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내 것을 가진 그대
가을이 누런빛으로 변해갔다.
새벽부터 대궐 문이 열렸다.
온궁으로 행차하는 영빈 이씨와 중전, 그리고 화완옹주를 태운 가마가 차례로 궐 문밖으로 향했다.
시린 계절이 가까워지자, 영빈의 무릎 병이 심해졌다.
날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내명부의 여인들이 온궁을 다녀오는 것이 정해졌다.
그러나 온전히 내명부를 비울 수 없었기엔, 이레는 궁에 남기로 하였다.
내내 궁궐 안에 갇혀 지내던 여인들의 외유인지라.
온궁으로 떠나는 비빈들과 그들을 따르는 궁녀들은 잔뜩 들떠 있었다.
평소보다 무겁게 내려앉은 쪽은 빈궁전의 궁인들이었다.
행차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빈궁전의 궁녀들은 부럽고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맨 앞에서 걸음을 옮기던 이레는 힐끗, 그들을 돌아보며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저들의 마음일랑, 능히 짐작하고 남았다.
답답한 궁을 떠나, 너른 산천을 구경하는 온궁행에 따라가고 싶었겠지.
우리 빈궁마마는 어쩌자고 자청하여 궁에 남겠다고 하신 것인지……하며 원망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을 터.
하지만 저들은 모르고 있었다.
내명부가 텅텅 비게 된 지금이 이레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고 빈궁전을 비울 수 있을 것이며, 은자원에 쌓인 서류를 살필 절호의 기회였다.
빈궁전으로 돌아가는 이레의 걸음은 깃털 보다 가벼웠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잠시 자리를 비웠던 금정이 이레의 뒤편으로 바싹 다가섰다.
“마마, 빈궁마마…….”
주위의 눈치를 살피던 금정이 망설이다 이레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이런 것을…… 받았사옵니다.”
금정이 손바닥 반만 한 크기로 작게 접힌 서찰을 건넸다.
이레는 몇 번을 접고 또 접은 서찰을 펼쳤다.
두험천(豆驗川), 금일(今日) 신시초(申時初).
쪽지의 말미에 십학사임을 뜻하는 표식이 쓰인 것으로 보아 회합을 알리는 전하는 쪽지였다.
그녀는 속삭이듯 금정에게 물었다.
“수월에서 보낸 것이냐?”
“아닙니다.”
금정이 잔뜩 숨죽여 아뢰었다.
“궐의 글월비자가 제게 다가와 빈궁마마께 전해달라며 건넸습니다.”
“궐의 글월비자라 하였느냐?”
놀람에 이레의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글월비자란 바깥출입이 어려운 궁인들의 문안 편지를 대신 전하는 나인을 뜻했다.
그런 나인이 십학사의 서찰을 전해왔다.
그것도 모호한 상대가 아닌 정확히 빈궁을 지칭하며.
“그 글월비자는 어디에 있느냐?”
“그 서찰을 전하자마자 급히 사라졌습니다.”
일순, 이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십학사의 서찰은 수월을 통해 전해지곤 하였다.
수월로 전해지는 십학사의 소식을 만사여의 한서로가 은밀하게 이레에게 전했던 것이다.
십학사 내에서 이레는 만사여의로 알려졌기에, 당연한 절차였다.
그런데 수월 대신 글월비자가 십학사의 소식을 전했다는 건…….
‘내가 십학사임을 아는 자가 이 궁 안에 있다.’
이레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적어도 한 사람.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다 이제 와 구태여 이런 신호를 보낸 이유가 무얼까?
경고의 의미일까?
“마마.”
금정의 목소리에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초조한 듯 금정은 양손을 한데 모아 연신 꼼지락거렸다.
“또 나가실 생각은 아니지요?”
금정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수월의 한서로와 더불어 이레의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무심코 서찰을 전해주긴 했지만,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겠지.
차라리 저 서찰을 숨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속마음을 훤히 드러내는 금정에게 이레는 미소를 보였다.
고맙구나.
하지만 난 저들의 저의를 알아야만 할 것 같구나.
“우선 전각으로 돌아가자꾸나.”
