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청출어람(靑出於藍)
왕은 고심에 빠졌다.
좌의정 홍인한의 내용과 전혀 상반되는 동궁의 행적.
왕을 비롯하여 영의정과 우의정은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나?
그러나 신뢰의 추는 좌의정 홍인한에게 기울었다.
동궁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증좌가 없었다.
그에 반해 홍인한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좌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수북하게 쌓인 상소가 그러했고, 종사관이 가져온 민옥관자와 갓끈이 또 그러했다.
홍인한은 민옥관자를 들어 보였다.
“도성의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사건 현장에서 이 민옥관자와 갓끈이 발견되었습니다. 동궁 저하께서 친히 이 물건의 주인을 자신 임을 밝혀주셨지요. 하지만 정작 동궁 저하께선 이 물건이 발견된 장소에서 벌어진 불운한 사건에 관하여는 아는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가 형운을 보며 날카로운 질문을 이었다.
“하면, 그때 동궁 저하께선 무엇을 하시었는지요.”
홍인한을 비롯한 다른 사람 모두의 시선이 형운의 얼굴로 이어졌다.
굳게 닫힌 형운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나는 그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고하는 문전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상 전하. 사헌부의 어사, 홍국영 입시옵니다.”
“전하께서는 어사를 부른 적 없다. 날이 밝으면 다시 오라 이르라.”
좌의정 홍인한이 왕의 안색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러나 어사, 홍국영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사헌부의 어사 홍국영이옵니다. 급히 살피셔야 할 상소문이 있사와…….”
“어허! 못 들었는가? 주상 전하께서는…….”
홍인한의 음성이 높아지려는 찰나.
형운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 밤에 전하의 침소를 찾아올 만큼 급한 것임이 틀림없을 터. 할바마마, 잠시 살펴보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형운의 조언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궁의 말이 옳다. 들게 하라.”
이내 문이 열리고 상소문이 담긴 쟁반을 들고 사헌부의 어사, 홍국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 밤에 무슨 일인가?”
청하지 않은 불청객을 향해 홍인한이 눈빛을 세웠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홍국영은 상소문을 왕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다 무엇인고? 또한, 어찌하여 상소문을 승정원이 아닌 사헌부의 어사가 올린단 말이냐?”
“승정원에 올린 상소문이 번번이 반려되기에, 망극하옵게도 이런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상소문이 반려되었다 하였느냐? 대체 무슨 내용이관데?”
왕의 물음에 홍국영이 아뢰었다.
“이것과 이것은 각기 혜민서와 경기 감영에서 올린 상소문이옵니다.”
동궁의 행적과 그가 행한 일, 그리고 동궁께서 지적한 사항을 공정하고 올바르게 시정조치한 내용을 상세하게 적은 상소였다.
이것으로 형운에게도 그의 행적을 입증할 만한 증인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들을 어찌하여 승정원에서 반려하였다는 것이냐?”
왕이 물었다.
홍국영이 머리를 조아렸다.
“승정원에서 정한 형식과 격식에 맞추지 않은 상소였기 때문이옵니다.”
“무어라?”
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면, 나머지 것들은 무엇이냐?”
“이것은 도성 곳곳의 관아에서 올라온 상소이옵니다.”
“읽어보라.”
왕의 명에 홍국영이 상소문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지난 열사흘, 남촌골 황 처사의 집으로 낯선 객이 있었으니. 그 차림이 민옥관자에 흑립을 쓰고 있었으며, 옥으로 만든 갓끈을 매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궁의 귀한 분이라 생각한 황 처사는 급히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낯선 객은 황 처사에게 자신의 신분을 굳이 밝히지 않고 대신 황 처사가 평소 구하길 원했던 서책과 종이를 두고 갔으니. 이에 감격한 황 처사가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홍국영은 다 읽은 상소를 접고 다른 상소를 펼쳤다.
