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52화 (152/215)

#152. 무변(無變)

궁궐은 변함이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흩날리는 꽃비 대신 마른 낙엽이 후원을 뒤덮었으며, 온화한 햇살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늦가을의 시린 바람으로 변하였지만.

줄지어 이어진 담벼락과 하늘을 쓸어담을 듯 넓게 펼쳐진 처마, 그리고 고요함 속에 잠식된 전각들의 모습은 여전하였다.

담과 후원을 둘러싼 나무.

연못을 헤엄치는 잉어.

무표정한 병사들.

종종걸음으로 궁을 오가는 내관들.

한껏 숙인 고개 아래로 흥밋거리를 기대하는 어린 궁녀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이 모든 것이 떠나기 전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형운과 이레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전과 달랐다.

궁을 떠나기 전엔 폐세자의 아들과 며느리였던 두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동궁과 동궁빈이라는 지고한 자리의 주인이 되어 돌아왔다.

더러는 여전히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이레를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껏 자세를 낮췄다.

특히 문 소원 전각의 궁인들은 이레의 눈에 띄지 않으려 부러 먼 길을 돌아다닌다고 금정이 귀띔해 주었다.

향긋한 들꽃 향기가 나부끼는 늦가을의 오후.

농익은 햇살이 빈궁전 뒤뜰의 정자 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이레의 부름으로 궁을 찾은 한서로는 마치 풍경을 감상하듯 오가는 궁녀들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재밌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 듯하옵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달포 전만 하여도 우리가 이리 궁 안에서 한가로이 다담상을 마주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루가 새롭고 순간순간이 즐거우니.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한서로와 함께 입궁한 유경이 특유의 경쾌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처음 초간택에 참여했을 때만 하여도 빈궁께서 이 자리에 계시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유경의 눈빛이 멀지 않은 과거를 더듬었다.

이레 역시 지난날들을 되짚었다.

늘 별채에 갇혀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서탁의 백귀와 만나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겠다며 초간택에 참여하였던 일.

서탁에 새롭게 나타난 오만불손한 백귀가 사실은 이 나라의 왕세손이었던 사실을 알게 된 날의 놀람.

재간택에서의 고난과 유경과의 특별한 인연.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의 틈바구니로 문득 아픈 상처가 파고들었다.

이레는 유경의 초록빛 치맛자락을 응시했다.

저리 밝고 유쾌한 여인의 몸에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은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자신을 지키다 생긴 흉터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

여러 갈래의 감정이 고스란히 눈빛에 담겼다.

그 눈빛을 마주한 유경이 동그랗게 미소를 지었다.

“또 그러십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시어요. 세월이 약이라더니. 흉터도 많이 흐려졌나이다.”

“정말이더냐?”

“제가 빈궁께 거짓을 고할 일이 무어가 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보여드리리까?”

정말 치맛자락이라도 걷어 올릴 시늉을 하는 유경을 향해 이레는 웃음을 보였다.

“아니다, 되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마마, 더는 마음쓰지 마시어요. 빈궁마마가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어요.”

“내가 무얼 베풀었다고 그러느냐?”

“이 작은 흉터로 인해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하지 않아도 되었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귀한 인연을 제게 선물하셨으니.”

유경의 눈길이 자연스레 한서로를 향했다.

“이보다 큰 은혜가 제게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전의 여걸, 만사여의.

유경과 비슷한 또래의 한서로였지만, 유경에게 만사여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 생각해준다면 나야말로 고맙구나. 너와 만사여의, 두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날은 없었을 것이야.”

이레는 고마움이 담긴 시선으로 한서로와 유경을 번갈아 보았다.

“언제고 이 은혜, 꼭 갚을 겁니다.”

동궁빈이 되었음에도 한서로를 대하는 이레의 말과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서로는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연하지요. 저는 뼛속까지 상인입니다. 이문이 남지 않는 일에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겐 무얼 보고 투자를 하신 겁니까?”

이레의 물음에 한서로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앞날이었습니다.”

“앞날?”

“장차 이 나라의 앞날을 빈궁께서 옳고 바르게 이끌어 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레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을 내가 어찌하겠습니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형운.

아마도 한서로의 말처럼 대단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 일은 내가 아닌 그분의 몫이리라.

