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64화 (164/215)

#164. 낙화(落花)의 의미

“이게 무엇입니까?”

이레의 손수건이 형운의 눈앞에 팔랑거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각기 다른 우주를 담은 그의 시선이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이레는 입술을 말아 물고 형운을 응시했다.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짧고도 긴.

찰나 같은 순간과 억겁처럼 영원할 것 같은 긴 시간이 동시에 흘렀다.

“이 손수건…….”

마침내 형운의 입이 열렸다.

“어디서 구했소?”

깊은 서사를 품은 그의 검은 동공이 이레에게로 돌아왔다.

“지난밤…….”

이레의 숨결이 절로 가빠졌다.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보았습니다.”

찬바람 공허하게 떠돌던 밤의 깊은 웅덩이.

그곳에 우두커니 선 거대한 나뭇가지 가지에서.

불현듯 형운의 한쪽 눈매가 위로 추켜 올라갔다.

“빈궁, 간밤에 그곳에 있었던 것이오?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이레는 형운의 말허리를 잘랐다.

중요한 건 손수건의 출처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궁금한 건 손수건의 의미였다.

이 손수건의 주인과 형운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저는 저하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 손수건의 주인과는 어찌 아는 사이입니까?”

빈궁으로 당연한 질문이었다.

당당한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레의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가파른 언덕을 달음박질한 사람처럼 심장이 무섭게 날뛰었다.

이레는 입안까지 차오른 거친 숨을 애써 참았다.

파랗게 질려가는 그녀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 형운은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굳게 닫혔던 일(一)자 모양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그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건…….

“하하하.”

청량한 바람 같은 웃음소리.

한껏 긴장했던 이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작은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다, 그녀의 오해를 단호히 부정하는 형운의 모습.

맞다, 그럼에도 당당한 형운의 모습.

그것이 왜 궁금한가, 되려 뻔뻔한 형운의 모습.

아니면 화를 내는 그의 모습까지…….

수십, 수백 가지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려보았다.

단 하나, 이리 웃는 것만 빼고.

형운은 대답 대신 웃음을 내어놓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형운이 성큼 다가왔다.

“왜, 왜 이러십니까?”

머리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에 놀라 이레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형운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들었다.

불쑥 터트린 웃음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눈동자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처음이오.”

“…….”

무엇이……?

무엇이 처음이란 말입니까?

“빈궁도…… 은랑에게도 이런 표정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소.”

이런 표정?

이레는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지금의 내 표정이 어떠한데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고민하던 이레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저는 이 손수건이…….”

“나쁘지 않소, 그대의 이런 표정.”

“저하!”

“또 보고 싶을 만큼, 상당히 마음에 드오.”

심각한 이레의 마음과 달리 형운의 얼굴엔 유쾌한 웃음이 가득했다.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터라.

이레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형운의 저 웃음, 대체 무슨 뜻일까?

긍정의 표현일까?

아니면, 자신을 믿지 못한 이레에 대한 불만의 표현?

혹시 웃음으로 난처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것일까?

“아! 그리고 그 손수건 말인데…….”

꼴깍.

이레는 저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지해버린 시간 속.

드디어 형운이 입을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건…….”

“두 분, 여기 계셨군요.”

고아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긴장했던 공기가 파스스 깨지며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두 사람의 곁으로 은은한 목련향이 밀려들었다.

결국, 형운의 해명은 들을 수 없었다.

***

“이곳에 계셨군요.”

해사한 화완 옹주의 웃음이 아침 햇살처럼 부서졌다.

황금빛 빛살을 화관처럼 머리에 인 옹주의 등 뒤로 제법 거칠고 시린 가을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잘게 어깨를 떠는 옹주의 몸짓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옹주마마께서 어찌 이곳에 계시옵니까?”

서둘러 손수건을 당의 자락 안으로 갈무리한 이레는 염려 섞인 눈빛으로 옹주를 바라보았다.

어제 아침, 내명부 여인들 모두가 온궁으로 행차하였다.

영빈 마마의 무릎 병을 고치기 위한 처방이었으나, 실상은 사계절 내내 궁에 갇혀 지내야 했던 궁궐 여인들에게 오랜만에 허락된 여행이었다.

그 속엔 화완 옹주의 가마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더랬다.

다시 돌아온 옹주의 모습에 형운과 이레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혹여 행차 중에 사고라도…….”

형운의 물음에 화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동궁. 아무 일도, 어떤 사고도 없었습니다.”

옹주는 이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행차 내내 어마마마께서 빈궁에 대한 걱정을 끊이지 않고 하시지 뭡니까. 빈궁 홀로 궁에 남겨두고 온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셨나 봅니다.”

“영빈 마마께서 제 걱정을 하셨단 말입니까?”

