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금야(今夜)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봤나.”
홍인한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삼불필지까지 들먹이며 동궁의 국정 참여에 대한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건만.
왕은 기어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디 그뿐일까?
깊은 밤, 급작스럽게 교지를 내려 동궁의 대리청정을 거행하였다.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은 셈이다.
“사태가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황급히 홍인한을 찾은 소나무의 표정엔 조급함이 가득했다.
대리청정이 무엇인가.
왕을 대신하여 국정의 크고 작은 일을 살피고 결정권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동궁에게 왕에 버금가는 힘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향후 동궁이 선세자의 죽음에 관련한 자들에게 어떤 보복을 할지.
선세자의 죽음 이후 세손을 비롯한 그 일가가 궁을 떠날 때 외면했던 조정의 대신들을 어찌 처분할지.
그리고 동궁의 환궁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였던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볼는지.
두렵고, 불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소나무는 연신 홍인한의 눈치를 살폈다.
“해는 무어라 하였습니까?”
왕의 명은 이미 내려졌다.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으니, 그들이 이제 믿을 곳은 십학사 뿐이다.
홍인한은 가래 끓는 소리를 토해냈다.
“사방에 지켜보는 눈이 있어 당장은 손을 쓰기 어렵다 하더이다.”
“그렇군요.”
예상한 대답이라 소나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인한은 미간을 찡그렸다.
소나무의 신음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랴.
당연한 반응인 것을.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구나.’
큰 별을 떨어뜨린 이후, 십학사의 주도권은 홍인한에게로 기울었다.
그는 해를 견제함과 동시에 십학사의 권력을 총동원하여 여러 일을 도모하였다.
제일 먼저 홍인한이 획책한 일은 동궁전의 주인을 택하는 것이었다.
왕세손 형운을 폐위하고 그 대신 버림받은 어린 하엽생을 동궁으로 삼으로 훗날을 대비할 생각이었다.
홍인한은 그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형운과 왕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하엽생을 자주 입에 올려 왕의 동정심을 유발하였다.
행여 어가의 행차에 폐세손이 나타날 것을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을 움직였고, 형운의 환궁을 막으려 하였다.
그와 동시에 많은 음모와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였다.
하지만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형운은 끝내 궁으로 되돌아왔다.
심지어 동궁전의 주인이 되었으며 대리청정까지 하게 되었다.
참담한 패배.
홍인한, 그는 형운에게 패하고 말았다.
‘두고두고 뼈아픈 실책이로다.’
당장 궐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간 홍인한의 눈도장 한 번 받고자 애쓰던 조정의 신료들과 궁인들.
하루살이처럼 귀찮을 정도로 홍인한의 주위를 맴돌던 그들이 그의 피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치명적인 것은 십학사 내에서의 위치였다.
연이은 실패로 홍인한과 그의 측근들의 발언권이 약화되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홍인한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동궁으로 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간 해가 보인 행보는 참으로 괴이했다.
한 손아귀에 권력을 쥘 수 있는 상황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해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홍인한이 십학사의 학사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그는 방관하였다.
그런 사이 홍인한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해를 배신하고 구름을 지지하는 학사들과 세력들이 늘어났다.
한동안, 홍인한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였던가.
홍인한의 천하는 짧았다.
구름은 몰락했고, 해를 배신했던 학사들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다.
“어가 행차가 있던 날, 그 밤에 있었던 참사의 범인은 밝혀졌습니까?”
소나무가 물었다.
홍인한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해’에게서 ‘어가 행차가 있던 날의 참사’로 흘러갔다.
왕의 행차가 있던 날.
그날 밤, 홍인한에겐 참으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홍인한을 따르는 자들의 중간책들이 여럿 살해된 것이다.
그 일은 이번 동궁의 대리청정만큼이나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십학사.
열 명의 학사를 중심으로 이뤄진 상부와 전국 각지에 그물처럼 퍼져있는 하부 조직의 사람들.
십학사는 재물과 관직, 계급과 신앙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하부 조직을 이끌어 왔다.
