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54화 (154/215)

#154.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정녕, 정녕 이것을 네가 했단 말이냐?”

형운을 바라보는 왕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깊게 파인 주름에 아뜩한 슬픔이 고였다.

세손만은 다를 줄 알았건만.

이 아이는 올바른 군주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시전의 왈짜들도 하지 않을 이런 개망나니짓을, 네가…… 동궁인 네가 정녕 하였단 말이냐? 네가…… 너의 백성들을 괴롭혔단 말이냐?”

망연자실하던 왕은 기어이 상체를 비틀거렸다.

형운을 경계하던 홍인한이 서둘러 다가와 왕을 부축하였다.

충신의 가면을 쓴 그는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왕을 위로하였다.

“전하, 이럴 때일수록 심성을 굳건히 하시어야 하옵니다.”

말을 하면서 홍인한은 형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형운의 모습이 기이하였던 까닭이다.

이런 경우 ‘아니다, 모함이다.’며 발악을 하기 마련이었다.

상소문에 쓰인 내용은 결단코 형운이 한 일이 아니었다.

반가의 담을 타 넘어 부녀자를 희롱하고, 보부상의 물건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길 가는 행인의 행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타작한 이는 동궁의 행세를 한 가짜였다.

그리고 그 가짜에게 망나니짓을 명령한 사람은 홍인한이었다.

형운이 동궁이 된 이후, 오늘을 위해 차곡차곡 준비한 음모.

그는 가짜들에게 명했다.

가능한 많은 사람을 괴롭혀라, 악랄하게.

그리고 그 행동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밝혀라.

직접 동궁이라 말해도 좋고, 동궁을 의미하는 민옥관자와 옥으로 만든 갓끈을 떨어트리는 것도 잊지 말라 신신당부하였다.

가짜 동궁의 망나니짓은 형운이 동궁을 비울 때만 이뤄졌다.

동궁의 일과시간을 알아내는 건 홍인한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직 궁 곳곳에 그의 손길이 뻗어 있음이라.

원하는 정보는 상대를 막론하고 바로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가짜 동궁의 망나니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도 쌓여갔다.

그리고 적당히 때를 맞춰 상소문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을 흔드는 계획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동궁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어째서 아니라고 항변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소가 올라왔고, 증인도 있다 한다.

억울한 것이 당연했고, 억울한 만큼 항변하고 해명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분루를 토해내야 하거늘.

형운은 되려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상소에 한 치 어김이 없노라고 재차 확인까지 하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속일까?

홍인한은 의문에 찬 눈길을 형운에게 보냈다.

마침 형운도 홍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싹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그때, 형운이 돌연 상소문을 다시 펼쳐 정확한 어조로 소리 내어 읽었다.

“지난 열사흘, 축시말. 서대문 밖, 양인의 담벼락을 뛰어넘은 괴한이 잠을 자고 있던 열여섯 살의 어린 여인을 희롱하는 일을 저질렀으니. 놀란 여인이 소리를 지르고 그 소리에 놀란 범인들이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관아의 포졸들이 범행현장을 살피던 중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발견하였으니. 다름 아닌 민옥관자였나이다. 민옥관자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조선에서 민옥관자를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상 전하와 동궁뿐이시니. 이 참담함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겠나이까. 부디 사정을 살펴 어린 여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옵소서.”

형운은 다 읽은 상소문을 차분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곤 왕에게 고한다.

“지난 열사흘, 축시말. 소손은 상소문에 쓰인 대로 서대문 밖에 있었사옵니다.”

그의 이실직고에 왕은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왕의 미간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반면 홍인한은 쾌재를 불렀다.

아무래도 동궁은 제 아비를 닮아 미친 모양이다.

제가 하지 않은 일도 인정할 만큼.

그러니 주위의 심각한 상황도 모른 채 저리 당당하게 엉뚱한 짓을 하고 있지.

하지만 형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오나…….”

“더 할 말이라도 있느냐?”

왕이 늙은 눈매를 들었다.

그 눈동자 속엔 손자를 향한 사랑도 배신에 대한 노여움도 들어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노인의 회한만이 가득하였을 뿐이었다.

형운은 탁하게 변한 할아버지의 눈동자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딱 거기까지옵니다.”

“거기까지라니?”

“축시말 서대문 밖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오나, 양인의 담벼락을 넘고 어린 여인을 희롱하고 달아난 적은 없다는 말이옵니다.”

형운은 상소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저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래?”

왕은 홍인한을 돌아보았다.

형운의 말을 어찌 생각하느냐 묻는 시선이었다.

홍인한은 뜻밖에 담담한 표정이었다.

형운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이쯤은 당연히 예측한 반응이었다.

