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66화 (166/215)

#166. 술의 향기(酒香)

너무 짧은 삶이었던 까닭일까.

되짚어보건대, 이레가 가진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가진 것이 적다 하여 불편하고, 섧던 기억도 딱히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별채라는 작은 공간에 갇힌 터라.

계절을 보낼 수 있는 옷가지와 여름엔 모기를 쫓고, 겨울엔 추위를 막아줄 이부자리면 충분하였다.

심심할 때면 수자를 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탁을 통해 백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오라버니가 가져다주는 군입 거리에 즐거웠다.

할머니 눈을 피해 서책을 구해 읽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그랬던 이레의 생이 형운을 만난 이후로 달라졌다.

그녀에게도 욕심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빈궁이라는 존귀한 자리, 왕실 여인이라 누리는 호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하나.

한 사내.

그녀의 유일한 정인.

형운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옆자리는 늘 자신의 것이길 원했다.

그런데…….

형운이 다른 여인을 만나러 왔다.

뜻하지 않은 장소, 예상 밖의 상황에 이레는 굳어버렸다.

충격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사가 가슴을 날뛰게 하였다.

그런 이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사슴이 형운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곳에 앉으세요.”

이레의 옆자리.

“실례하겠소.”

자리에 앉는 형운의 모습을 너울 너머로 바라보자니, 이상스레 속이 답답하였다.

이레는 찻잔을 들어 미지근해진 차를 단숨에 마셨다.

그러는 사이, 사슴이 형운을 위해 새 찻잔을 내왔다.

빈 찻잔에 찻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내가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소.”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

재차 형운의 존재를 확인한 이레가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 어떤 사이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제가 반가운 마음에 미처 소개를 잊었군요.”

사슴은 뒤늦게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발그레한 빛으로 변한 뺨.

가늘게 여며진 초승달 모양의 눈매.

영락없이 연모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이분은 저의…….”

이레는 사슴의 빨간 입술을 바라보았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인이십니다.”

“…….”

이레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은인이라. 무에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었습니까?”

“있었지요, 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일이…….”

사슴의 눈빛은 전에 없이 아련해졌다.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어느 날, 심심풀이로 세책방에 들렀을 때였지요. 새로 들어온 서책을 살피는데, 몇몇 선비님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

이레는 침묵한 채 사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풋사과를 베어 문 듯 상큼한 표정으로 사슴은 이야기를 이었다.

“사실, 제 사주가 평범하지 않아 평소에도 그런 일이 잦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선비님들의 짓궂음이 과하더군요. 세책방에서는 물론이고, 돌아오는 내내 치근거리더니, 인적이 뜸한 곳에 이르자 갑자기…….”

사슴의 말끝에 한숨이 푸욱 담겼다.

더는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을지 능히 짐작되었다.

“저런, 많이 놀랐겠습니다.”

이레의 걱정 섞인 말에 사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형운을 향해 정이 담뿍 담긴 눈길을 보냈다.

“그때 나리께서 온정을 베풀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험한 일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순라군들이 순시 돌던 시간이라. 굳이 내가 아니라 하여도 큰일은 없었을게요.”

“아닙니다. 그 선비님들의 차림이 예사롭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위세 등등한 집안의 분들이셨을 것입니다. 권세가의 사내들을 고작 순라군들이 어찌하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지경이랍니다.”

“그저 지나다 당연한 일을 행한 것일 뿐이니. 그리 깊게 생각지는 마시오.”

“그런 말씀 마시어요. 나리의 그 모습, 소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저를 위해 기꺼이 주먹다짐을 마다치 않던 나리의 모습이 꿈에까지 나온답니다.”

사슴은 형운에게 상체를 한껏 기울이며 요염한 눈빛을 흘렸다.

형운은 담담하게 차를 마셨다.

딱히 그녀의 살가움을 반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해하거나 내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이런 것을 인연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사슴의 눈썹이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높아졌다.

반면 이레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 흔들리지 않았다.

“듣고 보니 특별한 인연이 있었군요.”

