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53화 (153/215)

#153. 욕과 계책으로 단련된 동궁

11월, 초하루.

먹빛의 가마가 좁은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이레가 탄 가마였다.

“십학사의 모임이라…….”

궁에 있어야 할 이레가 성 밖, 후미진 골목을 지나는 이유는 바로 십학사 모임 때문이었다.

형운이 동궁이 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잠잠하였던 십학사에서 모임을 통보하였다.

수월로 전해진 연락을 전해 들은 이레는 고심 끝에 참석을 결정했다.

오랜만의 모임인 데다 형운이 동궁이 된 이후라, 십학사의 동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한서로를 대신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더는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이레는 금정의 눈물을 뒤로하고 은밀히 궁을 빠져나왔다.

“도착했습니다.”

가마 밖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니 천호와 백호가 고개를 숙였다.

수월의 호위무사들.

그들은 교꾼으로 위장하여 이레를 지켰다.

만약 이레의 상황이 위험해지면 그들은 목숨을 걸고 구하려 달려오리라.

“고생하셨소. 잠시 기다려주시오.”

두 호위에게 고마움을 표한 이레는 모임 장소로 향했다.

허술한 초가로 들어서자 허름한 외관과 다른 너른 실내가 드러났다.

긴 탁자와 십학사를 의미하는 열 개의 의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온 몇 명의 학사가 이레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이레는 차분하게 답례하며 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해가 들어왔다.

그는 나른한 눈으로 십학사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이윽고 해의 눈길이 이레에게 머물렀다.

이레는 태연하게 그의 눈길을 받아냈다.

하지만 속으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해는 이레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자리에서 이레의 정체를 밝힌다면.

아마도 큰 사달이 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였다.

“회의를 시작하겠소.”

아직 참석하지 않은 학사가 세 명이나 있었음에도 해는 개의치 않고 회의를 시작했다.

빈자리 중 하나는 대나무였다.

그리고 영지.

마지막 한 자리는 이레의 옆자리인 학의 것이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형운이 동궁이 된 것에 대한 논의였다.

정확하게는 형운을 막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과 성토에 가까웠다.

“일이 이렇게 어이없게 어그러지다니. 십학사가 생긴 이래, 이런 처참한 실패는 처음이랍니다.”

사슴은 등을 곧추세운 채 목소리를 높였다.

오랜만에 모인 십학사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달랐다.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왕세자마저 떨구었던 그들이 아니던가.

결정을 내린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던 차에 왕세손에게 뜻하지 않은 패배를 맛보았던 터라.

분위기가 어두운 건 당연하였다.

특히, 구름과 그를 따르던 십학사들이 그러했다.

학사들은 이번에 일어난 사달의 원흉을 구름으로 단정하였다.

구름을 향한 학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번엔 바위(巖)가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세손의 환궁을 막으려던 각 지방의 유생들이 여비를 구하지 못해 도성으로 올 수 없었다고 하오. 혹여 지원이 끊긴 것이 아니오?”

바위가 판을 깔자 구름이 눈매를 곤두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원이 끊기다니.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깟 여비가 없어 한양 땅을 밟지도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의 사나운 눈이 이레를 향했다.

십학사의 자금줄을 쥔 사람이 바로 만사여의.

물이기 때문이다.

이레는 태연했다.

“무언가 잘못 아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잘못 알고 있다니? 돈이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오?”

“느닷없는 사태에 몇몇 지역에 차질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원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면, 어찌하여 유생들이 참석하지 않았단 말이오?”

“식견이 얕은 제가 무얼 알 수 있겠습니까만은…… 혹, 유생들이 이번 일에 마음이 동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세손을 막고자 하는 뜻에 동참하기 싫어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었다.

이 말은 또한 유생들을 이끄는 소나무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는 의문이기도 했다.

“그, 그럴 리 없소.”

소나무는 당황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하지만 기세등등하였던 과거에 비해 상당히 작아진 목소리였다.

