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60화 (160/215)

#160. 유혈목이

밤늦은 시각.

특별히 갈 곳이 없었던 기대는 은자원으로 향했다.

사방 덧창이 내려진 은자원은 캄캄한 어둠에 가라앉아 있었다.

더듬더듬 안으로 들어서던 그의 미간에 문득 주름이 그려진다.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희미한 유등이 켜져 있었다.

누가 왔는가?

고개를 갸웃하며 빛을 따라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뜻밖의 모습이 보였다.

“빈궁마마…….”

기대의 입에서 놀란 부름이 흘러나왔다.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은랑입니다.”

입가에 맑은 미소를 머금은 이레는 자신을 향한 기대의 호칭을 정정했다.

“이곳에선 빈궁이 아닌 은자원의 은랑으로 부르기로 약조했잖습니까.”

“그래도 법도가 있거늘.”

“법도와 예법이라는 말이 오라버니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네가 이 오라비를 뭘로 보는 것이냐?”

“은자원의 은마로 보입니다만.”

두 남매의 시선이 허공 중에 마주쳤다.

이내 풋, 약조라도 한 듯 기대와 이레는 웃음을 터트렸다.

“밤이 늦었는데, 여태 이곳에 있었느냐?”

“오라버니는 이 늦은 밤에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할 일도 없고,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하여.”

“저는 오랜만에 왔더니, 살펴볼 일이 적지 않네요.”

기대는 이레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두루마리와 서찰들.

언짢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기대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레야.”

이레는 살피던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네, 오라버니.”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대는 누이가 보는 서류를 빼앗았다.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이깟 상소문 따위를 네가 살펴서 무에 쓴단 말이냐? 빈궁이라는 지고한 자리에 올랐으면, 즐기며 편히 쉬어야지.”

“세상에 쓸모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돌려주십시오.”

“싫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건…….”

기대는 말끝을 흐렸다.

이레를 본 이후 그의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다.

자신이 오늘 본 것을 이레에게 말해야 할까?

그랬다가 행여 상처받으면 어찌해야 하나.

그럼 아무것도 못 본 척, 기억에서 지워버릴까.

갈등하던 기대는 물음 대신 질문을 던졌다.

“이레야, 너는 은백을 믿느냐?”

“뜬금없이 무슨 말씀입니까?”

“혹시, 만약에 말이다. 은백이 다른 여인을 만난다면…….”

이레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기대는 급히 말을 돌렸다.

“오해하지 마라.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절대, 은백이 다른 여인과 있다거나, 그 여인과 함께 있으며 웃었다거나…… 하는 걸 본 건 아니고…….”

변명하는 기대를 보며 이레는 미소를 지었다.

“또 무슨 짓궂은 장난이십니까?”

“장난이라니?”

“장난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신단 말입니까?”

“그건…….”

“그럼 은백이 허랑방탕한 짓이라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늘 바르고, 정도를 걷는 분이라. 따분하고 심심한 분이라고 말씀하셨던 오라버니가 아니십니까. 은백께서 그럴 분이 아니시라는 걸 그 누구보다 오라버니가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 분명 은백은 그런 사람이지…….”

기대는 맥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정후겸과 함께 있던 의문의 여인이 떠올랐다.

유난히 붙임성 좋아 보였던 그녀가 오늘 마지막으로 만난 사내는 형운이 분명했다.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지만, 그가 틀림없었다.

비록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특별한 눈썰미를 지닌 기대를 속일 수는 없었다.

‘아쉽게도 확실한 현장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형운과 의문의 여인은 시전을 잠시 거닐다 기루가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방에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아 그 이후의 일은 확인할 수 없었다.

기대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허나, 사내는 절대 믿으면 안 된다.”

갑자기 버럭 소리치는 기대를 보며 이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대는 쐐기를 박듯 다시 말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뜻이다.”

“언제는 오라버니만 믿으라면서요?”

“오라버니는 예외지.”

“그렇다면 은백도 예외입니다.”

“은백은 네 오라비가 아니질 않으냐?”

“오늘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레야.”

“네.”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마라.”

“…….”

“네 곁에는 이 오라비가 있다. 네 눈에 눈물 나게 하는 놈, 이 오라버니가 피눈물 나게 할 것이다. 알겠느냐?”

이레는 대답 대신 기대를 빤히 응시했다.

“왜? 어찌 그리 보는 것이냐?”

“그놈이 설마…… 은백을 뜻하는 건 아니시죠?”

“세상 그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은백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하면, 그건 역적이 되는 겁니다.”

“……까짓, 역적 되는 게 대수겠느냐?”

“그런데 안색은 왜 그렇습니까?”

“내 안색이 어떠한데?”

“낯빛이 창백합니다.”

“햇빛을 못 봐서 그런 거다.”

“손도 떨고 있습니다.”

