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서막(序幕)
“칼에 찔리셨다고…… 환관으로 변복한 자가 저하를 찔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다행히 사실이 아닌 모양입니다.”
형운의 품 안에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이레가 말했다.
토닥토닥, 그녀의 등을 다독이던 형운이 무심히 대답했다.
“모두 사실이오.”
너무 담담한 어조라.
마치 남의 일인 양 느껴졌다.
이레는 놀란 눈으로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칼에 찔리셨단 말이어요? 어딥니까? 어딜 어떻게 찔린 겁니까?”
그녀는 형운의 몸 곳곳을 세심하게 더듬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팔과 어깨, 얼굴…….
그녀의 시선이 날카로운 안면 윤곽을 따라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다 상의가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가슴 한복판.
날카로운 무언가로 찔리고 베인 흔적.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설마…….”
전신이 벌벌 떨렸다.
형운이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주었다.
그리고 움츠러든 이레의 손을 찢어진 자신의 옷자락으로 인도했다.
두렵고 무서웠다.
손끝으로 큰 상처가 더듬어질까 봐.
상처를 칭칭 감은 천의 눅눅하고 거친 촉감이 느껴질까 봐.
하지만 이레의 손을 단단히 움켜쥔 형운은 끝내 찢어진 자신의 옷 틈으로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쿵! 쿵!
심장이 날뛰었다.
이윽고 이레의 손끝에 묘한 이질감이 전해졌다.
그것은 사정없이 뜯긴 살가죽의 안타까운 상처도 아니었고, 상처를 치료한 흔적도 아니었다.
“몸이 어찌 이리 딱딱하십니까?”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나무 방패처럼 단단했다.
형운의 입가가 부드럽게 여며졌다.
“빈궁도 알다시피 날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많지 않소?”
이레는 차분히 그의 사연에 귀 기울였다.
“내 존재가 껄끄러운 자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 몰아낼 궁리만 하고 있소.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상황이 급해지면 무리한 일도 서슴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오.”
형운은 돌연 입고 있던 철릭을 벗었다.
잠시 후.
하얀 저고리가 드러났다.
저분이 왜 저러실까?
이레의 의문은 이내 풀렸다.
형운이 속저고리를 마저 벗자, 적삼 위로 걸친 지갑(紙甲:종이로 만든 방탄복)이 나타난 것이다.
“갑옷을 늘 걸치고 계셨단 말입니까?”
이레는 형운의 지갑을 더듬었다.
질긴 한지를 십 여장 겹쳐 만든 지갑(紙甲).
철갑옷이나 짐승 가죽으로 만든 피갑, 면을 겹쳐 만든 면갑에 비해 가벼웠으나 칼이나 활촉을 피하는 건 다른 갑옷에 못지않았다.
“상옹께서 만사불여튼튼이라 하셨소. 권력에 미친 자들이 법도는 물론이고, 인륜과 천륜조차 아랑곳하지 않으니. 모든 일에 미리 대비하라고 신신당부하시었소.”
이레는 서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던 이레는 다시금 형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동궁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감히 어떤 자가 동궁을 해치려 하였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오…….”
다급하게 묻는 이레를 달래듯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형운은 아찔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생과 사를 오갔던 그 긴박한 순간을…….
*
또록, 똑.
서탁의 대화에 빠져 있노라니, 천장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종종 고양이나 살쾡이 같은 짐승이 궁의 지붕 위로 지나다녔던 터라.
형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따락, 툭.
다시 들려온 기척에 형운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올려보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은 제법 큰놈이 들어와 설치는 모양이구나.”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소인 최 내관이옵니다.”
“무슨 일이냐?”
“궁의 북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출몰하였다 하옵니다.”
“대체 궁의 경비가 어떠한데, 수상한 자들이 출몰한단 말이냐.”
“병부의 군사들과 금군이 그들을 잡으러 갔다 하옵니다. 동궁전도 위사들이 보호하고 있사오니. 아무 근심 마옵소서.”
“대전에는……. 할바마마의 전각에는 누가 있느냐?”
“심려치 마옵소서. 지금 주상전하의 전각을 비롯하여 교태전과 비빈들의 전각에도 병사들을 보냈사오니…….”
최 내관의 보고는 끝을 맺지 못했다.
위사들이 지키던 동궁전으로 검은 복면 차림의 괴한들이 들이닥친 까닭이었다.
“네 이놈들, 예가 어디라고!”
버럭 고함을 지르며 최치성이 달려나갔다.
그의 뒤로 홍인모가 따라나섰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밤공기 사이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고, 어린 궁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지라.
허둥대는 소리가 한참이나 회랑을 뒤덮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소란스럽던 밖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이처럼 대담하단 말인가.”
침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형운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최 내관을 바라보았다.