“상소문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 하시니, 다른 상소도 살펴봄이 좋을 듯합니다.”

그는 보란 듯 다른 상소문을 펼쳤다.

“지난 열닷새, 한양의 기루 골목에 세 명의 사내가 나타났으니. 호화로운 복색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른 저녁부터 다음 새벽이 될 때까지 기루의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향락을 즐겼나이다. 그러나 정작 그에 합당한 비용을 내지 않고 도리어 음식값을 요구한 기루의 주인과 노비들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상소문을 읽은 홍인한이 형운에게 물었다.

“이 내용은 어찌 보시옵니까?”

“열닷새라면, 확실히 궐 밖으로 나간 일이 있소. 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진실과 전혀 다르오. 아무래도 이번에도 상소를 올린 이가 착각한 모양이오.”

“그렇다면 자세한 경위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홍인한이 돌연 밖을 향해 소리쳤다.

“도착했느냐?”

기다렸다는 듯 침전의 문이 열리고 무관복 차림의 한 사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왕이 묻는다.

“너는 누구냐?”

“전하, 소인 종사관 문이현이라 하옵니다.”

“이 밤에 어이하여 과인의 침전을 찾았는고?”

“지난 며칠 도성의 백성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였던 사건의 범행현장에서 발견한 것이 있사와…….”

“그것이 무엇인고?”

왕의 질문에 문이현이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을 꺼내 올렸다.

환관이 그것을 받아 왕에게 바쳤다.

이윽고 왕의 앞에 펼쳐진 것은 옥으로 만든 민옥관자와 갓끈이었다.

왕의 주름진 눈이 커졌다.

이런 고품질의 민옥관자와 옥으로 만든 갓끈을 쓸 수 있는 자는 조선에서 오직 둘뿐이었다.

왕과 다음 보위를 이을 동궁.

자신이 아니니, 그렇다면 동궁의 것이렷다?

왕이 묻는 듯한 눈빛으로 형운을 바라보았다.

홍인한을 비롯하여 영의정과 우의정의 시선 역시 형운을 향했다.

“민옥관자와 갓끈은 어찌 설명하시겠습니까?”

“내 물건이 어찌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군.”

“동궁 저하의 물건이 확실하옵니까?”

“얼마 전 잃어버린 물건이오. 그것이 어찌 저자에게 있는지 모르겠구려.”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이란 말입니까? 기루의 일과는 정녕 관련이 없단 말입니까?”

홍인한의 비아냥 섞인 물음에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오. 필시 범상치 않은 일인 듯하니, 좌상께선 서둘러 그 진위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싶소.”

“하오면 이건 어찌 하올까요? 바로 사흘 전에 생긴 일이옵니다. 동궁전의 미행을 뒤따르던 무관들이 길가는 행인들을 시비를 걸고 난장을 피운 일이 있었으나, 본인을 직접 동궁이라 밝히는 사내로 인해 그들의 죄상을 밝히기 어려웠다는 여주 관아의 상소이옵니다.”

홍인한은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고 있는 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민심이 사납게 들끓고 있사옵니다. 이대로 계속 두고만 보신다면 왕실을 향한 백성들의 불신이 하늘을 찌를 것이옵니다.”

“…….”

“본디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기르라 하였나이다.”

왕은 침묵했다.

그의 주름진 눈은 형운을 주시하고 있었다.

형운이 굳게 닫힌 입술을 열었다.

“그 상소가 거짓인지, 참인지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오?”

“한두 명의 말이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 어렵겠지요. 하오나…….”

홍인한은 쟁반 위에 수북하게 쌓인 상소를 가리켰다.

“저처럼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를 내면 진실이 그 속에 담겨있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좌상의 말이 옳소. 저 많은 상소가 거짓을 할 리 없지.”

“하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범인을 찾아야지요.”

속을 꿰뚫는 듯한 형운의 눈동자가 홍인한을 향했다.

괜스레 찔린 홍인한은 부러 먼 곳을 바라보며 외면했다.

“범인이라고요? 상소의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심이…….”

상소들은 한 사람을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운은 여전히 당당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내가 하였다고 하니, 감히 동궁의 흉내를 내는 가짜가 있는 게 분명하지 않겠소? 그러니 속히 범인을 색출하여 일벌백계하여야 하지 않겠소?”

“누가 그런 일을 꾸민단 말입니까?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자가 어디에 있겠나이까.”

“사람이 가끔 미칠 때가 있다 하오.”

형운의 상체가 홍인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예를 든다면 병든 어미의 약값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누군가의 눈앞에 황금 덩이가 보인다면. 그것을 주우려 무슨 짓인들 못 할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신, 저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지금, 돈이 필요한 어떤 자에게 돈을 주고 저하의 흉내를 내라 명한 자라도 있었단 것이옵니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거늘. 좌상께서는 어찌 그리 성화를 내는 것이오?”