“원래 수전증이 있어서…….”

기대의 실없는 대답에 이레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거 아십니까, 오라버니.”

“무얼?”

“오라버니가 계셔서 늘 든든합니다.”

“…….”

“오라버니가 제 오라버니라 정말 좋습니다.”

이레의 말에 기대는 말 없이 빙그레 웃는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네가 좋으면…….

나는 무엇이라도 좋구나.

“그러니 오라버니, 은백은 봐주십시오. 오라버니를 역적으로 만들 순 없습니다. 그런 건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어허, 끝까지 은백을 감싸고 도는구나. 그렇게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약조하였으니까요.”

“약조?”

이레는 소매 속의 침통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동심결(同心結) 매듭으로 단단히 묶어놓은 침통.

“영원히 변치 않겠다, 그리 약조하셨으니까요.”

***

황금빛 태양이 궁궐의 지붕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이른 아침, 이레는 후원의 영화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달리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눈빛엔 짙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혹시, 만약에 말이다. 은백이 다른 여인을 만난다면…….’

간밤에 기대가 했던 말이 이상하게도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라버니는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셨을까.

물론,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이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밤마다 형운과 실뜨기 놀이를 하던 손이다.

그녀의 양손에 어지럽게 얽힌 실을 깍지끼듯 벗겨내며 형운은 속삭였더랬다.

영원히 변치 않겠노라고.

그의 굳은 약조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어제 같은 분이다.

자신의 입 밖으로 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틀림없이 지키는 그런 분이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그녀의 손가락을 지나, 굳고 단단하게 얽힌 실뜨기를 할 때마다 다짐한 말이니…….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어쩌자고 오라버니는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짓궂은 장난을 즐기시는 분이시지만, 한 번도 그렇게 심각한 농을 한 적은 없었는데.

이레는 허공을 맴돌던 손으로 당의 고름에 묶인 침통을 쥐었다.

백옥으로 만든 쌍나비 노리개와 함께 동심결 매듭으로 묶은 침통을 이레는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있었다.

번잡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자니,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이레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당에서 영빈 이씨와 화완 옹주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빈 마마.”

이레는 허리를 굽혀 영빈에게 예를 올렸다.

“무에, 근심이라도 생긴 겁니까?”

영빈의 물음에 이레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저런. 표정이 좋지 않은데, 어디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닌가요? 내가 괜히 불러낸 건 아닐까 걱정이 듭니다.”

“아닙니다. 마마를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영빈 이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화창한 늦가을의 아침.

영빈은 다과를 함께 하자며 화완옹주와 이레를 불렀다.

이레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영빈이 말했다.

“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시절이 이러하니. 반기는 연회도 크게 열지 못하였습니다. 섭섭하더라도 빈궁께서 이해해주세요.”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이리 영빈 마마를 다시 뵙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겁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우리 빈궁께서 동궁의 곁에서 위로가 되었다는 말은 늘 듣고 있었답니다.”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하였을 뿐입니다.”

“명색이 할미가 되었건만, 동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를 용서하세요.”

“영빈 마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동궁저하와 저는 그저 마마께서 계시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 생각해주니, 이 늙은이의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빈궁.”

“말씀하십시오, 영빈 마마.”

“혹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금처럼 그랬듯 빈궁께서 우리 동궁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기어이 폐세손 되었던 형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영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미안함과 한이 서려 있었다.

영빈의 곁을 지키던 화완 옹주가 끼어들었다.

“어마마마, 어찌 그리 약한 말씀 하십니까. 어마마마께서 강건하게 자리를 지키셔야 이 궁이 평온하다는 걸 어찌 모르시어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니라.”

“어마마마 그런 말씀 하실 때마다, 이 화완은 가슴이 오그라듭니다. 그러니 절 위해서라도 오래오래 저희 곁에 있어야 합니다.”

화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어이 고름을 들어 눈가를 훔치는 옹주를 영빈이 다독였다.

“이런, 내가 또 너를 울렸구나. 우리 옹주는 어찌 이리 눈물이 많을꼬. 울지 마라, 울지 마. 이 어미가 잘못하였느니. 모처럼 빈궁과 함께하는 좋은 자리인데. 이 어미가 괜한 말로 좋은 분위기를 망쳤구나.”

영빈이 손수건을 꺼내 화완 옹주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순순히 어미에게 얼굴을 맡기는 옹주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마냥 곱고 천진하였다.

두 모녀를 바라보는 이레의 눈에 문득 부러움이 들어찼다.

되짚어 생각하니, 어머니의 품에 안겨본 일이 없었다.

늘 병약했던 어머닌, 차마 여식을 한껏 품어주지도 못했다.

귓불을 스치는 늦가을의 바람만큼이나, 마음이 쓸쓸하였다.

이레는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시린 마음을 녹였다.

“그런데…….”