“어마마마는 여식인 저보다 빈궁을 더 걱정하고 염려한답니다. 때때론 질투가 날 정도예요.”

“그러셨군요.”

“그런 어마마마인데, 빈궁 홀로 궁에 두고 왔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셨을까요. 결국, 보다 못해 제가 가마를 돌렸답니다. 이 화완이라도 궁에 있으면 어마마마의 근심이 줄어들까 하여서요.”

“이런, 괜한 걱정으로 옹주의 궁 밖 나들이를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괜히 궁으로 돌아와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였군요.”

이레와 형운을 번갈아 보는 화완의 눈가에 짓궂은 미소가 그려졌다.

뒤늦게 이레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옹주마마, 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호호호, 우리 빈궁께는 농을 못 하겠습니다.”

옷고름으로 입가를 훔치며 화완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두 분 모습,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이레는 잠자코 시선을 깔았다.

보기 좋다는 말이 오늘만큼 아프고 무겁게 와 닿을 수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형운은 저 말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정수리 위에서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구름처럼 흘러갔다.

“주상 전하께 아침문안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제가 때맞춰 잘 왔군요. 마침 저도 전하의 침전으로 가는 길이니…….”

화완은 초승달 모양으로 눈가를 여몄다.

“빈궁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저와 함께 아침문안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질문은 이레에게 하면서도 정작 화완의 시선은 형운에게 머물렀다.

형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모습이 어미가 제 새끼를 지키려는 그것과 흡사한지라.

이레는 얼른 옹주와 형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시지요, 옹주마마. 저하, 괜찮으시지요?”

이레까지 가세하여 부탁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형운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수긍했다.

“그럼, 저 먼저 주상전하의 침전으로 갈 것이오니. 두 분은 천천히 오시지요.”

무에 미련이 남은 듯한 시선으로 이레를 바라보던 형운이 몸을 돌렸다.

동궁과 동궁전의 궁인들이 왕의 침전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레와 화완 사이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침묵 끝.

화완이 먼저 발걸음을 뗐다.

“궁 생활은 어떠하십니까?”

“좋습니다.”

“어수선한 시절이라, 빈궁께서 불편한 것이 많을 겁니다. 뭐든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시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누리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생긋 미소를 보인 화완이 혼잣말을 이었다.

“부디 그 마음, 잃지 않아야 할 터인데.”

“네?”

“그보다…….”

화완 옹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레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좀 전엔 동궁과 무슨 이야길 그리 진지하게 하시었나요?”

“별일 아닙니다.”

이레는 당의 자락 뒤로 감춘 손에 힘을 주었다.

“먼발치에서 보기에 빈궁과 동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무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뭡니까.”

옹주는 영문모를 미소를 흘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지나가는 풍경들이 을씨년스러웠다.

화사한 꽃들로 만발했던 화원에도 바싹 마른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초라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완 옹주의 입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마 전까지 이곳은 각양각색의 꽃으로 화려하였건만. 이젠 모두 져버리고 말았군요.”

“자연의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힘겹게 싹을 틔워 화사한 꽃을 피웠으니, 이젠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쉬는 것일 테지요.”

“순환이라. 하지만 꽃을 즐기는 제게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답니다. 하찮은 낙엽조차 계절이 지나도 여전히 발치를 뒹굴며 제 존재를 알리건만, 정작 가장 화려하여 눈길을 사로잡던 꽃들은 마른 잎사귀 하나 남지 못하니. 애써 꽃을 피운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리 떨어져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니. 세상사 허망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화완의 말이 가슴을 찔러왔다.

마치 지난한 고생 끝에 동궁빈이라는 지극한 위치에 오른 자신을 빗댄 것처럼 느껴졌다.

“꽃이 떨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빈궁께선 낙화(落花)에 다른 의미라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레는 바싹 마른 궁의 정원을 눈에 담았다.

“낙화란 또 다른 생의 시작이 아닐는지요.”

“또 다른 생이라…….”

“본디 풀이며 나무는 새싹으로 시작해 줄기를 뻗고 기둥을 세워 가지를 펼쳐야 비로소 꽃을 피웁니다. 그러니 어찌 낙화가 끝일 수 있겠습니까? 그저 떠나는 계절을 배웅하는 자연의 인사가 아니겠습니까. 돌아올 찬란한 계절에 다시 꽃을 피울 터이니. 다시 만나자, 다시 반갑게 인사하자는 또 다른 만남을 약조하는 자연의 징표. 저는 낙화를 그리 생각합니다.”

“자연의 징표라.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화완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가래 끓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왕의 침전이 가까워졌다.

화완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아바마마의 기침이 좀처럼 멎지 않는군요.”

“전하께선 쾌차하실 것이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나, 만에 하나 아바마마의 병환이 길어진다면…… 빈궁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라면……?”