“살펴보고 오너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 내관이 밖으로 종종걸음쳤다.
그리고 잠시 후.
보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을 침입했던 괴한들 대부분이 잡혔다고 하옵니다.”
낯선 목소리.
아마도 최 내관을 따르는 젊은 내관 중 하나이리라.
“잘되었구나.”
“하오나 잔당 몇을 놓치는 바람에 안심할 순 없다 하옵니다.”
“잔당 몇을 놓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무탈하여야 할 터인데. 걱정이로구나.”
형운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보고하던 젊은 내관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언뜻 보이는 몸태로 짐작건대, 뼈대가 굵은 자였다.
“그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또한, 그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냈느냐?”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사옵니다. 하지만 아마도…….”
말끝을 흐리던 내관이 돌연 형운의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형운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관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내내 허리를 조아리고 있던 젊은 내관이 몸을 바로 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기서 이런 일을 하지 않을까 싶소.”
내관의 소맷자락 속에 감춰져 있던 손에서 사나운 살기가 뻗어 나왔다.
퍽!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의 방심이 부른 불행.
형운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명치 부근에 꽂힌 비수를 응시했다.
벼려진 칼날은 어둠 속에서도 서슬 퍼런 살기를 번뜩였다.
“네,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하하, 나 말인가? 그대를 죽이러 온 저승사자니라.”
자객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던 형운의 표정이 죽는 자라고 보기엔 너무 단정했던 까닭이다.
어디 그뿐일까.
“저승사자? 네깟 놈이 날 죽이겠다는 것이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자객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히 염통을 찔렀는데…….”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인도했다.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었다.
그런데…….
분명 정확하게 상대의 명치를 찔렀건만.
잠시 비틀댔을 뿐.
형운은 곧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어, 어째서……?”
“어째서 멀쩡한지 궁금한 것이냐?”
그는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자객에게 달려들었다.
단숨에 자객을 제압한 형운이 귓속말하듯 속삭였다.
“네놈들을 잡기 위해 늘 이 심장을 단련하였다.”
밤낮없이 용암처럼 뜨거운 슬픔과 분노와 원한을 들이키고 삼켰으니.
“그러니 고작 이따위 쇠붙이로는 어림없다. 나를 죽이려면 더 큰 칼을 가져와야 할 것이다.”
나는 쉽게 죽지 않는다.
아니, 쉬이 죽을 수 없다.
네놈들을 모조리 잡을 때까지.
비통하게 먼저 간 내 사람들의 억울함을 모두 풀어줄 때까지.
“절대 호락호락 죽어주지 않을 것이다.”
*
“다행입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행여 저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너무 두려웠습니다.”
이레는 연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숨이 막혔습니다. 혹여나 저하께서 잘못되셨을까. 가슴 졸이며 불안하였나이다. 이곳에 있는 내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저는 애간장이 타서 죽었을지 모릅니다.”
형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허락 없이 어찌 그대가 죽을 수 있단 말이오?”
동의하듯 이레는 머리를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저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형운의 검은 눈동자에 온전히 담긴 제 얼굴을 보며 이레는 힘주어 말했다.
“행여 다치지 마십시오. 행여 제 허락 없인 절대 죽어선 아니 될 겁니다.”
“……따르겠소.”
“…….”
“그대의 명이니 따를 것이오.”
굳은 약조와 함께 이어지는 다정한 입맞춤.
사뿐사뿐.
형운은 여린 꽃잎을 닮은 이레의 입술을 더듬으며 그녀의 숨결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녀의 가슴을 에워쌌던 두려움과 긴장, 불안과 걱정을 모두 지워버리기라도 하는 듯.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녀의 숨결을 마시고 또 마셨다.
넘실대는 들숨의 풍랑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형운의 가슴을 쥐고 있는 이레의 손끝이 느른해졌다.
되었구나.
이젠 조금은 안심하는구나.
바짝 곤두세웠던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형운은 이번엔 들이마신 숨을 내뿜는다.
괜찮소.
괜찮소.
괜찮소.
다독이며 안심시키는 숨결이 이레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이촉을 간질이는 형운의 말캉한 위로에 그녀는 스르륵 녹아내린다.
꼿꼿하던 이레의 등이 부드러워졌다.
절벽에 매달린 듯 형운의 앞섶을 꼬옥 쥐었던 그녀의 하얀 손은 어느 사이 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입맞춤의 농도가 짙어지고, 숨결의 풍랑도 거칠어진다.
교교한 달빛 아래,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졌다.
적도, 죽음도, 두려움도, 질시도 없는…….
아찔한 연모만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형운과 이레를 맞이했다.
***
“이런 망할!”
뜻밖의 소식에 홍인한은 서탁을 내리쳤다.
실패하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건만.