빈궁전으로 돌아가는 이레의 두 눈에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
이레는 간신히 금정을 설득하여 궁을 나설 수 있었다.
글월비자를 통해 전해진 서찰은 여러 측면에서 불길하고 흉흉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엔 한서로가 아닌, 자신이 직접 참석해야 했다.
‘만약, 그들이 날 위해(危害) 할 목적이었다면, 굳이 글월비자를 통해 모임을 알릴 이유가 없다.’
십학사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레가 거슬렸다면, 다른 수단을 동원하여 지우려 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통로를 통해 서찰을 전했을 뿐이다.
무언가 연유가 있으리라.
그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궁녀의 모습으로 궁을 나선 이레는 수월을 통해 만사여의로 거듭났다.
고고한 자태로 변한 그녀가 모임 장소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지나 어두운 통로를 뚫고,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었다.
긴 탁자.
장생불사를 표상한 열 가지 물상(十長生).
각자의 자리에 앉은 각기 다른 차림새의 사람들.
십학사의 학사들.
그들의 눈이 일제히 이레에게로 향했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십학사들이 어찌 나올까?
적의로 번들거릴 저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정면돌파를 결심했음에도 긴장을 쉬이 털어낼 수 없었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정작 십학사의 반응은 이레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늦었구려.”
“이제 오시는 게요?”
이레를 확인한 학사들은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심지어 몇몇 학사는 호의 가득한 눈으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이레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빈궁임을 알게 되었다면, 저들의 눈빛에 미미한 변화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학사들의 반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학사들은 여전히 자신을 만사여의로 알고 있다는 뜻.
그럼 글월비자를 통해 전해진 서찰은 어찌 된 걸까?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레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친근한 목소리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사슴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저런, 그랬군요.”
가볍게 혀를 찬 사슴이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봅니다. 실은…… 저도 바로 직전에 왔답니다.”
생긋,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귀퉁이에 가녀린 사슴과 노란 나비 몇 마리가 수 놓인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에도 자신의 징표를 새겨넣다니.
“사슴을 참으로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이레의 말에 사슴은 소리 없이 웃었다.
“네. 사슴의 특이함을 좋아합니다.”
“특이함이라 했습니까?”
“아실지 모르지만, 사슴의 수명은 고작해야 스무 해 정도랍니다. 그런 사슴이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십장생에 들어 있는 이유…….”
사슴은 머리 위에 양손을 올렸다.
“뿔 때문이랍니다.”
그녀는 커다란 눈동자를 위로 치켜들었다, 다시 이레를 바라보았다.
“사슴의 뿔은 잘라내어도 봄이 되면 새싹이 나듯 다시 자란다나요? 이처럼 끊임없이 자라는 모습이 불사와 윤회를 상징하니, 그 뿔을 잘라 먹으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참으로 해괴한 말이 아닙니까? 다른 존재의 장수(長壽)를 위해 고작 스무 해밖에 못 사는 사슴이 불멸을 상징하는 십장생에 들어있다니 말이에요.”
손가락을 접었다 다시 펼치며 뿔의 형상을 만들어 보인 사슴은 뭐가 그리 웃긴 것인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이레는 웃지 않았다.
대신 살피는 눈빛으로 사슴을 바라보았다.
다른 학사들의 눈총에도 소란스럽게 웃는 사슴.
정작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사슴의 웃음은 늘 진심이 아닌 가짜였다.
그 가짜 웃음을 뚫고 이레의 조용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사슴이 단지 뿔의 가치 때문에 십장생이 된 건 아니라 들었습니다.”
“네?”
사슴이 이레의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사슴은 무릇 신선과 함께 무릉도원을 상징하는 존재라 합니다. 도인이 깨달음을 얻어 신선이 되듯, 사슴이 신령(神靈)을 얻어 천 년을 살면 청록(靑鹿)이 되고, 다시 천 년이 지나면 흑록(黑鹿)으로 거듭난다고 하니, 다른 십장생에 절대 뒤지지 않은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사슴이 어찌 수천 년을 살겠어요. 다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겠지요. 하지만 청록이니 흑록이니 하는 말처럼 거듭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사슴은 잔잔한 미소로 웃음을 거둬들였다.