“지난 열닷새, 하촌의 궁색한 집안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자라고 있는 아이의 수가 일곱이니. 그 아비와 어미가 어린 입들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막 출산한 산모라 하였지만, 굶주린 어린 것들을 위해 삯바느질을 하여야 했고, 정작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미의 젖을 먹는 어린것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때, 그 집 툇마루에 곡식 자루를 놓고 간 이가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본 자의 말에 의하면 키는 육 척쯤 되었고, 비단 도포와 검은 흑립의 미색 출중한 사내였다고 합니다. 특히 옥으로 만든 갓 끝이 찰랑거려, 그 용모를 잊지 못한다는 증언입니다.”
다시 다른 상소를 집는 홍국영에게 왕이 손을 들었다.
“되었다. 그만하라.”
왕의 시선이 홍인한에게로 향했다.
“좌상은 어찌 생각하는가? 민옥관자와 옥으로 만든 갓 끝을 쓴 자가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여럿 출몰하였구나.”
“소, 소신은 처음 듣는 일인지라…….”
홍인한이 당황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겠지. 저런 상소가 있는 줄 알았다면 삼정승이 이 늦은 밤, 내 침소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겠지. 게다가 정작 사건이 있는 밤마다 동궁은 혜민서를 비롯하여 경기 감영에 있었으니.”
잠시 숨을 몰아쉬던 왕이 홍인한과 영의정, 우의정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자들이 동궁의 행세를 한 것이 틀림없으렷다?”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답은 정해졌으니, 왕께서 원하는 답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 그렇사옵니다.”
홍인한의 대답을 시작으로 영의정과 우의정이 앞다퉈 고하였다.
“동궁을 흉내 낸 가짜가 있음이 틀림없사옵니다.”
“서둘러 가짜들을 잡아들여 일벌백계하셔야 하옵니다.”
왕은 이번엔 형운을 바라보았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형운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를 지은 죄인이 무얼 할 수 있겠나이까.”
“죄인이라니? 그 무슨 말이더냐?”
“전하께 두 가지 죄를 지었나이다. 그 첫 번째는 감히 전하의 의중을 여쭙지 아니하고 미행을 나간 죄이옵니다.”
“하면, 두 번째 죄는 무엇인고?”
“고작 동궁이라는 신분으로 혜민서와 경기 감영의 관원을 귀찮게 하였으니. 그것이 제가 저지른 두 번째 죄라 할 수 있겠나이다. 그러니 이 죄인을 벌하여 주옵소서. 부디 용서치 마옵소서.”
용서를 구하는 형운을 모습에 왕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 오랜만에 마음이 즐겁구나. 또한, 이번 기회로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왕이 형운의 손을 잡았다.
“내 지금까지 동궁을 오해하였구나. 아직도 어린 줄로만 생각하였거늘. 네가 이리 부쩍 자랐구나.”
“전하…….”
“동궁, 내가 어찌 동궁을 벌할 수 있겠느냐. 늙고 노쇠한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귀하게 여기며 또한 가여운 이에게 온정을 베풀었으니. 벌이 아니라 상을 내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전히 형운의 손을 잡은 채로 왕은 삼정승을 돌아보았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삼정승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신 흡족한 표정을 짓던 왕이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토록 백성을 아끼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며, 그 곁에서 직접 경험하고 공감하는 동궁이니. 늙고 지친 나를 대신하여 국정을 의논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겠구나.”
“전하, 그 어인…… 말씀이옵니까?”
홍인한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한 달 넘게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도 허탈할 노릇인데, 왕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경들은 들어라. 나는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려 한다.”
“전하, 받잡기 어려운 명이옵니다. 하명 거둬주옵소서.”
홍인한을 향해 왕은 고개를 저었다.
“경도 알다시피 내 몸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아느니. 그러니 내 말을 따르라. 경들도 알겠지만, 동궁의 총명함이 유별하니. 덧붙여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야. 다만, 나랏일이라는 것이 서책으로 배운 것과 직접 경험한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으니. 동궁이 당파를 알고, 병조와 형조, 이조의 적합한 인물이 뉘인지 알게 하며, 국정의 처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경들이 돕는 것이 어떠한가.”