자신이 보낸 자객의 칼이 형운의 갑옷에 가로막혔다고 한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홍인한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그놈이 어찌 알고 그런 방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길이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대감. 그들이 모두 죽거나 잡혔다 하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영지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동궁을 죽이려 하였으니.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어도, 방관하고 동조한 건 명백하였다.
다시 말해 역적이 된 것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과 일가 모두가 역적으로 낙인 찍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걱정 마시오. 자객들의 입단속은 철저히 해두었으니.”
“하지만 끔찍한 고문엔 장사 없다 하였습니다. 없는 죄도 지어서 불게 만들 수 있는 곳이 의금부가 아닙니까. 아무리 입이 무거운 자라도 진실을 고하지 않겠습니까?”
“제 한 목숨만 걱정한다면 그렇겠지.”
홍인한은 손때가 묻어 지저분한 서찰을 꺼내 보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번 일에 가담한 자들의 신세 내력과 그들의 식솔의 정보가 담긴 문서라오.”
자객 중 홍인한을 아는 자는 고작 셋.
나머지 자객들은 홍인한이라는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설사 안다고 해도 절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리라.
행여 그랬다간, 그들의 식솔들이 무사치 못할 테니까.
무사들의 목숨값으로 홍인한은 그들의 식솔을 책임지기로 약조하였다.
또한, 이 일의 배후를 불었다간 식솔들도 무사치 않으리라는 겁박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뒤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들과 관련한 모든 증좌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였다.
홍인한은 누렇게 방을 밝히는 등잔에 서찰을 가져갔다.
무사들과 관련한 서찰에 곧 불꽃이 옮겨붙었다.
불꽃은 이내 재가 되어 흩어졌다.
혹시나 작은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은 흔적조차 지워버렸다.
청지기를 통해 소나무에게 연통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운신을 조심하라 당부하였다.
오늘 밤, 궁에서 일어난 일과 자신과 관련한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도록 안팎을 단단히 단속했다.
어느덧 푸르게 하늘이 밝아왔다.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홍인한은 보료에 팔꿈치를 기대고 앉았다.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
지끈하게 밀려오는 두통을 억누르며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쾅쾅쾅!
이른 새벽이건만.
누군가 거칠게 대문을 두드렸다.
등줄기를 훑는 서늘한 예감.
홍인한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청지기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우렁찬 호통이 홍인한의 귀를 파고들었다.
“죄인은 어서 나와 오라를 받으시오!”
홍인한은 뛰쳐나가듯 대청마루로 나갔다.
이내 너른 마당을 가득 채운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맨 앞에 어사복을 입은 홍국영이 서 있었다.
마루로 나온 홍인한을 향해 홍국영은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죄인 홍인한을 당장 잡아들이라는 어명이오!”
***
동궁전에 괴한들의 침입이 있고 며칠 후.
좌의정 홍인한은 삭탈관직 되어 유배를 떠났다.
괴한들과 그의 연결점은 끝끝내 찾을 순 없었다.
다만, 자객들이 지닌 물건 몇 개에서 좌의정과 관련한 표식이 나왔다.
고작 그런 것으로 관직을 빼앗고 유배를 보낼 순 없었다.
홍인한의 실권(失權)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삼불필지를 외치던 그의 입이었다.
감히 동궁을 얕잡아 보고 권세를 휘두르려 하였으니.
그 죄를 크게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홍인한의 권세가 워낙 막대하여, 상소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형운을 가로막은 많은 사건에서 홍인한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을 수도 없었다.
삼불필지 또한 왕이 대리청정을 명하면, 정중히 뜻을 거둬들여 주십사 간청하는 것이 예의인 만큼, 죄를 묻기 어려웠다.
그처럼 홍인한은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형운은 포기하지 않았다.
홍국영을 시켜 홍인한을 감시하게 한 것이다.
그들의 집요함이 마침내 미세한 틈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번에 잡힌 괴한 중 한 사람이 좌의정의 집을 드나드는 것이 목도되었고, 좌의정의 집에서만 쓰이는 표식을 괴한의 집에서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그래도 동궁의 외척이니, 당장 죽일 순 없었다.
대신 홍인한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를 보내라는 명이 떨어졌다.
훗날 유배가 풀린다 하여도 홍인한은 두 번 다시 도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노라는 엄명이 덧붙여졌다.
삼불필지 운운하며 형운을 얕잡아보던 홍인한의 입에서 통곡이 흘러나왔다.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은 자신이 택한 사람이 될 것이라며, 기세등등했던 권세가는 제발 살려달라 애원하는 처량한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무리 중 그 어떤 이도 홍인한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결국, 홍인한은 초라한 몰골로 유배지로 끌려갔다.
그가 도성을 떠나는 날.
떠나는 홍인한을 배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각박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평소 저자의 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그 많은 사람은 어디로 간 걸까요?”
