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62화 (162/215)

#162. 사슴과 나비가 수(繡) 놓인

밤의 비늘이 세상을 뒤덮었다.

먹장구름으로 가득한 캄캄한 하늘엔 작은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십학사의 비밀 회합을 마친 이레는 수월에 들러 궁녀의 복색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그녀가 향한 곳은 빈궁전이 아니었다.

“오라버니.”

은자원의 후미진 곳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기대는 이레의 다급한 부름에 눈을 떴다.

“여긴 또 어쩐 일이더냐?”

“오라버닐 찾아왔지요.”

“보고 싶어 찾아왔단 말이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런데…….”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기대가 걱정 섞인 한 마디를 건넸다.

“빈궁전에 있을 시각, 아니더냐?”

“일이 있어 잠시 나왔습니다.”

“빈궁이 이리 막 돌아다녀도 되는 게야? 궁의 법도와 기강이 이리 해이해서야, 원.”

“오라버니한테서 그런 소릴 들으니, 신선합니다.”

“어험, 신선할 것도 많구나.”

투덜대는 기대를 이레가 응시했다.

깜빡깜빡.

커다란 눈을 연신 깜빡거리고 있자니, 이레와 시선을 마주하던 기대가 갑자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된다.”

“무에 안 된단 말입니까? 전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의 그 눈이 말하고 있지 않으냐. 무언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부탁할 게 있다고.”

“역시, 오라버니십니다. 어찌 그리 제 마음을 잘 아십니까?”

“십수 년 동안 당해보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법이다.”

“실은 오라버니. 긴히 부탁할 일이…….”

“됐다, 그만.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 아니, 안 보인다. 오늘 난 여기서 아무도 안 만났다.”

“그러지 마시고 제 말을 조금만 들어주십시오.”

“어유, 자던 잠이나 마저 자야지.”

기대는 자리에 벌러덩 누워 눈을 감았다.

이레는 그를 이런저런 말로 구슬려 보았지만, 끝내 기대는 두 귀를 막으며 외면했다.

“아! 아무 말도 안 들린다. 아무래도 귀가 먹은 모양이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완고한 저항에 이레는 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싫다니, 어쩔 수 없지요. 괜히 번거롭게 하여 죄송하였습니다.”

그 힘없는 목소리에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굴던 기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리 심각한 거냐?”

“오라버니!”

“웃지 마라. 네 시커먼 속셈, 다 보인단 말이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또 무슨 일인데, 인사치레부터 하는 것이야? 아니, 그보다 네 주위엔 사람이 그렇게 없느냐? 어째서 매번 일이 터질 때마다 날 찾아오는 게야?”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다만, 제가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오라버니 한 분뿐이니 그런 것이지요.”

“어험. 험.”

기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어색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그래.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오라버니에게만 맡길 수 있다는 그 대단한 일이 대체 무어냐?”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사람?”

이레는 까치발을 세우고, 두 손을 저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키는 딱 요만하고, 짜임이 조금 성긴 흑립에 대나무 빛 도포 자락을 입은 중년 사내입니다.”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듣던 기대가 이레에게 말했다.

“생김새는 되었고. 이름이 무엇이냐?”

“모릅니다. 아! 눈빛이 무겁고, 완고한 것으로 보아 학식이 무척 높은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목소리는 쉰 것처럼 카랑카랑하고, 고집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눈썹은 검은데, 머리는 군데군데 희끗희끗하였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마디가 무척 굵고, 손끝이 투박했습니다. 활시위를 자주 당긴 사람 같습니다.”

기대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는 곳은?”

“그것도 모릅니다.”

이레의 대답에 기대는 이맛살마저 구겼다.

“그럼 아는 사람이라도…….”

“모르니 오라버닐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이젠 기대의 얼굴 전체가 구겨졌다.