문득, 이레는 사슴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떤 인연으로 십학사가 된 것일까?
궁금증은 이 자리에 모인 다른 학사들에게로 옮겨갔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무슨 사연으로 십학사의 학사가 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분위기가 전처럼 떠들썩하지 않았다.
약조한 시각이 지났음에도 학사들의 자리엔 빈 곳이 많았다.
언제나 늦는 해를 제외하고도 무려 네 자리가 비어 있었다.
구름, 소나무, 대나무, 영지
형운이 동궁이 되는 과정에서 죽거나 실권하여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십학사의 큰 축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통째로 사라졌음에도 회합의 분위기가 그리 어둡지 않다는 점이다.
누구 한 사람, 안타까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다는 듯한 담담한 분위기.
그 여상한 모습에 이레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때 다시 사슴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꺼번에 넷이라니. 십학사가 생긴 이래 이렇게 많은 자리가 빈 것은 이번이 처음일 거예요.”
“평소에도 학사들이 자주 바뀌었나 봅니다.”
사슴은 고개를 저었다.
“상당히 드문 일로 알고 있어요.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고 들었답니다.”
천하의 근본을 상징하는 열 명의 학사.
권력, 민심, 그리고 재물을 장악한 사람이 자주 바뀔 리 없다.
상념에 잠긴 이레를 사슴이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왜 그리 보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사슴은 이번엔 학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이레와 학,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사슴이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들어오신 이후, 십학사에 오묘한 일이 많이 생기는군요.”
이레는 학을 흘끔 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면사 탓에 그의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분은 포기하세요. 목석 같은 사내예요. 무뚝뚝하기가 천 년 된 고목보다 더한 양반이랍니다.”
사슴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학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군분투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리 말한다는 건, 그녀가 실패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목석이라…….’
장무열은 그런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과묵하고, 진중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을 극도로 아끼는 사람.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런 그가 어쩌다 십학사가 되었는지.
정말로 은자원을 지워버린 걸까?
하지만 이레의 생각은 더는 이어질 수 없었다.
사슴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누가 될 것 같습니까?”
“무얼 말입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이레가 되물었다.
사슴은 빈자리를 손짓했다.
“빈자리들의 주인 말입니다.”
사슴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집중되었다.
‘천부적이로구나.’
사슴은 이레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린 면사 탓에 제대로 된 모습은 볼 수도 없고, 옷차림은 화려하지만 정작 이렇다 할 치장을 하지 않았다.
한두 번은 눈길이 갈 수 있겠지만, 이렇듯 매번 사슴이 입을 열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사소한 손짓, 행동 하나하나가 묘하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것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만사여의는 어떤 사람이 저 빈자리의 주인이 되길 원하시나요?”
“글쎄요. 어떤 사람이 거론되고 있습니까?”
이레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십학사의 움직임은 훗날, 형운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런 십학사의 학사를 새로 뽑는 일이니만큼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구름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였다.
구름은 권력을 상징하는 자리.
십학사 내에서도 ‘해’에 버금가는 권력의 상징인 데다, 대리청정 중인 형운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자리이기도 했다.
이레의 시선이 구름이 새겨진 의자에 박혀 있자, 사슴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군요. 그 자리라면 이미…….”
사슴이 무언가 새로운 소식을 전할 때였다.
닫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해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작게나마 웅성거리던 소음이 사라졌다.
새로운 구름에 관한 일을 언급하려던 사슴조차도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무심히 좌중을 쓱 훑으며 해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늦었소. 회합을 시작합시다.”
해는 짧은 말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평소라면 해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흔한 투덜거림조차 없었다.
‘해에게 반감을 품은 학사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우연일까?
십학사 중 빈자리는 어김없이 해를 탐탁잖게 여겼던 학사들의 것이었다.
해와 맞서던 학사들만 사라진 것을 과연 우연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 사력을 다하였던 구름.
그에 반해 권력 같은 덴 관심 없다는 듯 해는 언제나 수수방관했다.