왕세손이 동궁이 된 이후로 그의 영향력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았다.

이 말은 소나무가 지지하는 구름의 위신 또한 축소되었음을 의미했다.

해가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했다.

“그 일은 내가 달리 알아보았소. 물의 설명대로 자금 지원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소. 다만, 상당수의 유생이 정해진 장소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모였다는 이야기가 들렸소.”

소나무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니라면, 그들이 대체 어디에서 모였단 말입니까?”

“그거야 그들을 부른 사람이 알지 않겠소?”

또다시 화살이 소나무를 향했다.

심지어 구름마저도 그를 노려보았을 정도였다.

소나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왕세손이 환궁 날, 임금께서 계시는 경희궁의 ‘홍화문’ 앞으로 모두 모이라는 서찰을 써서 보냈건만.

유생들은 엉뚱하게도 창덕궁의 ‘돈화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검은 너울 속에 자리한 이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유생들이 엉뚱한 곳으로 간 것은 소나무의 잘못이 아니었다.

소나무가 작성해 전달한 서찰엔 분명 집결장소로 홍화문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생들이 받은 서찰엔 홍화문 대신 ‘돈화문’이 적혀 있었다.

소나무의 명령은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그의 지시가 담긴 서찰을 전달하는 과정에 있었다.

전국팔도로 뿌려진 소나무의 지시는 몇 사람을 거쳐 전달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레의 영향력이 미치는 팽례들에 의해 전혀 엉뚱한 내용을 바꿔치기 되었다.

형운이 환궁하던 날.

이레는 구름이 무언가 수작을 부릴 것을 예상했다.

그리하여 서탁의 할아버지들과 상의하여 이처럼 섬세하고 교묘한 계획을 세웠다.

난전의 잡화상, 하월네.

노파는 시전의 난전 상인들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팽례들의 우두머리인 그녀가 이레의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 지역의 유생들에겐 사소한 착오로 지원금이 늦게 전달되었고, 도성 인근의 유생들은 집결하는 장소를 엉뚱하게 전하였다.

덕분에 형운의 환궁을 막으려던 구름은 큰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십학사 중의 한 명인 대나무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너울 뒤로 미소 짓는 이레에게 사슴이 속삭였다.

“이것으로 구름도 끝이로군요.”

“그런가요?”

“대나무는 죽었고, 구름을 따르던 자들도 이번 실패로 기가 죽었으니, 예전과 같은 위세를 떨치기 쉽지 않겠지요. 아! 대나무가 죽은 건 알고 계시지요?”

“듣긴 하였습니다.”

“그럼 그를 따르던 무사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도 들으셨나요?”

“그래요?”

“그뿐만이 아니어요. 영지(靈芝: 불로초) 역시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소나무도 이번 일로 마음이 크게 상하여 지병이 도졌다 하고, 거북의 모습도 보이질 않네요.”

거북의 빈자리를 보던 사슴이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거북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때였다.

“워쩐대유? 나가 사슴의 맴도 몰라주고, 이렇게 다시 돌아와 버렸네유.”

벌컥 열린 문 뒤로 거북이 나타났다.

***

거북은 사슴을 향해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순, 사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았다.

“이게 무슨 냄새랍니까? 어디서 백정 노릇이라도 하도 온 게요? 아주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거북이 반색하며 맞장구쳤다.

“워뜨케 알았대유? 나가 며칠 백정 노릇 하느라 아주 죽을 뻔 했네유.”

빙글빙글 웃음을 지으며 박진봉은 말했다.

“간만에 피를 봐서 그런가. 이놈이 엥간히 날뛰어야 말이쥬.”

문득 그의 시선이 이레를 향했다.

“나가 이놈 말리느라 애 좀 먹었슈. 다음에도 말릴 수 있을 건지, 나가 장담을 못 하겠슈.”

허리춤에 있던 낫을 불쑥 꺼내는 거북의 모습에 사슴이 기겁했다.