하부조직에 속한 대부분은 자신들이 십학사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
상부조직인 십학사와 그들의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하부를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중간책들이었다.
그런 중간책들이 하룻밤 사이 변고를 맞고 말았다.
누군가 홍인한의 사람들만 죽인 것이다.
중간책을 잃어버린 홍인한에겐 자신을 지탱하는 지지 기반과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중간책과 더불어 지지 기반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홍인한은 이 사건의 배후에 형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달리했다.
‘아니다. 세손이 제아무리 변하였다고 하지만, 사람에겐 본성이란 것이 있는 법. 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어찌어찌할 수 있다곤 하지만 인의(人義)를 저버릴 일을 꾸밀 인사는 아니지.’
형운이 아니라면 누굴까?
자신의 몰락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지?
이 순간 해가 떠올랐다.
세상일에 관심 없다는 듯 늘 무심하고 느른한 해의 표정.
그러나 홍인한은 알고 있었다.
해의 불투명한 눈빛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늘 거짓의 가면을 쓴 채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
당했구나.
눈엣가시 같았던 왕세자의 죽음에 도취하였다.
그래서 정작 눈앞에 어떤 존재가 똬리 틀고 있는지 망각했던 것이다.
“이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소나무가 곤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홍인한은 그의 낙심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형세가 조금 어려워졌기로서니 이처럼 나약한 모습이라니.
오늘따라 대나무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소나무의 푸념이 이어졌다.
“긁어 부스럼이라더니. 되려 일을 키운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지난 일일세.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이리된 이상 결단을 내릴 수밖에.”
“결단……이라니요?”
홍인한은 대답 대신 차가운 시선을 들었다.
“게 있느냐?”
곧장 바라지창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너라.”
이내 검은 무복 차림의 사내 셋이 홍인한의 사랑채로 들어섰다.
***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와 매서운 살기.
소나무는 갑자기 나타난 사내들을 보며 코를 쥐었다.
“이 무슨 냄새인가?”
그는 이내 홍인한을 돌아보았다.
“대감, 이자들은 대체 누굽니까?”
“대나무를 따르던 자들이오.”
조선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인이었던 대나무.
그가 키운 무인 중엔 양지(陽地)가 아닌 음지(陰地)에서 활동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본디 큰일을 하다 보면 손에 원치 않는 피를 묻힐 때도 있고, 가끔은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쓸 때도 있다.
눈앞의 세 사내는 그럴 때를 대비하여 키운 자들이다.
저들이 가는 길목엔 언제나 피바람이 불었다.
명령을 내리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죽이는 자객들.
최후의 수단으로 쓰일 살수들을 불렀다는 건…….
소나무의 낯빛이 하얘졌다.
“대감. 설, 설마…….”
홍인한이 말한 결단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홍인한은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준비는 되었느냐?”
자객들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흰 언제나 준비가 되었습죠.”
홍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내들에게 술 한 잔씩을 내렸다.
“후일은 걱정하지 마라.”
“믿습지요.”
셋 중, 제일 마지막으로 술잔은 비운 사내가 물었다.
“실행은 언제로 하올까요?”
자신의 술잔을 채우며 홍인한이 대답했다.
“오늘 밤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무인이 살기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밤, 동궁의 머리가 성루에 걸릴 것입니다.”
***
달무리 곱게 진 밤하늘.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모호한 달밤의 정취가 궁궐에 내려앉았다.
명암이 불투명한 달밤인지라.
여느 때라면 이레와 할아버지들의 서탁 대화를 지켜보기만 할 뿐, 끼어들지 못했던 형운도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요? 어찌 되었습니까?
대리청정과 관련한 이야기를 형운에게서 전해 듣던 참이었다.
한껏 궁금증이 담긴 이레의 글씨가 서탁의 나뭇결 사이로 사라졌다.
-분명 조정 대신들이라는 것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통촉하라고 했겠지.
형운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상이 예측했다.
이내 형운의 반듯한 필체가 떠올랐다.