“감히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성화를 내겠나이까. 다만, 너무 엉뚱한 말씀을 하시니 놀란 것뿐이옵니다.”

“놀란 것이오? 내 눈에는 정곡이 찔리니 당황한 표정 같소만.”

“네?”

“혼잣말이오. 못 들었으면 되었소.”

느긋하게 고개를 돌리는 형운의 모습에 홍인한의 수염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오면 이번엔 동궁께서 답을 해 보시지요. 미행을 나가셨다지요? 그럼 어디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 미행의 목적은 무엇이었는지요?”

“어째 좌상이 나를 추국하는 듯 보이는 건 그저 느낌이겠지요?”

“그리 느껴지셨다면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그저 동궁의 행보가 궁금하였을 뿐이옵니다.”

“그리 궁금하다면 알려 주리다. 그때 나는…….”

모두의 시선이 형운의 입술로 향했다.

***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상이 급한 마음을 가감 없이 서탁에 드러냈다.

-불손, 그 녀석, 대체 밖에 나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것이냐?

상의 물음에 이레는 차분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상소의 적힌 그대로 그분은 사건이 있던 날마다 미행을 나가셨습니다.

-그, 그럼…… 상소의 내용대로 동궁과 그의 수하들이 죄 없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핍박하였다는 말이 사실인 겐가?

예의 물음에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찌 은백이 그런 짓을 하였겠습니까. 첫 번째 양인의 여인이 희롱당했다던 그 밤, 은백은 혜민서를 찾았다고 합니다.

-혜민서? 느닷없이 혜민서는 왜?

악의 물음에 이레가 답했다.

-혜민서에서 백성들에게 주는 약재의 질이 형편없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분명 나라에서 내리는 약재와 다른 것이라.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걸음 하셨다 합니다.

-기특한지고. 그런 일을 하였단 말이냐?

화 할아버지의 글 끝으로 악의 악필이 이어졌다.

-그럼 지난 열흘, 기루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건 뭐냐?

-그때, 은백께서 경기 감영에 계셨지요. 느닷없이 경기도에 홍수가 났습니다. 침수된 마을이 있어 정확한 피해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손이 정말 그리했단 것이냐?

영 믿지 못하겠다는 듯 상이 물음을 덧붙였다.

-그럼 여주의 일은 어찌 된 것이냐? 길 가는 행인을 마구잡이로 때린 것 역시 거짓이냐?

-그 역시 모함이었습니다. 그때 은백은 사헌부의 어사와 함께 다른 곳을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 모든 것이 좌상인지 진상인지 하는 놈이 꾸민 모함이렷다?

비록 글씨지만 으득 이를 가는 상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네. 그러했습니다.

-하나, 참으로 묘하구나. 좌상은 어찌 알고 은백의 미행시간에 맞춰 가짜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게야?

예가 물었다.

이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궁궐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조정의 대신들부터 궁궐의 환관과 상궁들, 심지어 무수리들조차도 좌상의 사람이 대다수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은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단 것이냐?

악의 물음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런 고얀 것들을 보았나!

늘 온화하던 화의 글에 분노가 깃들었다.

-화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화, 어울리지 않게 어찌 그리 흥분하느냐. 그보다 중한 일이 있으니. 분노는 나중으로 미루자.

평소와 달리 냉정해진 상의 다음 질문이 서탁 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찌 되었느냐? 그 진상 놈이 빼도 박도 못한 증좌를 내밀었으니. 은백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이레가 전한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형운은 꼼짝없이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놈들의 함정은 치밀했다.

동궁인 형운이 미행을 나갈 때에 맞춰 매번 일을 만들었다.

아무리 무죄를 외쳐도 모함을 벗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이레는 온화한 미소로 붓으로 글을 썼다.

-할아버지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은백은 이제 예전의 은백이 아닙니다. 최고의 스승들께 특별한 교육을 받은 분입니다.

-그럼…….

-상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지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래서 은백께선…….

*

일이 생기기 열흘 전.

어둠이 가득한 궁궐 후미진 전각으로 은밀한 걸음이 있었다

얼굴에 커다란 자루를 뒤집어쓴 누군가를 끌고 가는 최 내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윽고 최 내관은 인적이 드문 오래된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끌고 온 자와 함께.

이윽고 두 사람의 앞으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푸른 곤룡포를 입은 동궁.

형운은 고갯짓으로 최 내관이 끌고 온 자의 자루를 벗기게 하였다.

이윽고 자루 안에 숨겨졌던 얼굴이 보였다.

상책, 김 내관.