“어멋!”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서는 사슴과 달리 이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박진봉의 시선을 직시했다.

이자가 원하는 것.

그건 바로 두려워하는 이레의 모습을 보는 것이리라.

절대 겁먹지 않아.

두렵지 않아.

그러나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다가오는 박진봉의 모습에 머릿속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런 무례한 자를 보았나. 해,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것이어요?”

사슴이 동동 안달하며 말했지만, 해 역시 태연했다.

언제나처럼 느른하게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이레와 거북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거북의 행태에 이레의 반응이 어떠할지 기대하는 눈빛.

그 사이 거북의 상체가 이레를 향해 점점 기울었다.

더는 다가오지 마라.

살기로 번들거리는 거북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거북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이레를 뒤덮을 찰나.

“늦었소.”

때마침 문이 열리고 유난히 큰 키의 사내가 들어왔다.

비상하는 학이 수자 놓인 면사를 쓴 사내, 장무열이었다.

그는 예의 무심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저벅저벅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우연이었을까.

장무열의 몸짓으로 인해 이레를 향했던 박진봉의 시선이 차단되었다.

“회의라 들었는데. 그게 아니오?”

검붉은 핏물이 덕지덕지 묻은 박진봉이 낫을 보며 장무열이 물었다.

그의 음성엔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아니어요.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자리랍니다.”

어느샌가 제자리로 돌아온 사슴이 눈웃음을 지었다.

장무열이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런 요사스런 물건을 치우는 게 좋을 듯하군.”

“암만유, 치워야쥬. 나가 이래유. 아직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을 못 하네유. 천한 것이라 못 배워먹어 그런 것이니. 용서하셔유.”

언제 그랬냐는 듯.

순박한 표정의 박진봉이 낫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이레는 긴장으로 말아쥔 주먹을 풀 수 있었다.

그녀는 학을 응시했다.

그러나 장무열은 이레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니, 애초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회의 내내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 장무열을 보고 있자니, 이레는 씁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초간택을 위해 양덕당에서 지낼 때, 매화나무 위에서 이레를 지켜보던 그의 무모함은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은협에게 독종이라 불리면서도 꿋꿋하게 은자원에 자리 잡던 그 모습도…….

은호라는 별칭과 함께 침통을 건넬 때, 애써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려 했던 그 어색한 모습도 이젠 볼 수 없으리라.

형의 여인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까지도 동분서주하던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그저 화완옹주의 총애로 단숨에 사헌부의 집의가 되었으며 십학사의 학이 된 장무열만이 존재했다.

너울 뒤에 자리한 이레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반면, 장무열은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내내 무감하였다.

무(無).

과거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

다음 날 저녁.

“그래, 어찌 되었느냐?”

찬바람을 잔뜩 묻히고 돌아온 청지기에게 홍인한이 물었다.

“답신을 받아 왔습니다요.”

“그래?”

홍인한은 서둘러 청지기가 내미는 서찰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를 참지 못한 듯 홍인한은 서찰을 거칠게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눈치를 살피던 청지기가 슬금슬금 방에서 물러갔다.

기다렸다는 듯 홍인한과 마주 앉은 소나무가 물었다.

“무어라 쓰여 있습니까?”

대답 대신 홍인한은 이를 으득 갈았다.

“감히……!”

눈에 불을 켜는 홍인한의 모습에 소나무는 바닥을 뒹구는 서찰을 집었다.

<서찰을 읽고 또 읽었나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절박한 심정, 고스란히 전해져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하나, 미흡하고 얕은 소견으로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을 받들기엔 제 역량이 부족하니. 그저 애석할 뿐입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십시오. -水->

홍인한의 서찰에 대한 만사여의의 답신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간곡하였다.

그러나 결국 해가 아닌 자신과 손을 잡자는 홍인한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십학사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만사여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만이 작금의 상황을 해결한 묘안이라 생각했거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만사여의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시전의 여장부라, 입에 바른 칭송 좀 해주었더니. 어린 계집의 작태가 참으로 교만하구나.”