육조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루 위.
상궁 차림의 사슴이 오라에 묶인 채 끌려가는 홍인한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나른한 표정의 정후겸이 서 있었다.
“깃털보다 가벼운 게 사람의 마음이오. 의리(義理)는 고사하고 사사로운 인정조차 터럭만큼도 없는……. 그저 각자의 이해와 명분 위에 세워진 관계이거늘. 무엇이 서운할 것이며, 안타까울 것이 무어겠소.”
내내 침묵하던 정후겸이 입을 열었다.
사슴은 홍인한의 초라한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그래도 막상 저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마냥 편하진 않습니다.”
“…….”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낼 때부터 예견된 모습이었지만. 미운 정도 정인가 봅니다.”
“분에 넘치는 욕심이라…….”
정후겸이 사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어떻소? 어울리지 않는 과욕을 부리는 듯싶소?”
사슴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탐욕스러운 자도 볼썽사납지만, 욕심 없는 사내도 매력이 없답니다.”
정후겸의 귓가에 바싹 얼굴을 가져간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탐욕 하지 말고 탐미하시어요. 욕심내지 말고 욕망하세요. 고작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당신이 아닙니까. 그 미천한 아이가 옹주의 양자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
“종종 당신이 어디까지 닿을까 궁금해지곤 한답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사슴에게 정후겸이 물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오?”
“무어가 더 필요합니까?”
“열렬한 기대와 희망. 나를 위해서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마음…….”
혼잣말 같은 정후겸의 중얼거림에 사슴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귀한 걸 바라십니까?”
“바라면 아니 되오?”
“드릴 수 없는 걸 원하시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조금 당혹스럽다는 듯 사슴은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향한 정후겸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 그렇군.”
그러나 이내 툭툭, 소맷자락을 털어내며 표정마저 지워냈다.
십학사의 수장, 해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정후겸이 입을 열었다.
“사슴, 그대도 알겠지만 십학사에 빈자리가 생겼소. 서둘러 새로운 학사들을 알아봐야겠소.”
“구름과 대나무, 두 학사의 자리에 적당한 자들로 알아보면 되겠지요?”
“아참! 내 깜박 잊고 말하지 않았군. 어젯밤, 소나무와 영지가 자결하였다오. 그러니 두 명이 아닌 네 명의 학사를 알아봐야겠소.”
“소나무와 영지가…… 죽었습니까?”
“그렇소.”
“자결이 확실합니까?”
“글쎄. 자결이든 아니든 그게 무에 중요하겠소. 중요한 건…….”
정후겸이 허리를 굽혀 사슴과 눈높이를 맞췄다.
“분열되었던 십학사를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되었소. 그리고 또 하나…….”
“…….”
“이 조선의 왕은 내가 결정할 것이오.”
“십학사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까?”
정후겸은 사슴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십학사가 곧 내가 될 것이오.”
***
두 시진 후.
늦가을의 밤하늘에 시린 별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가득한 수월의 내실로 은밀한 걸음이 스며들었다.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한 한서로는 해사하게 웃었다.
“오셨습니까, 빈궁마마.”
“조금 늦었습니다.”
궁에 있던 이레에게 한서로의 서찰이 닿았다.
갑자기 십학사에서 회합을 소집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동궁전의 괴변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라.
바싹 긴장했던 궁의 경계가 한풀 느슨해졌다.
덕분에 이레의 궁 밖 외유도 가능했다.
이제나저제나.
이레를 기다리던 한서로는 반색하였다.
서둘러 이레가 만사여의로 변장하는 것을 도우며 한서로는 상황을 전달했다.
“갑작스러운 회합의 이유는 아무래도 학사들의 죽음 때문인 듯합니다.”
한서로의 이야기에 동의하듯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무와 영지의 자결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두 학사의 죽음, 혹여 해와 관련이 있을까요?”
이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학사의 죽음 직전, 십학사의 무사들이 다녀간 것을 본 자가 있습니다.”
“역시, 그렇게 된 것이군요.”
“홍인한의 일을 기회로 해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학사들을 모두 치워버린 듯하옵니다.”
“십학사를 온전히 자신이 쥐게 되었다고 믿겠군요.”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십학사 내에서 해의 말에 반기를 들 학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십학사의 균형이 해에게로 온전하게 기울었습니다.”
“…….”
한서로는 이레의 눈치를 살폈다.
주저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마,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이대로 계속 십학사에 머무실 계획이십니까?”
어느 사이 만사여의로 변신을 끝낸 이레가 얼굴을 가린 너울을 살짝 걷어 올린다.
이내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이 한서로를 향했다.
“해가 이리 판을 깔았으니…….”
이레는 너울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이제부터 제대로 십학사를 집어삼킬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