그런 해에게 등을 돌린 학사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구름과 함께 모조리 몰락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해를 따라 방관하던 사람들만 온전히 남아 십학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일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해의 치밀한 계획하에 벌어진 일이라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쳐내기 위한 해의 계략이라면.
줄곧 사태를 수수방관하여, 자신의 정적뿐만이 아니라 배신할 여지가 있는 자들마저 모조리 솎아낸 것이라면…….
하나, 하나, 떠오르는 생각에 이레는 일순 소름이 돋았다.
이 모든 것이 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해, 정후겸.
진실로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뻣뻣해졌다.
이레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해는 예의 느른한 눈빛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의 음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시다시피 불운한 사건으로 몇 사람이 십학사의 자리를 잃었소. 구름, 대나무, 소나무 그리고 영지. 한 번에 그 많은 학사를 잃게 되었음은 안타까운 일이나, 잠시라도 그 자리를 비워둘 수 없음도 알아주었으면 하오.”
동료를 넷이나 잃었다는 해의 말에도 학사들은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이제야 그들의 태연한 행동이 이해되었다.
하늘의 태양이 두 개가 될 수 없듯, 권력 역시 나눌 수 없다.
그간 십학사는 두 개의 세력으로 나눠 승기를 잡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고, 마침내 승패가 결정되었다.
목표가 있을 땐 함께 했으나, 정작 경쟁하는 관계였으니.
동료 의식이나 유대감이 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깊은 생각 끝에 적합한 사람들을 정하였소. 곧 새로운 학사들이 올 것이오.”
회의의 내용은 싱거웠다.
형식적인 논의조차도 없었다.
모든 것은 해가 결정했고, 통보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구름과 그를 따르던 학사들이 사라진 십학사는 해를 위한 사조직처럼 느껴졌다.
이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십학사.
예전보다 오히려 상대하기 어려워졌다.
그때, 해의 뒤편으로 문이 열리고 무복 차림의 무사가 해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이내 해가 말했다.
“아! 마침 새로운 구름으로 결정된 학사를 이곳으로 모신 모양이오.”
새사람을 본다는 말에 십학사들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초로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립을 쓴 초로의 중년인은 매서운 눈빛으로 자리에 앉은 학사들을 둘러보았다.
하얀 면사로 눈 아래를 가려 그의 진면목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굵은 미간의 주름으로 그의 단단한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상한 자들이로군. 허락도 없이 날 이런 곳으로 데려온 연유가 무엇이냐?”
중년인의 단단한 목소리가 좌중을 무겁게 흔들었다.
해가 입을 열었다.
“불가피하게 거칠게 모신 점, 내가 사과하리다. 십학사에 온 것을 환영하오.”
“십학사?”
중년인의 미간 주름이 고목의 옹이처럼 깊어졌다.
“뜬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 존재하는 자들이었단 말인가?”
“사람들은 우리를 조선의 진짜 주인이라 부르오.”
“조선의 진짜 주인?”
“어떠하오? 우리와 함께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생각이 없으시오?”
***
“함께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생각이 없으시오?”
해의 파격적인 제안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얼마 후.
“하하하.”
중년인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멈췄다.
정색한 표정의 중년인은 해를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눌러 말했다.
“이제 보니 미친놈들이로군.”
“내 제안을 가볍게 넘겨듣지 마시오.”
“가볍게 넘겨듣지 않으면? 대낮에 도적 떼처럼 얼굴을 가린 놈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란 말이냐?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차라리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하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묶어놓고 고문이라도 하든가.”
“고문을 하면 청을 들어줄 것이오?”
“내 아무리 힘없고 나약해도, 하찮은 육신 따위에 연연하겠느냐? 도적놈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죽음마저 도외시한 그의 의연함에 이레는 감탄했다.
무슨 이유로 십학사의 구름으로 천거되었는지는 몰라도, 대쪽 같은 심지는 분명 평범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궁금하였다.
무관심을 넘어 적개심까지 품은 저 사람을 해는 대체 어떻게 설득할 생각일까?
“정히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무리하여 권하지 않겠소. 돌아가도 좋소.”
예상과 달리, 해는 순순히 중년인을 놓아주었다.
