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왜 저하가 거기서 나오십니까?
“참으로 묘한 시국이로다.”
김기대가 중얼거렸다.
길게 이어붙인 의자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채였다.
“홍인한, 그자는 동궁 저하를 시해하려던 괴한들과 결탁하였다는 죄목으로 추포되었으나, 결정적인 증좌를 발견하지 못하여 결국 유배 정도로 끝나버렸고…….”
제 이야기에 스스로 취한 듯, 기대는 발마저 까딱이며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동궁 저하께선 무사히 대리청정하시게 되었건만, 정적(政敵)이라 할 수 있는 홍인한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여기저기 반대가 심하여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게 쉽지 않으니. 어허, 앞으로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기대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앞으로 일이 어찌 될까? 어떻게 될 거로 생각하는가?”
중얼중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기대의 혼잣말에 결국 장무열은 한마디 내놓았다.
“……대체 언제까지 그리 떠들 셈이냐?”
“아! 있었는가?”
있었다, 처음부터.
아니, 있을 수밖에 없다.
사헌부의 집의처에 집의인 장무열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장무열이 수북하게 쌓인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중, 슬그머니 들어온 쪽은 오히려 기대였다.
심지어 좀 전까지 태연하게 낮잠까지 자던 그가 아니던가.
“하도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네.”
“…….”
거짓말…….
그럼, 혼잣말을 그렇게 크게 떠들었단 말인가?
심지어 질문까지 던지며?
장무열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괜스레 한마디 섞었다간 열 마디, 백 마디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충분히 쉬었으면 그만 가라.”
단호한 축객령에 기대는 불에 덴 사람처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 무슨 박정한 소린가. 이제 바람도 싸늘하거늘. 날 더러 어딜 가란 말인가. 그렇게 야속한 소리 마시게. 우리가 어디 남인가?”
“남이다.”
피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딱히 이어질 연결 고리도 없다.
매몰찬 단정에도 기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자네가 몰라 그렇지. 우린 사실 남이 아니야.”
“내가 알지 못하는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었던가?”
“출생의 비밀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사돈에…….”
“너 같은 사돈 없다.”
“팔촌…….”
“이미 조사했다.”
“그 팔촌의 옆집 사는 사람이 내 먼 친척 되는 사람일세.”
“…….”
장무열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철두철미한 그라도 사돈에 팔촌의 옆집까지 뒤져보지는 못한 까닭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쯤 되면 이미 남이나 다름없거늘.
기대는 마치 승자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보게. 이런데도 우리가 남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웃사촌이라는 말을 들먹이며 전국 팔도의 모두가 친족이며 친척이라고 주장할 주둥이다.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뉘인가. 그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아닌가? 아! 그렇다고 그리 고마워할 필욘 없네. 물론 사람이라면 두고두고 은혜를 갚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러나 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 괜히 마음의 빚이니, 뭐니 하며 크게 신경 쓰지 말게.”
장무열은 이를 갈았다.
기대의 뻔뻔한 짓을 지금까지 지켜보고만 있는 이유.
자신의 집무실까지 쳐들어와서 배까지 벅벅 긁어가며 자는 김기대를 그대로 내쳐버릴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
김기대, 저자가 구명의 은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현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장무열은 주저 없이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던 그날, 그 시각으로.
그래서 이 악연을 거침없이 잘라낼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죽게 된다 하여도.
아니, 아예 김기대를 만나지 않는 것으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거스를 수 없고, 사헌부 집의의 집무실을 제집마냥 들락거리는 이 얄미운 녀석을 막을 방도 또한 없었다.
그 사이, 김기대의 혼잣말이 다시 장무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그대와 난 하늘이 내린 운명이 틀림없어.”
“하늘이 내린 형벌이겠지.”
꾹꾹 눌러 참던 장무열은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답답했다.
바깥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성큼성큼 집무실 문 앞으로 다가서자니, 어느새 쪼르르 등 뒤로 김기대가 따라붙었다.
“어딜 가는가? 함께 가세.”
“업무 중이다.”
따라오지 말라는 경고.
하지만 기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어디 자넬 따라간다 했는가? 마침 나도 밖으로 나갈 일이 생겨서 일어나던 참이니. 함께 나가잔 말이었네.”
말과는 달리 기대의 두 눈은 집착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기어코 들러붙고 말리라.
빤히 보이는 기대의 속내에 장무열은 신음을 삼켰다.
내 주변엔 어째서 이런 녀석들만 꼬이는 걸까.
***
잠시 후.
김기대와 장무열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궁궐 안이었다.
