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단초(端初)
얼마 후.
“이곳입니까?”
이레의 물음에 기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다.”
금정의 도움으로 이레는 저녁이 되기 전에 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라버니 기대의 안내에 따라 도성 외곽의 으슥한 초가에 도착한 그녀는 세세한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니까 이곳에 그 사람들이 있었단 말입니까?”
초가 안으로 들어서며 이레가 물었다.
“그래, 날 납치한 자들이 여기 있었다.”
“하면 그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 뒤꼍에 있는 기둥에 잘 묶어 두었다.”
기대가 초가 뒤편을 가리켰다.
서둘러 그곳으로 가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군요.”
이레의 말처럼 기대가 사로잡았다는 납치범들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의 묶었던 것으로 보이는 밧줄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뿐.
정작 사람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럴 리 없는데. 이놈들이 어떻게 빠져나갔지?”
“포박이 엉성했던 건 아닙니까?”
이레의 물음에 기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큰소리쳤다.
“어허! 지금 날 의심하는 것이냐? 내 포박술이 그냥 포박술이 아니야. 조선 최고의 달인에게서 배운 최고의 포박술이란 말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레 역시 알고 있었다.
기대가 배운 포박술.
포박술에 관해서라면 조선 최고의 실력을 지닌 서강율에게서 배운 포박술이었다.
그러니 포박당한 자들이 스스로 풀고 달아나긴 어려웠다.
“스스로 포박을 푼 게 아니라면, 패거리가 더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온종일 지키고 있었는데.”
기대는 투덜거리며 납치범들을 묶은 기둥과 그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한순간.
“어?”
문득 그의 미간이 한데 모였다.
“뭔가 발견했습니까?”
“이걸 보아라.”
기대는 바닥을 가리켰다.
희미한 핏자국이 기둥에서부터 밖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런 흔적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개였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무래도 오라버니가 잡은 자들과 그들을 데려간 자들은 같은 패거리가 아닌 모양입니다.”
곳곳에 남겨진 흔적은 손발이 묶인 사람을 강제로 끌고 나간 흔적이었다.
때로 심한 저항의 표식들도 남아 있었다.
기대와 이레는 끌려나간 사람들의 흔적을 쫓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포댓자루를 끈 듯한 흔적은 초가 뒤편의 허름한 헛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대는 손을 들어 이레를 멈춰 세웠다.
“너는 예서 잠시만 기다려라.”
어느새 단도를 꺼내 손에 쥔 채 기대는 홀로 헛간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라.”
싱긋, 미소로 이레를 안심시킨 기대가 헛간 안으로 사라졌다.
이레는 초조한 마음으로 오라비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기대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헛간을 나왔다.
“아무래도 단순한 납치사건이 아닌 모양이다.”
“무얼 보신 겁니까?”
“보지 마라, 이레야.”
그는 헛간으로 들어가려는 이레를 잡았다.
헛간에서 진동하는 쇳내와 불길한 혈향.
이레는 납치범들에게 불행한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방식, 역시 그자들이다.’
심환지의 여식을 납치하라 지시한 자들은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무자비한 자들임이 틀림없었다.
잔인무도한 손속과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뒤처리.
절로 하나의 이름이 이레의 뇌리로 떠올랐다.
십학사.
‘예상대로 그들이 틀림없구나.’
이레는 이번 사건의 배후에 십학사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나저나 저놈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이제 어찌한다?”
기대의 혼잣말에 허탈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납치범들을 심문하여 배후를 밝힐 작정이었다.
하지만 납치범들은 누군가에게 영영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니 배후를 밝히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사건의 유일한 실마리였건만.
“어쩔 수 없지. 그만 돌아가자꾸나.”
낙담 가득한 기대의 말에 이레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요, 오라버니.”
“네 마음은 알겠지만, 어쩔 수 없질 않으냐. 여기선 딱히 건질 게 없다.”
“…….”
이레는 침묵했다.
기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겉보기엔 게으르고 허술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오라버니지만, 무언가에 집중할 땐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게 또한 그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히 주변을 살피는 사람이 바로 기대였다.
그러기에 이레는 늘 기대의 말을 믿고 신뢰하였다.
하지만…….
“어린 여아가 납치된 사건입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도 보았듯 사건의 단초가 될 만한 것이 모두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질 않으냐.”
절망하는 기대에게 이레가 말했다.
“있습니다.”
이레는 소매 속의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아직 있습니다, 단초가.”
***
저녁 무렵.
화려한 가마 한 대가 시전의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한창 사람들로 붐비는 시각에 나타난 가마인지라.
행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누구야?”
“누가 이런 시각에 가마를 타고 다니는 거야?”
투덜대는 행인들 사이로 시전 상인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가마…… 만사여의의 가마가 아닌가.”
“그러게.”
“만사여의가 타고 다니는 가마가 틀림없네.”
시전의 가장 비밀스러운 존재, 만사여의.
