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너흰 이제 죽었다
이레의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형운을 향해 걷는 동안 머릿속이 아득했다.
그를 만나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무어라 물어야 할까.
그를 믿는다.
그를 믿고 있다.
늘 자신을 믿으라 하였다던 형운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믿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슴 저 깊은 곳에 작은 두려움이 작게 꼼틀거렸다.
만약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나온다면 어찌하나.
형운이…….
그녀가 그리도 믿고 신뢰하였던 그 사내가 ‘미안하다.’라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공들여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릴까 두려웠다.
지금이라도 아무것도 못 본 듯 돌아설까?
이 밤에 자신이 보았던 광경일랑, 그저 착각이라 믿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아름다운 과거에 묻혀 사는 게 행복할 수도 있다.
그래, 그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
그러나…….
이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물러서는 것 대신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훗날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지레짐작하여 오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으리라.
형운에게 직접 묻고, 그가 하는 말을 들으리라.
이레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좀 전까지 곤함으로 온몸이 천근만근이었건만.
어느덧 그녀는 어두운 골목길을 나는 듯이 치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비탈길을 내려가니, 좁은 골목길을 홀로 걷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푸른 도포를 입고, 흑립을 쓴 사내.
홀로 걷는 것을 보니, 함께 있던 기녀와는 헤어진 모양이다.
“잠시만요.”
이레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는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
가쁜 숨을 헐떡이는 사이 사내의 모습이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뒤늦게 이레가 도착했을 땐, 이미 사내의 모습은 사라진 후였다.
‘어디로 간 거지?’
직각으로 꺾인 골목길 끝엔 양쪽으로 갈라진 갈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어느 길로 간 걸까?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도, 도둑, 도둑이야!”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컹컹, 컹컹컹, 컹컹.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댔다.
잠들어 있던 마을이 부산스러워졌다.
웅크린 어둠 사이로 희미한 등잔불이 속속 새어 나왔다.
“지금 누가 소리 지르지 않았소?”
“도둑이 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어떤 놈이야?”
“뉘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거야?”
“윗집인 것 같은데?”
짜증과 우려 섞인 말소리가 담장 밖으로 웅성웅성 새어나왔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다시 한 번 들려온 외침에 사람들은 언덕 위로 잰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멍하니 지켜보던 이레는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명이 들려온 저곳.
좀 전까지 자신과 오라버니가 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제 뒤를 따라올 줄 알았던 기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라버니…….”
이레는 황급히 기대를 찾았다.
게다가…….
그녀는 이번엔 양쪽으로 갈라진 길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사라진 사내를 뒤쫓기에도 늦은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이레는 사람들과 함께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동네에 뭘 훔쳐갈 게 있다고!”
“에라잇, 벼락 피하다 똥통에 빠질 놈들!”
도둑이 든 초가로 향한 사람들은 저마다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때마침 주위를 순찰하던 순라군이 다가왔다.
그는 몰려든 마을 사람들을 뚫고 사립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무명으로 만든 치마저고리 차림의 아낙이 서 있었다.
순라군이 아낙에게 물었다.
“도둑이 들었소?”
“아, 글쎄 이만한 보따리를 등에 진 시커먼 놈들이 이 집 담을 넘지 뭐요.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놈들을 언제 봤소?”
“조금 전입지요. 자다 목이 말라 물 마시러 나왔다가 시커먼 놈들이 풀쩍 풀쩍 담벼락 뛰어넘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소.”
“그놈들이 무얼 훔쳐 갔소?”
“그거야 나도 모르죠. 이 집 안주인이 지금 살펴보는 중인데…….”
곧이어 집 안쪽에서 다급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명이야!”
비명 같은 외침에 순라군이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순라군은 망연자실한 안색의 안주인과 함께 나왔다.
반쯤 넋이 나간 안주인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희명이가, 우리 명이가 사라졌어요.”
안주인이 중얼거렸다.
순라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납치사건은 단순한 절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던 탓이다.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한창 커졌다.
“명이라면…… 이 댁 막내 애기씨 아냐? 그럼 그놈들이 그 애기씨를 보쌈해간 겐가?”
