸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완에게 그 사실까지 보고하진 않았다.
아니, 보고할 생각이 없다고 해야 옳으리라.
혹시 눈치채신 것이려나?
그러나 다행히 화완은 더는 관심 없다는 듯 수자 놓기에 열중했다.
더는 용무가 없으면 나가 보라는 무언의 축객령.
정후겸은 뒷걸음질로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옹주의 처소 문을 나서기 직전.
상궁 하나가 다급한 낯빛으로 들어섰다.
“대감, 여기 계셨습니까?”
수틀에 매여 있던 화완과 정후겸의 시선이 상궁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인가?”
정후겸의 물음에 상궁이 소식을 전했다.
“지난밤, 대감의 일을 방해했던 자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화완이 반색했다.
“잘되었구나.”
어미를 향해 정후겸이 서둘러 허리를 접었다.
“그자를 서둘러 처리하라 명을 내리겠나이다.”
모자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던 상궁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온데 대감, 그자를 사헌부에서 먼저 데려갔다고 하옵니다.”
정후겸과 화완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어라?”
“사헌부에서?”
* * *
사헌부의 옥사는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옥사 안에는 사헌부의 집의 장무열과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한 권문, 감찰단 방주로 승격한 허상익이 있었다.
권문과 허상익은 어이없다는 듯 포승줄에 묶인 이를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이곳이 어디인가.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사헌부의 죄옥(罪獄)이었다.
없는 죄도 만들어 자백하게 하는 악명 높은 공간이었건만.
그들 앞에 앉은 죄인에게서는 그 어떤 위기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위기의식은커녕 느긋한 여유마저 느껴졌다.
“날 잡으러 알았으면 그때 알은척하지 않는 건데. 반가운 마음에 내가 실수하고 말았군.”
아쉬운 듯 혀를 차는 모습에 허상익은 참던 성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네 이놈! 시끄럽다.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시답잖은 농을 입에 올린단 말이냐. 사헌부의 지엄한 법도가 두렵지도 않으냐?”
“거참, 시끄럽기로 치자면 그쪽이 나보다 몇 배는 더한 것 같은데.”
기대가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며 대답했다.
“네놈이 정녕 죽기를 작정하였느냐?”
“…….”
기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죽는 건 내가 아닐걸.’
그의 눈빛에 울컥한 허상익이 다시 호통을 치려 배에 힘을 잔뜩 주었다.
찰나.
장무열의 차분한 목소리가 앞서 나갔다.
“지난밤, 어디에 있었느냐?”
“…….”
“그제, 홍문관 관리의 여식이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이를 납치한 괴한들은 자신들의 은거지에 도착. 패거리로 보이는 자들과 접촉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그 집 헛간에서 괴한들은 전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묵묵히 듣던 김기대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이쿠, 끔찍한 사건이 생겼네그려. 그런데…….”
장난기 가득한 눈길로 장무열을 바라보며 김기대가 물었다.
“날 잡아 온 연유가 무언가?”
“중인(中人) 김덕칠과 그가 부리던 괴한들의 죽음, 그리고 홍문관 관원 여식의 납치.”
“그 흉측한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네가 살인 사건 현장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 이가 있다.”
“그럴 리가……. 나를 모함한 자가 대체 누구인가? 어디 이곳으로 데려와 보게나. 어떻게 날 콕 집어서 지목하였는지, 그 비상한 수단이 궁금하네만.”
“그날 현장에 있었는가?”
“있긴 했으나…….”
“그렇군.”
“그러나 다 이유가…….”
“홍문관 교리의 여식은 왜 납치하였나? 중인과 괴한들을 죽인 연유는 무엇이냐?”
연이은 추궁에 기대는 대답 대신 장무열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던 기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무어라?”
“내가 정말 그런 일을 하였다 생각하는가?”
기대의 물음을 무시한 채 장무열은 앞에 놓인 서책에 무언가를 적었다.
꼼꼼하게 기록을 마친 그가 책자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범행을 자백할 때까지 문초를 계속한다.”
차갑게 말한 장무열은 몸을 돌렸다.
그의 등에 대고 기대가 소리쳤다.
“대답해 보게나. 그대, 정말 내가 그런 짓을 하였다 믿는 것인가? 진심으로……?”
기대의 외침에 장무열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곤 무슨 생각에선지 묶여 있는 기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곳에 잡혀 온 이상, 모두가 혐의자다. 내가 믿는 건 사건 현장에서 나온 증좌와 사건을 목도한 증언뿐이다.”
“그것이 꾸며진 증좌이고 만들어진 증인이라면?”
올려다보는 김기대와 내려다보는 장무열의 시선이 한곳에서 마주했다.