유난히 큰 키의 장무열은 당당한 걸음으로 궁의 긴 회랑을 걸었다.
그와 마주친 관원들은 하나같이 허리를 깊게 접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사헌부의 집의.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꼬투리를 잡아 관복을 벗길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세상천지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장무열을 향한 사람들의 눈빛엔 두려움과 경외심이 공존하였다.
황당한 것은 그와 나란히 걷는 김기대의 태도였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더니(狐假虎威).
기대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마치 자신이 사헌부의 집의인 듯했다.
아니, 장무열 보다 오히려 더 거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렸다.
보다 못한 장무열이 물었다.
“볼일이 있다 하지 않았나?”
“당연히 있으니 왔지. 그러는 그댄?”
질문이 교묘하게 질문으로 돌아왔다.
“빈청에 가는 중이다. 그보다…….”
기대를 향한 장무열의 시선이 차가웠다.
대체 이자는 어디까지 따라다닐 속셈인가. 내 뒤를 쫓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에 볼일이 있는 게 사실이냐?”
“하하, 당연하지. 보면 모르는가.”
기대는 어깨를 쫙 펴며 입고 있는 관복을 과시했다.
나도 이쪽 사람이다,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장무열의 구겨진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자 역시 관복을 입었으니, 나라의 녹을 먹는 관인임은 틀림없건만.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지?
그보다 이 녀석의 소속은 어디란 말인가. 어느 소속이기에 관원의 관리가 이토록 엉망일까.
“그나저나 빈청에 간다고?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고리타분한 당상관들뿐인데. 그런 곳엔 무슨 일로 가는 건가?”
“대사헌께서 빈청에…….”
절묘한 시기에 날아온 질문.
무심코 대답하려던 장무열은 뒤늦게 입을 닫았다.
“왜 말을 하다 마는가?”
김기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 자가, 기본적인 업무 체계조차 모르니.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 사람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무릇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자네 같은 일벌레가 돋보이는 법이지.”
“나를 위해 네놈이 부러 무능하다는 뜻이냐?”
“무능이 아니라 희생이지, 희생. 고귀한 희생.”
천하제일의 게으름이 고귀한 헌신으로 포장되는 순간이었다.
“허허, 나라고 어디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겠는가? 하나, 내 실력이 지나치게 출중하니. 나 같은 유능한 인재가 작정하고 일을 하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무능해 보이는 건 당연한 이치.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어도 못하는 척, 잘하면서도 서투른 척, 이리 지내는 것이지.”
곧 죽어도 할 말 있다는 듯 김기대가 소리쳤다.
장무열의 표정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표정이 왜 그리 심각한 겐가?”
“아무래도 더는 못 참겠다.”
“무얼?”
“너, 소속이 어디냐?”
“그런 건 알아서 뭐하려고?”
“네가 소속된 관청의 사람 관리가 태만 한 듯하니. 조사해보려 그런다.”
서슬 퍼런 장무열의 협박에 기대의 태도가 급변했다.
“하하, 우리 사이에 조사는 무슨. 아차, 그러고 보니 내 급히 처리해야 할 볼일이 있는 걸 깜박하였군. 난 이만 가야겠네.”
“어디 소속이냐 물었다.”
“다음에 또 만나세.”
장무열의 성난 물음을 무시하며 기대는 발을 재게 놀렸다.
천하제일 팽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빠른 움직임이었다.
***
“사람 참 무정하기는…….”
연신 장무열을 험담하던 기대가 향한 곳, 바로 은자원이었다.
은자원의 덧창이 모두 내려진 것을 보며 기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밤 귀신 같은 분이 웬일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걸까?”
은자원의 은자 중 이렇게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은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은백, 형운.
기대는 더듬더듬 은자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라? 아니 계시잖아.”
당연히 있는 줄 알았던 은백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대신 운신의 폭이 어려워 은자원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이레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레…… 아니, 빈궁.”
“이곳에선 은랑이라 부르기로 했잖아요.”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빈궁의 차림이 아닌 궁녀 복색을 한 누이의 모습.
“빈궁전을 이리 자주 비워도 되느냐?”
“오늘 새벽, 중전마마와 영빈 마마를 비롯하여 여러 전각의 비빈들이 온궁으로 행차를 하셨답니다.”
“오호라. 날이 추워지니, 영빈 마마의 무릎병이 다시 도진 모양이구나.”
“오라버니께선 어찌 그리 다 아십니까?”
“내가 뉘더냐. 네 오라비가 아니더냐. 모르는 것 빼곤 다 알고 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면 된다. 그보다…….”