어느새 눈물을 말끔하게 지운 화완이 이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빈궁께선 별난 노리개를 갖고 계십니다.”

화완의 눈길이 이레의 당의 고름에 매달린 노리개에 닿았다.

백옥으로 만든 쌍나비 노리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그러나 쌍나비 노리개와 함께 동심결 매듭으로 단단히 묶어놓은 침통.

침통을 노리개처럼 달고 있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물었다.

화완의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이레는 은은한 미소로 마주했다.

“처음의 마음이 영원하길 기원하는 뜻으로 벗들과 나눈 것이라. 행여 잃어버릴까 걱정되어 이리 만들었습니다.”

이레는 은자원의 은자들을 떠올렸다.

그리움과 더불어 아련한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영원한 마음이라…….”

화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내 그녀는 감정 없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빈궁께선 보기보다 순진하시군요. 사람도, 그 사람의 마음도,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답니다.”

화완의 말에 이레는 침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이레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리석다 생각하겠지만, 저는 기적이라는 것을 믿곤 합니다. 간절히 염원하고 소망하면…… 행여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여도 기적처럼 이뤄지지 않을까요?”

화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으니, 어쩐지 서늘한 웃음이었다.

“헛된 희망으로 인해 빈궁께서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이레의 얼굴에 당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옹주께서 그리 말씀하여 주시니, 더욱 간절히 염원해야겠습니다. 이 동심결이 풀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

영화당의 다과를 마친 화완은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왔다.

처소로 들어서니, 때마침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초록의 단아한 당의 차림의 여인이 화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옹주마마.”

새치름하게 아래로 내린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진주분이라도 바른 듯 투명한 살결.

일부러 만들어도 그리 만들 수 없을 만큼 보기 좋은 콧날과 석류처럼 붉은 입술.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여인을 특별하게 하는 건 미려한 외관이 아니었다.

여인은 아련함과 청초함, 그리고 봄날의 나비 같은 팔랑한 생기가 가득했다.

그저 풍기는 느낌만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특별한 재주의 여인.

그녀는 십학사의 사슴이었다.

사슴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화완은 상석에 앉았다.

그러곤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곳은 어떠하냐?”

그곳.

십학사의 분위기를 묻는 말이었다.

“뒤숭숭하옵니다.”

학사들의 연이은 참변.

구름은 유배되었고 그를 따르던 대나무는 죽었다.

그리고 소나무와 영지 역시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십학사가 생긴 이래로 처음 겪는 실패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화완은 일말의 비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정리가 되어가는구나.”

담담한 화완의 반응에 사슴은 등골이 서늘하였다.

그래도 한때는 큰일을 함께 도모하던 사람들인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며, 단숨에 내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죽음 앞에서도 작은 감정조차 보이지 않다니.

아니, 화완은 비단 측근들을 쳐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실권한 학사들의 중간책들마저 모조리 쳐내어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사슴의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힐끗, 곁눈질로 화완을 훔쳐보았다.

화완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어제도, 지금도, 그리고 아마도 내일도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유혈목이.

전신에 꽃이 핀 듯한 무늬가 있어 꽃뱀이라 불리는 뱀.

무늬도 화려하고 사람을 보면 피하여 무해 하다 알려졌다.

물어도 좀처럼 탈이 나지 않아 무독사로 알고 있으나…… 사실, 꽃뱀은 가장 치명적인 독을 지닌 뱀이었다.

입안 깊숙이 치명적인 독니를 숨기고 있으니.

워낙 깊은 곳에 독니가 있어 열 번을 물어도 아홉 번은 중독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입안 깊은 곳의 독니에 물리게 되면, 살모사의 열 배나 되는 치명적인 독으로 처참하게 죽고 만다.

사슴은 화완의 미소를 마주할 때마다 늘 꽃뱀의 독니를 떠올렸다.

언제나 웃고 있지만, 누구보다 차가운 독심을 품은 여인.

과연 그녀에게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 걸까?

“십학사에 빈자리가 많이 생겼으니,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화완은 서탁 위에 놓인 종이를 사슴에게 내밀었다.

“이자들이 적당할 것이다.”

사슴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갈무리했다.

“그나저나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그 일.

화완이 십학사의 일 외의 일을 물었다.

사슴에게 은밀히 내린 명령.

권력을 거머쥐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

사슴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잘되고 있사옵니다.”

“잘되고 있다? 그 답답한 인사를 잘도 꾀어냈구나.”

“사람에겐 누구나 숨기고 싶은 본성이 있는 법이지요.”

“그 아이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느냐?”

화완의 물음에 사슴은 웃음을 지었다.

“지나치게 바른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러한 본능은 더욱 강한 법이옵니다.”

“그래,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가지려 합니다.”

“가져?”

사슴을 향한 화완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형편없이 망가뜨릴 계획이 아니었느냐?”