딴에는 열심히 설명하긴 했지만, 결국 중년에 손가락 마디 굵은 꼬장꼬장한 새치 사내를 찾으란 말이지 않은가.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봐도 한 시진이면 그런 특징의 사람을 못해도 서른 명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내에 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 특징이라도 잡아낸 것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기대에겐 이레의 말이 황당하게 들릴 뿐이었다.

“빈궁마마…… 아니, 누이야. 네 눈엔 내가 대체 뭐로 보이느냐?”

“제 오라버니시지요. 그리고…….”

이레는 양 엄지를 한껏 추켜들었다.

“조선 최고의 팽례가 아니십니까?”

***

저녁 늦은 시각.

궁궐을 떠난 비빈들의 행차는 여주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였다.

“참으로 절경이로구나.”

아랫사람들이 침소를 정리하는 동안 영빈은 화완옹주와 함께 상궁이 내온 따뜻한 차를 음미했다.

주위의 풍경을 더듬던 영빈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과연 그렇습니다.”

붉은 오미자차를 마시던 화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절경을 빈궁과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허나 어찌하겠느냐.”

영빈은 열두 폭 치맛자락을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마른기침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니. 내명부가 모두 궁을 비울 순 없질 않으냐.”

영빈의 말에 화완이 작게 풋,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웃는 것이야?”

“어마마마도, 참. 저에게도 말씀 안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내가 무얼?”

“동궁과 빈궁이 궁을 나가 잠시나마 사가에서 지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 아니옵니까. 이참에 아바마마와의 오해를 풀라고 부러 자리를 피해주시는 걸,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영빈은 화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뗐다.

“언제부터 알았느냐?”

“온궁으로 행차하자 하실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넌 못 당하겠구나. 그래, 어릴 적부터 그랬지. 눈치가 얼마나 빠르던지. 무얼 감추고 숨길 수가 없었지.”

“제가 그랬습니까?”

“완아.”

“네, 어마마마.”

“그런 너를 보며 나는 가끔 다행이라 생각했단다.”

“무얼요?”

“네가 사내가 아닌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어마마마,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었나이까.”

“어릴 적부터 그랬단다. 오라비 하는 건 뭐든 너도 하고 싶어 했고. 오라비 가진 것과 똑같은 것을 달라고 어찌나 억지를 부리던지.”

“제가 그랬습니까?”

자신도 몰랐던 제 모습에 화완이 놀란 시늉을 보였다.

“기억나느냐? 청국의 황실에서 세자에게 보낸 강아지를 너도 갖고 싶다며, 얼마나 울었는지. 사흘 밤낮을 울다 기절하길 반복하니. 지켜보는 이 어미의 심장이 좁쌀만큼 오그라들었었지.”

“아, 그건 저도 기억납니다. 털이 유난히 보드라운 강아지였지요. 그 작고 영리한 눈빛을 보는 순간, 마음을 쏙 빼앗겼지 뭐여요.”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는 듯 화완옹주는 하늘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여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빈이 입술을 열었다.

“완아, 그래서 그리했느냐?”

“네?”

“그래서 죽였느냐?”

느닷없는 영빈의 물음에 화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어마마마께서 그걸 어찌 아시옵니까?”

“강아지가 궁에 오고 닷새쯤 지났을까? 네 전각의 궁녀가 기겁하여 내게 달려왔었느니라.”

“하오면 그때 죽은 강아지를 치운 분이 어마마마였나이까?”

“그래.”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지 뭐여요.”

비밀을 들킨 것이건만.

말하는 화완의 목소리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눈가를 여며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무에 재미있는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어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나쁜 것이 아니어요, 어마마마.”

“완아…….”

“결국, 그 강이질 죽게 한 건 오라버니랍니다.”

옹주는 해사한 미소를 담뿍 머금으며 뒷말을 이었다.

“아무리 졸라도 주질 않으니…… 죽일 수밖에요.”

***

은자원을 나선 지, 두 시진 후.

이레는 기대와 함께 목멱산 인근의 마을 어귀로 접어들었다.