예상치 못한 왕의 결정.
마음이 급해진 홍인한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전하, 동궁께선 알 필요가 없나이다.”
***
“무어라?”
뜻밖의 대답에 왕은 황당했고, 그다음엔 분노했다.
그러나 홍인한은 마치 죽기를 각오한 듯 소리쳤다.
“동궁께서 굳이 노론과 소론, 남인과 서인을 알 필요가 무에 있겠나이까. 아직 연치 어린 분께서 인사(人事)를 정하는 골치 아픈 일을 알아서 좋을 것이 무엇이겠나이까. 더더욱 어지럽고 혼란한 국정을 논하는 일은 동궁께 큰 짐이 될 것이옵니다. 하오니 전하, 동궁께서 조금 더 서책을 벗 삼고,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도록 여유를 주심이 어떠할지요.”
홍인한의 삼불필지(三不必知)에 용기를 얻은 영의정도 목소리를 냈다.
“전하의 옥체 여전히 강건하오니. 망극한 하명, 거둬주옵소서.”
우의정 역시 동조했다.
“조정에는 나라의 일을 자신의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충신이 가득하옵니다.”
삼정승이 한뜻으로 형운의 대리청정을 막았다.
행여 형운이 권력을 쥐게 되는 날엔 저희의 목숨줄이 위태로우니.
저희 목숨만이 아니라 가문이 풍비박산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네들의 모습에 왕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너희에게 왕은 무엇이냐? 나라는 무엇이고 동궁은 또 무엇이냐?”
“전하, 소신은 그저 충심으로 올리는…….”
“되었다. 물러가라.”
“전하.”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모두 물러가라!”
왕의 단호한 축객령.
삼정승은 마지못해 일어섰다.
자리에 누운 왕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손주 앞에서 나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왕이 등을 돌렸다.
“동궁, 걱정하지 마라. 이 할아비가 너를 지킬 것이니…….”
운신하는 것조차 힘겨운 늙은 왕의 목소리가 형운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아니옵니다.’
형운은 속으로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다짐하듯.
새기듯.
‘제가 지킵니다. 제가 지켜내겠습니다.’
이 나라를…….
이 왕실을…….
그리고 내 백성과 내 사람들을…….
왕의 침전을 나서는 형운의 눈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
반 시진 후.
홍인한은 빈청을 나섰다.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왕의 마음을 어찌 돌릴까 의논을 마친 후였다.
왕께서 기어이 동궁에게 대리청정하겠다고 하면 조정의 대신들은 등청을 거부할 것이다.
이 밤에 내린 결론에 흡족한 홍인한은 가벼운 걸음으로 빈청의 중문을 나섰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허, 뉘더냐? 감히 내가 누구라고 앞을 막는 것이냐?”
“이런? 이제 보니 좌상이구려.”
고개를 내리는 상대는 다름 아닌 형운이었다.
“허허, 이 밤에 동궁께서 빈청까지 어인 걸음이시옵니까?”
“생각이 깊은 밤이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어떻소? 내 대궐 문까지 경을 배웅해도 되겠소?”
“그럴 필요까지야…….”
홍인한의 거부는 단호히 거절되었다.
“가시지요. 궁에서 나고 자란 내가 아니오. 게다가 아직 어리니. 경보다 밤눈이 밝을 것이오.”
앞서 걷는 형운을 따라 홍인한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달이 밝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형운이 말했다.
덩달아 하늘을 보며 홍인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리 환한 달빛이 있음에도 나는 늘 어둠뿐이니.”
“…….”
“처음에는 그저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내 눈만 탓하였지 뭐요. 누군가 내 하늘에 검은 장막을 드리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저하의 하늘에 검은 장막을 드리운 자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요?”