홍인한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를 지켜보던 소나무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다.

표정이 어둡기는 소나무의 옆에 앉은 상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물의 의중이 해에게로 기울어진 것 같습니다.”

소나무의 말에 상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감. 주상께서 절 보는 눈길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동궁의 일로 잔뜩 날을 세우고 계시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합니다.”

소나무와 상선의 앓는 소리에 홍인한은 결국 쾅, 서탁을 내리쳤다.

“그만들 하시오.”

“하지만 대감…….”

상선이 안달한 표정을 지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이러다간 전하께서 엉뚱한 결정을 내리실 수도 있어요.”

“엉뚱한 결정이라뇨?”

소나무의 물음에 상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간밤에 번을 서던 지밀상궁이 말하길 ‘대리청정’을 입에 올리셨다 합니다.”

“무어라?”

홍인한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리청정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대리청정을 한단 말이오?”

“하지만 주상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면 따를 수밖에요.”

상선의 말을 홍인한이 단칼에 잘랐다.

“그 결단, 절대 내릴 수 없게 하면 될 것이오.”

“무에, 방법이 있습니까?”

상선이 물음에 답하는 대신 홍인한은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일은 어찌 되었소?”

소나무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의 실패 이후에도 그들은 야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소. 오늘 밤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너무 성급하게 일을 진행하는 건 아닐지요?”

“공든 탑이 무너질 상황이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란 말이오.”

잠시 고민하던 소나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 따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실수가 없어야 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홍인한은 이번엔 상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선은 세손에게서 눈을 떼지 마시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할게요.”

“…….”

“아무래도 이상하오. 세손의 행동이 예전과 사뭇 다르니. 틀림없이 그를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오.”

언제나 가르친 대로만 행동하던 왕세손에게서 또 다른 면을 보았다.

염병하내.

환궁하던 날, 자신에게 속삭였던 형운의 음성이 내내 홍인한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소나무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어버린다고 하질 않습니까. 지금 왕세손의 행동이 딱 그렇습니다.”

“쥐에게 물려도 흉이 남는 건 마찬가지니.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해야 하오.”

홍인한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그 천심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보여주리라.

홍인한은 환궁하는 형운을 따르던 어리석은 백성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겐 이제 후회할 일만 남을 것이다.

“잊지 마시오. 우리가 하늘이오. 우리의 뜻이 곧 하늘이 뜻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순리가 될 것이오.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 함을 결코 잊어선 아니 될 것이오.”

소나무와 상선을 향한 말은 홍인한,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하였다.

***

“전하, 통촉하여 주옵소서.”

“통촉하시옵소서.”

침전을 비통하게 뒤덮은 삼정승의 목소리.

“그놈의 통촉, 통촉, 통촉! 경들은 지겹지도 않은가. 어찌하여 과인에게 늘 통촉하라 하는 것인가?”

왕의 노한 음성이 삼정승을 향해 날아갔다.

보료에 몸을 기댄 왕은 연신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비장한 얼굴의 홍인한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전 좌의정이 된 그는 비통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상소를 보시지 않으셨나이까. 밤마다 동궁의 미행이 이어지고 있다 하옵니다. 미행을 빙자하여 양가의 여인을 희롱하고, 보부상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으며, 심지어 까닭 없이 백성을 매질하니. 동궁의 행패에 두려운 백성들은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집안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근다고 하옵니다.”

홍인한의 보고에 왕은 이마를 짚었다.

“믿기지 않는다. 아니, 과인은 정녕 믿을 수 없구나.”

이른 시간부터 날아든 상소.

그곳엔 동궁이 밤마다 궁밖으로 나가 온갖 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고발이 적혀있었다.

그러한 내용의 상소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상선이 두 손으로 받쳐든 은쟁반 위에 수북한 상소가 모두 그러한 내용이었다.