고작 한 시진 만에 기대는 그녀가 알려준 용모와 흡사한 사내 다섯을 추려왔다.

이레가 용케 사내의 손등에 난 작은 화상 자국을 기억해 낸 덕이었다.

그 하찮은 흔적들을 바탕으로 기대는 모든 인맥과 능력을 총동원하였고, 그렇게 간신히 추려낸 사람이 다섯이었다.

“병과에 급제한 사람 가운데, 화상 자국이 있는 사람을 추려본 것에 불과해. 그 사람이 관직에 없거나, 도성 밖에 산다면 말짱 헛짓이다. 어쩌면 오늘 살펴볼 다섯 중에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알겠습니다. 설사 못 찾는다 해도 실망하지 않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과는 달리 이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내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새로운 구름이 될 자라 하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만 했다.

그가 십학사에게로 넘어가기 전에…….

아쉽게도 오라버니가 추려낸 다섯 사내 중 앞서 찾아간 둘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실망하기엔 이르다.

아직 살펴볼 사람이 셋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열의로 불타는 마음과 달리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온종일 수월과 십학사, 은자원을 정신없이 오갔다.

지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저만치 앞서 걷던 기대가 혀를 끌끌 차며 돌아왔다.

입꼬리를 실룩이는 걸 보니, 또 한바탕 잔소리를 할 모양이다.

“그러게, 내 먼저 알아보고 연통을 준다 하지 않았느냐.”

이레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온 기대가 불퉁한 지청구를 날렸다.

“오라버니는 그 사람의 생김새를 모르지 않습니까?”

“너도 그 사람의 눈만 보았다면서?”

“평범한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보면 분명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눈빛이 평범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눈에 도끼라도 달고 있단 말이냐? 그보다 지금 얼마나 늦은 시각인 줄은 아느냐? 그 사람은 잘 때 눈이라도 벌겋게 뜨고 있다더냐?”

기대의 말에 맞장구치듯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으슥한 냉기를 머금은 바람은 절로 옷깃을 여미게 했다.

그러나 이레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기대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두 걸음, 세 걸음 옮겨야 했던지라.

딴에는 애를 썼던 까닭이다.

무에 못마땅한 듯 이레를 바라보던 기대는 소맷자락으로 누이의 이마를 훔쳐주었다.

“기력도 안 되면서, 고집은 어찌나 쇠고집인지.”

“오라버니 닮아서 그렇습니다.”

“한 마디를 안 지지.”

“그것도 오라버니 닮았지요.”

턱 끝에 붙은 숨을 삼키며 이레는 오라비가 평소 좋아하는 말을 건넸다.

예전부터 저 닮았다고만 하면 불퉁했던 기대의 마음이 풀리는 걸 잘 알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콩.

기대가 이레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살짝 쥐어박았다.

“혼인하더니, 오라비 부려 먹는 요령만 늘었구나.”

“아얏. 혼인했다고 출가외인 취급이십니까?”

“그래, 앞으론 그리 대할 것이다.”

말은 그리하지만, 이레의 이마와 콧등에 맺힌 땀을 닦는 기대의 손길은 꼼꼼하고 세심했다.

“서두르자. 자칫하다간 날 밝겠다.”

날 밝는 건 상관없으나, 대궐에 있어야 할 이레가 밖에 있으니.

혹여나 빈궁의 부재를 누군가 눈치챌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급한 마음에 기대는 이레의 등을 밀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밀어주는 힘이 있으니, 걷는 것이 훨씬 수월하였다.

“이러고 걸으니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습니다. 예전에 오라버니랑 할아버지 따라 산에 올라갔을 적에…….”

말을 하던 이레가 돌연 입을 닫았다.

마을 어귀를 지나 공동 우물을 지나쳐 서로 어깨를 맞대듯 담벼락을 맞대고 있는 두 채의 초가 앞에 다다랐다.

목적한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 어귀.

마주 선 두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레와 기대는 황급히 근처의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담벼락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 이레는 가늘게 눈을 여몄다.