“동궁은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화완은 야릇한 눈길로 말을 이었다.

“그 손수건.”

이레의 당의 자락 뒤편에 있는 손수건을 턱짓하며 화완은 말을 이었다.

“동궁과 관련된 손수건인 듯한데. 크게 개의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알잖습니까. 동궁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될 분. 어찌 한 사람이 그분의 마음을 독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화완은 왕의 침전 안으로 들어섰다.

“계절은 돌아와도 한 번 진 꽃은 다시 피지 않는 법. 꽃이 져버린 자리에 다시 피어나는 건 결국 새로운 꽃이니. 젊음과 영화 또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랍니다.”

힐끗, 이레를 돌아보는 옹주의 얼굴에 예의 빛살처럼 환한 미소가 걸렸다. 열두 폭 스란치마를 팔랑거리며 걸어가는 화완의 뒷모습은 화려한 범나비 같았다.

이레는 그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옹주의 미소와 걸음이건만.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연유가 무엇일까.

어찌하여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것일까.

***

왕에게 아침문안을 드린 이레는 빈궁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 아침, 빈궁전을 나설 때보다 머릿속이 더 복잡했다.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름 큰 결심을 하고 형운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그녀에게 보여준 건 의미 모를 웃음뿐이었다.

손수건을 바라보던 그의 묘한 눈빛.

그 눈빛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불편한 감정을 돌려 표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또 한 가지.

그렇지 않아도 버석거리던 이레의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화완 옹주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동궁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될 분. 어찌 한 사람이 그분의 마음을 독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화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옹주는 무언가 알고 있다.’

지나치듯 말하던 낙화와 손수건.

곱씹어 보건대, 결코 우연히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레를 향하던 화완의 미소.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미소가 틀림없었다.

어떻게 옹주가 손수건과 관련된 일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얼마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옹주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

이레를 보는 화완의 입가엔 늘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옹주의 눈빛.

입은 웃고 있었으나, 이레를 향한 옹주의 눈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자신에게 다정하지 않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오늘 옹주에게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 이상의 것이었다.

적의(敵意).

옹주가 보인 감정은 분명 적의였다.

오늘 아침, 빈궁전을 나설 땐 형운과 관련한 문제만 풀면 답답한 가슴이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화완 옹주의 문제까지 더해졌다.

어디 그뿐일까?

당장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이레는 깨달았다.

“하아.”

이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빈궁전의 중문을 넘었다.

대체 언제쯤 평온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구사일생 끝에 간신히 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전각의 돌계단을 올라가며 이레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할아버지들 조언대로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자.

이레는 엉킨 실타래 같은 머릿속을 털어내며 대청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때 빈궁전을 지키던 금정이 쪼르르 달려왔다.

“빈궁마마.”

“나 없는 사이, 별일 없었느냐?”

“별일은 없었는데…….”

금정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별스런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별스런 손님?”

“사가의 오라버니십니다.”

이레의 안색이 모처럼 밝아졌다.

“정녕, 오라버니가 오셨단 말이냐?”

지난밤, 갑자기 헤어진 이후로 기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어린 여아가 납치당하는 사건으로 걱정했건만.

다행히 무사했던 모양이다.

이레는 서둘러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금정의 말대로 기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오라버니.”

“당연하지요. 제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아셨습니까?”

“어찌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벼랑에 떨어지지 않나, 실종되질 않나, 음모에 휘말리지 않나. 좀처럼 평범하질 않으시니. 이번엔 또 무슨 일에 엮인 건 아닐까, 한 걱정이었습니다.”

“험험.”

기대는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사실이 그러한 터라. 이레의 지청구에 반박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금세 다녀온다고 나갔다가 연락 두절 되어 끝내 이레를 단양까지 다녀오게 하였다.

어디 그뿐일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큰 위기를 맞기도 했더랬다.

“이미 지나간 일을 새삼스레 입에 올리십니다.”

“혹여 간밤에도 엉뚱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가 하여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엔 그런 거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안도하며 이레는 오라비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젯밤엔 대체 어딜 가셨던 겁니까?”

속삭이는 이레의 질문에 기대도 속삭임으로 대답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그저……?”

“납치당했었습니다.”

“아, 납치…… 납치요?”

이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

행여 들은 사람이 있었을까.

기대는 황급히 이레의 입을 막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쉿! 누가 듣겠구나.”

다행히 금정이 빈궁의 처소 근처엔 아무도 못 오게 했던 터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목소리를 낮춘 이레가 기대에게 물었다.

“납치라니요.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그게 말이다…….”

기대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레가 손수건을 들고 골목 아래로 뛰어 내려갔을 때, 기대 역시 누이의 뒤를 쫓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에 성가신 인기척이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남의 집 담을 넘는 괴한들이 있더란 말이지.”