이레의 말을 끝으로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였다.

누각의 아래쪽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사내들의 험악한 외침.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사슴이 시동을 불러 물었다.

“귀한 분들이 오신 자리다. 대체 무슨 일로 이리 소란인 게냐?”

“관복 입은 무사님들이 잔뜩 몰려왔습니다요.”

“관복 입은 무사들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잠시 살펴보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를 구한 사슴이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사라지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레도 몸을 일으켰다.

“저도 다른 볼일이 있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작별인사를 건넨 이레가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막 형운의 곁을 스쳐 지나칠 때였다.

“잠깐.”

내내 침묵한 채 앉았던 형운이 불현듯 이레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

마치 그의 말이 주문(呪文)이라도 된 듯, 이레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꼼짝할 수 없었다.

***

상상하지 못한 형운의 행동.

평소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이레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운이…… 낯선 여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이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분명, 여인과 시선조차도 제대로 맞추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지금껏 알던 모습과 전혀 다른 면모에 이레는 당혹스러웠다.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놀란 기색을 애써 숨긴 채 이레가 질문을 던졌다.

형운은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내가 이러는 연유를 정녕 모르시오?”

의미심장한 그의 물음.

너울 뒤에 자리한 이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그때, 형운의 목소리가 너울을 뚫고 이레의 귓가에 다시 들려왔다.

“어이하여 날 모른 척하는 것이오?”

“……!”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걸까?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서먹하게 대하는 연유가 궁금하오.”

그의 추궁에 이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간신히 마음을 억누르며 이레가 물었다.

“우리가…… 언제 만났던가요?”

두려웠다.

형운이 무어라 답할지 무서웠다.

아니, 차라리 그가 눈치챈 것이라면 좋겠다.

그편이 오히려 더 속 시원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이뤄온 일들이 와르르 무너질지 몰라도.

당장 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풀리지 않을까?

곧 형운의 대답이 들려왔다.

“벌써 잊은 것이오? 지난번, 세책방에서 만나질 않았소.”

“……아!”

이레는 저도 모르게 낮게 탄성을 흘렸다.

예전, 이레가 만사여의로 변복하여 시전 거리를 활보할 때.

우연히 형운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와 만난 곳도 세책방이었구려. 한데, 오늘도 만사여의 차림이로군. 진짜 만사여의는 어찌 된 것이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오?”

형운은 진짜 만사여의를 알고 있었다.

엉뚱한 사람이 만사여의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사정이 있어 이런 모습입니다. 진짜 만사여의께선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형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원하는 답을 들었다는 듯 그는 이레의 소맷자락을 풀어주었다.

담담한 미소와 담백한 해방.

다행이다…… 머리에선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쪽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무언가 섭섭하고 서운하였다.

“가시려고요? 마침 급히 전할 소식이 있답니다.”

때마침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슴이 이레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지금 밖에서…….”

이레의 표정이 급변하였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이레는 급히 방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형운이 사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사소한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나리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그렇소?”

형운은 차를 마셨다.

어느새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슴이 빈 찻잔을 웃음으로 채워주었다.

“나리를 이렇게 뵈오니 소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여유가 있으시옵니까? 나리께 들려드리고 싶은 말이 무척 많답니다.”

“미안하오. 오늘도 바쁜 일이 있어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소.”

“참으로 슬프고 아쉽습니다. 언제쯤 제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실 것이온지요?”

“그대는 이미 충분히 갚았소. 오늘은 지난밤, 평온히 잘 돌아왔는지 궁금하여 찾은 것뿐이라오. 다행히 별 탈 없는 모양이니, 이만 돌아가리다.”

형운이 몸을 일으켰다.

사슴이 그의 팔에 매달렸다.

“긴히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그 이야긴 다음에 듣기로 합시다.”

“십학사, 그들에 관한 또 다른 소식을 들었답니다.”

십학사라는 말에 형운의 눈빛이 변했다.

“어떤 이야기요?”

“우연히 다른 기녀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지난밤에 모신 선비들이 십학사를 언급하더라고요.”