“에이, 설마. 그 애기씨 아직 열 살도 안 됐잖여.”
“그러게 말이야. 그렇다고 청상도 아니고. 게다가 비록 살림은 궁해도 떡하니 관복 입고 궐문 드나드는 양반댁네 아닌가. 그런 댁 애기씨를 보쌈해 가? 어떤 미친놈들이 그런 짓을 해?”
마을 사람들은 저희끼리 나름의 추론을 펼쳤다.
그러다 누군가 양 손뼉을 짝 마주쳤다.
“맞다, 혹시 그거 아닌가?”
“그거라니?”
“자네들 못 들었는가? 얼마 전, 상선 탔던 임가가 말했잖여. 서역 놈 중에 조선 여인네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 있다고. 그것도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값을 후하게 쳐주는 바람에 서역 무역선이 들어올 때마다 이렇게 어린 애기씨 사라지는 일이 종종 생긴다는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제물포로 무역선 하나가 들어왔지.”
“엄마야, 그게 사실이면 이 댁 애기씨도……?”
“웃너브네에서도 몰락한 양반댁 애기씨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던데. 그 댁은 애기씨 나이가 열여덟인지라. 담벼락 너머로 눈 맞은 어떤 사내랑 도망갔을 거라고 수군거렸더니. 아무래도 그게 아닌가 보네.”
“아이고, 그게 사실이면 이 댁 애기씨는 어찌 되는겨?”
“명이 애기씨도 그런 놈들이 잡아간 거 아니야?”
“망할 놈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쑥덕거리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 물린 순라군들이 초가의 안주인에게 물었다.
“누가 사라진 겁니까?”
“여식이 사라졌소. 잠자던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졌소.”
“다른 물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사람만 사라진 게 분명합니까?”
“우리 명이가…… 명이만 보이지 않소.”
자식을 잃은 충격에 중년 여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기씨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열 살이네.”
모인 사람들 사이로 중년 사내가 들어서며 말했다.
깐깐한 인상의 사내.
중년 사내가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누가 말하지 않았건만, 그들은 한옆으로 비켜서서 중년인의 길을 터주었다.
“영감.”
안주인이 덜덜 몸을 떨며 중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도둑맞은 아이를 찾기 위해 신도 신지 않은 버선발로 달려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길이었다.
“심희명, 열 살 생일이 지난 지 딱 닷새 되었군. 내 여식을 도둑맞았네.”
미간을 한데 모은 중년인이 순라군에게 말했다.
강단 있는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 사내를 지켜보던 이레의 눈동자에 일순 이채가 떠올랐다.
저 사내!
이레가 그토록 찾길 원했던 그 사내였다.
십학사의 새로운 ‘구름’으로 지목된 사내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사내의 여식이 사라졌다고?
이레의 머릿속으로 사슴의 속삭임이 지나갔다.
‘그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 사람은 결국 십학사의 새로운 구름이 될 것이어요.’
사내를 새로운 ‘구름’으로 만들려는 십학사.
십학사를 거부하는 사내.
그리고 갑자기 납치된 사내의 여식.
과연 이 모든 일이 우연일까?
***
사건이 발생한 지 일 다경이 흘렀다.
“그래서 그 망할 놈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순라군이 중년인에게 물었다.
마을의 남정네들도 험한 욕설을 쏟아내며 당장에라도 범인을 때려잡을 기세였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흥분한 군중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흥분하지 마라!”
물길이 갈라지듯 인파가 좌우로 나뉘며 키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도포에 흑립을 쓴 훤칠한 키의 사내.
이레는 다시 한 번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은호?’
그는 다름 아닌 장무열이었다.
장무열이 여긴 어쩐 일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장무열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레는 서둘러 인파 사이로 몸을 숨겼다.
힐끗, 차가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장무열이 순라군들에게 자신의 신분 패를 보였다.
“사헌부 집의다.”
장무열이 순라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어떤 불한당들이 이 댁의 아가씨를 납치해갔다 합니다.”
“납치?”
“해시 무렵부터 잠을 자고 있었소. 그런 여식이 감쪽같이 사라졌소.”