-맞습니다. 대신들이 이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래서? 설마, 네 할아버지란 자가 또 판을 뒤집은 건 아니렷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사대부라는 것들의 억지가 여간 심한 것이어야 말이지. 선비 운운하고, 유학자 운운하며 멍석 깔고 통곡하면. 제아무리 임금이라 하여도 당해낼 재간이 없어. 거기다 늙은 대신이 금식이라도 하는 날엔, 천하에 다시 없을 악군이 되는 거지.
화의 물음이 상이 또 나서며 알은체를 했다.
보다 못한 악이 지청구를 날렸다.
-상, 여기서 그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보고 싶은 건 네 대답이 아니고 은백, 저 아이의 글이란 말이다.
-그렇소. 상은 그만 끼어드는 게 좋겠소.
-이것들이…….
불뚱가지가 솟구친 상이 서탁에 난장을 피웠다.
조용히 종이를 내리고 새로운 백지를 서탁에 펼친 이레가 형운에게 물었다.
-은백,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소. 다행히 할바마마께서도 한번 내린 결정을 굽히지 않으시니. 되려 항의하는 대신들이 통곡하면 눈물을 흘리셨고, 금식하여 자신의 의지를 내보이는 유생들에게 실망하시어 탕약과 수라를 물리시는 강수를 두셨다오.
-오호,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는 게로군.
화가 반색하자 악 역시 동조했다.
-은백 저 아이도 그렇고. 그 할아비란 자도 그렇고. 어느 집안의 자손들인지 모르지만, 썩 마음에 드는구나.
서탁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피어났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어느새 한바탕 성화를 풀어낸 상이 서탁의 대화에 참여할 때였다.
-송구합니다. 저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이 불손한 녀석. 너, 내가 오니까 피하는 것이렷다?
-그것이 아닙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형운의 글씨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서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레가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벌써 자리를 비운 듯했다.
-푸하하, 불손 녀석. 볼일이 급했던 모양이구나.
상이 여상한 말투로 놀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레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상하게도 정수리가 서늘하였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불길한 예감.
근래 들어 당혹스러운 일을 많이 겪어 그런 것이리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로구나.”
이레는 핀잔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마마! 빈궁마마!”
회랑을 가로지르는 다급한 외침과 함께 금정이 들어섰다.
“어인 소란이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두려움을 삼키며 이레가 물었다.
이내 금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동궁마마께서, 칼에…… 찔리셨다고 하옵니다.”
***
마치 진공의 공간 속에 갇힌 듯하였다.
시간도, 공기의 흐름도 멈춰버렸다.
그러다 잠시 후.
삐이이익.
머릿속으로 저릿한 이명이 파고들었다.
갑자기 전신의 힘이 쭈욱 빠져버린 이레는 쥐고 있던 붓을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마마, 빈궁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금정이 서둘러 이레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깨를 부여잡는 손길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이레가 금정에게 재차 물었다.
“다시 말해봐라. 그분이 어찌…… 되었다고?”
“동궁께서 칼에…….”
“어쩌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냐? 여긴 궁이 아니더냐. 존귀한 동궁께서 어찌 칼에 찔린단 말이냐?”
말이 되질 않는 소리였다.
수천 명의 병사가 지키는 궁궐이 아니던가.
허락받지 않으면 개미 한 마리조차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는 이 철옹성에서 존귀하디 존귀하신 동궁께서 칼에 찔리다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이레의 믿음은 이어지는 금정의 설명에 산산 조각났다.
“궁 북쪽에 난데없이 한 무리의 괴한들이 나타났다고 하옵니다. 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그리로 죄 달려간 사이, 동궁전으로 침입한 자가 십여 명 있었는데. 침입자 대다수는 세자익위사들이 막았으나, 환관으로 변복한 자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잠시 방심한 사이, 환관 행세를 하던 자객이 동궁저하를 향해 칼을…….”
이레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침소를 나서는 그녀의 뒤를 금정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빈궁마마, 어딜 가시려고요?”
“네가 말이 안 되는 소릴 하니. 내가……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덜덜 턱이 떨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연신 후들거렸다.
그러나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이레는 신을 꿰신었다.