찰나.
장무열은 기대의 왼쪽 어깨를 거칠게 쥐었다.
“윽!”
어깨에 전해진 고통에 기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무열은 사나운 음성으로 그의 귓가에 읊조렸다.
“네 눈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 것이냐?”
“…….”
“여긴 사헌부다. 앞으론 말조심해야 할 것이다.”
차갑게 윽박지른 장무열은 천천히 기대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러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옷자락을 털며 매무시를 정돈했다.
“가자!”
장무열은 수하들을 이끌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옥사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권문과 허상익이 비릿한 눈빛으로 기대를 힐끔 쳐다보곤 그의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기대는 장무열의 냉정한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장무열이 움켜쥐었던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기대는 그 어깨를 넋이 나간 듯 한참 바라보았다.
텅!
옥사의 문이 매정하게 닫혔다.
* * *
“방금 그놈 표정 보셨습니까?”
권문은 장무열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꼴에 외척이라, 이거죠. 동궁빈의 뒷배만 믿고 시건방지게 굴더니. 꼴좋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집의처로 들어선 이후에도 권문의 입은 좀처럼 닫히지 않았다.
상석에 앉은 장무열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집의 영감 한마디에 벌벌 떠는 모습이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
“집의 영감께선 참으로 호쾌하십니다. 소인이 본 사내 중 최고의 사내입니다. 열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주먹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오늘 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사람이나 짐승이나 힘 앞에선 장사가 없습지요, 하하.”
권문은 필사적으로 아부하며 장무열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집의 장무열은 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굳은 표정으로 책상 위에 쌓인 문서만 살필 뿐이다.
그 무심한 반응에도 권문은 포기하지 않았다.
“행적으로 보아 놈이 범인인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부터 제대로 된 문초를 진행하겠습니다. 제깟 놈이 아무리 의연한 척 굴어도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옵니다. 아무렴요,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터지는 고통을 겪으면 없는 죄도 불어 낼…….”
불현듯 장무열이 살피던 문서를 내려놓고 권문을 바라보았다.
이제나저제나.
장무열의 반응을 살피던 권문은 반색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앉아 있는 의자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자신을 향한 장무열의 눈빛.
그 까만 눈동자에 담긴 선뜩한 기세에 권문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귓가로 장무열의 송곳 같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자의 문초는 내가 직접 할 것이다. 그러니 내 먹이에 손대지 마라.”
“네? ……아, 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듯 권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놈의 오만방자함을 직접 다스릴 생각이시었군요. 옳습니다. 정말 탁월한 생각이십니다.”
장무열은 다시 시선을 돌려 문서를 살폈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자의 문초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집의처 입구에 서 있던 허상익이었다.
허상익은 장무열이 앉아 있는 상석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최근 도성 안팎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실종된 심환지의 여식을 찾는 일도 시급하거니와 몇몇 관료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도 아직 작은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사건을 조사할 어사를 확충해 주십시오.”
장무열은 문서를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허상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일이라면 이미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안다.”
“하오나, 영감. 조사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조사 시간도 제한적이라, 수사에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허상익은 작심한 듯 숨을 한껏 들이켰다.
“최근 사헌부 내의 기밀문서들이 외부로 빼돌려진 정황마저 포착되었습니다.”
“그 일은 일전에도 보고를 받았다. 검토해 보고 따로 지시를 내릴 것이니. 명을 기다려라.”
“미룰 일이 아닙니다. 문건 유출의 동향으로 보아, 이런 일이 하루 이틀 벌어진 것이 아니옵니다. 적어도 몇 해 전부터 조직적으로…….”
“언제부터 감찰단에서 사헌부의 집의에게 명을 내리게 되었느냐?”
장무열의 얼음 같은 음성에 허상익은 입을 다물었다.
쐐기를 박듯 장무열이 말을 이었다.
“사헌부가 어떤 사건을 수사할지 결정하는 건 그대가 아니라 내가 할 일이다. 사헌부 집의는 그대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허상익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하오나…….”
그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챈 권문이 황급히 허상익을 잡아끌었다.
“어허, 이 사람. 오늘따라 왜 이러는가? 집의 영감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물러나게.”
“그러기엔 시간이…….”
“이 사람이 무얼 잘못 먹었나.”
권문이 허상익의 등을 떠밀었다.
“소인들은 그만 물러가겠나이다.”
황급히 허리를 접은 권문은 허상익을 끌고 집의처 밖으로 향했다.
장무열은 다시 책상으로 고개를 내렸다.