푸른 새벽빛 사이로 화려한 치마와 저고리의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기녀들이 외출할 때 쓰는 전모를 쓰고 있었다.

“이런 곳에 기녀가?”

이레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른 새벽.

평범한 초가의 사립문 앞.

기녀가 서성거리기엔 어울리지 않는 시간과 장소였다.

점점 밝아지는 새벽빛 사이로 낯설지 않은 눈웃음이 보였다.

곱디고운 여인의 웃음.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웃음이었다.

휘둥그레진 이레의 눈동자가 여인의 곁에 선 사내에게로 향했다.

제비꽃을 닮은 짙은 보랏빛의 도포와 세심한 손길로 만든 태가 확연한 흑립 차림의 사내.

푸르스름한 달빛에 오연히 선 그의 자태는 붓으로 그린 것처럼 멋스러웠다.

풍류를 한껏 담아낸 것 같은 사내의 모습은 오히려 기녀보다도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사내의 윤곽을 바라보던 이레의 눈이 다음 순간 찢어질 듯 커졌다.

‘저분은…….’

밤이 그린 착각일까?

아니면 달빛이 빚어낸 신기루려나.

흑립의 사내.

그는…….

이레가 아는 어느 사람과 무척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이려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설마…….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찰나.

펄럭.

기대의 너른 소맷자락이 이레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

“아무도, 없다.”

“…….”

“여긴 네가 찾는 사내가 없는 듯하구나.”

기대의 연초록색 도포 소매에 가려져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스레 심장이 쿵쿵 날뛰었다.

아무도, 없다.

기대가 했던 말을 주문처럼 외며 이레는 걸음을 옮겼다.

날은 점점 밝아지고 있건만, 이레의 머릿속은 점점 흐릿해졌다.

짙은 잿빛 안개에 갇혀 갈팡질팡하는 이레의 귓가에 기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쐐기를 박듯 한 마디가 이어졌다.

“없었다.”

그 필사적인 말에 오히려 이레는 정신이 맑아졌다.

오라버니는 아무도 없다 말하지만, 정작 바람결엔 그들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오늘 고생이 많았소.”

“고생이라니요. 선비님께서 부르시면 당연히 나와야지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그런 말 마십시오. 소녀, 서운합니다.”

“…….”

“이런, 손에서 피가 나지 않습니까?”

“조금 긁힌 모양이오. 신경 쓰지 마시오.”

“피가 나는데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손 주십시오. 어서요.”

두런두런 주고받는 남녀의 대화가 이어졌다.

귀에 익은 음성.

흑립의 사내, 그리고 기녀.

두 사람의 목소리 모두 무척 귀에 익었다.

“아! 바람에 손수건이…….”

“내가 가져오겠소.”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남에게 들키면 곤란하니 잠시만 숨자꾸나.”

기대는 이레를 이끌고 골목의 그늘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들이 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흑립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에 날아간 손수건을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신형을 돌렸다.

그 순간, 이레는 그의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

내내 날뛰던 심장이 쿵,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군.”

흑립 사내는 큰 걸음으로 기녀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레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구려. 바람결에 먼 곳으로 날아간 모양이오.”

“대단한 물건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손을 다쳐 어찌합니까?”

“나야말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럼, 밤도 늦었으니 이만 돌아갑시다.”

“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나란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하하. 다행히 들키지 않았구나. 천만다행이다. 안 그러냐?”

기대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정작 이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근처의 나뭇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바람에 날려온 기녀의 손수건이 그곳에 걸려있었다.

사슴과 나비가 수자 놓인 손수건이었다.

“설마, 엉뚱한 오해 같은 걸 하는 건 아니지?”

기대는 누이의 관심을 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이레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냉랭한 표정에 기대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고심하던 이레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그녀는 나무에 걸린 손수건을 잡아챘다.

그러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레야, 어딜 가느냐?”

기대의 물음에도 이레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가 사라진 곳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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