깐깐한 인상의 중년인이 끼어들었다.
이미 중년인과 일면식이 있었던 듯 장무열이 말했다.
“교리께서 여긴 어찌……?”
“여기가 내 집이오.”
중년인이 소박한 초가를 가리켰다.
홍문관 교리라는 직책에 비해 다소 궁색한 살림살이.
빠르게 집 안팎을 훑은 장무열이 질문을 이었다.
“어떤 자들인지 보았소?”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발이 무척 빠른 자들이었소. 놈들의 그림자를 보고 뒤를 쫓아갔지만, 놓치고 말았소.”
중년인은 버선발이었다.
신도 신지 않고 급하게 범인들을 쫓았지만, 끝내 놓치고 만 것이다.
중년인의 표정이 무거웠다.
그러나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한 까닭일까.
사내의 얼굴에는 슬픔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하얗게 뼈마디가 보일 만큼 꽉 움켜쥔 주먹으로 그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눈앞에서 제 여식을 빼앗겼으니, 그 마음 얼마나 참담할까.
“혹시 특이한 행동이라든가, 복색이라든가. 작은 것이라도 좋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소이까?”
장무열의 물음에 중년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밤이 깊은 데다 뒷모습만 본 게 고작이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이다.”
“알겠소. 관군들을 풀어 수색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부탁하겠소.”
중년인의 낮은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장무열은 순라군들과 관졸들을 불러 수색을 명했다.
마을 주민들이 수색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사방을 뒤지고 다니면, 오히려 범인 수색에 혼선만 줄 뿐이다. 범인을 쫓는 건 관군이 알아서 할 일이니, 다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그의 엄중한 말에 주민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레 역시 그들 틈에 섞여 자리를 벗어났다.
궁으로 향하는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건 십학사의 소행이 분명하다.’
완고한 중년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의 여식을 납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장무열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의아한 일이다.
그보다…….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로 가신 거야?’
당연히 이곳에 있을 줄 알았던 기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대문 밖의 인적 드문 초가로 검은 무복의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중 덩치 큰 사내는 커다란 보퉁이를 오른 어깨에 메고 있었다.
주위를 경계하던 사내들은 서둘러 초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인기척이 들리기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매서운 눈매를 지닌 노인이었다.
“일은 확실하게 했는가?”
“분명 일러준 대로 하였소.”
어깨에 올린 짐을 눈짓하며 덩치 사내가 대답했다.
“행여 뒤를 밟힌 건 아니겠지?”
“염려 마시오. 어설픈 실수 따위나 하는 그런 초짜가 아니오.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열린 방문 안으로 들어선 덩치 사내는 보퉁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군.”
덩치 사내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곁에 선 동료가 초가의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조한 돈이나 주시오.”
“우선 물건부터 확인해야지.”
노인은 사내들이 가져온 보퉁이를 끌렀다.
이윽고, 꽁꽁 묶은 입구가 열리고 속에 있던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아니, 그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동그란 정수리.
긴 머리카락.
유난히 하얀 피부.
그리고…….
“……!”
보퉁이 안에서 나온 건 사람이었다.
놀라울 건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가져온 ‘물건’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물건의 모습이 정작 예상과 달랐던 터라.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인이 덩치에게 말했다.
“계집아이라 하지 않았나.”
다그치는 목소리에 덩치 사내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캄캄한데 자세히 볼 수 있어야지. 이부자리에 누운 사람이 하나인 데다 얼핏 보니 곱상하여, 계집인 줄 알았소.”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을 봤나. 저게 계집이냐?”
“아니야? 어쩐지 무겁더라.”
“이상하다. 분명 노인이 말한 그 집, 그 방에서 자던 사람을 보쌈해 온 것인데.”
“눈구멍은 왜 달고 있는 게야? 얼굴 가죽이 모자라 뚫어 놓은 게 눈구멍이냐? 분명 열 살이라 하였잖느냐. 네놈들 눈엔 저 커다란 놈이 열 살 계집으로 보이느냐? 대체 뭘 가져온 거야?”
그때, 보퉁이 안의 사내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하암, 편히 잘 잤다.”
사내들의 험악한 눈초리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너, 대체 누구냐?”