“글쎄, 그게 무슨 말일까?”
돌연 걸음을 세운 형운이 홍인한을 향해 돌아섰다.
형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겨울밤, 깊은 산중에서 범을 마주할 때와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더럭 겁이 난 홍인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전까지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궁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어인 일일까.
놀라고 당황한 홍인한의 앞으로 형운이 성큼 다가섰다.
“동궁은 아무것도 알 필요 없다…….”
형운은 왕의 앞에서 홍인한이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소신은 그저 동궁께서 골치 아픈 정치보단 지금의 편안함을 오래도록 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뢴 것뿐이옵니다.”
형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소? 나는 좌상이 나를 그리 생각하는 줄 미처 몰랐소.”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형운은 홍인한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주춤 놀란 홍인한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다시 저벅.
홍인한의 앞으로 형운이 성큼 또 한 걸음 다가선다.
전신을 찔러오는 날카로운 기세에 홍인한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물러난 만큼 형운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가고 물러서길 얼마나 하였을까.
어느 사이 홍인한의 등 뒤로 차가운 담벼락이 느껴졌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키의 형운이기에 홍인한은 고개를 들어 올려보아야만 했다.
그때 고개를 숙인 형운이 말했다.
“참으로 시벌로마(施罰勞馬)구나!”
“지,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당나라 시절,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가혹하게 채찍질하는 농부를 보았소. 하여, 물었지. 말에게 어찌 그리 채찍질을 하는가 하고 말이오. 그랬더니 농부가 하는 말이, 본디 말이란 동물은 쉼 없이 부려야 다른 생각을 않고 일을 하기 때문이라 하였소.”
“…….”
“남의 말을 두고 더 무슨 말을 하겠소. 결국, 나그네는 가던 길을 가야 했소. 하지만 열심히 일하여도 농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이 참으로 가엾어 긴 탄식을 흘리며 한마디 하였다지.”
형운은 홍인한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시벌로마.”
“……!”
홍인한의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칭찬하는 말인데, 묘하게 불쾌한 마음이 불끈 솟구쳤기 때문이다.
“좌상이 지금 내게 하는 짓이 딱 그 농부 같단 말이지.”
“소신은 절대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알고 있소. 내 어찌 좌상의 깊은 뜻을 모를까. 할바마마를 생각하고 나를 걱정하는 좌상의 충심, 내 이미 알고 있소.”
“그리 말씀하시니,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다만, 소신의 능력이 아직 성심에 한참 닿질 못하니. 늘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옵니다.”
“그렇소?”
형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늘 그렇듯 오늘도 좌상의 염병이 풍년이오.”
“……네?”
“이토록 백성을 위하고 막힌 나랏일을 풀어가려 노력하는 좌상에게 내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구려.”
“…….”
“하하하. 좌상, 그대는…… 존나개색기(尊裸開塞氣)요.”
***
-할아버지들, 할아버지들.
서탁 위로 연신 이레의 글씨가 떠올랐다.
그러나 글씨는 점점 흐려지더니, 고요해졌다.
-이런, 또 이러는구나.
화의 푸념 섞인 글이 서탁을 덮었다.
그러나 자신의 글씨가 이레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화는 알고 있었다.
종종 이런 있었으나.
그 조화의 근원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이 답답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탁에 어린 다른 백귀와의 필담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소. 은백, 그 바른 아이가 그런 언행을 하였다니.
예의 말에 상이 장난기 가득한 대답이 이어졌다.
-푸하하하, 난 재미만 있던데. 예는 너무 고리타분하군.
-고리타분하다니. 나는 그저 예법과 격식을 따르는 것뿐이오.
-시끄럽다. 그보다 악, 소감이 어떠하냐? 내 보기에 불손, 저놈의 배움이 예사롭지 않으니. 곧 청출어람, 악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을 것 같구나. 욕설의 미학이라 해야 할까. 날이 갈수록 이토록 참신한 욕이라니.