기대가 이레를 향해 궁금증을 보였다.
“내명부 여인들 모두가 온궁으로 갔으면 빈궁인 너도 응당 가는 거 아니냐. 너는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주상전하의 기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시니. 저라도 내명부를 지켜야지요.”
그제야 은자원의 덧창이 꼼꼼하게 내려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형운만큼이나 이레 역시 이곳에 있음을 남에게 들켜선 안 되었던 까닭이다.
“모처럼 궁이 비었으면, 편히 쉴 것이지. 여긴 뭐 볼 게 있다고 찾아왔느냐?”
“빈궁전에 갇혀 지내다 보니, 세상일에 어두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바깥세상을 살피고 확인하는데, 은자원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과 일들이 이곳으로 모이기 때문이었다.
문득, 기대는 의문이 생겼다.
이곳의 자료는 누가 가져오는 것일까.
여태 당연하게 생각해 오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한번 알아봐야겠다.
다짐하며 기대는 이레의 곁으로 다가섰다.
“소일거리 삼아 온 모양이구나. 그래, 뭘 그리 열심히 적는 것이냐?”
기대는 이레가 붓을 놀리는 서찰을 흘끔 보았다.
이상하거나 특이한 사건들에 관한 기록.
그리고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부창부수라더니. 답답한 은백과 혼인을 한 이후로 노는 방법을 모두 까먹은 게로구나.”
“저는 이리 노는 것이 즐겁습니다.”
“좀 더 즐겁게 노는 법도 많다.”
기대가 돌연 이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자.”
“갑자기 어딜 가자는 말입니까?”
“오라비랑 놀러 가자.”
“네?”
“복색을 보아하니, 금정이가 너를 대신하여 처소에 있는 것이 분명하렷다. 그렇다는 건 네가 잠시 궁을 비워도 된다는 뜻. 너 좋아하는 서책이라도 보러 가자.”
“서책은 궁에도 많습니다.”
“답답한 궁에서 읽는 것보단 거리의 세책방에서 읽는 게 더 재밌지 않겠느냐?”
“세책방이요?”
“궁의 서고에 있는 서책들이야 뻔하지. 도리가 어떻고, 인정이 어떻고, 군주가 어떻고, 충심이 어떻고. 누구누구 왈왈왈, 재미없는 소리만 잔뜩 할 것인데. 이 귀한 시간을 그리 재미없는 서책 읽기로 쓰긴 너무 아깝지.”
“…….”
“도성에 새로 생긴 세책방이 있느니. 그곳엔 세상에서 듣도 보도 못한 재미있는 서책들이 가득하니라. 그뿐인 줄 아느냐? 서역의 서책들도 잔뜩 있으니. 아마 네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기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누이동생이다.
틀림없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설 것이다.
***
“이상하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며 기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역, 세책방, 이런 말을 하면 당장 뛰쳐나올 줄 알았는데.”
그의 생각과 달리 이레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 어두컴컴한 곳이 대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연모하면 닮는다더니.
정말 은백의 음울한 분위기를 닮아버린 모양이다.
“다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은랑, 그 아이를 꼬여내고야 말 것이야.”
자꾸만 음침한 곳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누이에게 밝은 햇살을 쐬어주고 싶었다.
결의를 굳힌 기대가 궁궐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 사람은?”
때마침 빈청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
무표정한 얼굴.
자로 잰 듯 정확한 너비로 뚜벅뚜벅 걷는 걸음걸이.
“은호로군.”
조금 전에 헤어진 장무열이었다.
“하하, 역시 우린 보통 인연이 아닌…….”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장무열에게 달려가려던 기대는 다음 순간,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꺾인 담벼락 너머에서 긴 행렬이 나타났다.
무채색의 공간을 밟으며 나타난 행렬의 가장 앞.
화려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여인이 봄꽃 같은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완옹주와 그녀를 따르는 옹주전의 상궁과 궁녀들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장무열에게 서슴없이 다가간 화완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처럼 그윽한 목소리를 흘렸다.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터라.
장무열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기대의 눈에 보이는 건 옹주의 얼굴뿐이다.
옹주는 장무열과의 우연한 마주침이 마냥 즐거운 듯했다.
기대는 숨을 죽인 채 둘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옹주의 화려하면서도 도도한 미색은 먼발치에서 보아도 강렬하였다.
하얀 목련꽃이 수 놓인 자줏빛 당의.
바람결에 느껴지는 아스라한 향내.
발걸음 한 폭, 손짓 하나에도 고귀함이 배어 있었고, 입가의 번진 웃음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가련함과 청아함이 함께 했다.