* * *
“거참, 오늘따라 왜 이러는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허상익은 장무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겨우 집의처 밖으로 허상익을 끌고 나온 권문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한동안 얌전하기에 이제 눈치가 좀 생겼나 싶었는데. 오늘 보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
“모름지기 나라의 녹을 먹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이 무언지 아는가? 바로 쓸데없는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야.”
권문은 허상익의 이마를 콕콕, 검지로 찍었다.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저 우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명령을 받으면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이행하면 그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겠는가.”
허상익은 대답 대신 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장무열.
그가 사헌부의 집의가 되면 달라질 줄 알았다.
썩을 대로 썩어 이제는 고름으로 가득 찬 사헌부가 부패한 부위를 도려내고 크게 변할 줄 알았다.
사라진 임부(妊婦)들을 찾아낼 때, 장무열의 모습은 허상익이 잊고 있었던 기대와 설렘을 다시 갖게 하였다.
‘희망’이라는 불씨가 허상익의 가슴에 다시 지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너무 큰 기대를 품은 걸까?
허상익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혀를 끌끌 차던 권문이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그 문서 유출은 어디서 들은 헛소문인가?”
“헛소문이 아닙니다.”
“헛소문이 아니면?”
“제 소식통에 의하면…….”
권문이 허상익의 말허리를 잘랐다.
“자네, 그 문서들. 누가 관리하는지 아는가?”
“사헌부의 남대(南臺)들이 아닙니까.”
“잘 아는군. 그럼, 그 사람들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겠군.”
허상익은 권문을 돌아보았다.
권문이 으쓱 어깨를 들어 올렸다.
“그래, 바로 나일세. 내 지평이었던 시절부터 그들과 함께 사헌부와 관련한 모든 문서를 정리, 보관하였지. 그러니 자네의 말은 바로 나, 청렴과 결백을 삶의 신조로 살아온 내가 사헌부의 중요한 문서를 유출하였다는 말과 다름없네.”
권문은 심히 언짢은 표정으로 허상익을 노려보았다.
“자네 눈엔 내가 그런 실수나 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
보인다.
아니,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온갖 부패의 온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차마 그런 말을 본인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소인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당연히 착각이지. 그러니 쓸데없는 착각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하게. 알겠는가?”
허상익에게 엄포를 놓은 권문은 거들먹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허상익은 문득 눈가를 여몄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언젠가 전향사 아래의 이름 없는 조직으로 사헌부의 기밀이 누설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뜻밖의 사태가 터지며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때도 저 사람이 책임자였지.’
과거와 현재의 사건.
그 사건들과 관련하여 공통적인 한 사람, 권문.
설마, 저자가…….
사건과 관련한 연결고리를 이어 가던 허상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 없지.’
입에 발린 아부와 아첨으로 저 자리에까지 오른 권문이었으나, 유난히 겁이 많은 자였다.
그런 본성 탓인지.
그는 들켜도 크게 질책받지 않을 만큼의 부정부패만을 저질렀다.
권문은 사헌부의 기밀을 유출할 만큼의 배포를 가진 자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누굴까?
사헌부의 기밀문서를 유출한 자…….
아니, 그 기밀문서를 가져간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 * *
“그것은 전하였느냐?”
어둠 속에서 저음의 음성이 들려왔다.
“팽례 강현보에게 맡겼나이다.”
“그렇다면 틀림없겠구나. 그리고…….”
때마침, 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사라지고, 유백색의 달이 온전한 얼굴을 드러냈다.
캄캄한 방 안에 달빛이 들어찼다.
흐릿하게 그림자만 보이던 인영이 또렷해졌다.
이제 막 궁으로 돌아온 듯 환복을 서두르던 형운과 그의 시중을 드는 최 내관의 모습이 보였다.
“좌익위는 아직이더냐?”
형운이 물었다.
최 내관의 주름진 눈가에 시름이 떠올랐다.
“송구하오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좌익위가 아니 옵니까.”
“역시…… 그분들의 말씀이 옳았구나.”
형운은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
“아니다, 아무것도.”
환복을 마친 형운은 등잔을 밝히려는 최 내관을 손짓을 물린 후, 서탁 앞에 앉았다.
동창을 열어 환한 달빛을 고스란히 받은 서탁 위에 하얀 종이를 깔았다.
이윽고…….
설원처럼 새하얗던 종이 위로 검은 먹빛이 안개처럼 번져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흐릿했던 먹빛은 점점 또렷한 형상으로 변했고 마침내 하나의 글씨가 되었다.
-행(行)하면 행(悻)할 것이니, 행(幸)을 시작하라.
행동으로 저들의 성화를 끌어낼 것이니, 이제는 희망하는 것을 시작하라.
그토록 바라던 글귀가 서탁 위로 떠올랐다.
형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