처음엔 기대도 그들을 무시하려 했다.

도둑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진 이레를 지키는 게 그에겐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필이면 그 괴한들이 몰래 숨어든 집이 바로 우리가 찾으려 했던 그 집이지 뭐냐.”

“우리가 찾으려 했던 그 집이라면…….”

십학사의 새로운 구름이 될 학사.

심환지.

바로 홍문관 교리의 집이었다.

“고민 끝에 발을 돌려 괴한들의 뒤를 따라갔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재빨리 잡은 다음에 네 뒤를 쫓으면 되겠다 판단한 거지.”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는 뭡니까?”

“괴한들이 사랑방이 아닌 작은 쪽방 쪽을 살피더구나. 그때 딱 감이 왔지. 이놈들 평범한 도둑이 아니로구나. 그래서 놈들이 관심을 가지는 방의 창문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단다.”

이부자리가 펼쳐진 작은 방.

딱히, 훔쳐갈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놈들이 노리는 게 뭘까?

다행히 아이의 방으로 보이는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

기대는 잘되었다 생각하며 이부자리에 들어가 자는 시늉을 했다.

괴한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래 관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온 그놈들이 이부자리에 누운 나를 그대로 보쌈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졸지에 보쌈을 당한 기대는 남의 등의 업힌 채 외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아이가 왜 이렇게 무거워’를 연발하는 도둑의 등에서 그는 이 황당하고 해괴한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고심했다.

“우선은 얌전히 숨죽이고 있기로 했다. 놈들이 어쩌면 아이들을 납치하는 몹쓸 놈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아이들을 납치하여 남에게 파는 흉악한 인신매매 무리가 존재했다.

기대는 괴한들을 그런 무리라 생각했다.

이레가 걱정되긴 했지만, 이참에 이 몹쓸 무리의 본거지로 들어가서 일망타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 시진 정도 흘렀나. 놈들이 드디어 본거지에 도착했지. 그곳엔 날 납치한 두 놈을 제외하고 늙은 놈 하나랑 산적처럼 생긴 놈들이 세 놈이나 더 있더구나.”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내가 누구냐. 은자원의 은마가 아니더냐. 이 오라비가 물 찬 제비처럼 뛰어올라 단숨에 놈들을…….”

기대는 자신의 활약상을 온갖 허풍과 과장을 섞어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이레가 관심을 둔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잠깐만요, 오라버니.”

“지금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내가 말이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오라버니께서 그 작은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갔을 때, 그곳은 이미 비어 있었다 하셨지요?”

“그랬지. 왜?”

“어젯밤, 그 집의 어린 여식이 납치되었습니다.”

“뭐?”

기대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 납치된 건 나뿐이다. 다른 아이는 없었다.”

“그럼, 사라진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오라버니를 납치한 자들이 그런 건 아닐까요?”

기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날 그곳에 납치된 사람은 나뿐이었다. 애초에 그놈들도 이상했어. 형편도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뭘 뜯어먹을 게 있다고 아이를 납치하는지 모르겠더구나.”

이레는 괴한들이 아이를 납치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원한 건, 아이를 미끼로 얻어낼 재물이 아니었다.

아이의 아비.

아이는 심지 굳은 홍문관 교리를 십학사의 학사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만, 이상한 건 괴한들이 침입하였을 때, 이미 아이는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십학사의 소행이 아니라면, 대체 아이는 누가 데려간 걸까.

“안 되겠다. 다시 가서 놈들을 족쳐봐야겠어.”

기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일어서는 거냐?”

“당연히 함께 갈 생각입니다.”

기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곳이 어디라고 네가 간단 말이냐? 그런 일이라면 나에게 맡겨라.”

“어제도 갔는데, 오늘이라고 못 가겠습니까?”

“어제는 특별한 연유가 있었던 거고. 네가 지금 어디 있는지 잊지 마라. 이레야, 너는 빈궁이다. 행여 네가 자리를 비운 걸 누가 알기라도 한다면 궐에 한바탕 폭풍우가 불 게야.”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 어찌 이곳에서 맘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말리셔도 전 갈 겁니다.”

이레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아니, 꼭 가야만 했다.

형운과 기녀 복색을 한 사슴.

실종된 심환지의 어린 여식.

화완의 의미심장한 말들.

그 모든 일이 단순한 우연일까?

“오라버니, 잠시만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금정아, 거기 있느냐?”

나갈 채비를 서두르는 누이의 모습에 기대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누굴 닮아 그리 막무가내인지 모르겠구나.”

“누굴 닮긴요. 오라버니를 닮았지요.”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천연덕스러운 이레의 말에 기대는 풀썩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이레도 그를 보며 웃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오누이의 미소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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