궁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

갑작스레 동궁이 된 그에겐 어렵고 불편한 날들이었다.

경연과 빈대의 자리에 참석해야 했으며, 때때로 국정과 관련하여 자신의 의견을 보태기도 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형운은 이레를 찾아왔다.

그는 서탁 속 할아버지들의 가르침을 청하고 배웠다.

이 어려운 형국을 극복할 해답이 서탁에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유를 이레가 물은 적이 있었다.

‘무언가 만들어야 할 땐 장인(匠人)을 찾고, 모르는 길을 가야 할 땐 앞서간 선객에서 묻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소? 나라의 정치는 참으로 어려우니, 도움을 구하려면 참된 스승과 넉넉한 인심의 선배와 현자를 찾아야 한다오.’

‘서탁에 그 모두가 담겨 있단 말입니까?’

이레의 물음에 형운은 웃음을 보였다.

‘어찌 서탁에서만 해답을 구할 수 있겠소.’

‘그럼 저하께 또 다른 스승이 있는 겁니까?’

‘그대라오. 나의 참된 스승은 서탁과 바로 그대, 둘 모두요.’

형운의 대답을 떠올리던 이레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스승이라 하는 형운만큼이나 한서로 역시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런 이레에게 한서로가 물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내게 원대한 희망을 품은 만사여의의 모습이 재밌고도 안타까워 웃고 말았습니다.”

“본디 희망은 크고 원대하게 품으라 하였사옵니다.”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요.”

“실망할 건지, 실현될 건지는 두고 보면 알 겁니다.”

“그리 확신하지 마세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또한, 부귀영화라면 구태여 내가 없어도 그대의 힘만으로도 충분할 듯합니다. 그보다…….”

이레는 힐끗 유경을 눈짓하며 한서로에게 물었다.

“이 아이의 배움은 어떠합니까?”

한서로의 입에서 돌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말도 마시옵소서.”

“……?”

이레는 궁금했고, 유경은 긴장했다.

두 사람의 귓가로 한서로의 대답이 들려왔다.

“수를 헤아리는데 탁월하며, 물품을 정하고 이문을 남기는 솜씨가 어지간한 상인보다 월등하오니. 타고난 상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지경입니다.”

“그 정도란 말입니까.”

유경을 곁눈질하던 한서로가 낮아진 음성으로 이레에게 말했다.

“이러다간 조만간 만사여의의 자리를 저분께 내어드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한 칭찬에 유경의 뺨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더는 듣고 있기 민망한 듯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월에서 빈궁께 올리는 비단을 가져왔나이다. 보관이 까다로운 것이라 제가 직접 살피고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두 분은 말씀 나누시어요.”

유경이 도망치듯 쪼르르 밖으로 사라졌다.

문밖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서로가 흐뭇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

“참으로 귀여운 아가씹니다.”

유경이 있던 자리를 보며 한서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레는 재밌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겉으로 보기엔 유경이나 한서로나 앳된 티가 역력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는 말투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그것과 흡사한지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으시옵니까?”

한서로의 순진한 물음에 이레는 잠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전의 여장부 한서로가 아니던가.

세상의 이치에 밝으며 시류를 읽는 혜안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었다.

모든 것에서 완벽하리라 생각했던 그녀에게서 한 가지 빈틈을 발견했다.

바로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알지 못하다는 것.

저 사람의 머릿속엔 대체 어떤 생각들이 있는 것일까?

“잠시 산책이나 할까요?”

이레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후원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주로 한서로가 묻고 이레가 답하는 식이었다.

“궁의 생활은 지낼 만하시옵니까?”

“궁궐의 규율과 법규를 익히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나, 예전과는 달리 궁인들의 태도가 수굿합니다.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답니다.”

“하오면 동궁께선 어떠하옵니까?”

“왕세손과 동궁의 지위가 엄연히 다르니. 매일 새로이 익히고 파악할 것들로 정신없이 바쁘다 합니다.”

“그렇군요.”

“한데…….”

이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십학사에게선 아무런 연통이 없습니까?”

“아직 특별한 기별은 없었사옵니다.”

“그렇겠지요. 근래 이런저런 이변이 많았으니, 수습하는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테지요.”

이레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궁에 묶인 처지라.