“처음엔 그리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직접 만나보니 다른 마음이 생긴 모양이구나.”

“사심(私心), 가져도 되겠습니까?”

화완은 미소 지었다.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

사슴이 물러나고, 화완 역시 궁을 나섰다.

문득, 한 사내가 보고 싶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제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사슴 때문인지.

그것이 아니면 영원한 마음 운운하던 이레에게 자극받은 것인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음이 그녀를 사헌부로 이끌었다.

집의의 집무실이 가까워지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

느닷없는 방문인지라.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였다.

하지만 정작 집무실로 들어가기도 전, 화완을 반긴 것은 엉뚱하게도 그 사내의 호통이었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그러한 일은 할 수 없다. 허튼소리를 계속할 것이면 그만 나가라.”

“알았네. 오늘은 이만 가지. 사람 참 각박하기는…….”

구시렁거리며 집의처를 나오던 기대는 화완과 시선이 마주쳤다.

기대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옹주마마를 뵈옵니다.”

옹주는 기대를 내려다보았다.

칼날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음성이 곧장 기대에게로 향했다.

“낯이 익은데. 누구더냐?”

“저는…….”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장무열이 나왔다.

“오신 줄 몰랐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

기대를 잠시 바라보던 화완은 장무열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내보다 그녀에게 더 중요한 건 장무열이었다.

화완은 장무열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 듣자 하니, 화가 많이 난 듯한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별일 아니었습니다.”

“그대가 화내는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군.”

장무열은 호수 같은 사내였다.

간혹 차갑고 비정하게 얼어붙는 때는 있어도, 좀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법이 없었다.

“귀한 분께 흉한 모습을 보였나이다.”

“아니외다. 옛 생각이 나서 오히려 반갑고 설레기까지 하였다오.”

그의 이질적인 모습이 화완은 반가웠다.

몇 해 전, 유난히 헛헛한 공허함으로 소리 없이 몸부림치던 그 날.

화완의 앞에 나타난 그 사내도 지금처럼 뜨거웠었다.

당장에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열기에 놀라고, 두 눈에 담긴 집요함에 호기심을 느꼈다.

오랜 기간 그 불길을 볼 수 없었는데, 오늘 뜻하지 않게 그날의 열기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무열의 그리운 열기는 이내 식어버리고 말았다.

요동치듯 타오르던 눈빛은 흠집 하나 없는 동경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 사내, 누구인가요?”

누구인데 차갑게 식어 돌처럼 굳어버린 그대를 흔드는 것이오?

그의 무엇이 나조차 못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오?

“질 나쁜 자이옵니다. 그자의 이름으로 옹주마마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몇 번을 더 물어도 장무열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자라며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정말로 하찮은 자라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알려주기 싫어서일까.

그런데 어째서 낯이 익은 것이지?

화완은 좀전의 그 사내를 그냥 보낸 것을 후회했다.

‘다시 기회가 있겠지.’

상념에 빠진 화완을 장무열의 목소리가 깨웠다.

“하온데, 사헌부에 무슨 볼일이십니까?”

“지나는 길에 집의처의 불빛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지요.”

차마, 그를 보기 위해 부러 걸음하였다는 말을 할 수없었다.

화완은 담담한 눈빛으로 장무열을 바라보았다.

“아직 퇴청하지 않은 겁니까?”

“이제 막 정리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랬군요.”

화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의처를 둘러보았다.

“늘 궁금했답니다. 장 집의가 일하는 곳은 어떤 곳일까 하고.”

어느새 장무열의 곁으로 다가온 화완에게서 짙은 분내가 전해졌다.

장무열이 서둘러 살피던 문서를 갈무리하였다.

화완 옹주는 묵묵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되었던 것일까.

문서를 정리하는 그의 손길이 분주하였다.

그러다 툭.

장무열의 소맷자락 안에 갈무리 되었던 작은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순, 화완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에 쏠렸다.

“이건…….”

화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침통이네요.”

화완의 손에 들린 침통을 본 장무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요즘 이런 것을 지니는 것이 유행인가 봅니다. 오늘 다른 곳에서도 침통을 보았소.”

“그랬습니까?”

이리저리,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물건을 살피던 화완이 입을 열었다.

“때마침 나도 이런 물건이 필요하였는데…….”

화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물건, 내게 주지 않겠소?”

“그 낡고 초라한 물건이 어찌 옹주께 어울리겠습니다. 차라리 제대로 된 물건을 구해 드리겠나이다.”

“구태여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소? 그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의미가 되니.”

“송구하옵니다.”

장무열은 침통을 빼앗듯 덥석 가져갔다.

화완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손안의 온기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아쉽군.”

그녀는 미소 지었다.

“나는 그것이 꼭 갖고 싶었는데…….”

화완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한 사람의 죽음을 결정한 특별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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