“나 말인가?”
늘어지게 하품까지 하던 사내가 그들을 쓱 훑어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은마.”
“뭐?”
“은자원의 기린이라고 할까?”
“은자원? 기린? 무슨 헛소리야?”
“하하하, 네놈들은 알 턱이 없지. 알 필요도 없고. 지금은 그저 이것 한 가지만 알면 되네.”
“뭐, 뭔데?”
당당한 기세에 주눅이 든 듯 덩치 사내가 말을 더듬었다.
그런 사내를 향해 기대의 눈꼬리가 가늘고 길게 여며졌다.
“너흰 이제 죽었다.”
***
푸른 새벽 안개가 밀물처럼 사위를 뒤덮었다.
궁궐로 돌아온 이레는 잠시 눈을 붙일 사이도 없이 다시 빈궁의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평소와 다른 이레의 모습에, 단장을 돕던 금정이 물었다.
“왜? 내가 무에 이상한 게냐?”
“이상한 것은 아니오나…… 밤사이 안색이 꺼칠해지셨사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라 그러는가 보다.”
이레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금정은 이레의 미간에 서린 어두운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이시지요? 간밤에 정말 아무 일도 없으셨지요?”
“아무 일도 없다. 그보다 서두르자꾸나. 이러다 아침 문안에 늦겠구나.”
이레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존현각에서 조강(朝講) 중이시옵니다. 조강이 끝나는 대로 동궁 저하와 함께 주상 전하께 아침문안 가시면 될 것이옵니다.”
이레는 형운이 있는 존현각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을과 겨울의 풍경이 교차하듯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눈에 담기는 많은 풍경만큼이나 수다한 생각도 뇌리를 스쳤다.
이레는 손안에 쥐고 있는 수건의 감촉을 더듬었다.
이 물건은 어쩌자고 이리 부드러운 걸까.
내 속은 어쩌자고 이리 거칠고 황량한 것인지.
답답한 마음으로 존현각에 닿았다.
전각 앞을 지키고 섰던 최 내관이 이레에게 달려왔다.
“빈궁마마, 납시었나이까?”
동궁을 지키는 늙은 내관은 여전하였다.
최 내관에게 눈인사를 건넨 이레는 형운이 있는 존현각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바람이 제법 시린 계절인지라.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면 동서남북 사방의 문을 활짝 걷어 올렸을 누각의 문은 꽁꽁 닫혀 있었다.
“아직 아니 끝나셨는가?”
마침 존현각 안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 어인 말씀이옵니까? 하오면 가진 것 많고 배부른 자들은 이 조선의 백성이 아니오이까.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아끼고 보듬는 저하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이까. 하오나 그들만이 저하의 백성이라 생각하지 마옵소서. 무릇 군주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무사공평이라 하였나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여선 아니 된다 생각하옵니다.”
이어 형운의 고저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극심한 가뭄으로 살아온 터전마저 버리고 스스로 유랑의 삶을 택한 백성들이오. 그들을 어찌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옳단 말이오? 군주의 무사공평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그 공평함에도 예외가 있어야 하는 법이오.”
“한번 예외가 생긴다면 모두가 그 예외를 믿고 정해진 규율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하였소(荷政猛於虎). 어느 아비가 죽어가는 자식에게 원칙을 논한단 말이오?”
“저하께선 그저 사사로운 아비가 아니옵니다. 원칙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마땅한 규범이기에 원칙이라 하는 것이옵니다. 마땅히 예외가 있어선 아니되옵니다.”
“목숨이 달린 일을 어찌 사사롭다 할 수 있을까. 당장은 죽어가는 생명부터 살리자는 말이오.”
금방이라도 터질 듯 긴장된 공기가 존현각을 에워쌌다.
차마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을 만큼 응축된 시간이 흘렀다.
밖에서 귀 기울이던 이레는 최 내관에게 작게 물었다.
“지금 저하와 맞서는 저분은 뉘시오?”
“홍문관 교리, 심환지라는 자이옵니다.”
교리 심환지.
이레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의 영수들이 귀양이나 파면을 맞은 이후, 동궁과 대척하며 정국을 이끄는 새 인물이 바로 심환지라 하였다.