왕은 가래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궁의 성실함은 내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 동궁이 괴행이라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좌의정 홍인한, 감히 아뢰옵니다. 장차 만백성의 아비 되실 분이 되려 백성의 근심이 되니. 지금이라도 바로 잡지 않는다면 장차 이 나라에 큰 화가 될 것이옵니다.”

“어허.”

왕의 입에서 참담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늙어 침침해진 눈으로 왕은 승정원에서 올라온 상소를 읽고 또 읽었다.

그간 동궁에게 당한 백성들의 사연이 세세하게 적힌 상소였다.

“이 상소를 올린 자가 뉘더냐?”

“성균관 유생, 한 아무개라 하옵니다.”

“그자의 말이 진실이라 어찌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공과 정을 익히고 도리를 배우는 유생이 감히 동궁의 이야기를 지어 올릴 수 있겠나이까. 게다가 유생의 말을 뒷받침하는 증인들이 수두룩하옵니다.”

“증인이 수두룩하다?”

“미행 중인 동궁께 희롱당한 여인과 매질 당했던 백성이 너도나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나이다.”

“…….”

왕의 시선이 허공을 했다.

진득한 눈가에 습기가 어렸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기는가?

욕하며 닮는다 하였던가.

제 아비의 일탈을 그리 몸서리치게 싫어하던 동궁이 아니던가.

한데, 어찌하여 하는 이런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일을 벌인단 말인가.

믿었던 동궁이기에 왕의 상처는 더욱 컸다.

어찌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진 임금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상전하, 동궁 저하 입시옵니다.”

왕은 물론이고 늦은 밤 왕과 독대하던 삼정승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돌아갔다.

“들라 하라.”

왕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르륵 문이 열렸다.

이윽고 검푸른 곤룡포 차림의 형운이 보였다.

그를 향한 왕의 눈빛이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사나운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형운은 왕의 침전으로 들어섰다.

한발, 한발.

하얀 버선을 신은 형운의 걸음은 곧장 왕을 향했다.

“전하.”

형운은 왕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긴 두루마리가 떨어졌다.

“읽어보아라.”

동궁에게 상소문을 던지며 왕이 소리쳤다.

분노한 왕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형운은 침착하였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그는 상소문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이윽고 상소문을 내려놓는 그에게 왕이 물었다.

“이것이 모두 사실이더냐?”

일순, 형운은 침묵했다.

안달이 난 건 외려 왕이었다.

다시 다그치듯 왕이 질문했다.

“사실이냐 물었다. 이게 정녕 사실이냐?”

이윽고.

정적을 깨며 형운이 입을 열었다.

“사실이옵니다.”

재차 확인하듯 그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대답했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사실이옵니다.”

***

-정말이냐? 정말 불손이 그리 말했단 말이냐?

상의 다급한 물음이 서탁을 가득 채웠다.

구름으로 뒤덮인 캄캄한 밤.

이레는 서탁의 할아버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모함이 분명하거늘. 어찌하여 그걸 고스란히 인정하였단 말이냐?

답답함이 가득한 화 할아버지의 글도 서탁 위로 떠올랐다.

분노한 상이 글이 이어졌다.

-불손, 그것이 진정 미쳤구나.

-어허,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점잖게 말리던 예의 뒷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아이야, 실은 나도 그의 대답이 이해되지 않는구나. 좋은 말로 오해를 풀어도 부족할 상황에 왜 그런 악수를 둔 것이냐?

걱정 가득한 글씨 뒤로 악의 악필이 떠올랐다.

-다들 어찌 이리 수선들인가. 분명 무언가 수가 있으렷다? 그렇지 않으냐, 아이야.

-맞습니다.

이레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일필휘지로 할아버지들의 걱정을 잠재웠다.

-그분은 이제 예전의 왕세손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들께 특별한 제왕학을 배운 분이지요.

욕과 온갖 술수와 비책으로 단련한…….

-누구보다 강인한 동궁이시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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