궁의 실세라 불리는 상선의 수족 노릇을 하던 자라.

궁인들에게 김 상책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그에게 두려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형운을 보는 순간, 김 상책은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

늘 바른 생활의 정석을 보였던 왕세손의 사나운 모습을 본 이후로 그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답답한 마음에 자신이 당한 일을 털어놨지만, 그 누구도 김 내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정작 당한 자신조차도 꿈을 꾼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녔으니까.

그러나…….

동궁의 환궁 이후 김 내관은 그날의 일이 현실임을 뼈저리게 실감하였다.

이렇게 가끔 최 내관의 손에 이끌려 동궁의 앞에 끌려올 때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눈빛.

저 입가에 맺힌 미소.

저런 얼굴로 행해지는 사나운 주먹질을 떠올리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게다가 요즘 상선은 무슨 일이 있는지,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동궁에게 이리 시달림을 받는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형운이 물었다.

“요즘 별일 없고?”

심각한 분위기와 달리 온화한 물음이었다.

심지어 눈가에 진심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빛마저 어려 있었다.

“저, 저하의 온정으로 다행히 무탈하였사옵니다.”

“다행이구나. 무탈하였다니. 그래, 무탈하였구나. 나는 요즘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라 제대로 잠도 못 이룰 지경인데. 너는 무탈하였구나.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하게 이어진 형운의 말에 김 내관은 이상하게 가슴이 점점 무거워졌다.

“일은 어떠하냐? 힘든 일은 없고?”

여전히 온화하다 못해 깃털처럼 부드러운 음성.

그 이면의 두려움에 질린 김 내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열심히 눈알을 굴리던 그가 반짝 얼굴을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상선께서 며칠 전 이상한 지시를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오호, 상선이?”

형운이 관심을 보였다.

그의 눈빛에 질린 김 내관은 정신없이 말을 쏟아냈다.

“상선께서 젊은 사내들을 알아보라 하였습니다.”

“갑자기 젊은 사내들을 알아보라 하였다? 왜? 그래, 어떤 사내들을 알아보라 하였느냐?”

“네, 키는 6척 정도로, 멀리서 보아도 미색이 출중하여야 하며, 언행에 귀태가 흐르고 턱선은…….”

말을 하다 보니 어째 상선이 원하는 사내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했다.

“상선께서 동궁저하와 비슷하게 생긴 사내들을 알아보라 한 것 같사옵니다.”

김 내관의 말에 형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무래도 상선은 밤이 외로웠던 모양이구나.”

“네?”

“그렇지 않으면 왜 사내를 찾겠느냐? 설마, 세자께 씌운 누명을 내게도 씌우려고 그런 치졸한 명령을 하였을까.”

“다, 당연히 아닐 것이옵니다.”

“상선의 취향이 나였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이로구나.”

김 내관은 눈동자를 마구 굴렸다.

“하오면 어찌하오면 되겠나이까? 적당한 핑계로 못 구하였다고 보고하면…….”

“무슨 말이냐? 윗사람이 시킨 지시인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하여야지.”

“네?”

뜻밖의 명에 김 내관은 감히 고개를 들어 형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동궁의 얼굴을 쳐다보아선 절대 아니 된다는 것을 잠시나마 망각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내 말 오해하지 마라. 넌 상선이 맡긴 일을 열심히 하여야 한다. 단, 그 사람들을 찾아 상선에 데려가기 전에 내게로 먼저 데려오너라.”

김 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운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고른 그 사람들이 정말 날 닮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이니라. 알겠느냐?”

“그리…… 하겠나이다.”

“이 일은 너와 나,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아니 될 것이고.”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럼 그만 가보아라.”

“성은이 망극하옵…….”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 내관은 김 내관의 얼굴에 자루를 씌웠다.

눈앞이 캄캄해진 김 내관은 다시 최 내관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형운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동궁이 되어 궁으로 돌아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김 내관을 세작으로 만든 일이었다.

궁의 실세라 불리는 상선.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형운의 눈과 귀를 심어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른 채 상선은 열심히 계략을 도모하였다.

동궁과 가장 닮은 사내를 찾아내 백성들의 원성을 쌓게 하는 기막힌 전략.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니로구나.”

그들은 절대 허술하게 일을 꾸미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계략으로 이미 큰 별 하나를 떨구었으니.

그러니 저들은 이번에도 자신하고 있으리라.

동궁을 향한 왕의 굳건한 신임이 흔들릴 것을, 어떻게든 동궁을 향한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형운이 그들의 행보를 낱낱이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 그 사내들을 어찌 이용할까.”

어둠 속에서 턱을 쓰다듬으며 웃는 형운의 눈빛에 감히 범접이 어려운 위압적인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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