그 앞을 금정이 막아섰다.
“아니 되옵니다. 지금 궁에 불온한 세력이 가득하옵니다. 이럴 때 나가셨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지만…….”
동궁께서 칼에 찔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분께 정녕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느냐.
차마 뒷말을 입에 담기 어려워 이레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마마, 조금만 진정하시어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소인이 더 알아보겠나이다.”
어느 사이 빈궁전의 상궁들 역시 달려 나와 이레를 말렸다.
“빈궁마마, 자중하옵소서.”
“불온한 자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옵니다.”
“행여 빈궁께도 불경한 일이 생길 수 있사오니. 이럴 때일수록 옥체 보존하옵소서.”
금정을 비롯한 궁녀들의 필사적인 만류.
결국, 이레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빈궁전의 높은 담벼락 밖으론 한 발짝도 나가보지 못한 채 다시 침소로 돌아와야 했다.
텅 빈 방 안.
홀로 남은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막상 붓을 다시 잡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얼 해야 할지.
무슨 이야길 써야 할지.
머릿속이 텅 비어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일순간 툭.
서탁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방울이었다.
다른 이들의 앞에선 절대 보이지 않았던 눈물.
애써 다잡고 다잡았던 마음이 무너지며 눈물 벽 역시 와르르 깨어지고 말았다.
투투둑, 툭툭.
서탁 위로 연신 눈물이 떨어졌다.
애써 말아 문 잇새로 두려움 섞인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행여 울음소리 한 자락 새어나갈까 싶어 이레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덕분에 문 앞을 지키는 금정조차도 그녀의 울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서탁의 할아버지들에겐 금세 들키고 말았다.
-아이야, 어인 눈물이냐?
화의 물음을 시작으로 예와 악의 글씨가 이어졌다.
-이리 우는 것은 처음 보는구나.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이냐?
-은백……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자상한 물음에 이레는 겨우겨우 붓을 움직여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 일도 없을 것이야. 우리 그렇게 믿자꾸나.
말은 그리했지만, 악의 글씨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정녕 큰일은 없으렷다.
화 역시 염려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어허, 감히 궁에서 이 어인 변고인가. 그런데 상…… 어쩐 일로 조용하오?
한탄하던 예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상에게 물었다.
상에게선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이레 역시 궁금증을 드러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형운에게 집중되었다.
혹여 서탁 위에 형운의 반듯한 글씨가 떠오르진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형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다더니.
아무래도 이 밤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아니.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레는 떨리는 붓끝을 서탁으로 가져갔다.
-그분을 뵈어야겠습니다. 이대론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습니다.
애끓는 속내가 서탁 사이로 사라졌다.
-아이야, 어찌하려는 것이냐?
-아직 괴한들이 궁을 활보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기왕지사 참은 거 조금 더 참는 게 어떻겠는가.
악과 화, 예의 조언에 차례로 이어졌다.
-상, 너도 뭐라고 한마디 해라.
악이 내내 조용한 상 할아버지를 부추길 때였다.
벌컥!
내내 굳게 닫혀 있던 빈궁전 침소의 문이 열렸다.
찬바람과 함께 불쑥 안으로 들어온 그림자를 향해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이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코끝이 뜨거워지고 겨우 진정되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저하.”
“…….”
“은백……!”
당신입니까?
정말 은백, 당신이 맞습니까?
차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 한 채 이레는 제 눈앞에 서 있는 형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형운이 물었다.
“괜찮소?”
“……흐윽.”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레의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내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윽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윽, 흑흑.”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울음소리.
놀란 형운이 한걸음에 달려와 이레를 힘껏 끌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옷자락을 적시었다.
연신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렸다.
안도하는 울음소리로 자신을 반기는 따뜻한 체온.
“괜찮소, 이제 다 괜찮소.”
형운의 가슴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그의 입가에 행복에 겨운 미소가 길게 번져나갔다.
때마침.
상의 글씨가 서탁 위로 떠올랐다.
-만사 불여튼튼이다. 불손, 그 녀석에게 단단히 준비하라 일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