“사사건건 동궁 저하의 의견에 맞서고, 배척하니. 그야말로 목에 걸린 생선 가시요, 손톱 밑의 가시 같은 자이옵니다.”
최 내관의 대답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때마침 강연이 끝난 듯, 신료들이 밖으로 나왔다.
이레는 한옆으로 비켜섰다.
강연에 참석한 대신들은 마지못해 이레에게 예를 취했다.
그러나 저희들이 반기지 않은 동궁이었고, 빈궁이었다.
가벼운 인사조차도 주고받고 싶지 않았던 터라. 관리들은 무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서둘러 이레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자가 심환지이옵니다.”
무리의 한중간에 끼어 있는 중년인을 최 내관이 눈짓했다.
“저 사람은…….”
심환지를 본 이레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홍문관 교리, 심환지.
마르고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
그는 바로 십학사의 새로운 구름으로 지목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
‘여식이 실종되었음에도 강연에 참석하다니.’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심환지의 표정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담담해 보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딸의 실종 따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무정한 사람인가? 아니면 본디 심지가 남다른 것일까?’
마침 며칠 전, 은자원에서 접한 심환지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세상의 온갖 정보가 모이는 은자원.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 수 없는 은자원의 서찰 중엔 홍문관에 새로이 배속된 교리, 심환지에 관한 기록 또한 있었다.
관직에 오른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매사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쉬이 굽히지 않아 노론의 고지식한 유학자들의 신망을 받는 자라 하였다.
평소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하다고 정평이 자자했다.
의리와 공의(公儀)를 중시하며 왕의 앞에서도 준엄하고 격렬한 언론으로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니.
아군이 아닌 적으로 만난다면 사사건건 맞서고 싸워야 할 골치 아픈 상대였다.
이제야 이해되었다.
정후겸이 그토록 저 사내를 구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유가…….
‘그래서 그의 여식을 납치한 것이로구나.’
강직하고 고지식하여 그 어떤 겁박이나 위협에도 자신의 의지를 쉬이 굽히지 않는 심환지.
그런 그를 움직일 수 있는 단 한 가지.
바로 심환지의 늦둥이 여식이었다.
심환지는 서른 후반에 간신히 얻은 어린 여식을 유난히 아낀다 하였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담담한 표정이지만, 지난밤 그는 버선발로 딸을 찾기 위해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딸에 대한 심환지의 깊은 정을 알기에 십학사에서도 그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치졸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만큼 심환지가 탐이 난다는 뜻이었다.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십학사가 치졸해질 만큼…….
어찌한다?
십학사의 계략에 빠진 심환지를 어떻게 구해야 할까.
동궁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그를 어찌 설득해야 할까.
“무얼 그리 보는 것이오?”
심환지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자니, 낯익은 목소리가 이레의 귓불 아래로 불쑥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자 크고 선한 눈동자가 들어왔다.
“저하…….”
“많이 기다렸소?”
허리를 굽혀 이레와 키를 맞추던 형운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봄날처럼 따스한 표정이라.
조금 전까지 북풍한설을 뒤집어쓴 듯 차가운 태도로 대신들과 강론을 펼치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오직 이레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었고, 이레만이 볼 수 있는 미소였다.
하지만 정작 그 미소를 대하는 이레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형운의 미소를.
변함없는 그의 따스한 눈빛을.
어쩌면 영영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손수건을 쥔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왜 그러시오?”
불편한 기색을 읽은 형운이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소?”
여느 때의 그녀라면 분명 고개를 저었으리라.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설사, 크게 아프고 불편한 곳이 있어도, 미소를 지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괜찮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대관절 무엇이관데 빈궁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오?”
되려 궁금하다는 듯 형운이 물었다.
그런 형운의 눈앞에 이레는 당의 자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윽고 팔랑팔랑, 날갯짓하는 나비와 사슴이 수자 놓인 손수건이 형운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결연한 눈빛으로 이레가 물었다.
“이 손수건이 무엇이옵니까?”
“…….”
“저하께 이 손수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꼭 듣고 싶사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