시전상가의 삼 할을 차지한 여자부란 사실만 알려졌을 뿐.
어디 사는 누구인지, 나이는 몇인지.
심지어 진짜 여인인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모든 것이 철저히 비밀에 싸인 존재였다.
그런 만사여의가 조금씩 자신을 드러냈다.
그녀의 가마가 시전을 활보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여전히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녀의 본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소문으로만 떠돌던 만사여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한동안 뜸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밤에 다 납시었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러게나 말일세.”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긴한 볼일이 있는 모양일세.”
여기저기서 상인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의 예측대로 만사여의가 시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당히 긴요한 볼일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레야, 정말 이곳에 있을까?”
가마를 호위하며 괜히 주위 행인들에게 눈을 부라리던 무인이 가마의 작은 창문을 향해 속삭였다.
가마 안에서 단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그럴 겁니다. 오라버니.”
만사여의와 호위.
두 사람은 이레와 기대였다.
간밤에 기대가 납치되었던 초가를 떠난 두 사람은 곧장 수월로 향했다.
그곳에서 둘은 한서로의 도움을 받아 만사여의와 호위무사로 변장할 수 있었다.
“정말 이곳에 사건의 단초가 있단 말이냐?”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부지런히 이동한 가마가 멈춘 곳은 시전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기루, 금옥관(金玉館).
기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인간말종 같은 놈들이……!”
납치된 여아가 기루에 팔린 것이라 오해한 기대가 버럭 성화를 부렸다.
서둘러 이레는 오라비를 말렸다.
“진정하세요, 오라버니. 그 아이는 이곳에 없습니다.”
가마 문을 열고 나오며 이레가 말했다.
화려한 복색에 긴 검은 너울을 쓴 여인의 등장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기대가 허리에 찬 검을 슬며시 치켜들었다.
그 소리 없는 겁박이 통한 것일까.
이레에게 몰린 시선이 뿔뿔이 흩어졌다.
오라버니의 엉뚱한 견제에 이레는 속으로 웃었다.
‘장검은 쓸 줄도 모르시면서…….’
기대는 검을 잘 다루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팔보다 긴 장검 쓰는 것에 서툴렀다.
비검, 표창, 단도, 화살까지…….
짧고 던질 수 있는 무기는 뭐든 귀신같이 다루면서도 유독 날이 긴 장병기를 쓰는 건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당장 사달이라도 낼 것처럼 저리 분위기를 잡고 있지만, 정작 검을 휘두르라 하면 허둥댈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 없다고……요?”
“네. 이곳에 있지 않을 겁니다.”
이레와 기대는 사람들의 이목을 의식하여 진짜 만사여의와 호위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어째서 이곳으로 온 겁니까?”
“만나볼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이레가 말했지만, 어림없다는 듯 기대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불안해하는 기대를 남겨둔 채 이레는 기루의 안쪽에 위치한 이 층 누각에 올랐다.
이 층 누각은 한산했다.
몇몇 손님이 있긴 했지만, 딱히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금주령이 내린 터라.
도성에서 이름난 기루라 하여도 상황이 딱히 좋은 건 아니었다.
누각 한쪽에 모인 사내들도 분명 술 대신 차를 마시고 있을 터.
한데, 바람에 은은하게 실려오는 주향(酒香)은 어찌 된 것일까?
“어떻게 오셨소?”
풍채 좋은 중년인이 이레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서 선연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여인이 홀로 주루를 찾는 경우도 드문데, 하물며 검고 촘촘한 너울까지 쓰고 있으니.
수상쩍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의 주인을 만나러 왔소.”
이레의 요구에 중년 사내가 가슴을 활짝 폈다.
“내가 바로 그 주인이오만.”
스스로를 주인이라 칭하는 사내를 이레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무슨 용무로 날 만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그쪽과 딱히 만날 약조를 한 것 같지 않은데.”
사내는 침묵하는 이레에게 삐딱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임 행수, 그분은 제 손님입니다.”
누각의 계단 아래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 행수라 불린 중년 사내가 서둘러 허리를 접었다.
이윽고 이레가 서 있는 이 층 누각으로 연분홍빛 복숭아꽃이 한가득 수자 놓인 살굿빛 치마와 노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학사의 사슴.
지난밤 형운과 함께 있던 여인이 화사한 웃음을 흘리며 이레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만사여의.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로군요.”
***
사슴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이레를 안쪽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안내했다.
어린 여종이 차를 내왔다.
딸그락.
여종은 찻잔을 내려놓고 방안의 작은 화로에 물 끓이는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여종이 물러간 뒤, 방안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찻물이 끓고, 찻잔을 데우고, 차를 우리는, 일련의 과정이 다 끝날 때까지 침묵은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슴이었다.
“많은 분이 절 찾았지만, 사내가 아닌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군요.”
“제가 놀라게 했나요?”
이레는 사슴이 건넨 찻물에 입술 끝을 담갔다.