갑작스레 회합이라도 생긴다면 당장 처신이 곤란하였던 까닭이다.

한서로가 대신하여 모임에 나가면 되겠지만, 매번 위험한 일을 그녀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십학사의 요구가 부담되지 않습니까?”

“걱정 마시옵소서. 앞으로 몇 년은 거뜬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몇 년이나 그리 내어줄 순 없지요.”

“그럼…….”

“조만간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은막에 숨어 이 나라를 흔드는 십학사.

그들을 통째로 흔들어놓을 것이다.

반드시.

십학사를 향한 이레의 결심이 단단하게 굳어질 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원 쪽에서 화려한 당의 차림의 여인이 긴 행렬을 이끌고 다가왔다.

옹주, 화완이었다.

“이런 곳에서 빈궁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산책 나왔습니까?”

“그렇습니다.”

“저 역시 답답하던 차라, 걸음 하였는데. 이리 빈궁을 만나니, 반가움이 배가 되는 듯합니다. 그래, 궁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이 화완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중궁전과 영빈전에서 신경 써주신 덕에 특별히 불편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한데, 이분은…….”

화완은 한서로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가에 지낼 때 알게 된 분입니다. 적적하여 차나 함께 하자 불렀습니다.”

이레의 설명이 끝나자 한서로가 옹주를 향해 예를 취했다.

“한서로라 하옵니다.”

“빈궁의 사람이라 그런지 한없이 곱습니다.”

“망극합니다.”

“이리도 좋은 사람과 뜻깊은 자리가 있었다면 이 사람도 부르지 그랬습니까?”

다정한 목소리로 화완은 투정하듯 이레에게 말했다.

“느닷없는 변덕으로 행한 일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다음엔 꼭 그리하겠습니다.”

“그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런 주책이 보았나. 반가운 마음에 빈궁을 잡아두고 말았군요.”

화완옹주는 한서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즐겁게 지내다 가세요. 그럼 나는 이만…….”

그녀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장 집의.”

옹주의 뒤를 따르던 행렬 가운데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헌부의 집의, 장무열이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이레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그런 이레의 모습을 알지 못한 듯, 화완은 장무열에게 말을 이었다.

“우린 그만 가지요.”

옅은 미소와 함께 화완이 걸음을 옮겼다.

옹주의 곁에 서 있던 장무열도 이레에게 무뚝뚝한 묵례를 건넨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레는 멀어지는 화완과 장무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한서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분, 십학사라 하셨지요?”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오래전부터 화완 옹주와 각별한 사이라 하더군요. 아무래도 옹주의 가장 최측근인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이레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변한 것이 없는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하나 더 있었다.

사헌부의 장령이며, 은자원의 은자였던 장무열.

잠시 궁을 떠났다가 돌아오니 그는 사헌부의 집의가 되었고, 은자원 대신 십학사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생선 가시가 목구멍에 박힌 기분이다.

“마마?”

눈치 빠른 한서로가 이레의 표정을 살폈다.

“무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시온지요?”

“아닙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이레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곁을 따르던 한서로가 조심스레 질문을 잇는다.

“빈궁마마, 예전이 그립지는 않으십니까?”

별채.

그곳에서 형운과 오손도손 살던 때가 그립지 않으냐는 물음이었다.

이레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더군요. 적응하면 그런대로 지낼 만하답니다.”

***

“부탁한다.”

밤늦은 시각.

여느 날처럼 유등을 밝힌 채, 서탁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이레가 금정을 불러 말했다.

부탁한다는 말에 금정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설마, 오늘도 그 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쉿! 목소리가 높구나. 이러다 누가 듣겠다.”

숨죽인 이레의 말에 금정이 울상을 한 채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나 울상인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이레는 금정의 손을 잡았다.

“금방 다녀오마.”

“전에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정작…….”

“이번엔 진심이니라.”

“하오나…….”

“파루가 치기 전에 꼭 돌아올 것이야.”

“아침이 밝은 후에야 온다는 말이 아니 옵니까. 마마,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 일을 누가 알기라도 하면…….”

이레는 한발이나 나온 금정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조용히. 다녀오마.”

“……이번뿐입니다.”

“그래.”

“정말 이번만이옵니다.”

“그렇다니까.”