놀리는 듯한 상의 말에도 악은 침묵했다.
-뭐야? 악, 설마 충격이라도 받은 것이냐?
상의 놀림이 이어졌다.
그러나 서탁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악의 글씨가 떠올랐다.
-난 가끔 화의 온화함이 무섭더군.
-뭐? 갑자기 내가 거기서 왜 나와?
화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악이 글이 이어졌다.
-항상 예의 바른 ‘예’의 행동도 사람을 어렵게 하지. 자신이 예를 지킨 만큼 다른 사람에게고 그것을 요구할 테니까.
상이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나는 안 무섭냐?
-흥, 네깟 것이 무에 겁날까. 다만…… 가끔 예상외의 행동을 할 때면 조금, 아주 개미허리만큼 긴장될 때가 있긴 했지.
-어쨌든 긴장했단 뜻이렷다? 하하하.
웃고 즐거워하는 상의 글씨 위로 화의 글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사설이 긴 여유가 무엇이냐?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소름?
화의 물음에 악의 진지한 대답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우리 중 가장 지독한 놈을 만난 건 아닐까 하여.
-나도 요즘 그런 일이 있긴 하는데.
상이 자신의 말을 매듭지었다.
-나는 가끔…… 불손, 그놈이 무섭다.
예와 화의 의견이 이어졌다.
-나도 근래 들어 그런 생각을 한다오.
-오랜만에 생각이 일치하는군.
***
“에췻!”
형운의 입에서 느닷없이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저하.”
최 내관이 단숨에 다가왔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사옵니까?”
“아니다. 갑자기 귀가 간지럽고 재채기가 나는구나.”
누가 내 얘길 하나?
고개를 갸웃하는 형운에게 최 내관이 조심스레 아뢰었다.
“동궁전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다. 오늘은 꼭 빈궁전으로 간다고 약조를 하였느니.”
“한동안 바쁘시어 쉬시질 못하셨사옵니다. 고뿔이라도 걸린 것이 아닐까 걱정이옵니다.”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자. 이레가…… 아니, 빈궁이 많이 기다리겠구나.”
홍인한을 대하던 매서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온전히 연모에 빠진 사내의 얼굴.
전신에 설렘을 가득 담은 채 형운을 재게 움직였다.
이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빈궁전의 대문 턱을 넘기 무섭게 그의 앞으로 해사한 미소를 지은 이레의 얼굴이 들어왔다.
온종일 기다린 듯 이레의 전신엔 늦가을 밤의 한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안에서 기다리지 그랬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리 직접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이레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행복함에 심장이 터질 듯하였다.
그는 당의 자락 뒤에 숨은 이레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갑소.”
“저하께서 따뜻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면 손을 떼면 안 되겠소.”
“그러십시오.”
주고받는 이야기에 연모의 마음이 가득했다.
달빛을 머리에 이고 발걸음을 맞추다 보니 어느 사이 침소에 다다랐다.
황금 나비 문양이 장식된 촛대에는 불빛이 일렁거렸고, 바닥에는 금실로 수 놓인 이불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곳은 궁궐이었고, 형운과 이레는 동궁과 동궁빈이었다.
사내와 여인이 아닌 동궁과 동궁빈이라는 지위에 맞는 격과 식이 이어졌다.
게다가 오늘은 합방일이 아니니.
두 사람은 손만 잡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직 그뿐, 다른 행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손만 잡은 채 누워 있자니, 이내 고요가 내려앉았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지 못할 만큼의 무거운 적막이었다.
워낙에 조용하니, 속눈썹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풍지 위로 꾸벅꾸벅 조는 궁녀의 그림자가 그려졌다.
이윽고.
멀리서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형운과 이레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 아래, 두 사람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약조라도 한 듯 둘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형운이었다.
“준비되었소?”
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시작합시다.”
사르륵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로질렀다.
두 사람의 은밀한 밤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