“이리 곱게 보내줄 것이면 뭐하러 사람을 끌고 온단 말이냐. 별 미친놈들을 다 보겠군.”
중년인은 마지막까지도 독설을 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해는 여전히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소용없어요.”
사슴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무슨 뜻인가요?”
“저 사람은 결국 우리 십학사의 새로운 구름이 될 것이어요.”
“저리 싫다는 뜻이 분명한데도 말입니까?”
“저 사람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무엇이 중요합니까?”
사슴은 해를 손짓했다.
“해의 결정.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지요.”
***
회합이 끝났다.
학사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이레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진짜 용무가 아직 남았던 까닭이다.
모두가 떠나자 이레는 해에게 다가갔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소?”
“어떤 의도입니까?”
“무슨 말인지 짐작도 못 하겠소. 우둔한 이 사람을 위해 쉽게 설명해주지 않겠소?”
이레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누구인지 해는 알고 있습니다.”
해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짐작은 하고 있소.”
“알면서도 회합에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레는 빈궁이며, 또한 형운의 사람이었다.
십학사의 반대편에 선 사람.
해의 입장에선 적이라 규정짓고 경계해도 부족하지 않을 위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는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만사여의의 재물이 목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왜 그대를 해치지 않는 것인지 묻는 것이오?”
해의 직설적인 물음에 이레는 긍정의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나와 십학사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소.”
“무슨 말입니까?”
“불순한 존재 하나쯤 끼어 있다고 해서 십학사가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란 뜻이오.”
“…….”
“그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은 알고 있소. 하지만 결국 여인. 그대가 아무리 사력을 다해도 여인이라는 새장에 갇힌 이상할 수 있는 발악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소. 그리고 그런 상황은 그 사람 또한 마찬가지일 테지.”
새장에 갇힌 존재.
이레는 여인이라는 한계로 푸른 창공을 날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람.
형운 또한 궁이라는 새장에 갇혀 헛된 발버둥을 치는 새라는 뜻.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있으나, 그곳은 지독하게 높은 곳이라. 목이 터지라 소리쳐도 결코 지상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오.”
해의 일침에 이레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십학사의 영향력은 조선 곳곳에 닿아 있었다.
그에 반해 형운은 아직 조정의 권력조차 온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하고 있음에도 곳곳에서 거센 반대와 방해를 겪고 있다.
해의 말은 바로 그런 형운과 이레의 외롭고 위태로운 상황을 언급한 것이었다.
“차라리 그대가 설득하는 게 어떻겠소?”
“무엇을 말입니까?”
“그에게 십학사를 따르라 하시오. 파도와 맞서는 어리석음 대신 바람에 허리를 숙이는 갈대의 유연함이 현명하지 않겠소?”
“……!”
해의 느른한 속삭임 한마디, 한마디가 이레의 급소를 찔렀다.
이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파도가 높다 하나, 어찌 높게 솟은 태산의 의지를 꺾을 수 있겠습니까? 바람이 제아무리 날카롭다 하나 어찌 한여름 뙤약볕을 물릴 수 있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진정으로 그가 태산처럼 의연하고, 뙤약볕처럼 만천하를 달굴 만큼 뜨겁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해의 대답은 명백한 냉소, 비웃음이었다.
이쯤 되니, 이레 역시 화를 삼키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 형운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군요. 회합을 전하는 방식이 전과 달라져 이상하게 생각하였더니, 과연 이런 의도를 전하기 위함이었군요.”
“회합을 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니?”
이레는 소매에서 서찰을 꺼냈다.
“오늘 글월비자가 전한 이것이 방금 보인 해의 뜻이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분노를 담은 이레의 물음에 해는 상상하지도 못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이 서찰을 전했다고?”
되묻는 해.
그의 놀란 반응은 결코 천연덕스러운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금시초문.
그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해가…… 아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해가 한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무슨 이유로.
무슨 목적으로.
***
“또 그대란 말인가?”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온궁으로 향하던 행차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
화완 옹주의 가마 안으로 은밀히 서찰이 전해졌다.
서찰엔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이레.
“내 것을 가진 그대가 이제 보니 내 다른 것마저 훔치려 하였구나.”
화완 옹주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