게다가 주상 전하께서 애지중지, 총애하는 여식인지라.
궐 안의 모든 일이 옹주의 한 마디에 좌지우지된다고 하였다.
그런 여인이…….
기대가 숨어 있는 곳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화완과 은호라…….”
기대의 눈이 날카롭게 여며졌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뭐든 말만 하세요.”
“…….”
“그럼, 다음에 또 보지요, 장 집의.”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화완 옹주는 사람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마치, 볼일을 다 보았다는 것처럼 곧장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렇게 화완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사람 중엔 정후겸도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섰던 그가 장무열 앞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짧은 순간.
두 사내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한순간이지만, 나른하기만 하던 정후겸의 두 눈에 불길이 올랐다.
장무열은 그의 뜨거운 눈빛을 무감한 시선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 사내의 충돌은 찰나에 불과했다.
두 사내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지나쳤다.
‘이것 봐라?’
지켜보던 기대는 턱을 쓰다듬었다.
화완 옹주에 이어 정후겸까지…….
심상치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화완과 그녀의 일행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기대는 긴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인 듯 폴짝거리는 걸음으로 장무열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기대의 부름과 동시에 장무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 철저히 기대를 외면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 냉대에 물러설 기대가 아니었다.
“조금 전, 그분과는 어찌 아는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보통 사이는 아닌 듯하던데.”
화완과 장무열의 모습.
다분히 수상했다.
적어도 스치듯 지나치며, 안면만 익힌 사이는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장무열은 찬바람만 흘릴 뿐이다.
“알 필요 없다.”
“여전히 냉정한 사람이군. 그렇게 숨기고 있으니…….”
장무열의 너른 등을 보는 기대의 두 눈이 가늘게 여며졌다.
“더더욱 알고 싶어지지 않은가.”
***
“대체 저자, 뭐하는 자란 말인가?”
시전 거리를 걷는 기대의 얼굴은 의혹으로 가득했다.
장무열의 비밀.
은호와 화완 옹주의 관계가 궁금했던 기대는 몰래 장무열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의 추적 대상이 바뀌었다.
궐문 앞에서 장무열과 정후겸이 다시 마주쳤던 까닭이다.
우연히 만난 것인지.
둘은 나란히 걷긴 했지만, 별반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뒤를 쫓던 기대의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갈림길에서 장무열과 정후겸이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 때, 기대는 정후겸을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왕을 극진히 보필하며, 화완의 위세를 등에 업고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
형운이 동궁이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자리의 주인은 정후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자가 장무열과 수상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증이 기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가 뒤쫓던 표적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시전 거리를 걷던 정후겸이 한 여인을 만났다.
장무열과 정후겸의 관계가 적당히 수상했다면, 지금 만난 여인과의 관계는 상당히 수상했다.
‘정후겸, 저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조사할 수 있으니.’
지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캐는 쪽이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대는 감(感)과 변덕으로 두 번이나 표적을 바꿔가며 여인의 뒤를 쫓았다.
정후겸과 한동안 시전 거리를 걷던 여인은 반 시진 후, 세책방 앞에서 정후겸과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반 시진이 지났다.
세책방에서 여인이 나왔다.
기대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참으로 기이한 여인이구나.’
수려한 미모의 여인은 생김새와 달리 활달한 성격이었다.
시전의 상인들을 스스럼없이 대했고, 오가는 이들 중 아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시전 여기저기에 등이 걸렸다.
여인은 시전 끝자락에 자리한 거대한 느티나무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섰다.
연신 주위를 살피는 모양새로 보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정후겸과 다시 만나기로 한 걸까?’
기대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여인의 동태를 살폈다.
그렇게 일 다경쯤 지났을까.
문득 여인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왔구나!’
드디어 여인이 기다리던 자가 나타났다.
정후겸인가?
김기대는 면사를 쓴 채 여인에게 다가가는 사내를 보며 눈가를 여몄다.
누군가 지켜보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듯.
여인은 기다리던 사내를 향해 한걸음에 달려갔다.
이윽고 여인과 사내가 마주 섰다.
기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어렴풋하던 사내의 얼굴을 세세히 살필 수 있었다.
푸른 도포.
옥으로 끝을 매듭지은 세조대.
구하기 어려운 고품질의 흑립.
유난히 날렵하고 단아한 미간을 지닌 사내.
‘저 사람은……!’
기대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면사를 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기대는 사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사내는 기대와도 무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동궁 저하?”
왜 저하가 거기서 나오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