“웬걸요. 색다른 경험이라 낯설고 설레는걸요.”
사슴이 긴 입술을 늘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천하의 만사여의께서 인사차 절 찾으셨을 것 같지는 않고. 무슨 볼일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단도직입적인 질문.
이레도 쓸데없는 인사치레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소맷자락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나요?”
사슴과 나비가 수자 놓인 바로 손수건이었다.
“어머!”
손수건을 본 사슴의 눈가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렇잖아도 영영 잃어버린 줄 알고 애가 탔던 차였는데. 어디서 이걸 찾으셨습니까?”
“우연히 나무에 걸려 있는 걸 발견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리 고마울 데가.”
손수건이 사슴에게로 돌아갔다.
이레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이 손수건을 빌미로 사슴을 찾아오긴 했지만, 정작 용무는 다른 것이었다.
사슴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제일 궁금하고 알고 싶은 건…….
그 밤, 그 사내와 왜 그곳에 함께 있었는지.
어쩌다 그와 함께 있게 되었는지.
묻고 싶고,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그 질문은 좀 더 뒤로 미뤄야 했다.
민감한 질문으로 대화의 맥을 끊어놓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종된 여아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일, 십학사에서 한 일이겠죠?”
“무슨 일 말인가요?”
“어젯밤, 홍문관 교리의 금지옥엽이 실종되었다더군요.”
“저런, 슬픈 일이군요.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길 기원하겠어요.”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사슴의 말간 눈동자에 안타까운 기색이 들어찼다.
그러나 이레는 투명한 눈빛에 속지 않았다.
“한데, 사건 현장 근처에 그 손수건이 있었습니다.”
“그랬던가요? 참으로 신기한 우연도 다 있군요.”
“과연 우연일까요?”
이레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사슴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우연이 아니라면요?”
“새로운 구름이 될 분의 심지가 보통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고집이 이만저만한 사내가 아니라더군요.”
“그를 흔들 수 있는 방도가 꼭 한 가지 있다던데…….”
“그래요?”
“뒤늦게 본 늦둥이를 그리 아낀다더군요.”
“그렇군요.”
“십학사에 꼭 필요한 사람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이었나요?”
넌지시 던진 미끼.
이레의 물음에 사슴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다 한순간.
이레를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이며 사슴은 하얀 이를 드러냈다.
“하하, 참 대단한 분이시군요.”
“…….”
“회합에서도 자세한 계획은 말하지 않았는데, 그걸 어찌 소상히 아십니까?”
예상대로 십학사의 소행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안심이다.
홍문관 교리, 심환지를 십학사로 맞이하기 위한 방도로 아이를 납치했다면 아이는 분명 무사하리라.
아니, 아이는 솜털 하나 다쳐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아이를 어디에 숨겼을까, 하는 점이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대화를 이끌어야 해.’
심환지를 십학사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의 여식을 안전하게 구해 와야 한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자신의 당파의 이익과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을 위한 싸움은 이미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다.
노론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른 심환지.
그가 노론의 대표가 되어 형운의 앞날을 사사건건 방해하게 둘 순 없었다.
정적(政敵)으로 인해 매번 무너지고 부서지는 형운의 모습일랑, 보고 싶지 않았다.
속마음을 감춘 채 이레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심지 굳은 분을 어찌 끌어들일까 궁금했는데,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 있었군요.”
“저야말로 감탄하였어요. 단순히 상술에만 능한 줄 알았더니. 만사여의께선 다른 수완도 대단하신 모양이어요. 시전상가의 삼 할을 차지한 게 단순히 운만은 아니로군요.”
상인을 대변하는 만사여의와 밀주(密酒)와 기루를 대표하는 사슴 간의 치열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이제부터 사소하게 오가는 웃음과 대화는 벼린 칼싸움만큼이나 날카롭고 치열한 심기가 담겨 있으리라.
하지만 팽팽한 공기는 엉뚱한 사람의 등장으로 허무하게 종식되었다.
“안에 있소?”
사내의 음성과 함께 긴 그림자가 밀실로 들어왔다.
“이런, 선객(先客)이 있었군. 실례하였소. 다음에 다시 오리다.”
돌아서는 사내를 사슴이 다급하게 붙들었다.
“아니어요. 전혀 실례하지 않았습니다. 이리 와 앉으십시오.”
“나는 괜찮소.”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사슴의 막무가내에 사내는 난처한 얼굴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내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이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검은 너울을 쓴 이레 역시 사내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겉으로 보기엔 태연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너울 속에 숨은 이레의 낯빛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내를 보는 순간, 갑자기 숨통이 꽉 틀어 막힌 듯했다.
그런 이레를 향해 사내가 웃음을 보였다.
“어쩌다 보니 합석하게 되었소. 언짢았다면 용서하오.”
여유로운 인사말을 건네는 사내, 형운.
그는 이 나라의 동궁이자, 이레의 단 하나뿐인 정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