“하지만 사흘 전에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엔 정말이래도. 그러니 어서 자리에 누우려무나.”

“그렇지 않아도 콩알만 한 간덩이, 이제는 좁쌀보다 더 작아졌습니다.”

“훗날 배 밖으로 나올 만큼 크게 만들어주마.”

“약조하셨습니다?”

“약조하마.”

결국, 금정은 이레를 대신하여 모란이 수자 놓인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는 금정을 뒤로 한 채 이레는 조용조용 빈궁전 침소를 나섰다.

문밖을 지키던 궁녀와 상궁들이 꾸벅꾸벅 졸다 인기척에 눈을 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평범한 궁녀 복색에 다시 눈을 감고 나른한 졸음에 몸을 맡겼다.

무사히 그들을 지나쳐 이레는 빈궁전 밖으로 나섰다.

늦은 밤의 궁은 고요했다.

각 전각의 불빛은 진즉 꺼졌고, 길목마다 밝힌 횃불만이 밤을 태우고 있었다.

궁을 순찰하는 군사들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역시도 이레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전, 오라비를 찾아 초간택에 참여했을 때 그들이 순찰하는 시간과 장소를 파악한 까닭이다.

어디 그뿐일까.

그때보다 궁의 지리에 밝으니.

순찰을 피해 은자원으로 가는 일은 누워 떡 먹는 일보다 쉬웠다.

이레는 가벼운 걸음으로 전각의 담벼락을 끼고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지나온 전각 담벼락으로 한 무리의 군사들이 지나갔다.

‘역시…….’

느긋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이레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청룡의 등뼈 같은 처마 아래를 지나, 붉은 기둥과 으슥한 회랑의 그늘 밑으로 익숙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밤은 더욱 농밀해졌다.

이레는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굳게 닫힌 나무문.

이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낡은 문이 낮은 신음으로 잠든 내부를 깨웠다.

이레는 어둡게 침잠된 실내로 조심조심 발을 들였다.

사방 벽을 가득 메운 책자들.

나란히 늘어선 세 개의 탁자.

그 위에 수북하게 쌓인 두루마리들.

다양한 크기의 붓, 먹과 벼루.

코끝을 감도는 묵향.

그리움이 그녀를 휘감았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은자원.

이곳은 변함이 없구나.

변함없이 지키고 선 것은 은자원만이 아니었다.

“그대요?”

천장에 난 창으로 유백색 달빛이 비스듬히 은자원을 비추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

한 사내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두텁게 가라앉은 그리운 향기 속.

너른 등을 보인 사내.

그가 고개를 돌려 이레를 보았다.

달빛이 그의 날카로운 얼굴 윤곽을 타고 흘렀다.

고고한 달빛과 묵향이 한데 어우러진 그곳.

은자원.

익숙하고 그리운 풍경 속에 그린 듯한 모습의 그가 있었다.

“왜 말이 없소?”

그의 낮은 물음에 이레는 가슴이 고동쳤다.

때마침 먼 곳에서 축시(丑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어둠 저편, 사내의 단단한 그림자에 가지런한 하얀 균열이 일었다.

“기억나오?”

향수에 잠겨 있던 이레가 여전히 몽롱한 시선으로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예전. 유독 잠이 오지 않던 날이 있었다오.”

“…….”

“밤바람이나 쐬자며 밖으로 나왔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소. 쓸데없는 곳에 왔구나, 한탄하면서도 무심코 이곳으로 들어서고 말았소.”

그날.

그 밤.

“마침 지금처럼 멀리서 파루의 북소리가 울리고 있었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땐 이곳에 제가 있었습니다.”

이레.

그녀는 이곳에서 울고 있었다.

끝내 찾지 못한 오라버니의 흔적에 애달파하며, 슬프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렇군. 지금은 그대 대신 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구려.”

울음이 아닌 미소로.

절망의 탄식이 아닌 은밀한 설레임으로…….

형운은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시오.”

이레는 그의 너른 가슴에 날아가 안겼다.

형운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보고 싶었소.”

“그리웠습니다.”

궁은 많은 것이 변하였다.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반가운 무변(無變)은 이 사람의 따뜻한 체온과 반기는 미소와 내 심장의 고동.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가 심장의 떨림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0