“……자세히 말해보시오.”

***

반 시진 후.

사슴과 헤어진 형운이 기루를 벗어났다.

하나둘 꺼지는 시전의 불빛 사이를 홀로 얼마나 걸었을까.

발소리도 없이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하.”

형운만이 들을 수 있는 예의를 갖춘 낮은 목소리.

“인모로구나. 따라붙는 자들은 없느냐?”

“돌아갔음을 확인했습니다.”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루의 여인에 관해 확인해 보았느냐?”

“아무래도 십학사와 관련된 자인 것 같사옵니다.”

“단순히 십학사에 관한 소문을 전하는 자가 아니다?”

“낮 동안의 움직임에 묘연한 구석이 많습니다. 제법 실력 있는 아이들을 붙였음에도 종적이 놓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사옵니다. 주위에 감시하는 눈길도 적지 않으니, 범상한 여인은 아닌 듯합니다.”

홍인모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쩌면 세책방에서의 사건도 의도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놀라운 보고에도 형운의 반응은 담담했다.

“술과 여인이 있는 곳에 비밀은 없다. 하지만 평범한 기녀가 십학사에 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의심할 수 있겠지.”

“전날, 십학사와 관련 있는 이들의 모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에 향했던 곳에서 심환지의 여식이 사라진 것도…….”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는 의도였을 터.”

“십학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예상보다 높은 위치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가 어이하여 동궁 저하께 접근한 것인지…….”

“동태를 살피려 한 것이겠지. 그도 아니면…….”

형운은 어둡게 변한 이레의 안색을 떠올렸다.

어쩌면 저 여인이 진정으로 노린 것은 또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부의 균열.

형운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그 여인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해선 아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십학사의 다른 동향은 잡히지 않느냐?”

“심 교리와 관련한 사건 이외엔 잠잠합니다.”

한동안 스스로를 드러내며 활보하던 자들이 홍인한의 몰락 이후로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적이 어두운 곳에 숨어 도사린 형국이니, 형운으로서는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터.’

권력에 관한 그들의 탐욕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지금 당장은 음지에 엎드려 있을지 몰라도 놈들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더 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치명적인 흉계를 품고.

형운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아픔은 한 번으로 족했다.

두 번 다시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리라.

“저하.”

홍인한의 목소리가 형운의 상념을 깨웠다.

“더 할 말이 있느냐?”

“그분께서 오해하지 않으실까요?”

‘그분’이란, 이레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기녀와 형운이 함께 한 모습을 보고 엉뚱한 오해는 하지 않을까.

홍인한은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형운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째서 명확히 해명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홍인모의 물음에 엉뚱한 대답이 들려왔다.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손해라니요?”

“그 사람도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이 많은데, 나만 속을 훤히 드러내면 왠지 억울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만사여의로 알려진 여인이 이레임은 이미 오래전에 눈치챘다.

그럼에도 형운은 이레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슬기롭고 속 깊은 여인이니.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하지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좀처럼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형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네?”

무엇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정작 형운은 뒷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장난기 가득한 이채가 서렸다.

‘그 사람의 눈빛, 그 표정……. 늘 평온한 호수 같던 사람이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보았다. 오해가 빚어낸 그 표정을,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입술을 뾰족하게 내민 이레를 떠올리며 형운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옵고, 저하.”

홍인모가 보고를 이었다.

“저하께서 내실에 계시는 동안 밖에서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레가 그 일에 관한 소식을 듣고 급히 자리를 떠난 일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었느냐?”

“사헌부의 어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한 사람을 추포했습니다. 한데, 그 사람이…….”

이어진 홍인한의 말에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누가 잡혀갔다고 하였느냐?”

***

쏴아아아.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갈대가 휘청거렸다.

정후겸은 느른한 눈길로 갈대의 속삭임을 지켜보았다.

“아직 마시고 계십니까?”

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정후겸은 취기 오른 고갯짓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는 돌아갔는가?”

맞은 편에 앉은 사슴이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돌아갔습니다.”

“오늘도 오래 있지 않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쉬운가?”

“사람의 인연이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겠습니까. 소녀는 그저 돌을 쌓듯, 하루하루를 얹어갈 뿐이지요.”

“인연이라. 남의 사람을 가로채는 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옷깃만 스쳐도 삼생의 연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랬는가?”

“무얼 말입니까?”

“간밤의 일…….”

이내 정후겸의 바싹 메마른 시선이 순진한 듯 보이는 그녀와 맞닿았다.

“이번엔 지나쳤다.”

“절 믿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큰일을 도모하는 그곳에 그를 데려갔단 말이냐?”

“그 사람을 회유하려면, 그 정도의 위험은 마땅히 감수해야 했습니다.”

“잘못하여 일을 망쳤으면 어찌하려고?”

“잘못되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사전에 나와 논의했어야지. 큰 계획을 망치는 건 언제나 작은 변수임을 잊었느냐?”

“그분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분이 허락하였다는 말에 정후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네가 원하는 게 무어냐?”

사슴은 술병을 기울여 몇 방울을 식탁 위에 떨어뜨렸다.

“붓을 들면 먹이 묻고, 술을 따르면 주향이 머물기 마련이지요. 저는 주향입니다. 다음 날이면 허무하게 흩어질 술의 잔향. 이 하찮은 인생이 처음으로 욕심을 품었습니다.”

“녹아.”

“걱정하지 마시어요. 해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분이 십학사의 그늘에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누가 알겠습니까? 제가 그 일을 해낼지.”

“그는 다르다.”

사슴이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그렸다.

“동궁은 사내 아니랍니까?”

사슴의 자신에도 해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유, 분위기가 왜 이리 삭막하대유?”

순박한 목소리와 함께 더벅머리 사내가 나타났다.

거북 박진봉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던 사슴의 표정이 냉령하게 변했다.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이지?”

“나가 이런 곳에 무신 볼일이 있어 왔겠슈. 다 부르는 분이 왔으니 온거쥬.”

박진봉이 정후겸을 눈짓했다.

저 사람이 불렀슈.

눈으로 대꾸한 박진봉은 은근슬쩍 사슴의 곁에 앉았다.

사슴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두 분께서 말씀 많이 나누세요.”

박진봉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게 뭔 경우 없는 짓이래유. 사람이 오자마자 횅하니 나가버리면, 날 싫어하는 줄 오해하잖유.”

“오해? 이참에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대가 싫어.”

박진봉이 씨익,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유? 왜 나가 싫대요? 나가 백정이라 그런거유?”

“그대가 어디 평범한 백정이냐?”

“그럼 무신 백정인데유?”

“망나니.”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한 사슴의 말에도 박진봉은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에유, 백정이면 백정이지. 짐승 백정이 어딨고 사람 백정이 어딨대유. 그렇게 다르지도 않아유, 소 돼지나 사람이나. 그러니께…….”

“그래서 내가 그대를 싫어하는 거야. 그나저나……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지?”

“뭐가유?”

“내 팔!”

사슴이 박진봉의 손을 뿌리쳤다.

얼마나 강하게 잡았는지 그녀의 여린 손목에 손자국이 남았다.

박진봉은 능글맞게 웃었다.

“미안하게 됐슈.”

사슴은 그를 앙칼지게 노려보곤 밖으로 나갔다.

“엥간히도 나가 싫은 모양이네유. 근디 워떡하다 싸웠슈? 평시엔 죽이 잘 맞는 것 같더니유.”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보다 물건은?”

“그게 말이쥬…….”

박진봉은 미련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조금 곤란한 상황이 생겼네유.”

“곤란한 상황?”

창밖을 보던 정후겸이 고개를 돌렸다.

물건은 귀한 손님을 설득할 중요한 빌미였다.

“무슨 일이냐?”

박진봉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누가 우리 물건을 채간 것 같슈.”

“……어떻게 된 일이냐?”

물어보는 정후겸의 표정은 술잔을 채운 술만큼 차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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